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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자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습니다. 12제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혁명을 일으켜 민족을 구원하고 왕이 되실 줄 알았습니다. 3년을 따라다니며 쉬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께 인생을 다 걸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모든 것을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주 힘없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멘붕이 왔습니다. 예수님께 너무 실망했습니다. 십자가에 실망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예수님 때문에 실망하시는 분 있으십니까? 십자가 때문에 실망하시는 분 있으십니까? 교회 때문에 실망하시는 분들 있으십니까?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부활과 천국을 바라보십시오. 천국, 부활, 생명이 가장 참된 보상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두 제자가 부활을 믿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엠마오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13절에 “그날에”라고 했습니다. 그날은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천사의 계시를 받고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사도들에게 증언한 부활의 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떠들썩한데 두 제자는 소문을 뒤로 한 채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 실망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실망하지 마세요. 엠마오는 ‘뜨거운 샘물’, ‘따뜻한 샘물’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옘은 ‘온천’, ‘따뜻한 봄’이라는 뜻입니다. 옘은 욤에서 온 말인데 욤은 ‘낮’, ‘날’, ‘일평생’, ‘생일’, ‘영원히’라는 뜻입니다. 엠마오는 그냥 뜨거운 샘물이 아니라 영원히 뜨거운 샘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름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엠마오에 온천이 있었던 듯합니다. 사람들이 왜 온천을 갈까요? 보통 쉬러 가지 않나요? 그래서 어떤 교파에서는 소풍 간다고 할 때 엠마오에 간다고 말합니다. 휴양을 갈 때도 엠마오에 간다고 말합니다. 두 제자는 왜 엠마오로 가고 있을까요? 예수님 사후에 지치고 낙심해서 휴양을 가는 중일까요? 성경이 말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지 두 사람은 따뜻한 온천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의 여정이 꼭 우리 인생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네 인생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뒤로 하고 세상의 온천을 향해 휴양을 찾아 떠나는 인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여러분은 예수님 없이 이 세상에서 엠마오를 찾아 해매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지만 진짜 영원히 따뜻한 샘물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따뜻한 은혜의 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등지고 세상에서 온천을 찾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엠마오를 찾아 해매지 마세요.
그런데 오늘 말씀은 두 제자가 부활의 날에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이 세상 따뜻한 샘물에 갔다가 거기서 진짜 뜨거운 은혜의 샘을 경험하고 다시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는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반전의 이야기입니다. 두 제자는 이 세상의 엠마오에서 하늘의 엠마오를 경험했습니다. 이 땅의 엠마오에서 영적 엠마오를 경험했습니다. 어떻게 영적 엠마오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시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셔서 영적 엠마오, 따뜻한 온천의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등대교회가 예수님을 만나는 영적 엠마오가 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온천에 가면 뜨거운 물이 속에서 부글부글 계속 솟구칩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뜨거운 온천수가 계속 솟구쳐 흘러 사람들이 하나님의 뜨거운 온천의 은혜를 경험하는 축복된 장소가 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17세기 네덜란드 천재 화가 렘브란트는 빛의 화가로 불립니다. 렘브란트는 빛으로 인물의 내면을 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분의 작품을 보면 항상 빛이 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작품으로는 십자가에서 내려지시는 예수, 돌아온 탕자, 갈릴리 호수의 폭풍, 자화상 등이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그림을 그려 많은 돈을 벌었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하루아침에 행복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것입니다. 그는 그날로 붓을 꺾고, 그림을 포기한 채 절망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그 절망 가운데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다시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린 그림이 ‘엠마오 도상의 그리스도’입니다. 아주 유명한 그림입니다. 렘브란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낙심해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두 제자의 모습에서 절망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복된 제자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절망의 그림자를 떨쳐버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그림의 값을 물어볼 때마다 렘브란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내의 죽음을 통해 주님을 만났고 생명이 무엇인지 깨달아 그린 그림이니 값을 칠 수 없다.” 우리가 얻은 생명은 값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서 얻은 생명입니다. 어떻게 값으로 따질 수 있겠습니까? 어제 성찬식을 준비하기 위해 아내와 제과점에 갔습니다. 교회 옆에 유명한 빵집이 있잖아요.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더라고요. 그런데 빵이 너무 비싼 거예요. 무심코 제 잎에서 “빵이 너무 비싸다.”라는 말이 툭 튀어나와요. 그러니까 옆에 있던 직원이 쳐다보더라고요. 아내에게 내년부터는 여기서 사지 말라고 했어요. 그리고 교회에 왔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성찬식인데 조금 비싸면 어떤가? 좋은 걸로 하지 뭐.”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얻은 생명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 얻은 것입니다. 렘브란트는 풍요롭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아내를 잃고 허무와 좌절의 길목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절망에서 소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실의에 빠진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뒷모습이 참 쓸쓸했을 것 같아요. 그때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가까이 오셔서 동행하셨습니다. 여기 ‘동행하다’는 말이 같은 방향으로 함께 여행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아주 가까이 오셔서 두 사람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등지고 세상을 향해 가는데 예수님이 같이 가신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깊고 정말 넓고 정말 높다는 듭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눈이 뭔가에 가리어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가리다’는 말이 헬라어로 ‘크라테오’입니다. 크라테오는 체포하다, 억누르다, 방해하다, 수감하다, ~ 세력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시제는 수동태 미완료입니다. ‘눈이 예수님을 보는 일에 방해를 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눈이 억눌려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눈이 어떤 세력 안에 있어서 참된 것을 보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가끔 보잖아요. 눈이 뭔가 팔려 있습니다. 넋을 놓고 뭔가를 보고 있어요. 그래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여주면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세요.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입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제자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본다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봐도 믿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도 믿지 않습니다. 눈은 굉장히 부정확합니다. 보고도 틀립니다. 잘못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잘못 봅니다.
맥커크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맥커크 이펙트는 1976년 해리 맥커크가 과학 학술지인 <네이처>에 발표하며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감을 통해 입력된 정보가 인지과정 중에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발생하는 착각 현상의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라고 말합니다. 음 소거를 한 영상을 제 3 자에게 보여주며 동시에 “바”라는 소리를 들려줍니다. 이 소리가 그 사람에게 어떻게 들릴까요? 가로 듣게 될까요? 아니면 바로 듣게 될까요? 둘 다 아닙니다. ‘다’로 듣습니다. ‘카’라고 소리를 내고 음 소거를 한 다음에 이 영상을 보여주며 ‘파’소리를 내면 사람들은 ‘타’로 듣습니다. 사람은 귀로만 듣지 않습니다. 눈으로도 듣습니다. 경험으로 듣습니다. 우리 눈과 귀는 착각을 일으켜서 잘못 보고 잘못 들을 수 있습니다. 잘못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여행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 눈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도록 이 세상의 것들에 의해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눈이 세상 것에 체포되어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과 귀가 세상에 빠져 예수님 안 보이는 것입니다. 어둠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을 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은 무엇이 두 사람의 눈을 가리었는지 말씀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경의 정황을 고려해 무엇이 제자들의 눈을 가리었는지 몇 가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첫째, 슬픔이 눈을 가리었다고 생각합니다. 17절에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낙심했습니다. 슬픔과 낙심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터널 시야 증후군이란 것이 있습니다. 주변 시야가 다 사라지고 터널 속에서 밖을 보듯 저 멀리 있는 중심부만 희미하게 보이는 현상입니다. 망원경처럼 중심 시야(중심부)만 남고 주변 시야가 사라집니다. 제가 21살 때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트럭에 치었습니다. 1차선인데 도로 옆에 여유가 있는 넓은 1차선 도로입니다. 이쪽 가운데 쯤 치었는데 대각선으로 날아가서 반대쪽 끝에 떨어졌으니 7-8m 정도는 족히 날아간 것 같습니다. 날아가는데 주변이 캄캄하고 저 멀리 앞부분만 흑백으로 보였습니다. 그것도 짙은 흑백으로 아주 어둡게 보였습니다. 사람이 갑자기 슬픈 일을 만나면 아무것도 안 보일 수 있습니다. 시선이 좁아집니다. 눈이 터널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슬픔 가운데 오시는 분이십니다. 너무 큰 일을 당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세상이 캄캄할 때 슬픔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시편이 150편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의 내용은 하나 같이 슬픔과 고통 중에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는 고백입니다. 슬픔 중에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둘째, 선입견이 제자들의 눈을 가리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으셨고 무덤에 계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살아 계시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김성완 목사님의 <사무엘상> 설교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김성완 목사님은 오병이어장로교회를 담임하셨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한인장로교회를 담임하셨습니다. 목사님이 1981년 6월에 미국을 방문했다가 예고 없이 두 달 만에 갑자기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가족도 목사님이 한국에 돌아온 사실을 몰랐습니다. 집에 와서 아이 이름을 불렀더니 온 식구가 깜짝 놀라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목사님은 이어서 토요일 청년부 예배를 참석하기 위해 교회로 갔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교회로 걸어가다 보니까 청년회 총무와 부회장 청년이 앞에 가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반가워서 한 청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청년이 뒤를 뒤돌아보고는 본체만체 하더니 가던 길을 그냥 걸어갔습니다. 두 달 동안 미국에 갔다가 왔다고 해서 얼굴이 바뀐 것도 아닌데 얼굴을 몰라보다니 너무 이상했습니다. 다른 청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번에는 두 청년이 동시에 뒤돌아보았습니다. 조금 전 보다는 더 오래 쳐다봤지만 역시 고개를 다시 돌리고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목사님은 하도 이상해서 그 청년들의 이름을 번갈아가며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그때서야 두 청년이 깜짝 놀란 듯 뒤돌아서 목사님의 얼굴을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아이고 목사님!”이라고 했습니다. 두 청년은 목사님의 얼굴도 알고 목소리도 알고 있습니다. 뒤돌아보고 뚫어져라 바라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우리 교회 목사님은 미국에 계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리를 듣고, 얼굴을 봤지만 목사님을 몰라봤던 것입니다. 목사님을 보고, 목사님의 음성을 듣고도 목사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죽으셨고, 무덤에 계신다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걷고,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있고, 예수님의 음성을 귀로 듣고 있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편견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편견, 선입견이 눈을 가리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에 대한 수많은 편견들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4대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예수님이 결혼했다. 예수님이 승려였다. 이건 너무 한 것 같아요. 예수님을 중이라니요.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아요. 여러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예수님의 대한 온갖 편견을 버리시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수님을 묵상하십시오. 가룟 유다가 왜 가룟 유다가 된지 아십니까? 가룟 유다란 이름이 왜 영원히 저주스런 마스코트가 된지 아십니까? 편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혁명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혁명을 하지 않으시니까 예수님을 판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예수님께 실망한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 사생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편견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절대화하기 때문에 누가 무슨 말을 꼼짝도 안 합니다.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의견에 눈과 귀를 다 막아버립니다. 예수님에 대한 편견이란 두꺼운 벽으로 진리를 막지 마십시오. 편견을 내려놓고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십시오. 편견을 내려놓지 않으면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편견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내가 알고 있는 것, 눈으로 본 것, 경험한 것이 전부라고 믿지 마십시오. 틀릴 수 있습니다. 잘못 알 수 있습니다. 편견을 내려놓고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은 길에서 두 사람과 함께 걸으면서 성경 말씀을 풀어주셨습니다. 얼마나 함께 걸었을까요? 30분? 아니면 1시간? 예수님과 두 사람은 엠마오에 도착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께 함께 유하자고 요청합니다. 두 사람이 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차려놓자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과 같이, 전에 하시던 대로 떡을 가지시고 축복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주셨습니다. 이때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30-31절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왜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서 나누어주실 때 두 사람의 눈이 밝아졌을까요? 벳세다 광야에서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를 놓고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예수님과 항상 동행했다면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주시는 일을 여러 번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이 다시 그 일을 똑같이 반복하고 계신 것입니다. 길에서 말씀을 풀어주시고, 집에 들어와서,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주시던 주님을 느낀 것입니다. 그때 선입견과 불신앙과, 슬픔에 가리어졌던 눈이 떠졌습니다. 그리고 길에서 말씀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을 기억합니다. 32절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뜨겁다’는 말이 ‘불을 붙이다’는 뜻입니다. 길에서 말씀을 들을 때 불이 붙듯 마음이 크게 뜨거워졌습니다. 마음에 말씀의 불이 붙었습니다. 제자들은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안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을 마음으로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눈으로 보려고 하자 예수님은 사라지셨습니다. 31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눈으로 보려고 하니까 사라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닙니다. 마음으로 느끼면 눈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믿으면 느껴져요. 마음을 열면 느껴져요.
두 제자는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안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느낀 것입니다. 축복기도하시는 모습 속에서 예수님을 느낀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이 두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했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기도와 말씀이 두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기도와 말씀이 두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보도록 한 것입니다. 두 제자는 이 세상 엠마오에서 영적 엠마오를 경험한 것입니다. 두 제자와 같이 말씀의 온천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온천은 우리 몸을 씻지만 말씀은 우리 영혼을 씻습니다. 온천은 우리 몸을 뜨겁게 하지만 말씀은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말씀은 우리 속을 뜨겁게 하는 주님의 온천입니다. 말씀은 우리 영혼을 뜨겁게 하는 영혼의 온천물입니다. 교회는 영적 엠마오, 영적 온천탕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온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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