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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굴러온 보리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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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사기 7:9~23
주일오전예배 | 2026-07-19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니체의 초월자>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조종사가 이륙 준비를 하고 있는 찰나에 비행기 한쪽에서 긁는 소리가 났습니다. 처음에는 착간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소리는 점점 커졌습니다. 조종사는 손전등을 들고 소리 나는 쪽을 살폈습니다. 그곳에는 쥐 한 마리가 전선을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조종사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전선이 끊어지면 비행기는 추락할 수도 있습니다. 잡으려고 했지만 쥐는 숨어버렸습니다. 그|때 조종사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쥐는 높은 고도를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조종사는 망설이지 않고 엔진 출력을 높였습니다. 비행기는 천천히 활주로를 벗어났습니다. 1000m, 쥐가 여전히 전선을 갉아먹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3000m, 쥐가 갉아먹는 소리가 조금 작아졌습니다. 5000m, 전선을 갉아먹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8000m, 비행기 안은 완전히 조용해졌습니다. 착륙한 뒤 조종사가 확인해 보니 쥐는 죽어 있었습니다. 조종사는 쥐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을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니체가 책에 주제에 맞게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입니다.

 

걱정, 근심, 불안, 두려움 등 우리의 인생을 살살 갉아먹는 쥐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과 싸우지 마시고 더 높이 올라가십시오. 뒤에서 쥐처럼 여러분을 험담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싸우기 시작하는 순간 여러분은 쥐의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쥐의 높이에서 살게 하려는 사탄의 술수입니다. 반대로 계속 성장해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그들의 말은 더 이상 여러분에게 닿지 않습니다. 저는 이곳에 와서 십 수 년 동안 많은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권사, 집사, 성도입니다. 왜 성도가 쥐처럼 목사와 교회를 갉아먹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장 좋은 복수는 싸워서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닿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쥐를 잡으려고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쥐와 싸우며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십시오. 더 높은 은혜의 자리로 올라가십시오. 니체는 말했습니다. “높이를 바꾸면 싸울 이유도 함께 사라진다.”

 

 

 

32,000명 중에 31,700명이 썰물 빠지듯 돌아갔습니다. 기드온과 300명은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별의별 말을 다 들었을 것입니다. “300명으로 뭘 한다는 거지. 기드온 미친 거 아냐. 우리 없이 잘 되는지 보자. 위 같이 가자. 여기서 기드온과 같이 있다가는 개죽음 당해.” 99/100가 빠질 때 300명이 가졌던 허전함, 불안, 답답함, 긴장감, 두려움, 좌절은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하나님은 기가 막힌 명령을 또 하십니다. 300명으로 135,000명의 미디안 대군을 치라는 것입니다. 9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주었느니라” “진영으로 내려가라”는 말은 “진영으로 내려가서 미디안을 대항해서 싸우라”는 뜻입니다. 전진하라는 말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진군하라는 말입니다. 300명이 135,000명을 향진 전진하는 일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기입니다. 300명으로 135,000명을 치는 일은 너무 무모한 일입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또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명령은 직진입니다. 홍해가 가로 막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진하라고 하십니다. 홍해를 돌아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또 요단강이 가로막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도 직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진격하려고 준비하는 여호수아에게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직진하라는 말씀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법궤를 빼앗아 갔다가 이스라엘로 돌려보냅니다. 이 때 블레셋의 점쟁이들은 젖 나는 소 두 마리가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가게 합니다. 새끼들은 집에 두었습니다. 블레셋 점쟁이들이 젖 나는 소가 새끼 생각에 똑바로 가지 못하도록 장난을 친 것입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생겼습니다. 암소 두 마리가 벧세베스로 똑바로 갔습니다. 사무엘상 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 암 소 두 마리가 똑바로 갔습니다. 법궤가 상징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성경은 직진입니다. 성경의 명령을 요약하면 “똑바로!” “앞으로!” “위로!”입니다. 역주행이 아닙니다. 정주행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직진하지 못하도록 장난을 치고 유혹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에 정주행 하세요. 직진하십시오. 뒤로 물러나지 마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똑바로 앞으로 가십시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맹활약한 조지 S. 패튼이라는 미국 장군이 있었습니다. 미군이 튀니지의 카세린 협곡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해 사기가 크게 저하됩니다. 이때 조지 패튼이 미 제2군단의 지휘봉을 잡고 엘 게타르 전투(Battle of El Guettar) 등에서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둡니다. 또 시칠리아 침공,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프랑스와 독일 진격전에서 기갑부대를 이끌고 엄청난 속도로 적진을 돌파하며 전쟁 영웅으로 떠오릅니다. 패튼 장군은 전쟁에서 공격 또 공격, 전진 또 전진을 외쳤습니다. 패튼은 무조건 전진했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무조건 전진해오는 패튼 때문에 독일군이 혼비백산했습니다. 무조건 전진하는 패튼은 독일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장군이 됩니다. 패튼의 리더쉽을 직진의 리더쉽이라고 합니다. 목표를 설정하면 굽히지 않는 고집과 '무조건 공격'이라는 적극적인 공세로 장애물을 돌파했습니다. 패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방어는 필요 없다. 오직 진군 뿐 내게 방어를 맡기려면 차라리 해임시켜 달라.> 패튼 장군이 가진 직진 정신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정신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300명으로 적진을 향해 직진하라고 하십니다.

 

 

기드온이 두려워서 전진을 하지 못하자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미디안 진영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두려움을 이기고 강해져서 미디안을 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혼자 들어가는 것이 두렵다면 부라라는 부하와 함께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10-11절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이에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군대가 있는 진영 근처로 내려간즉”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동행자를 한 명 붙여주셨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지만 두 사람은 능히 맞설 수 있다고 했고, 삼겹줄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세 겹 중에 첫 번째 줄과 두 번째 줄은 성도라고 했고, 세 번째 줄은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믿는 두 사람이 함께 하면 거기에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할 때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삼 겹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삼겹줄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사도들을 보내실 때 둘씩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삼겹줄로 만드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같이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넘어졌을 때 옆에 요한이 있었지만 가룟 유다는 넘어졌을 때 옆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혼자 하지 마세요.

 

기드온이 부라와 함께 미디안 진영 안으로 몰래 들어갔습니다. 12절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하나님이 기드온을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두려움의 실체를 보여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두려움을 이기도록 하기 위해 아주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어디선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보리떡 한 덩어리가 우리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오더니 한 장막을 쳐서 무너뜨려 엎어버렸다는 것입니다. 13절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무슨 꿈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 꿈이 심상치 않다는 것입니다. 영 기분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때 친구가 꿈을 해석합니다. 14절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느니라 하더라” 보리떡은 기드온의 칼인데 하나님이 미디안 연합군을 기드온의 손에 주셨다는 것입니다. 미디안 연합군이 기드온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군대를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미디안 군대도 기드온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두려움의 실체입니다. 미디안은 덩치만 컸지 허상에 불과했습니다. 꿈 해석이 아주 기이합니다. 보리떡과 칼은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왜 이런 해석을 하게 됐을까요? 하나님이 역사하셨겠지만 두렵기 때문입니다. 두려우면 사람들은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게 두려움의 실체입니다. 걱정, 근심, 두려움은 거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두려움 속으로 집어 넣으셔서 두려움의 실체를 보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짖는 개를 무서워하는데 사실은 개가 그 사람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짖는 것입니다. 개가 짖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7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왜 마귀가 두려움, 걱정, 근심으로 사람을 위협할까요? 마귀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불안, 걱정, 근심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마귀의 운명은 지옥에 던져지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움은 마귀가 주는 허상일 뿐입니다. 조지 패튼 장군은 "두려움은 1분만 참으면 용기가 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또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양처럼 100년을 사느니, 차라리 하루를 살아도 사자처럼 살겠다.” 패튼 장군의 이야기를 담은 책 제목이 『나는 하루를 살아도 사자로 살고 싶다』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움과 용기는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보리떡이 천막을 쳐서 무너뜨렸습니다. 영어 성경은 보리빵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당시 보리빵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입니다. 밀가루 빵이 맛있지 보리빵이 맛있지 않습니다. 보리 빵 한 덩어리는 광야의 가난한 베두인들이 흔히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가루를 반죽해서 불 속에 넣었다가 다 익으면 꺼내 먹는 빵입니다. 본문에서 보리빵은 미디안의 약탈과 박해로 가난에 쪼들리고 불같은 온갖 역경 가운데 처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기드온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을 불에서 꺼낸 보리빵에 비유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학대와 탈취 속에서 가난과 고통을 견뎌낸 불에서 꺼낸 보리빵과 같은 존재입니다.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미디안의 장막은 악한 영의 세력과 세상의 힘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보리빵이 성령에 붙잡혀 미디안 연합군의 천막을 무너뜨리듯 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3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모습이 참 비참합니다. 사탄이 여호수아를 더럽다고 조롱하며 대적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탄을 책망하시면서 여호수아를 비호하십니다.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나님은 더러운 여호수아를 세상의 불 시험 속에서 연단을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입니다. 성도는 불 속에서 꺼낸 보리빵입니다. 세상 불에 검게 탄 보리빵 같은 인생이라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예수님의 손에 붙잡혔을 때 5천명을 먹이고도 남는 기적의 도구가 됐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기적의 인생이 됩니다.

 

 

 

꿈 이야기를 들은 기드온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15절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하고” 경배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솨하입니다. 솨하는 ‘몸을 굽히다’, ‘납작 엎드리다’, ‘절하다’, ‘경배하다’는 뜻입니다. '예배하다'로 번역될 때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복종하고 엎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권위 앞에 온전히 굴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전적인 복종을 뜻합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의 꿈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의 능력을 믿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 의지만이 승리의 조건입니다.

 

기드온이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승리를 선포합니다.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정났다는 것입니다. 승리는 이미 우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승리는 이미 결정됐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기셨는데 왜 우리가 담대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승리가 내 승리가 되고,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승리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승리가 내 승리입니다.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때로 넘어지지만, 아니 자주 넘어지지만 우리는 결국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최후 승리를 얻기로 준비된 사람들입니다. 승리의 확신은 내가 얼마나 잘 났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아는데 있습니다.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기드온은 전쟁을 위해 아주 특별한 준비를 합니다. 그것은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입니다. 16절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기드온은 병사들에게 칼과 창 대신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을 주었습니다. 교회가 하는 일은 진리의 나팔을 불고, 욕심의 항아리를 깨뜨리고, 복음의 횃불을 치켜들고 외치는 일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많이 배웠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저 보고 설교할 때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느냐고 합니다. 하도 그래서 제가 요즘 설교할 때 소리를 작게 하려고 연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리는 곳입니다. 교회는 횃불을 들고 크게 외치는 곳입니다. 불이 났는데 응급 상황인데 소리 안 칠 수 있습니까? 세례 요한을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외치는 자입니다. 여러분! 진리를 외치십시오.

 

왠지 불편한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는 말씀입니다. 18절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기드온은 300명에게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깨드리고, 다시 나팔을 불며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고 외치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나란히 놓았습니다. 300명은 기드온이 시킨 대로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깨뜨리고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라고 외쳤습니다. 20절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는 말씀과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라는 말씀은 똑같은 말씀입니다.

 

기드온은 300명에게 “여호와를 위하라”고만 하라고 해야지 왜 “기드온을 위하라”는 말까지 같이 하게 했을까요? 이것을 어떤 성경학자는 기드온이 자신을 높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교만의 극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하나님께 철저하게 헌신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기드온의 마음이 됐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기드온의 방법이 되고, 하나님의 목적이 기드온의 목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기가 내 무기가 되고, 내 무기가 하나님의 무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게 된 순간 기드온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기드온의 칼이라고 외치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칼이 기드온의 칼이 되고, 기드온의 칼이 여호와의 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칼과 내 칼이 같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칼과 내 칼이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하나가 되십시오.

 

창세기 5:24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주어가 하나님이 아니라 에녹입니다. 에녹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됐다는 의미입니다. 에녹이 가는 길이 하나님이 가는 길이고, 하나님이 가는 길이 에녹이 가는 길이었습니다. 에녹의 길과 하나님의 길이 완전히 일치됐다는 뜻입니다. 에녹의 길과 하나님의 길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모스 3:3에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은 하나님과 아모스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목적과 하나님의 목적이 하나가 돼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기드온의 뜻이 됐고, 기드온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됐습니다. 기드온의 칼이 하나님의 칼이 되고, 하나님의 칼이 기드온의 칼이 됐습니다. 기드온의 칼과 하나님의 칼이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칼과 내 칼이 같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칼과 창이 하나님의 무기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무기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칼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무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실 때 오직 말씀으로만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으로만 마귀를 얼마든지 물리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귀를 오직 말씀으로만 물리치십니다. 말씀이 예수님의 무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돈도 아니고 힘도 아니고 권세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무기가 내 무기가 되고, 내 무기가 하나님의 무기가 될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기드온과 300명이 하나가 돼서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들고, 외쳤을 때 미디안 군은 자중지란에 빠져 무너졌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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