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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그가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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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 25:31~46
주일오전예배 | 2026-04-26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예수님은 사역 초기에는 자신을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숨기셨습니다.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병을 고쳐주신 후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역 후반부로 가면서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들어내시자 제자들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한복음 16:29-30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예수님께서 감람산 강화를 마치시면서 아주 분명한 말씀을 하나 하십니다. 그것이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오른쪽이냐 왼쪽이냐를 아주 노골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거두절미하고 너희는 오른쪽에 서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오른쪽에 마음을 두십시오. 예수님의 오른쪽에 서십시오. 계시록 22:11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한다는 말은 불의한 자는 더 불의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끝으로 갈수록 불의한 자는 더 불의해지고, 더러운 자는 더러워질 것입니다. 반대로 의로운 자는 더 의로워지고, 거룩한 자는 더 거룩해질 것입니다. 개도가 안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변화가 안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이 도무지 회개하지 않는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 그 때가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대로 계시 마십시오. 더 의로워지려고 하시고, 더 거룩해지려고 하십시오. 더 믿음으로 서려고 하십시오.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을 치십시오. 새벽기도도 해보시고, 금요심야기도회도 해보시고, 금식도 해보세요. 성경도 하루에 50장도 읽어보고, 80장도 읽어보세요.

 

열 처녀 비유(1-13)가 세상 종말에 대한 준비성을 강조하고 있다면 달란트 비유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성과 성실(열심)입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초림 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다시 오실 때는 영광 중에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입니다.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자기 영광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 중에 다시 오십니다. 재림은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조사에 따르면 미국 기독교인의 50%만 재림을 믿는다고 합니다. 교회를 다녀도 둘 중에 한 사람은 재림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미국 기독교인 보다 재림을 더 적게 믿는 것 같습니다. 2024년 글로벌 리서치 기관인 입소스(IPSOS)가 세계 주요 26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세계인의 종교의식 조사에 따르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천국, 지옥, 천사, 마귀에 대한 인식 조사에서 30%로 나타났습니다. 26개 국 중 하위에 속합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영적 세계는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실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현실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영적 세계는 더 중요합니다. 말세가 될수록 현실이 강조됩니다. 하지만 영적 세계를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사람들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인정을 하든지 인정을 하지 않든지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천사들은 이 세상 모든 민족(24:31)을 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나누듯 좌우로 나눌 것입니다. 낮에는 양과 염소가 들판에서 섞여서 자유롭게 자기의 풀을 뜯습니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목자는 양과 염소를 구별해서 양은 양 우리에 염소는 염소 우리에 들여 넣습니다. 양은 온순하여 목자의 말을 잘 따르지만, 염소는 주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염소는 고집이 세고 움직임이 거칠어 같이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염소는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불통입니다. 염소 그리스도인이 되지 마십시오. 염소가 되지 마세요. 양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주님의 양이 되십시오. 목자는 저녁이 되면 양과 염소를 구별해서 각자 다른 곳에 거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천사들은 목사가 양과 염소를 나누듯 사람들을 예수님의 좌우로 나눌 것입니다.

 

본문에서 오른쪽은 힘과 능력, 생명과 구원의 자리를 상징하지만 왼쪽은 저주와 사망, 어둠과 형벌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지금은 온 인류가 세상이라는 들판에서 자유롭게 자기의 풀을 뜯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양과 염소로 분리되어 양은 예수님의 오른쪽으로, 염소는 예수님의 왼쪽으로 보내질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가 섞여 살지만 마지막 날에는 분명하게 구분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과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섞여 살지만 세상 끝에는 분리가 될 것입니다. 지금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섞여 살아서 누가 양인지 누가 염소인지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누가 마귀의 자녀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아주 선명하게 구분이 될 것입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은 왼쪽이 아니라 반드시 오른쪽에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저와 여러분이 오른쪽에서 만난다면 찬송과 영광을 돌리며 기뻐할 것입니다. 하지만 왼쪽에서 만난다면 원망하고 울며 고통스러워할 것입니다. 왼쪽에서 만나지 맙시다. 꼭 오른쪽에서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세상은 돈이 있는 사람과 돈이 없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돈이 기준이고, 축입니다. 또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어집니다. 세상은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을 갖지 못한 자, 능력 있는 사람과 능력이 없는 사람, 공부를 잘 하는 사람과 공부를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이런 구분 때문에 사람들은 상처를 입습니다. 하지만 세상 끝에는 이런 구분법이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구분법은 아무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가진 것을 자랑하지만 그때는 그 모든 것들이 쓰레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쓰레기 버리세요. 쓰레기 끌어안고 있지 마세요. 그때는 오직 예수님을 중심으로만 이 세상이 나누어질 것입니다. 양과 염소로 나누어집니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어집니다. 기준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중심축은 십자가입니다. 다른 어떤 기준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 믿음으로만 이 세상이 나누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기준은 다 무너질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여러분의 인생의 축으로 삼으십시오.

 

칼 야스퍼스의 <역사의 기원과 목표>라는 책이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BC 900~ BC 200년까지를 축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이 시기에 인도에서는 붓다(싯다르타), 중국에서는 공자, 노자,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 등의 선지자가 등장했습니다. 야스퍼스는 이때를 인류 역사가 폭력과 야만의 시대에서 철학과 종교적인 각성의 시대로 전환하는 시기였다고 했습니다. 인류의 사고가 신화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합리적, 도덕적, 철학적, 사고로 전환됐으며 '황금률'과 같은 인류 보편적인 도덕규범이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바퀴는 축이 있어야 굴러갑니다. 축이 없으면 비틀거립니다. 얼마가지 못해 쓰러지고 맙니다.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인류 역사가 발전적으로 굴러갈 수 있는 축이 생긴 시대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철학, 지식인, 윤리, 사상, 물질 등을 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축에 따라 움직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축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축은 예수 이름입니다. 예수님만이 인류의 참 축이십니다. 인류 역사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나뉘어졌습니다. 로마의 신학자이자 수도원장인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525년에 역사를 BC(기원 전)AD(기원 후)로 나누었습니다. 이 구분법은 8세기 영국의 역사가 베다(Bede)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B.C’‘Before Christ’의 약자로 그리스도 탄생 이전이라는 뜻이고 ‘A.D’는 라틴어 ‘Anno Domini’의 약자로 '주님의 해'라는 뜻입니다. AD는 예수님이 인류 역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AD 100년은 <주님의 해 100>이라는 뜻입니다. 올해는 <주님의 해 2026>입니다. 예수님 이전의 시대에 왕들은 힘과 돈으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돈이 축이었고, 칼이 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이 축이 되셨습니다. 세상은 칼과 돈으로 통치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사랑으로 통치하십니다. 인류 역사의 중심은 축은 예수님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인류의 축이심을 전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축으로 삼으십시오.

 

일주일의 시작점은 주일입니다. 월요일이 아닙니다. 주일이 일주일의 축입니다. 한 주는 주일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부활이 일주일의 축입니다. 부활이 세상의 축입니다. 부활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월요일이 한 주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달력을 보세요. 주일이 일주일의 첫날입니다. 간혹 월요일을 첫날로 만든 달력이 있지만 주일을 첫날로 만든 달력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7일 한 주 구분은 성경적인 개념입니다. 철학적 구분이 아닙니다. 유교나 불교의 개념도 아닙니다. 우연히 만들어진 개념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세상이 부활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거나 모를 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이 성경적인 개념을 없애려고 노력을 한 적이 있습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무신혁명입니다. 1793년 프랑스 국민공회가 혁명 달력을 제정하고 기존의 7일을 한 주로 삼던 것을 폐지하고 10일을 한 주로 삼는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이것을 프랑스 공화력(혁명력)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적 개념을 없애고 10일째 되는 날만 쉬게 해서 노동 생산성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일을 더하는데 생산성은 크게 떨어졌습니다. 결국 혁명력은 만든 지 12년 만에 나폴레옹 시대에 폐지됩니다. 공산주의 혁명도 무신 혁명입니다. 레닌이 공산주의 혁명 후 기독교 전통을 없애기 위해 7일을 한 주로 삼던 것을 폐기하고 8일을 한 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레닌이 노동자들에게 일을 더 많이 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생산성은 떨어졌습니다. 참 이상하죠. 일을 더 많이 하는데 생산성이 떨어졌습니다. 당황한 레닌은 한 주를 6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레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보다 더 노동자의 편이다. 그래서 5일 동안만 일하고 6일 만에 쉬도록 하겠다.” 그래도 이상하게 생산성이 향상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레닌은 원래대로 돌아와 한 주를 7일로 바꾸었습니다.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예수님을 배제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사람들의 삶에서 예수님을 배제시키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돈을 축으로 삼게 합니다. 사상, 사람, 힘을 축으로 삼게 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에 의해서 움직이게 합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축은 예수님뿐입니다. 인류 역사는 예수님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외시킨 역사는 무의미합니다. 우리나라 사회 운동가인 씨알 함석헌 선생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역사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삶의 축으로 삼으십시오. 예수님을 가정의 축, 직장의 축, 인생의 축으로 삼으십시오. 전도서 102절에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오른쪽에 마음을 두십시오. 이 세상 끝에 인류는 예수님을 축으로 좌우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 읽고 나면 이런 의구심이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며 착하게 살아야지 구원을 받는 건가? 뭐가 맞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데 키워드가 되는 말씀은 34절입니다.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임금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을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 복은 언제 준비되었을까요? 창세 때 준비된 복입니다.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했습니다. “창세로부터라는 말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기초를 놓은 때로부터”, “태초부터라는 뜻입니다. 이 복은 태초부터 준비된 복입니다. 아직 내가 태어나기 전입니다. 세상이 있기 전입니다. 태초에 준비된 복이라는 말씀은 내가 어떤 노력을 해서 얻을 수 있는 복이 아니란 뜻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준비된 복이라는 말씀은 나의 인간적인 노력이 아니라 창조주의 무조건적인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받는 복입니다. 도를 닦아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천국은 은혜이고 선물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준비한 복이지 사람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하나님이 나를 창세 전에 택하시고, 내가 태어나자 나를 사랑으로 부르시고 흠이 없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나의 죄를 씻으시고 천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복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준비된 복입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복입니다. 그래서 개역개정 성경은 복을 받을 자들이라고 미래형으로 번역했지만 영어성경은 복을 받은 자들이라고 과거형으로 번역했습니다. 이미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 번역 성경의 의미를 합하면 우리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이고, 앞으로 또 복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창세 전에 구원의 복을 받았고, 앞으로 그 구원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태어나기 전에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태어나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에 이미 복을 받았습니다. 노력해서 얻은 복이 아닙니다. 애를 써서 대가로 받은 복이 아닙니다. 은혜로 받은 복입니다. 값없이 받은 선물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애를 써서 받은 복이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선물입니다.

 

이 은혜는 삶에서 선행으로 나타납니다. 받은 복은 삶에서 착한 행실로 나타납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착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기 위해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17절에서 우리는 돌 감람나무였는데 참 감람나무가 됐다고 했습니다. 참 올리브나무가 됐기 때문에 참 올리브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참 올리브 열매가 열리기 때문에 참 올리브 나무가 아니라 참 올리브나무이기 때문에 참 올리브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참깨이기 때문에 참기름이 나옵니다. 옥상 화단에 개복숭아 한 그루가 있습니다. 개복숭아 열매가 열려서 개복숭아 나무가 아니라 개복숭아 나무이기 때문에 개복숭아가 열리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아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았기 때문에 착하게 사는 것입니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착하게 살아야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구원받으려고 착하게 살고 도를 닦고 수행을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아주 도덕적입니다. 기독교만큼 도덕적인 종교는 없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종교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고 기독교가 도덕 종교는 아닙니다. 기독교는 은혜 종교입니다.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은혜의 힘으로 착하게 사는 것입니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입니다. 선행으로 구원을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으로 구원을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가 나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열매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열매는 나무를 확인할 뿐입니다. 마태복음 7: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2: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행함이 없다면 처음부터 죽은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진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가짜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이 한 착한 일 여섯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35-36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우리말 성경에는 라는 말이 한 번 밖에 없지만 원어 성경에는 열 번 나옵니다. “라는 말을 모두 넣어서 35-36절을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나를) 마시게 하였고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나를)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나에게) 옷을 입혔고 (내가) 병 들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돌보았고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내게로) 와서 보았느니라예수님께서 말끝마다 나를 강조하셨습니다. 나를, 나에게. 나를 위해. “너희가 나에게 이렇게 했다.” “너희가 나를 위해 나에게 이렇게 했다.” 이 말씀은 정말 고맙다. 그때 나를 위해 나에게 이렇게 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그때 정말 고마웠어.”라는 의미입니다. 형제에게 선을 베풀면 예수님이 고마워하십니다. 예수님이 정말 고마워하십니다.

 

예수님의 칭찬에 양들이 우리가 언제 그랬냐며 정색을 합니다. 37-39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양들은 어느 때라는 말을 세 번이나 하며 놀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본 적도 없고, 주님을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대접하느냐는 의미입니다. 왜 양들은 자신들이 한 선행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늘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의식하고 선한 척하며 억지로 선한 일을 짜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베푼 일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다른 사도들보다 더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한 일은 너무 큽니다. 수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왔고, 수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못 먹고, 못자고, 헐벗고, 맞고,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 등등의 온갖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받은 은혜에 비하면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양들은 늘 베풀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받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 앞에서도 자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행을 부인하는 양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지극히 작은 자라는 말은 가장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어떤 관심도 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회피하는 사람들입니다. 공동 번역 성경은 지극히 작은 자라는 말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양들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하는 음지의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께 한 것이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바로 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그가 바로 나였다.” “내가 바로 그였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입니다.

 

원종수 권사님은 서울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의사 국시를 수석으로 합격했습니다. 현재 원 권사님은 미국 디트로이트 오크우드병원 암 전문의로 계십니다. 원 권사님은 학생 때 공부를 못했습니다. 480명 중 350등을 했습니다. 권사님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서울대를 갔다고 고백합니다. 원 권사님이 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어 모친께 고기 사드리고 싶어 고향집에 찾아갑니다. 가는 도중에 버스에서 불쌍한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그때 마음속에 성령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종수야 너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 저 할아버지에게 주거라,” 순종 했습니다. 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설날 바로 전날에 어머님이 어떤 노숙자 할아버지 한분을 집으로 왔습니다. 권사님의 어머님이 참 대단하신 분이시죠. “종수야 이 할아버지 목욕시켜 드려라.”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옷을 벗겨드릴 때 너무 더러워 도저히 만질 수가 없어서 막대기로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켜드렸습니다. 어머님이 설날 입으려고 아껴놓은 옷을 입혀드리라고 해서 또 그렇게 순종했습니다. 그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병원에서 인턴을 할 때, 무릎이 퉁퉁 부운 할아버지가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그때 원 권사님은 내 월급에서 제하고 이 할아버지를 고쳐주세요.”라고 말하고 그 할아버지를 치료해주었습니다. 원종수가 어느 날 기도하는데 이 세 가지 일이 환상처럼 보이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바로 그였다, 그가 바로 나였다."(that was me)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은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에 염소들도 정색을 합니다. 세상 끝에 염소들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 정색을 할 것입니다. 세상 끝에 정색하는 염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정말 이 세상의 구세주였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었어!” 이렇게 되면 정말 곤란합니다.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이 말씀은 우리는 주님을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주님께 선을 행할 수 있습니까?”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인지 몰랐으니까 그랬지 예수님인지 알았다면 우리가 그럴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때 예수님이라고 말씀을 하시지 그랬어요.” “사장님이라고 하시지 그랬어요. 그러면 대접이 달라졌죠. 사장님인지 몰랐으니까 그랬죠.”이런 말입니다. 사람을 봐가면서 선을 행하겠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봐가면서 하는 선은 선이 아닙니다. 또 우리는 주님을 섬긴 적은 없지만 다른 선은 행하며 살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늘 선을 행하며 산 양들은 선을 행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데 선을 조금 행한 영소들은 자신들이 행한 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별적인 선행을 주장하는 염소들에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토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책에 양파 한 뿌리라는 우화 한 토막이 있습니다. 옛날 못되고 아주 못된 할머니가 살았는데, 죽고 나서 보니 착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기에, 악마들은 할머니를 지옥의 불바다 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할머니의 수호천사는 뭔가 구제할 거리가 없나 곰곰이 생각하다가, 단 하나의 선행을 기억해 내고는 하나님께 고했습니다. 할머니가 텃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있었습니다.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양파를 가지고 가서 할머니가 양파를 붙잡고 나오게 하라. 만약 불바다에서 나오면 천국으로 가지만, 양파가 끊어진다면 불바다에 남게 되리라.” 수호천사가 내민 양파를 붙잡고 할머니가 조심조심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다른 죄수들이 할머니에게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못되고 못돼서 그들을 발로 차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끌어올려주는 거야. 너희가 아니라. 이건 내 양파야. 너희들 것이 아니라구!!”할머니가 이 말을 하기 무섭게 양파는 뚝 끊어져 할머니는 다시 불바다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천사는 하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떠났습니다.이 할머니의 전 인생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양파 한 뿌리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참 불쌍한 인생입니다. 전 생애에 자선을 베푼 것이 양파 한 뿌리 밖에 없는 노파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염소들이 자신들의 선행을 기억했던 이유는 할머니의 양파 한 뿌리처럼 선행이 아주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토스토예프스키는 단절의 시대에 이기심을 벗어나는 길은 선행이라는 것입니다. 이 선행을 토스토예프스키는 사랑의 실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소자에게 베푼 냉수 한 그릇도 결코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0:42).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위해 누군가에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푼 행위가 있는지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도 천사도 양파 한 뿌리만으로도 할머니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1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이 나그네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앙 때문에 맞고, 빼앗기고, 쫓겨나고, 죽임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이름 때문에 추방당해 거할 곳을 찾아 유리하며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거할 곳이 없는 거지같은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36-38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예수님은 아무나 형제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을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양들이 대접한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이 형제라고 부르시는 나그네들입니다. 나그네가 헬라어로 크세노스입니다. ‘크세노스낯선’, ‘외국()’, ‘상관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크세노스에는 주인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은 반대말입니다. 양들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을 예수님 때문에, 받은 은혜 때문에 주인처럼 영접했습니다. 이것을 환대라고 합니다. 양들은 볼품 없는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환대했습니다. 교회는 사랑을 외칩니다. “사랑!” “사랑!”이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요한일서 3:18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말로도 사랑하지만 행함으로도 사랑합시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환대가 하나님의 임재를 받는 것보다 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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