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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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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110:1~7
주일오전예배 | 2026-05-03
설교자 : 서요한 목사

1918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천문학적인 배상금, 영토 축소, 군비 제한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룹니다. 히틀러는 독일의 무너진 경제와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독일에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때 대다수의 목사들은 기독교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종합하기 위한 독일 기독교 신앙운동에 가담합니다. 나치는 민족주의에 호소하며 국가교회를 세워 독일을 지배하려 했고, ‘강력한 국가를 원하던 일부 목회자들이 이에 동조합니다. 그들은 요한복음 11절을 이렇게 바꿨습니다. ‘태초에 민족이 있었다. 이 민족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니, 하나님은 곧 민족이다’ ‘독일신앙운동은 독일 국민의 삶에 배어있는 기독교 전통을 토착적 요소로 교체하려고 했습니다. 이들에게 민족은 곧 하나님이었습니다. 교회는 히틀러를 무너진 독일을 세우고 온 세계에 번영을 가져다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이 시대의 구세주라고 선전했습니다. 교회가 조직한 일요일 성경학교에서는 히틀러가 하나님의 손에 들리어 권력을 잡았으며,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기적이다.”라는 설교가 이뤄졌습니다. 교회당에 모인 수백 만 명의 어린이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이 나치당의 발전에 있음을 믿는다.”라고 배웠습니다. 교회 목사들은 나치즘은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외쳤습니다.

 

나치에 야합한 독일 교회는 히틀러를 교회의 머리로 세뇌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머리는 히틀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1934529일 독일 부퍼탈 시의 바르멘에 모였습니다. 이들이 바로 고백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르멘 선언문을 체결하고 고백했습니다. <고백교회 총회는 우리의 신앙고백과 독일의 교회를 파괴하는 나치 기독교에 맞서 믿음으로 일치단결하여 그들에게 저항하고자 한다. 그들은 거짓된 신조, 폭력, 위선적인 이념을 통해 독일 교회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시도하지만 독일 복음주의 교회는 성령을 통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만 하나가 될 수 있다. 바르멘 선언이 성경과 교부들의 신앙고백과 일치하는지, 일치하지 않는지 확인해 보라. 만일 우리의 선언이 성경에 위배된다면 듣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성경에 근거한다면 나치에게서 오는 모든 두려움과 유혹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믿음의 길에 함께 참여하라.> 이로 인해 고백교회 성도들은 나치에 의해 박해를 받습니다. 바르멘 선언의 주역은 칼 바르트, 마르틴 니뮐러, 디트리히 본회퍼입니다. 칼 바르트는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그의 조국인 스위스로 추방되고, 니뮐러 목사는 다카우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후에 풀려납니다. 하지만 본회퍼 목사는 플로센뷔르트 수용소에 감금됐다가 194549일에 사형을 당합니다. 사형당하기 전까지 본회퍼 목사는 수용자들과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수용소에 있으면서도 항상 평온하고 당당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본회퍼는 사형대에 올라가기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끝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본회퍼 목사의 죽음을 지켜보던 한 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죽음을 앞두고 무릎을 꿇고 진심을 다해 경건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사형집행 장소에서도 짧은 기도를 드리고 나서 침착하고 용감하게 교수대 위로 올라갔습니다.” 정말 멋있는 것 같습니다. 칼 바르트는 임종 직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혼탁해도 의기소침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모스크바나 워싱턴이나 베이징에 의해서 통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만 통치되기 때문입니다.” 독일 교회가 위험에 처했을 때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일어나 주께 헌신했습니다.

 

 

 

시편 110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1절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젊은이주일이니까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시편 110편은 몇 절 안되는 짧은 시지만 다윗의 깊은 영적 통찰력이 빛나는 시입니다.

 

다윗은 시를 하늘의 회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 회의 내용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여기 여호와는 성부 하나님이시고, 주는 성자 그리스도이십니다. ‘여호와는 오직 성부 하나님만을 일컫는 고유한 칭호입니다. 다윗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너(you)라는 우리말 표현이 우리 정서로 거북하지만 외국어에서는 자연스러운 표현임을 감안하시고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회의를 하고 계십니다. 4절에도 천상회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여기서 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천상에서 있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신탁 회의 모습을 아주 정확하게 시로 옮기고 있습니다. 다윗은 왕인 자신이 아니라 저 하늘 위에서 주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 왕이 아니라 저 하늘의 왕이 저 하늘 위에서 다스리십니다.

 

그러면 다윗은 천상회의 모습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또 다윗은 예수님 오시기 약 1000년 전 사람인데 그리스도를 눈으로 본 것처럼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BC 1100년에서 BC 970년까지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아직 오시지 않은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언약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입니다. 다윗은 말씀과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의 세계를 알았고, 1000년 후를 내다보고 1000년 후에 오실 메시야를 정확하게 인식했습니다. 사람은 육전 존재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이라면,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늘의 세계를 알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텔레비전 드라마에 감동되지는 마십시오. 세상 풍조와 유흥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말씀과 성령에 감동되어 사십시오. 히브리서 2:1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감동되어야 세상 조류에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을 내 주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고 만났던 신약의 사도들처럼 예수님을 나의 주라고 정확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내 주인님이 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입에서 나는 주라는 말이 공허한 고백일 뿐입니다. 요즘 아르바이트를 하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악덕 업주는 장사를 하다가 무슨 사고를 생기면 아르바이트 청년에게 더 덮어씌웁니다. 하지만 좋은 주인은 갑질하는 손님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이것저것을 챙겨줍니다. 예수님은 악덕 업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5절에는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라고 했습니다. 앞의 주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뒤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윗은 1절과 5절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신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은 권능을 가리키고, 보좌는 통치를 상징합니다. 다윗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오른쪽에 있는 보좌에 앉아계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진짜 통치자는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에스라 4:20에는 페르시아 왕이 다윗과 솔로몬을 큰 군왕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근동 지역에서 다윗은 가장 큰 왕이었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다 머리를 숙이고 조공을 바쳤습니다. 다윗 위에 누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예수님을 주인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왕이 아니라 진짜 왕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 위에 영원한 하늘의 왕이 계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삼성 노조가 데모를 하니까 SK 노조도 데모를 하고 있습니다. 노란봉투법은 한 마디로 노조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무슨 짓을 해도 너희에게는 책임 없다.” 한 마디로 노조가 왕이란 말입니다. 이게 노란봉투법입니다. 2025년 기준 삼성전자 평균 연봉이 15천입니다. 데모하는 사람들 중에는 2-3억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 최상위입니다. 0.01%입니다. 오늘 날 사람들이 왕처럼 살고 있습니다. , ,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 다 왕처럼 삽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싸울까요? 내가 왕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위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숙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 위에 이 세상의 주인님이 계십니다. 나와 내 가정, 내 인생, 이 세상을 다스리는 주인님이 계십니다. 다윗은 하늘에 계신 진짜 왕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저 하늘에 진짜 주인이 계심을 인식하며 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리스도께 오른쪽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고대 시대 왕들이나 귀족들의 보좌에 앉으면 보좌 앞에 있는 발판에 발을 올려놓았습니다. 원수들이 발판이 된다는 말은 원수들을 완전히 짓밟아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발판은 완전 정복을 의미합니다. 보좌에 앉음은 통치를 의미하지만 기다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원수들이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싸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잡히실 때 제자들에게 지금 당장 열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26:53). 천사들을 동원해 지금 당장 세상의 악을 쓸어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천군천사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명령을 내리시지 않습니다. 보좌에 앉아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지금 당장 원수를 다 쓸어버리시면 되는데 왜 원수가 굴복할 때까지 성자 예수님을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지금 당장 개입하셔서 악을 다 무너뜨리지 않으실까요? 왜 하나님은 지금 가만히 계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운영하시는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244년 고대 중국 조나라 북방, 흉노는 조나라 변경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강적이었습니다. 흉노는 쳐들어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병대가 주력이었습니다. 정면승부로는 흉노를 도저히 이길 수 없었습니다. 조 나라는 이 흉노를 막아낼 장수가 절실했고, 안문() 요새를 지키는 이목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목이 내린 군령이 이상했습니다. “흉노가 쳐들어오면 무조건 요새 안으로 들어가 지켜라. 감히 나가 싸우려는 자는 참하겠다.” 흉노가 쳐들어왔지만 이목은 움직이지 않았고, 물러갔다가 또 쳐들어왔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흉노는 이목을 겁쟁이라 비웃었습니다. 심지어 조나라 병사들까지 우리 장수가 겁쟁이라며 손가락질했습니다. “왜 싸우지 않는 거지? 자존심 상하게. 죽더라도 싸우다 죽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목은 온갖 조롱을 들었습니다. 결국 조왕은 이목을 교체해버렸습니다. 후임 장수가 부임해 나가서 싸웠지만 연전전패하며 막대한 손실만 쌓였습니다. 조왕은 결국 이목을 다시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목은 돌아와서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요새 안에서 버티면서 조용히 준비했습니다. 전차, 기병, 궁수 13만여 명의 정예 병력을 훈련시키고 또 훈련시켰습니다. 흉노 선우는 확인했습니다. 저 장수는 겁쟁이고, 저 군대는 싸울 의지가 없다고. 결국 흉노는 대군을 이끌고 조나라 영토 깊숙이 아무런 방비 없이 밀고 들어왔습니다. 이목이 기다리던 순간이었습니다. 이목은 이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13만여 병력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고, 흉노군은 순식간에 포위됐습니다. 조 군대가 사방에서 몰려들자 흉노의 대군이 무너졌고, 그 후 흉노는 10여 년 동안 조나라 국경을 넘보지 못했습니다. 수년 동안 겁쟁이 소리를 들으며 버텼던 이목은, 단 한 번의 전투로 흉노를 물리치고, 자존심을 회복했습니다. 수년 동안 당한 그 굴욕은 전부 이목의 계획된 굴욕이었습니다. 만약 흉노가 쳐들어올 때마다 맞서 싸웠다면 아군의 피해가 매우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목은 병사들을 훈련하며 결정적인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십자가는 굴욕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손바닥을 때리고, 주먹으로 쳤습니다. 침을 뱉고 조롱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며 머리를 흔들고 조롱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모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십자가는 굴욕 중에서도 최고의 굴욕입니다. 그런데 그냥 굴욕이 아니고 계획된 굴욕입니다. 그것도 창세 전에 원수를 단 번에 멸하시고 단번에 당신의 백성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기 위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계획된 굴욕입니다. 고린도전서 15:24-26에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이니맨 나중에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원수를 단번에 멸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원수가 심판을 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조롱을 당해도 예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탄의 세력에 결정적인 판결을 내린 사건입니다. 이미(Already) 죄와 사망 권세는 깨졌습니다. 그러나 아직(Not Yet) 악에 대한 최종적인 집행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집행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 심판이라고 합니다. 최후 심판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 중간 시기입니다. 지금은 이미와 아직 사이입니다. Already but Not Yet! 사탄은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발악을 하고 있는 때입니다. 계시록 12: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아직 악에 대한 완전한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갈등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오른쪽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고, 기다리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오른쪽에 마음을 두시고 기다립시다.

 

 

 

예수님의 통치는 지금 이 세상 중심부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시온에서 주의 권능의 규를 원수들 중에 보내셔서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신다고 했습니다. ‘중에서라는 말은 내부’,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한 가운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 계시지만 그 통치는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은 예수님이 우리 삶의 한 가운데, 세상 한 가운데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고통받는 순간, 아파하는 현장,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한 가운데에 계십니다. 세상의 불의와 아픔 가운데서도 정의를 비추시는 분으로, 삶의 치열한 일상 속에 임재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경을 통해, 교회를 통해, 당신의 통치의 규(막대기)를 보내셔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3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정말 은혜롭고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주의 권능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권능의 날이 언제일까요? 사도행전 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는 날이 주의 권능의 날입니다. 목사의 능력의 날이 아닙니다. 목사가 설교를 유창하게 잘 하는 날이 아닙니다. 목사의 능력과 인간의 재능이 발휘되는 날이 아닙니다. 청중들이 모여서 힘을 쓰는 청중의 날이 아닙니다. 탱크가 불을 뿜는 날, 스텔스기가 능력을 발휘하는 날이 아닙니다. 주의 권능의 날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날입니다. 인간적인 날이 아닙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애굽의 왕자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학문과 무예를 다 익혔습니다. 인간적인 능력이 최대치에 올라 있습니다. 그날에 모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 날에 모세가 한 일은 살인입니다. 모세는 도망자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권능이 임했습니다. 주의 권능의 날은 성령께서 각 사람의 인격 속에서 역사하시는 날입니다. 주의 권능의 날은 성령이 각 사람에게 오셔서 인간적인 욕망을 부수고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날입니다. 여러분! 성령 받으십시오. 그래서 성령에 이끌리십시오. 그때가 주의 권능의 날입니다. 성령 충만 받으십시오. 성령 충만 받지 못하면 늘 연약합니다. 시들시들합니다. 성령 충만 받아야 싱싱합니다.

 

권능은 히브리어로 하일입니다. 하일은 권능, 군대,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권능의 날은 주의 군대의 날, 또는 주의 전쟁의 날이라고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주의 권능의 날은 성도들이 주의 군대가 돼서 주를 위해 일어나는 날입니다. 언제 주의 군대가 일어날까요? 교회에 대한 세상의 박해가 일어날 때입니다. 영적 싸움이 치열할 때입니다. 교회에 환란이 불면 많은 사람들이 도망가고, 숨습니다. 코로나 때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집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믿음의 자리를 지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코로나 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 보다 정은경의 말을 더 잘 들었습니다. 한국교회가 텅텅 비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곰팡이 백신이었습니다. 백신에서 곰팡이도 나오고, 머리카락도 나왔습니다. 정은경은 안 맞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국민에게 그걸 맞힌 것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 너무하죠. 환란의 바람이 불 때 분연히 일어나 주의 군대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루마니아는 나치의 억압을 받았습니다. 1944년 루마니아에서 나치가 물러갑니다. 그러나 루마니아에 해방은 오지 않았습니다. 소련군 100만 명이 루마니아로 몰려왔습니다. 한 독재가 끝나자 또 다른 독재가 시작됐습니다. 나치가 떠난 자리에 스탈린이 앉았습니다. 1945년 스탈린은 루마니아에서 정권이 굳어지자 종교를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루마니아 국민은 종교심이 깊었습니다. 교회를 통제하면 국민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정권은 거대한 종교 행사를 열었습니다. 부쿠레슈티 의회 건물에 4000명의 종교지도자를 소집했습니다. 목사, 신부, 주교, 랍비 등 모든 종파의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명예 의장석에는 스탈린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대회는 전 국민에게 라디오로 생중계됩니다. 정권의 계획은 간간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단상에 올라가 공산주의를 찬양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정권의 확성기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한명씩 단상에 올라갔습니다. 정교회 주교 한 명은 성직복에 낫과 망치를 수놓고 나왔습니다. “동지 주교라고 불러주십시오.” 루터교 부감독은 신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 번 계시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예수를 통해, 그리고 스탈린을 통해.” 한 주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여러 색깔의 물줄기가 교회라는 강으로 흘러왔습니다. 지금 붉은 물줄기가 들어오는 것을 환영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줄줄이 독재자를 찬양했습니다.

 

리처드 브룸브란트 목사의 주먹이 떨렸습니다. 속에서 피가 끓어올랐습니다. 목사, 주교라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대신 스탈린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부인 사비나가 리처드 목사의 손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리처드 일어서세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이 수치를 씻어내세요.” 리처드 목사가 아내를 바라봤습니다. “사비나, 내가 그렇게 하면 당신은 남편을 잃게 됩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사비나의 눈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비나가 다시 말했습니다. “겁쟁이를 남편으로 두고 싶지 않아요.” 리처드 목사가 일어섰습니다. 리처드가 신분증을 제출하고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공산당 간부들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기치 못한 말이 리처드 목사님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만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어떤 정치권력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목사님! 목사님!”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강당 안의 함성은 마이크 없이도 건물을 울렸습니다. 강당이 폭발했습니다. 4천 명 중 상당수가 마음 속으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중계가 중단되었습니다. 그 후 리처드 목사는 공산당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리처드는 정부가 통제하는 교회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순종하는 지하교회를 결성했습니다. 가정 집 지하실에서, 숲 속에서, 때로는 묘지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1948229일 주일 아침 예배를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늘 걷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검은 색 밴이 리처드 목사의 옆에 섰고, 두 사람이 리처드 목사를 차에 강제로 태웠습니다. 리처드 목사는 납치되었습니다. 리처드는 지하 10m 깊이의 감방에 갇혔습니다. 빛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매일 17시간씩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공산주의는 선하다. 기독교는 어리석다.” 리처드 목사의 정신을 날마다 공격했습니다. 고문도 했습니다. 발바닥 가죽을 벗겼습니다. 새살이 나오면 다시 벗겼습니다. 등과 가슴에 불에 달군 쇠로 고문을 했습니다. 뼈가 부러지고 척추 네 개가 고문으로 무너졌습니다. 리처드는 밤마다 머리 속으로 설교를 만들었습니다. 3년 후에 단체 감방으로 옮겨졌습니다. 리처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리처드를 끌어다가 다시 두들겨 팼습니다. 실신 직전인 리처드를 감당에 던져 놓으면 리처드는 일어나 다시 설교했습니다. 리처드는 환란의 때에 새벽이슬 같이 주를 위해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앞에서는 주의 백성이라고 했는데 뒤에서는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백성과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들입니다. 주의 백성이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입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우기와 건기로 나누어집니다. 건기에는 비가 6개월 동안 한 방울도 오지 않습니다. 이때는 헐몬산에서 내려오는 이슬이 밤에 갈릴리 평지에 내려 식물의 생명을 줍니다. 시편 133편에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같다고 했습니다.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이슬은 은혜, 충만한 축복을 의미합니다. 지난 밤에 오랜만에 비가 왔습니다. 그동안 날씨가 가물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니까 식물이 시들시들했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니까 식물에 활력이 있어졌습니다. 시들시들했던 식물들이 싱싱해졌습니다. 새벽이슬 같은 청년은 문자적으로 청년이 아니라 충만한 복을 받아 활기차게 사는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은혜의 이슬을 충만히 먹고 청년 같은 싱싱한 성도가 됩시다. 은혜를 받지 못해 시들시들한 늙은 성도가 되지 맙시다. 은혜가 없으면 늙은 성도가 됩니다. 하지만 은혜가 있으면 젊은 성도가 됩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드는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눈이 오면 어린 아이처럼 막 뛰면서 좋아했다고 합니다. 뇌 과학자들은 늙어도 젊게 살려면 뇌를 속이라고 조언합니다. 나는 늙었다고 생각하고 말하면 뇌가 거기에 반응해 신체적으로 무기력해집니다. 뇌를 속이면 뇌의 노화 프로그램을 깨고, 활력 있고 건강한 노년을 보낼 수 있다고 합니다. 뇌는 가끔씩 상상과 현실을 구별 못합니다. 실감나는 꿈을 꾸면 진짜 온 힘을 달릴 때처럼 심장이 마구 뛰고 땀도 나고 설레기도 합니다. 꿈에 뇌가 속는 것입니다. 뇌를 속인다는 것은 새로운 정보로 뇌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뇌에 입력된 정보를 바꾸어서, 뇌의 습관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나는 젊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꾀병 다리환자가 많이 모인 병실에 보다 못한 의사가 뱀을 한 자루 가져다가 풀어놓으니 환자 모두가 병실을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환자들은 순간적으로 아픈 사실을 뇌에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음 날부터 퇴원이 잇따랐다고 합니다. ‘나는 죽는다’, ‘나는 늙었다고 자꾸 말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더 늙습니다. 더 힘이 빠집니다. 더 활력이 없어집니다. “나는 젊다. 팔팔하다. 건강하다. 아직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말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은 뇌를 속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으면 젊어지기 때문입니다. 요엘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성령 받으면 늙은이가 어린이처럼 꿈을 꿉니다. 성령 받으면 늙은이가 젊은이처럼 꿈이 생깁니다. 성령 충만 받고 젊은이처럼 꿈을 꾸십시오. 성령충만으로 청년신앙르 가집니다. 호세아 14:5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하나님은 내게 이슬과 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슬같은 은혜를 주십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 시들시들한 성도가 되지 마시고, 새벽이슬 같은 싱싱한 성도가 되십시오. 갈렙은 85세의 나이에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14:10-11) 갈렙은 85세의 나이에 헤브론을 정복했습니다. 모세는 120세의 나이에 눈도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120세의 나이에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열정을 가졌습니다. 갈렙과 모세는 청년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은혜 받고 새벽 이슬 같은 청년 신앙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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