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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주인과 종, 그리고 달란트

조회수 : 8회

본문 : 마태복음 25:14~30
주일오전예배 | 2026-04-19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심리 공부할 때 자주 인용하는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영상) 아주 유명한 그림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아가씨로 보이기도 하고, 마귀할멈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토끼와 오리> 그림이 있습니다. 이것은 뭐로 보이세요? (영상) 어떻게 보면 토끼처럼 보이고, 어떻게 보면 오리처럼 보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림이 다르게 보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어떻게 보면 참인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거짓입니다. 오리 같은데 토끼 같고, 토끼 같은데 오리 같은 게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줏대가 없습니다. 애매합니다.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가치관은 명확합니다. 검은 색과 흰색이 갖는 차이처럼 성경의 진리는 이 세상의 가치관과 아주 뚜렷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은 성경의 선명한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법안입니다. 뭐가 뭔지 모르게 하는 법입니다. 아는 웹디자이너에게 지난 부활절 현수막 디자인을 부탁했는데 처음에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괜찮았습니다. 두 가지 색만으로 부활을 이렇게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란색이 약간 있긴 하지만 색깔의 95% 이상이 검정과 흰색 두 가지 뿐입니다. 흑과 백 두 가지 색으로만 죽음과 부활을 아주 명확하게 표현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예수님께서 마치 흑백을 대조하듯 좋은 편과 나쁜 편을 아주 분명하게 대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세상 종말에 있을 징조를 말씀하시고, 세상 종말을 어떻게 준비할지를 말씀하시면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과 한 달란트 받은 종, 그리고 양과 염소(오른쪽과 왼쪽)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흑백과 같이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세 가지를 대조해서 말씀하십니다. 대조하면 흑백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처럼 선과 악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왜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대조하실까요? 흑과 백 중간에서 이쪽이냐 저쪽이냐 고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좋은 쪽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쪽을 꽉 잡으라는 요청입니다.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의 선지자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세상과 교회 중간에서 갈팡질팡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확실한 말씀입니다. 꽉 잡으십시오.

 

지난 주일에 예수님의 열 처녀의 비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달란트 비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 비유는 모두 끝에 관한 말씀입니다. 1절에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라고 했고, 14절에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라는 말은 앞에 비유와 이어진다는 뜻으로 똑같이 종말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관한 말씀입니다. 열 처녀와 종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같은 사람들입니다. 동일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똑같은 사람들을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비유의 내용은 같습니다. 열 처녀는 등을 가지고 있고, 종들을 달란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을 밝혔고, 착하고 충성된 종을 달란트를 빛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을 꺼뜨렸고, 게으르고 악한 종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두 비유의 강조점은 다릅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경계가 강조점이고, 달란트 비유는 충성, 성실이 강조점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준비하라,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고, 달란트 비유는 충성하라, 성실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두 비유 다 종말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종말을 준비합시다. 우리의 주인님께 충성하며 내세, 천국을 성실하게 준비합시다. 이 땅의 삶이 다가 아닙니다.

 

 

1. 맡기는 주인

 

어떤 사람이 외국에 나가면서 종들을 불러서 자신의 소유를 맡겼습니다. 어떤 사람이 외국에 간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 하늘로 승천하심을 가리킵니다. 주인이 돌아왔다(19)는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립시다. 주인이 종들을 불러 달란트는 맡겼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달란트는 사명입니다. 주인은 타국에 가면서 자신의 소유를 종들에게 맡깁니다. 14-15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누가복음 19장의 <므나의 비유>에 보면 주인이 왕위를 받아오기 위해 떠났다고 했습니다. 둘은 같은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9:12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주인은 로마로부터 왕위를 받아오기 위해 로마로 떠나는 것입니다. 다시 올 때는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주인이 떠나기 전에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깁니다. 주인은 자신이 집에 없는 동안 자신의 일을 종들에게 맡깁니다. 아주 중요하고 엄위한 순간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긴다는 것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뢰입니다. 자기 소유를 맡겼다고 했습니다. ‘자기 소유라는 말을 직역하면 그의 손에 가까이 있는 것들입니다. 손에 가까이 있다는 말은 아끼고 귀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늘 돌보아야 하는 일입니다. 주인은 자신이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자신의 손때가 묻은 것들을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주인은 종들을 아주 신뢰했습니다.

 

주인은 엄청난 돈을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달란트는 금의 수량입니다. 금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6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6천 일 품삯입니다. 노동자 하루 품삯이 15만원이라고 하면 한 달란트는 9억 원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노동자가 1년에 주일만 쉬고, 300일씩 20년을 한 푼도 쓰지도 않고 모아야 하는 돈입니다. 한 달란트는 금34kg입니다. 금 한 돈은 3.75g이고, 현재 한 돈 가격은 847,000원입니다. 한 달란트를 금 가격으로 환산하면 767900만원입니다. 아주 큰 돈이다. 역대하 36:3애굽 왕이 예루살렘에서 그의 왕위를 폐하고 또 그 나라에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지배국이 피지배국에 바치는 돈이 금 한 달란트였습니다.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정도의 캐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두 달란트는 40년 연봉이고, 다섯 달란트는 100년 연봉입니다. 주인은 큰 돈을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주인이 종들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12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게 여겨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충성스럽지 않은데 주님이 나를 충성스럽게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나는 죄인인데 주님이 나를 의롭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시간, , , 건강, 말 잘하는 것, 얼굴, 건강, 잘 하는 것, 성격, 등등은 달란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입니다.

 

 

두 번째 달란트는 사명입니다. 주인은 종들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calling는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란트라는 말에서 재능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재능은 잘 하는 일, 타고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잘 하는 일을 맡긴 것입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라고 했습니다. 종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 역량, 재능에 따라 일을 맡겼습니다. 주인은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사명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부르심, 콜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목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일을 알고 계십니까?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명을 발견하시고 그 사명을 위해 사십시오.

 

요즘 사람들의 삶의 목표가 집 바꾸고, 차 바꾸는 것입니다. 500백만 원 자리 옷, 1000원 자리 명품 백 자랑합니다. 인생이 너무 유치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공작새가 연애를 하려면 몸에 힘을 줘서 깃털을 쫙 폅니다. 화려한 깃털 자랑을 합니다. 나 이만큼 예쁘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이성에게 파는 것입니다. 곰이 적수를 만나면 몸을 일으켜 세웁니다. 나 이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내 앞에 꿇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본능을 따라 사는 동물하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창세기 6: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이 됨이라는 말씀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없어지고 육체의 욕망, 정욕, 세상 욕망만 남았다는 뜻입니다. 외형적 몸 덩어리가 사람됨의 기준이 됐다는 뜻입니다. 속사람은 죽어버린 영적 좀비가 됐다는 뜻입니다. 사람됨의 가치가 명품에 있습니까? 큰 집에 있습니까? 돈에 있습니까? 육체의 욕망만 남은 인류의 끝이 무엇이었습니까? 홍수 심판이었습니다. 홍수 심판은 산 사람을 심판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을 쓸어버린 것입니다. 서울에 살 때 집 근처 힐튼호텔에서 행사를 하는데 양복을 한 벌에 만원씩 하더라고요.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어요. 구로에서 양복 3만원 하던 것 사서 입은 적도 있습니다. 일산에 살 때는 백화점에서 양복 두 벌에 10만원에 팔더라고요. 너무 비싼 옷을 샀죠. 그것도 두 벌이나. 20년 됐는데 한 벌은 지금도 입습니다. 너무 좋아요. 여러분! 너무 세상 욕망, 세상 자랑 따라가지 마십시오.

 

신애라 씨가 한 방송에서 나와서 한 말입니다. 크리스천이잖아요. 친구가 , 너도 좀 제일 비싼 가방 하나 들어. 네 남편이 그것도 하나 안 사주는 줄 알겠다. 돈이 없니, 뭐가 없니?”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명품 가방 매장에 갔습니다. 하나 사서 집에 왔는데 가방이 계속 신경이 쓰였습니다. 마음 속으로 자신과 한참 싸웠다고 합니다. 별별 생각을 다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 가방은 내가 것이 아니구나!’라고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매장 문이 열리자마자 가방을 가지고 갔어요. “정말 죄송한데 이 가방은 내 가방이 아닌 거 같네요.” 그랬더니 직원이 그럴 줄 알았어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제 들고 가시는데 하나도 기쁜 표정이 아니시더라고요.” 사람들이 명품이 뭔지 명품 가방을 사면 신나서 싱글벙글하면서 가는 거예요. 신애라 씨는 그때가 물욕이 사라지는 전환점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는 그 어떤 물건을 봐도 전혀 욕심이 안 생기더래요. 그리스도인은 세상 자랑이 불편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또 달란트는 사랑입니다. 주인은 8달란트를 세 사람에게 똑같이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다르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차별일까요? 아닙니다. 우열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종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입니다. 저에게는 삼남매가 있습니다. 세 아이를 모두 사랑합니다. 그러나 다르게 대합니다. 다르게 대하는 이유는 세 아이의 성품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아이는 사탕을 좋아하고, 한 아이는 초콜릿을 좋아하고, 그리고 한 아이는 둘 다 좋아합니다. 한 아이에게는 사탕을 사주고, 한 아이에게는 초콜릿을 사줍니다. 사탕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초콜릿을 사주고, 초콜릿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사탕을 사주지 않습니다. 과거에 한 아이는 핑크색을 좋아했고, 한 아이는 노란 색을 좋아했습니다. 무얼 사려고 하면 아이가 좋아하는 건지 고민을 합니다. 샀는데 아이가 좋아하면 저도 좋습니다.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다양합니다. 차별이 아닙니다. 구별이고 배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양합니다. 재능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은사에는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이해와 사랑과 배려, 그리고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배려하시고, 사랑하셨다는 증거입니다.

 

바다에 수만 종의 물고기가 있습니다. 고래처럼 큰 고기만 있지 않습니다. 멸치처럼 작은 고기도 있습니다. 계곡에 사는 물고가 있는가 하면 강이나 바다에 사는 물고기도 있습니다. 산에는 백향목처럼 큰 나무가 있는가 하면 잘 보이지 않는 잡초가 있습니다. 장미꽃이 있는가 하면 호박꽃도 있습니다. 땅 속에 지렁이가 있는가 하면, 공중의 독수리가 있고, 천국에는 천사가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이 다 똑같지 않습니다. 별이 일렬로 서 있지 않습니다. 위치가 다르고, 크기가 다르고, 빛도 다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지으시고 좋아하셨다고 했습니다. 각자는 피조물에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있습니다. 지렁이가 나를 왜 천사와 같이 만들지 않았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전에 살던 곳에 있을 때 들은 말입니다. 아파트 단지가 있고, 전원주택단지가 있고, 상가주택 단지가 있습니다. 다른 데는 다 자유롭게 건축을 했습니다. 그런데 상가주택 위치에는 높이가 똑같습니다. 5층 이상을 짓지 못하도록 규제했습니다. 지나가다 보면 높이가 똑같습니다. 도시를 설계한 사람이 후회하는 것이 상가주택 높이 제한을 둔 것이라고 합니다.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어야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요? 달란트를 다르게 주셨다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다름이고 구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다양하게 사랑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배려하시고, 사랑하셨다는 증거입니다.

 

 

2. 충성하는 종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장사를 했습니다. 16-17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두 종은 주인에게 달란트를 받자마자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으로 장사했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주신 것으로 장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달란트를 땅에 묻었습니다. 18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충성했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일을 했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께 왜 충성했을까요? 본문에서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19절에서 힌트를 찾았습니다. 19절에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라고 했습니다. 그냥 주인이라고 하지 않고 <종들의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주인에게 속한 종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인과 종을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로따로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종이 헬라어로 둘로스인데 둘로스는 종, 노예라는 뜻입니다. 둘로스는 밧줄이나 끈으로 동여 매다는 뜻의 데오에서 온 말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묶여 있는 사람입니다. 종은 인생, 의지, 생각 등이 주인에게 묶여 있는 존재입니다.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둘로스라는 말을 NASBslave, 노예라고 번역했습니다. 온전히 매여 있다는 의미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철저하게 예속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종은 자신이 종인지 알아야 하고 자기 위에 주인이 있음을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묶여 있는 존재입니다. 인생, 생각, 의지, 사고가 묶여 있습니다. 나와 주님은 운명공동체입니다. 이 끈을 아무도 끊을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8: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 이 우주의 어떤 존재도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주인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퀴리오스입니다. 퀴로오스는 힘, 권세, 권위라는 말의 퀴로스에서 온 말입니다. 퀴리오스, 주인이라는 말은 힘과 권한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종의 힘은 주인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 아닙니다. 주인의 힘입니다. 주인의 권세입니다. 일을 주신 분이 주인입니다. 사명을 주신 분은 주인입니다. 그 일을 감당하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 주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힘과 능력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나에게 권세,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능력입니다. 사명을 주시면 감당할 능력도 주십니다. 내 힘은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위에 주인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종의 주인이고 주인의 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유튜브로 부산 어느 교회 목사님의 설교로 듣다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교회가 주차장 자리가 필요했습니다. 마침 교회 옆에 넓은 공터가 있었습니다. 그 공터를 주차장으로 사용하면 좋겠는데 땅 주인이 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땅주인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이 문제로 기도하고 애를 쓰는 중에 땅 주인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제안을 했습니다. “일요일마다 교인들의 주차장으로 사용하세요.” 주차장으로 허락을 한 것입니다. 그것도 무상으로.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일 년 51주 만 사용하고 한 주는 사용을 못합니다.” 너무 좋은 조건입니다. 교회는 땅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일 년 51주를 주차장으로 마음껏 사용하였습니다. 1, 2, 3년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성도들 사이에 스멀스멀 불평, 불만들이 올라왔습니다. “아니, 땅 주인은 주차장을 쓰게 할 거면 일 년 내내 다 쓰게 할 것이지 왜 한 주를 못 쓰게 해서 그 주일엔 다른 곳에 주차하게 해...불편하네.” 그래서 교회에서 땅 주인에게 연락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일 년 중 51주 만 사용하고 한 주를 못 쓰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러자 그 땅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해야 이 땅 주인이 누군지는 알고 쓸 거 아니요!”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이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셨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내가 모든 나무실과를 내 마음대로 따 먹는다 해서 내가 에덴동산의 주인이 아니구나! 내 마음대로 살지만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구나! 에덴의 주인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시구나! 이를 늘 확인하라는 거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믿으십니까? 오늘은 일요일입니다. 일요일이라는 말은 해가 빛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태양이 주인인 날입니다. 사람들은 해를 섬기며 삽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을 섬기며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요일이라고 하지 않고 주일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주일입니다. 주일은 주의 날, 주인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내 날이 아닙니다. 내가 주인인 날이 아닙니다. 이 날의 주인이 따로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일주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일주일 중에 6일은 세상에서 열심히 살라고 주셨고, 하루는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주셨습니다. 이 날은 예수님이 주인이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일주일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하루는 주의 날입니다. 예배하는 이 시간만 주님의 시간이 아니라 오늘 하루가 다 주의 날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는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입니다. 주일을 꼭 지키십시오. 전에는 주일 성수라는 말을 썼는데 지금은 주일 성수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주일성수라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열 개를 주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은 내 물질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일성수, 십일조는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입니다.

 

 

3. 결산하는 주인

 

주인이 돌아왔을 때 종들은 주인 앞에서 결산했습니다.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시면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법정에 서야 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피하거나 숨지 못할 것입니다. 심판이 없다면 성경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사야 6장에 아무 죄가 없는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렸습니다. 죄가 없는 천사가 주님 앞에서 몸 둘 바를 몰라 발과 얼굴을 가렸다면 죄투성이인 우리는 숨쉬기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16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고 했습니다. 어린양의 심판이 두려워 산과 바위에게 자신을 숨겨달라고 합니다. 그때 어떤 사람은 봉서산아 나를 덮어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뭐라고 부르실까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부르실까요? 아니면 악하고 게으르고 무익한 종이라고 부르실까요?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하실까요? 아니면 밖에 나가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하실까요?

 

주인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합니다.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열 달란트를 만들고, 두 달란트로 네 달란트를 만들었으니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크게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들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합니다. 주인이 종에게 요청한 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충성과 성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성공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충성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진실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맡겨진 일에 충성하면 됩니다. 진실하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선한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19:17). 착하다는 말이 선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쓰던 말을 사명에 충성한 종에게 쓰고 계십니다. 진실한 사람에게 쓰십니다. 우리가 진실하면 주님은 우리를 진실하다고 여겨주십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대가 프랑스를 점령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프랑스의 뜻 있는 젊은 청년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레지스탕스라고 불렀습니다. 레지스탕스는 저항이라는 뜻입니다. 그때 한 청년이 레지스탕스가 아닌데 레지스탕스로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재판받던 중 자기가 얼마나 억울한지 열심히 자기 변호를 했지만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방에 돌아와서 너무나 억울하다며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울면서 호소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억울하게도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 감방에는 진짜 레지스탕스 멤버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사랑하는 조국이 지금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데 너는 아무 일도 안 했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너는 죽어 마땅하다.” 아무것도 안 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내 사명에 충성하는 종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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