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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5대 제사 중 두 번째 제사는 소제(素祭)입니다. 소제는 고운 곡식 가루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1절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소제의 ‘소’(素) 자는 ‘희다’, ‘소박하다’라는 뜻입니다. 소제는 “곡식의 흰 가루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영어 성경(NIV, NASB)은 소제를 곡물 제사(grain offering)라고 번역했습니다. 소제는 내가 땀을 흘려서 가꾼 곡물의 낟알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음식 제사(meal offering)라고 번역한 성경도 있는데 먹는 음식을 내가 먹지 않고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로 소제의 정신을 잘 살린 명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제는 1년 동안 내가 땀을 흘려 농사를 지은 귀중한 곡식을 내가 모두 취하지 않고 그 중에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곡물의 제사 또는 음식의 제사입니다
제사에는 반드시 동물의 피가 있어야 합니다. 피가 없으면 제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소제는 피가 없는 제사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독으로 드리지 않습니다. 반드시 피 있는 제사(번제 혹은 화목제)에 덧붙여 드렸습니다. 고마운 사람에게 선물을 합니다. 선물을 하면서 카드를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땡큐 카드(감사편지)라고 합니다. 카드에 감사의 마음을 간단하게 적습니다. 소제는 동물 제사 위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제는 번제물과 함께 드려지는 땡큐 카드라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선물보다 감사편지가 감동을 줍니다. 소제를 기념물이라고 했습니다. 소제는 소박한 제사지만 하나님의 기억에 남는 제사입니다. 우리가 고마운 마음으로 밥을 삽니다. 밥을 사면서 특별한 경우에 간단한 선물을 하기도 합니다. 소제는 이와 같이 선물 위에 또 다른 소박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제는 피가 없는 제사로 피가 있는 제사 위에 같이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소제를 히브리어로 민하라고 하는데 민하는 ‘선물’, ‘헌물’, ‘예물’이라는 뜻입니다. 에서가 자신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야곱은 형을 피해 외가로 도망갑니다. 야곱이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군사 400명을 대동하고 야곱을 맞으러 오고 있습니다. 너무 두려운 야곱은 형에게 선물을 보냅니다. 창세기 32: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여기 예물이 히브리어로 민하입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이 모압에게 억압을 당했습니다. 사사 에훗이 모압 왕 에글론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공물을 바칩니다. 사사기 3: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통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여기 공물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민하입니다. 민하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민하는 신하가 왕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선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소제는 의무 제사가 아닙니다. 안 드려도 되는 제사입니다. 소제는 자원하는 제사입니다.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드리는 봉헌물입니다. 소제의 정신은 감사,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2절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라고 했습니다. 소제는 곡식 가루 한 주먹으로 드려서 보잘 것 없이 보이지만 드리는 사람의 심령 때문에 하나님께 기념물이 되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기억하십니다. 이것이 감사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소제에는 몇 가지 형태가 있는데 본문에서는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요리 하지 않은 소제이고, 두 번째는 요리한 소제이고, 세 번째는 첫 이삭의 소제입니다.
먼저 요리하지 않은 소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절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소제는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놓는 제사입니다.
고운 가루는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하나는 한 없이 자비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은 고운 가루이십니다. 예수님은 거칠거나 뾰족하거나 딱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아주 고운 가루이십니다. 밀가루를 만져보셨습니까? 정말 부드럽습니다. 손에 걸리는 알갱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갈아져서 조그만 알갱이도 없는 아주 부드러운 밀가루 같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아주 고운 밀가루처럼 우리를 대하십니다. 이런 한없는 자비로움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고운 밀가루 같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뺨을 때렸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고 온갖 조롱의 다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저주하거나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만약 예수님께서 가시같이 뾰족한 마음으로 저들을 대하셨다면 저들은 심판을 받아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끌려 다니실 때 베드로가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너도 예수당이라고 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참 비겁했습니다. 세 번째 부인할 때는 저주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 부인할 때 닭이 울었고, 바로 그때 베드로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눈은 어떤 눈이었을까요? 째려보는 눈이었을까요? 원망의 눈이었을까요? 저는 예수님께서 밀가루처럼 고운 눈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셨다고 믿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돌멩이 같은 마음으로 대하셨다면 베드로는 자신의 저주처럼 죽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여섯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바다로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과거의 삶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때도 제자들을 고운가루처럼 대하셨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해 허무해 하는 제자들을 향해 “얘들아!”라고 하셨습니다. “얘들아” 이 말은 “나의 아기들아!” “내 귀공자들아!”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떠나 과거의 삶으로 돌아간 제자들을 “아가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엄마가 자녀를 부를 때 아가야라는 말보다 더 깊은 사랑의 표현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해변에서 손수 떡과 생선을 구우셔서 지치고 배고픈 제자들을 직접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고운 가루셨습니다. 고운 가루처럼 사람들을 대하셨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얼마나 자주 과거의 삶으로 돌아갑니까? 회개하고 다시 돌아가고, 회개하고 또 다시 돌아갑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듯이 예배하고 다시 과거의 죄악된 삶으로 돌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만약 우리가 과거의 삶으로 돌아갈 때마다 예수님께서 가시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찌르신다면 우리는 가시에 수없이 찔려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됐든지 아니면 가시에 너무 많이 찔려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곱게 갈린 밀가루처럼 우리를 부드럽게 대하십니다. 예수님은 고운 가루십니다. 예수님은 고운 가루처럼 한 없이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이 밀가루 같이 고운 마음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운 가루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운 가루로 대하신다는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소제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고운 가루로 사셨습니다.
두 번째 고운 가루는 완전히 부서지고, 무너지고, 깨어져서 순결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성품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고운 가루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처럼 고운 가루가 되십시오. 가시 같은 삶을 살지 마십시오. 예수님처럼 소제의 삶을 사십시오.
고운 가루가 히브리어로 쏠레트입니다. 이 말은 ‘흔들다’, ‘쏟아내다’는 뜻의 쏼라에서 온 말입니다. 어렸을 때 명절이 가까이 오면 떡을 하기 위해 어머니와 맷돌로 쌀을 간 적이 있습니다. 저는 맷돌을 돌리고 어머니는 맷돌 구멍에 조그만 그릇으로 쌀을 퍼서 부으셨습니다. 한 번만 갈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갈았습니다. 간 쌀가루를 다시 맷돌에 넣고 또 가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 아주 고운 쌀가루가 됩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간 쌀가루를 고운 채에 넣고 좌우로 흔듭니다. 완전히 갈리지 않은 알갱이는 채에 그대로 남지만 잘 갈린 고운 쌀가루는 밑으로 떨어집니다. 갈고 갈고 또 갈고 다시 흔드는 과정을 통해 아주 고운 쌀가루가 됩니다. 저는 어머님이 채로 거른 고운 쌀가루를 손으로 만지작만지작 했습니다. 부드러운 감촉이 좋아서 양손으로 비벼보기도 했습니다. 그 고운 가루로 떡을 해먹었습니다. 채에 빠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큰 알갱이들은 다시 맷돌에 넣고 더 갈아서 고운 가루로 만들었습니다. 곱게 간 쌀가루만 떡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곱게 갈아진 가루만이 소제로 사용되었습니다.
세상에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찬바람이 붑니다. 세상이 계속 나를 흔들고 춥고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비바람, 눈보라를 다 막아주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아프고, 병들고, 슬프고, 괴롭습니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바람과 눈보라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모난 성품을 갈아서 고운 가루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에서 욥을 시험하시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더욱 고운 가루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마귀가 우리 인생을 흔드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이유는 나를 순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욥기 23:8-10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이 고난 중에 얼마나 답답했으면 하나님이 내 오른쪽에 안계시고 내 왼쪽에도 안계시고 내 앞에도, 뒤에도 안 계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환란을 당해 너무 힘들 때 하나님은 그때 어디 계셨습니까? 왜 그때 모른 척하셨습니까? 하나님! 그때 어디 무얼하셨습니까?”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하나님이 안 계셨던 것이 아니라 나를 순금처럼 연단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속아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욥을 고운 가루로 만들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괴테는 “성숙이란 점점 더 부드러워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상선약수라는 말을 했습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처럼 부드러운 것이 있을까요? 그런데 물은 다투지 않습니다. 막으면 다른 길로 갑니다. 부드럽지만 바위를 뚫습니다.
성도는 밀가루처럼 고운 가루로 완전히 갈려 순전한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정욕이 부셔지고, 자아가 무너지고, 불신앙이 깨지고, 허물과 죄가 깨끗이 씻겨야 합니다. 더 부셔지고, 더 무너지고, 떠 깨지고, 더 깨끗하게 씻겨야 합니다. 고운 가루, 순결한 가루, 주님 앞에 하얀 가루가 되십시오. 가시 같이 삐쭉삐쭉한 마음, 돌멩이 같이 완고한 성품, 모지고 딱딱한 인격을 갈고 또 갈아서 하얗고 순결한 가루가 되십시오. 예레미야 23:2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이성에 갈아 넣어서 난도질 합니다. 말씀을 이성으로 짓밟습니다. 우리는 반대로 불같은 말씀, 방망이 같은 말씀에 내 인격을 갈아 넣어야 합니다. 우리 인격과 신앙이 밀가루처럼 고운 가루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제의 삶이고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름은 올리브기름입니다. 기름을 부으면 고운 가루가 불에 더 활활 탑니다. 여기서 기름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학자들은 한결같이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고운 가루가 될 때 성령께서 충만하게 부어집니다. 그래서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우리 교회가 고운 가루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불이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2장에 기름이란 말이 9번 나옵니다. 3장에는 기름이란 말이 13번 나오고, 4장에는 14번 나옵니다. 하지만 3장, 4장의 기름은 모두 짐승의 기름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올리브기름이 가장 많이 나오는 장이 레위기 2장입니다. 소제에는 기름, 즉 성령이 특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곡식 가루 한 주먹 밖에 안 되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충만한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순결하고 고운 가루가 될 때 우리 위에 성령께서 아주 충만하게 부어집니다. 여러분! 뾰족하고 딱딱하고 완고한 채로 있지 마십니다. 고운 가루가 되십시오. 하나님은 고운 가루의 삶을 원하십니다.
기름 위에 유향을 붓습니다. 유향은 소제가 탈 때 향기를 나게 합니다. 유향은 두 곳에서만 자생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중동의 오만이고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 소말리아입니다. 유향 나무를 절개하면 진액이 나오는데 이 진액을 응고해서 만든 향이 유향입니다. 역사가 플리니에 의하면 이 유향이 나오는 지역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했다고 합니다. 최근에 발견되는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플리니의 증언이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유향은 아주 귀하고 값비싼 향료였습니다. 소제에 유향을 붓는 이유는 향기 때문입니다. 유향이 의미하는 것은 기도와 삶입니다. 기도와 삶으로 드리는 예배는 유향 같이 아주 귀한 향기입니다. 우리가 고운 가루가 되어 하나님 앞에 산제사로 드려질 때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의 귀한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가서 2:2에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자들은 성도를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하나님은 내 사람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하 같다고 하십니다. 가시나무 가운데서 백합이 있으면 꽃이 피면서 가시에 찔립니다. 바람이 불어 꽃이 흔들리면 더 많이 찔립니다. 백합화는 가시에 찔릴수록 향이 더 많이 나고, 바람이 불면 향기는 더 멀리 갑니다. 성도는 바람이 불어 흔들리고, 가시에 찔릴수록 더 고운 가루가 되고 더 향기를 내는 것입니다. 가짜 신앙은 가시에 찔리면 원망 불평하지만 참 신앙은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소제의 삶은 향기로운 삶입니다.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요리한 소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요리한 소제는 세 가지입니다. 먼저 화덕에 구운 것입니다. 4절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화덕은 점토나 진흙으로 만든 커다란 가마(솥)입니다. 장작불을 지펴 흙벽을 달구면 흙에서 나오는 열이 음식을 굽듯이 익힙니다. 화덕을 영어 성경은 오븐(ove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화덕에 구운 무교병의 소제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철판에 부친 것입니다. 5-6절 “철판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을지니 이는 소제니라” 식당 메뉴 중에 철판 볶음밥, 철판구이가 있습니다. 그 철판을 생각하면 됩니다. 프라이팬과는 다르지만 프라이팬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철판에 전처럼 여러 조각으로 부친 소제가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냄비에 튀긴 것입니다. 7절 “네가 냄비의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지니라” 냄비에 기름을 많이 넣고 기름으로 튀긴 음식입니다. 곡식 가루를 기름으로 반죽하고, 다시 기름에 튀긴 소제가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화덕에 굽고, 철판에 부치고, 냄비에 튀긴 소제를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불가마에 구워지고, 고난의 철판에 지져지고, 고난의 냄비에서 튀겨지는 소제의 삶을 사셨다고 했습니다. 덜 익은 소제가 아니라 완전히 익은 소제가 되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기름을 섞고, 기름을 바르고, 기름에 튀기라고 했습니다. 요리된 모든 소제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름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중에서도 성령의 삶을 사셨습니다. 고난이 클수록 성령의 역사, 은혜가 큽니다. 호세아 7:8에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고 했습니다. 뒤집지 않으면 한쪽은 익고 한쪽은 익지 않습니다.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는 말은 한쪽만 익은 설익은 전병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잘 익은 전병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설익은 전병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익지 않은 소제의 삶을 살았습니다. 설익은 소제의 삶이 아니라 잘 익은 소제의 삶을 삽시다.
마지막으로 첫 이삭의 소제가 있습니다. 14절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네 소제를 삼되” ‘첫’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로쉬입니다. 로쉬는 머리, 으뜸, 꼭대기라는 뜻입니다. 첫 이삭은 이삭 중에서 머리가 되는 가장 좋은 것입니다. 선별한 것입니다. 고르고 고른 것입니다. 첫 이삭으로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양식에 감사하고 자신이 생산한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의 우선적인 소유권을 인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생은 소제의 인생이셨습니다. 소제의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첫 이삭이 되어야 합니다. 덜 익은 이삭이 되면 안 됩니다. 쭉정이가 되면 안 됩니다. 알맹이가 실한 이삭이 되어야 합니다. 첫 이삭의 소제는 구운 다음에 빻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깨뜨리셨습니다. 내 자아를 깨뜨려 소제의 삶을 삽시다.
11-13절에는 소제의 특별 조항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소제에 누룩과 꿀을 넣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을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누룩을 넣어야 빵이 맛있습니다. 누룩을 넣지 않으면 빵이 맛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룩은 죽음 음식의 곰팡이에서 채취합니다. 그래서 누룩은 죄악을 상징합니다. 꿀은 단 것입니다. 소제의 삶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것, 맛있게 생각하는 것을 끊는 삶입니다. 게임, 술, 유튜브, 핸드폰 등 중독성 있는 것은 끊으십시오. 중독된 채로 있지 마십시오. 지금 인생이 망가지고 있습니다. 죄악의 누룩을 끊으시오. 죄악의 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십시오. 소금은 소독하고 보존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계약을 맺을 때 계약의 당사자들은 짠 소금을 먹었습니다. 계약이 보존된다는 의미입니다. 소제의 소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이 영원하다는 상징입니다. 소제는 하나님께 영원히 기억되는 기념제사입니다.
2절에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기념물이라는 말은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소제는 곡식 가루 한 움큼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곡식 가루 한 움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소나 양의 제사에 비해 너무 하찮은 제사입니다. 그래서 짐승 제사 위에 덧붙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영원히 기억하시는 기념 제사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성경에 우리를 위해 만들어놓으신 길을 따라 가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의 소제의 인생이 영원히 기억되는 것처럼 우리가 소제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이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하나님께 지극히 거룩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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