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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습니다. 암중에서도 희귀 암인 설암에 걸렸습니다. 설암에 걸리면 혀를 잘라야 합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혀를 잘라내는 수술실 앞에서 의사가 그 사람에게 말합니다. “이제 수술이 끝나면 선생님은 다시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하시는 말이 마지막 말이 됩니다. 한마디 하시죠.”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환자의 눈가가 눈물로 살짝 젖었습니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띠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금껏 은혜로 지켜주시고, 남은 인생을 말없이 주님만을 따르게 하신 그 은혜를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감동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이런 순간에 어떤 말을 하시겠습니까? 또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오늘은 하반기 첫째 주일, 맥추절입니다. 한 해의 반을 보내고, 한 해의 나머지 반을 시작하는 여러분의 마음이 불안과 두려움이 아니라 평안과 감사이기를 바랍니다.
시편 50편에는 <아삽의 시>라는 부제가 붙어있습니다. 지은 사람이 아삽입니다. 아삽은 다윗 시대 찬양대 지휘자입니다. 찬양대를 지휘했던 사람이 헤만, 아삽, 여두둔(에단) 세 사람입니다. 아삽은 다윗 시대 3대 지휘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아삽은 주로 놋제금을 연주하며 찬양대를 이끌었고, 작사, 작곡에도 능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찬양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찬양대 4000명을 세워 1년 내내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습니다.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이런 생각을 종종 합니다. ‘내 인생인데 하나님만을 찬양한다면 나는 뭐지? 내 인생은 없는 건가?’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안 해보셨습니까? 저는 성경을 읽다가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합니다. 생각하면 솔직하게 말해서 하나님께 살짝 섭섭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인정 욕구가 있습니다. 사람은 인정, 칭찬에 목말라 있습니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원리는 인정받고 싶은 갈망이다”라고 했습니다. 인정받고 싶어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봅니다. 사람들의 표정을 살핍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몰입합니다. 사치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인정 욕구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인정은 바닷물 같습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이 마릅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불안하고 우울합니다. 사람이 인정에 목마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찬양하면 됩니다. 찬양하면 내 안이 하나님으로 가득 찹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인정에 목마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 사람들의 시선에 흔들리거나 휘둘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찬양하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집니다. 여러분! 찬양하며 사십시오. 호모 칸탄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칸탄스는 노래하다, 찬양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노래하는 존재, 찬양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 속에 노래를 두셨습니다. 속에 있는 그 노래가 터지기를 바랍니다. 노래하며 사십시오. 세상 노래 말고, 찬양하며 사십시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인간을 찬양하는 존재로 만드셨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시편 50편은 3연으로 된 시입니다. 1연은 1절부터 6절이고, 주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법정으로 소환하심입니다. 2연은 7절부터 15절이고, 주제는 예배가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3연은 16절부터 23절이고, 주제는 삶이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법정으로 소환하신 이유는 예배와 삶이 엉터리이기 때문입니다.
1연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1절 끝에 해 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다고 했고, 5절에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부르시는 곳이 연회장이나 집이 아니라 법정입니다. 4절에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라고 했고, 6절에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재판관이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피고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법정으로 백성들을 소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이 법정에서 심판자와 피고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아버지와 자녀라는 은혜로운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자녀가 법정에서 재판관과 피고로 만났다는 것은 은혜로운 관계가 깨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관계가 은혜롭습니까? 아니면 재판하는 자리처럼 무겁고 딱딱한 관계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은혜롭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고 하십니다. 5절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나의 성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여기 성도들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하시딤입니다. 하시딤은 헤세드에서 온 말입니다. 헤세드는 ‘인애’, ‘자비’, ‘은혜’, ‘경건’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여기서 성도라는 말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나의 은혜를 입은 자, 나의 사랑을 입은 자라고 부르십니다. 이 호칭에는 하나님의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은혜와 사랑을 입었습니까? 제사를 통해서 은혜와 사랑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제사로 언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제사가 깨지면 은혜로운 관계가 깨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믿을 때 이 구원의 은혜를 입습니다. 믿을 때 십자가의 은혜를 입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구원의 은혜를 입습니다. 예배는 내가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예배로 언약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우습게 여기지 마십시오. 예배를 귀하게 여기십시오. 예배를 깨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지 마십시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사십시오.
그림을 보십시오. 미국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케네디 대통령의 딸과 아들이 뛰어다니며 놀고 있습니다. 1961~1963년 케네디 통령의 재임 시절 사진이니까 60년도 더 된 사진입니다. 대통령이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는데 대통령의 아들이 책상 밑에서 숨어서 장난치며 놀고 있습니다. 또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지시하는데 아들이 책상 밑에서 놀면서 재미있어 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아이들을 제지하지 않습니다. 왜요? 대통령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술래잡기 하며 놀 수 있는 아이들은 미국 대통령 자녀 밖에 없습니다. 이게 자녀된 특권입니다. 다른 사람은 대통령 앞에서 경직되지만 아이들은 평안합니다.
우리는 예배로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배로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사십시오. 예배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심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깨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고 하나님을 재판장으로 나를 피고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예배를 깨지 마십시오. 계속 하나님의 자녀로 사십시오.
2연의 주제는 깨진 예배의 회복입니다. 2연에는 하나님의 답답한 마음이 아주 리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7절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하나님께서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 “내 백성아 들으라.” “내가 말한다.” “내가 증언한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라는 말씀을 먼저 하십니다. 이 말씀은 “얘들아! 지금부터 내가 말할 거니까 잘 들어야 해. 알았지? 잘 들어. 나는 너의 하나님이야.”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잘못된 예배 때문에 너무 답답해하시고 속상해하시고 애달파 하십니다. 나의 예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답답하시고 애달파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예배를 잘 드리고 있습니까? 예배가 깨진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예배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예배에 무엇이 문제입니까? 형식은 있는데 마음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제물 때문에는 너희를 책망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8절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식만 갖추어서 제물을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시편에는 아삽의 시가 12편 있습니다. 73편에서 83편까지 11편이 아삽의 시입니다. 아삽의 시 11개를 묶어서 한 곳에 모아놓았습니다. 그런데 50편은 따로 떼어서 이 위치에 놓았습니다.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에 지은 회개의 시입니다. 회개가 뭔지 통회하는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는 시입니다. 시편 51:6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17절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아삽의 예배 시와 다윗의 참회 시를 나란히 놓은 이유는 예배와 회개에는 마음이 있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에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예배에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탄식하셨습니다. 이 예배에 여러분의 마음이 있으십니까? 예배드리는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9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13절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그 고기를 가져가서 하나님이 먹고, 피를 마신다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바알과 아낫이 짐승 고기를 먹고 짐승의 피를 마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제사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소 고기를 먹고, 소의 피를 마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짐승 제사를 드리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짐승의 고기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짐승을 잡으면서 너희가 참회를 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정성스럽게 키운 양입니다. 죄 때문에 내가 정성스럽게 키운 양이 찢겨서 죽어야 합니다. 짐승제사는 짐승을 죽이면서 너의 죄를 죽이라는 의미입니다. 짐승을 찢으면서 마음을 찢으라는 뜻입니다. 제사를 마음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제물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하면서 버드나무로 만든 숟가락으로 쌀을 떠서 죽은 사람의 입의 오른쪽과 왼쪽과 가운데에 한 수저씩 넣었습니다. 입에 엽전도 넣었습니다. 저승 가는 길에 배곯지 말고 잘 먹으면서 가라는 의미입니다. 처음 한 수저를 넣을 때는 “백 석이요.”라고 외치고, 두 번째는 “천 석이요.”라고 외치고, 세 번째는 “만 석이요.”라고 외쳤습니다. 저승에서 풍족하게 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면 죽은 사람의 혼령이 와서 제삿밥을 먹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아닙니다. 제사 지낼 때 죽은 사람의 혼령이 오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죽으면 천사처럼 되지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이 되고 싶으세요. 천사들은 이 땅의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지내지 마세요. 제사는 귀신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신에게 제사하듯 하나님께 제사한 것입니다.
깨진 예배를 회복하는 길은 감사입니다. 14절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서원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서원제사는 화목제사입니다. 화목제를 감사제사라고도 하고 자유제라고도 합니다. 자유의지에 따라 드려도 되고 안 드려도 되는 제사라는 의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네 서원을 갚으며”라고 했습니다.
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신자들이 참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15절의 조건절이 14절입니다. 14절 없는 15절은 없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14절은 생각하지 않고 15절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15절은 반드시 14절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14절과 15절을 연결해서 생각하면 감사하는 자가 환난을 당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구원해주시고 그때 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평상시 감사를 하는 사람이 환란 때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그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그러니까 감사는 우리가 환란을 당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게 하는 동인입니다.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하면 평상시 감사하지 않으면 환란 때에 기도해도 하나님이 구출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못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환란을 당해 기도해도 하나님이 구원해주시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래도 원망, 저래도 원망이기 때문입니다. 왜 감사하는 사람을 구원하실까요?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환란이 더 큰 은혜를 받게 해서 더 큰 감사를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환란이 더 큰 감사로 가는 통로입니다. 여러분! 감사하십시오. 감사가 여러분을 환란에서 구원하고, 환란은 여러분을 더 큰 은혜로 이끌 것입니다. 감사가 깨진 예배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3연을 생각해보겠습니다. 3연의 주제는 성도들의 엉망이 된 삶의 회복입니다. 16절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악인이 하나님의 율례를 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악인은 믿는 사람입니다. 5절의 성도들을 하나님이 여기서는 악인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성도가 나쁜 짓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사기를 치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강도짓을 하고 나서 강도짓을 당한 사람에게 교회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입니다. 손에 양말을 신은 느낌입니다. 발에 장갑을 낀 느낌입니다.
잠언 11:22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에 돼지를 키우지 않습니다. 1962년부터 특정 지역에서 돼지를 키웠지만 그 이전에는 돼지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금은 가장 귀한 보물입니다. 천하고 부정한 돼지 코에 가장 귀한 보물인 금 고리를 하는 사람은 이스라엘 사회에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않는 것은 돼지 코에 금 고리를 하는 것처럼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크리스천답지 못한 것은 돼지 코를 금 고리로 장식한 것처럼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돼지 입술에 립스틱을 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개에게 립스틱 합니까? 정말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크리스천이 크리스천답지 못하는 것은 돼지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 것처럼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있을 수도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돼지 코에 금 고리와 같은 크리스천이 되지 맙시다. 돼지 입술에 립스틱 같은 크리스천은 되지 맙시다. 16절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몇 년 전 연말에 어떤 분이 교회에 김을 많이 기증하셔서 송구영신 예배 때 성도님들에게 신년 선물로 나눠줬습니다. 한 집사님이 예배 후에 집에 가다가 편의점에 들렀는데 사장님을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김을 드리며 교회에 나오라고 했답니다. 며칠 후에 그 집사님이 집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가 술이 떨어져 술을 사러 나오셨답니다. 이미 많이 취해 있었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된 상태입니다. 늦은 시간이라 마트의 문은 닫혀 있어서 그 편의점으로 갔습니다. 사장님이 계시더래요. 계산대에서 술을 계산하는데 민망하더래요.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는 선물을 주면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고, 지금은 술에 취해 빨간 얼굴로 술을 사가고 뭐가 좀 안 맞는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이상하죠. 집사님이 제게 하신 말씀이에요 그 분을 정죄하려고 하는 말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앞뒤가 안 맞는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입으로 언약을 말하며,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뒤로 던져버렸습니다. 이상합니다.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에게 도둑질을 같이 하자고 하고, 간음하는 자들에게는 같이 간음하자고 했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고,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형제까지 속이고 욕했습니다. 18-20절 “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하나님이 회개하기를 참고 기다렸더니 하나님이 나쁜 짓을 하는 자기들을 지지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21절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회개하기를 참고 기다렸더니 하나님을 자기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악행을 지지해주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배가 깨지니 은혜도 깨지고, 관계도 깨지고, 삶도 깨진 것입니다.
목요일에 전도하려고 “오늘 예비된 영혼을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교회에서 내려가서 4거리에서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까 생각하며 둘러보는데 옆 건물에서 편의점을 하시던 사장님이 보여요. 평상시 인사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저분인가?’ 고민하고 있는데 농협으로 들어가세요. ‘아닌가보다.’라고 생각하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다가 그분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농협으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대뜸 하는 말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너무 썩어서요.”이었습니다.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집으로 오면서 그 말이 계속 마음에 울려요. 아직도 그 말이 계속 제 마음에 남아 있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너무 썩어서요.”
깨진 삶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감사입니다. 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행위가 깨진 삶을 회복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감사의 예배가 삶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100:4에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면 하나님의 궁정의 문이 열려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고, 들어가서 또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사는 닫친 문을 여는 열쇠, 패스워드입니다. 감사는 만능 패스워드입니다. 감사는 우리 삶에 닫힌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감사는 깨진 예배를 회복하고, 깨진 삶도 회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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