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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물건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백화점에서 상품을 그냥 아무렇게나 진열해놓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들어와서 매장을 돌 때 어느 각도에서 상품을 보게 되는지 계산을 하고 놓는 것입니다. 얼짱 각도라고 하죠. 사진이 잘 나오는 각도가 있는 것처럼 상품을 봤을 때 가장 좋아 보이는 각도가 있습니다. 판매자는 그 각도를 생각하고 진열해놓습니다. 사람들이 매장을 왼쪽으로 많이 도는 지 오른쪽으로 많이 도는 지를 계산하고 상품을 놓습니다. 가까운 대형 마트에 가면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정면과 오른쪽에 물건들을 진열해놓았습니다. 내려올 때 잘 보이도록 진열해놓은 것입니다. 물건의 위치를 정기적으로 계속 바꾸어놓습니다. 물건을 찾으러 다니면서 다른 물건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카지노는 슬롯머신이 있는 바닥에 빨간색 조명을 사용합니다. 흥분시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금색을 함께 사용합니다. 금색은 심리적으로 성공한다는 확신을 주게 합니다. 색깔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미국 유럽 어디를 가도 카지노는 똑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세상이 보여주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보이게 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마귀가 보여주려고 하는 게 있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에게 속지 않습니다. 롯은 정욕적인 눈으로 보고 소돔과 고모라로 내려갔다가 고통을 당했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눈으로 보고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합니다. 10명의 정탐꾼은 인간적인 눈으로 가나안을 바라보았고, 여호수아 갈렙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가나안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려고 하십시오. 그래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영적 눈으로 보려고 하십시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보고, 내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려고 했던 사람이 요셉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미워해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애굽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형제가 원수 보다 더 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을 22년 만에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45:4-5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았는데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을 애굽에 보내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봤고, 형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과 세상을 봤습니다. 2026년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려고 노력해봅시다. 세상적인 각도, 마귀적인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려고 해봅시다.
창세기는 50장까지 있는데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장에서 11장까지는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고, 12장부터 50장까지는 히브리 족장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을 4대 족장이라고 합니다. 창세기는 네 명의 족장 중에서 요셉을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37장부터 50장까지는 요셉의 스토리입니다. 30장에는 요셉의 출생스토리가 나옵니다. 창세기에는 요셉의 스토리가 가장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요셉 스토리가 가장 많다는 것은 요셉이 네 명의 족장 중에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셨고 보존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생명을 보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교회를 형성하고 주님의 교회를 보존하는 일을 하십시오. 사람을 살리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이 일을 주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36장은 야곱의 형 에서의 족보입니다. 성경기자는 37장을 야곱의 족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요셉 이야기를 바로 이어서 합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니 요셉을 이야기 합니다. 1-2절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 성경 기자가 야곱의 족보라는 말을 하더니 요셉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이것은 12명의 아들 중에서 요셉이 야곱을 잇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을 이삭이 잇고, 이삭을 야곱이 잇고, 야곱을 요셉이 잇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신앙을 요셉이 잇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37장은 야곱의 12 아들 중에 왜 하나님이 요셉을 선택하셨는지를 설명하는 장입니다. 많은 아들 중에 왜 하필 요셉일까요? 요셉이 선대의 신앙을 잇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잇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을 잇는 삶을 사십시오. 이것이 구약 성경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의 내용입니다. 구약 성경 맨 마지막 말씀이 이것입니다. 말라기 4: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여기 아버지는 믿음의 조상들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화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절됐던 신앙이 이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누가는 의인의 슬기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믿음의 조상들의 신앙을 잇는 것이 의인의 슬기입니다. 의인의 슬기를 가지십시오. 구약 성경 마지막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신약 성경은 족보로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왜 족보로 시작할까요?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어져 내려왔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도 족보가 있습니다. 그 족보는 요셉에게서 시작해서 하나님까지 올라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누구에게로 이어졌는지 추적해 올라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잇는 삶을 사십시오. 신앙의 선조들의 뜻을 잇는 삶을 사십시오.
열 두 명 중에 왜 하필 요셉일까요? 요셉은 순전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2절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이 말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둘로 갈라집니다. 첫 번째 견해는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그대로 이르는 고자질쟁이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셉의 행위가 고자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자질은 남의 허물이나 비밀을 몰래 이르거나 헐뜯는 일입니다. 고자질은 상대를 곤경에 빠뜨립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 형들의 잘못을 몰래 일러바친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행위를 고자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요셉이 고자질쟁이였다면 하나님은 고자질이나 하는 비열한 사람은 선택하신 것이 됩니다. 성경 전체적 맥락을 볼 때 요셉이 고자질쟁이였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두 번째 견해는 요셉은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17살이었습니다.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한다면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충분히 아는 나이입니다. 그럼에도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했다는 것은 그의 성품 자체가 정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보다 분명하게 들어납니다.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요셉이 그들(형들)의 나쁜 소식(과실)을 아버지에게 가져갔다”입니다. 여기 잘못이라는 말은 상태적으로, 성품적으로, 또 영적으로 아주 악하다는 의미입니다. 형들은 아주 악했습니다. 덮어줄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덮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잘못(문제)을 아버지께 가져갔다는 말은 형들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안의 악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11째입니다. 제일 큰 형인 르우벤은 40대 초반 정도 됐을 것입니다. 형들이 거의 아버지뻘, 삼촌뻘입니다. 형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고, 옳든지 옳지 않든 간에 형들의 행실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다수에 휩쓸립니다. 그런데 어렸지만 요셉은 형들의 악행에 휘말리거나 동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형들의 악행, 다수의 요청을 거절하고 가정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문제를 아버지께 가져갑니다. 왜 하나님은 12명의 아들 중에서 11번째인 요셉을 이스라엘 4대 족장으로 세우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12 명의 아들들 중에 요셉을 사용하셨을까요? 요셉이 다수의 악행을 거절하고 자신의 순전함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2026년을 사시다가 도대체 풀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을 하나님께로 가져가십시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광야를 지나는 40년 동안 백성들을 재판을 했습니다. 장인 이드로가 보니 너무 바빠서 사위인 모세가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문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을 세웠습니다. 백성들은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먼저 십부장에게 가져갔습니다. 십부장이 풀지 못하면, 오십부장이 풀었습니다. 백부장이 풀지 못하면 천부장이 풀었고, 천부장이 풀지 못하면 모세가 풀었습니다. 모세가 풀지 못하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가정, 자녀, 직장에 도무지 우리가 풀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걸 하나님께 가져가십시오. 당시는 씨족 사회입니다. 가족이 사회입니다. 요셉이 사회의 문제를 아버지께 가져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풀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를 누가 하나님께 가져가야겠습니까? 도지사, 시장이 가져가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땅에서 벌어지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우리가 하나님께 가져갑시다. 이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요셉은 아주 복잡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삼촌에게 속아서 칠일 간격으로 결혼을 두 번했습니다. 두 아내는 한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자매가 남편 야곱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야곱은 두 아내의 여종들을 또 아내로 맞이하게 됐습니다. 아내가 넷이 됐습니다. 네 명의 아내가 두 파로 나누어져 싸웠습니다. 네 명의 아내에게서 12명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중에 요셉은 열 한 번째입니다. 어머니 라헬은 외할아버지의 우상을 훔쳐 우상을 숭배를 한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엄마 라헬은 12째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요셉에게는 엄마가 없었습니다. 큰 형 르우벤은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인 빌하와 통간을 했습니다. 빌하는 어머니의 여종이었습니다. 집안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가장이었던 야곱은 집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어느 날 누나 디나가 세겜에 나갔다 겁탈을 당합니다. 창세기 34:2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끌어들였고 욕을 보였습니다. 겁탈이라는 게 얼마나 비인격적인 폭행입니까? 여자가 받을 충격과 상처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 야곱은 잠잠했습니다. 34:5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잠잠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하라쉬입니다. 하라쉬는 ‘귀머거리가 되다’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처럼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자식이 몹쓸 일을 당했는데 귀머거리가 됐습니다. 무조건 참았습니다. 자식이 그랬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잠잠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의 행동을 본 디나는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까요? 야곱은 집에서 일어나는 일에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오빠들이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34:7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근심하다는 말이 마음에 새겼다,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마음에 앙금이 남았다는 의미입니다. 오빠들은 디나의 일을 마음에 새겼고, 그들의 마음에 없어지지 않는 앙금이 됐습니다. 아버지 마음에 씻어지지 않는 앙금이 남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노하다는 말은 ‘빨갛게 달아오르다’, ‘맹렬하다’, ‘타오르다’는 뜻입니다. 오빠들이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집안이 거꾸로 됐습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세겜 족의 남자들을 칼로 다 죽이고 노략을 했습니다. 그때 야곱이 아들들에게 화를 냅니다. 34: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여기 보면 야곱이 나라는 말을 7번 사용합니다. 내게, 나로 하여금, 나는, 나를. 자식이 몹쓸 일을 당했는데 아버지가 자기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딸 걱정은 없고, 자기 걱정만 하고 있습니다. 딸의 아픔 앞에서 자기 안전, 자기 손해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겜 족속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아들들에게 화를 내고 있습니다.
맏아들 르우벤이 자기의 세 번째 부인 빌하와 통간했습니다. 큰 아들이 집안에서 해괴망측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 말을 해야죠. 혼을 내야죠. “이런 못된 놈.” 그런데 야곱은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내버려두었습니다. 아버지의 이 태도가 뭘까요? 빌하는 요셉의 어머니의 종이었습니다. 틀림없이 요셉이 태어났을 때 빌하의 손길이 있었을 것입니다. 빌하는 요셉에게 유모와 같은 존재입니다. 야곱이 하란에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돌아와서 보니 어머니 유모만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 유모가 죽습니다. 유모가 죽었을 때 얼마나 비통했는지 야곱이 통곡을 합니다. 야곱은 요셉의 아픔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집 안 문제에 손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얼마나 상처였을까요? 상처의 주범이 아버지였습니다.
요셉은 이런 환경에서, 이런 아버지 아래서 자랐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은 상처를 입고 삐뚤어지기 쉽습니다. 실제로 형제들이 삐뚤어졌습니다. 4절에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아버지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요셉이 다른 형제들의 미움을 받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가정의 문제에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른 신앙의 소유자가 되었을까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 환경이 아무리 나쁘고, 세상이 흉흉해도 우리는 바른 신앙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 탓하지 마십시오. 환경 탓하지 마십시오. 잘난 부모도 없고, 못난 부모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진짜 부모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세상이 참 어지럽습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때입니다. 이런 때에 요셉과 같은 바른 신앙을 갖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족장들의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위한 기도와 야곱의 얍복강 나루의 기도는 유명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37장부터 50장을 아무리 살펴도 요셉이 기도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타나심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12번, 야곱에게 9번, 이삭에게 3번이나 꿈으로, 환상으로, 음성으로 이들을 찾아 주셨습니다. 그러셨던 하나님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요셉에게는 평생 그 어떤 말씀도, 환상도, 꿈도, 음성도 들려주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요셉 이야기가 구약의 그 어떤 인물 이야기와도 다른 내용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삭에게 계승되고, 이삭의 언약이 야곱에게 계승됐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에는 언약이 계승됐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요셉의 이야기에는 신앙적인 표현이 거의 전무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 기자가 요셉 이야기를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무신론자나 타종교인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만 보면 요셉은 하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하나님께서 위기 때마다 꿈, 환상,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경고하고, 건져 주고, 축복을 약속했음에도 많은 실수와 오점을 많이 남겼습니다. 반면에 한 번도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은커녕 음성 한 번 들려주지 않았음에도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과오나 흠을 남기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애굽 세상에서 요셉은 바른 신앙을 소유했습니다. 요셉을 보면 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려지는 게 없고, 손에 잡히는 게 없을 때 어떻게 확신을 갖고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크리스천들에게 대안입니다.
요셉은 환상을 보거나 하나님 음성을 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을 병을 고쳐 주셨다거나 위기에서 구해주셨다는 간증도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요셉은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 그러니까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같은 이집트 고위 관리의 꿈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전혀 쫄지 않습니다. 그들의 꿈을 풀어주면서 전혀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말을 돌리거나 피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떡맡은 관원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아주 섬뜩한 말입니다. 상대방에게 욕을 엄청 먹을 말입니다. 만약 이 말대로 되지 않으면 요셉은 죽은 목숨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말을 하면서 조금도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클라이막스는 41장입니다. 41장에서 요셉은 바로 앞에 섭니다.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간 바로 목이 날아가는 자리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 조금도 쫄지 않습니다. 조금도 미동하지 않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요셉이 드러내는 하나님에 관한 확신은 눈이 부십니다. 요셉의 바른 믿음이 태산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고 환상을 보지 못하기로는 우리와 요셉이 다를 바 없는데 우리는 왜 요셉처럼 바위처럼 당당한 확신에 이르지 못하는 것일까요? 요셉은 평생 하나님의 목소리,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 한 번 보지 못하고 어떻게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야곱은 요셉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십시오. 요셉이 태어난 곳은 하란입니다. 요셉이 태어나자 야곱은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창세기 30:25-26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야곱은 요셉이 태어났을 때 삼촌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내 고향, 나의 땅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태어났을 때 야곱은 고향 생각을 했습니다. 요셉이 태어났을 때 야곱은 인생을 새롭게 살고 싶어졌습니다. 요셉은 야곱에게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요셉은 야곱에게 약속의 땅이 생각나게 하는 아들이었습니다. 하란은 야곱에게 타향이었습니다. 삼촌 집에서 얹혀서 살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야곱에게 인생을 세우고 싶게 하는 아들이었습니다(30:30).
제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첫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저는 새로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보면서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잘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가 저에게 새로운 삶의 욕구를 주었습니다. 요셉은 야곱에게 인생을 새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 아들입니다. 요셉은 새로운 의미를 주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혔습니다. 3절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채색 옷은 손바닥과 발바닥까지 가릴 정도로 긴 옷입니다. 긴 옷을 입고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일이 다른 아들들을 분노하게 했고,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사게 됐습니다.
부모는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채색 옷을 입힙니다. 명품 가방에 명품 신발, 명품 옷을 사줍니다. 아낌없이 줍니다. 다 해줍니다. 그러다가 자녀를 망칩니다. 진짜 사랑한다면 채색 옷을 입히면 안 됩니다. 사랑한다면 광야로 내보내야 합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혔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형제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미움받는 아들이 되게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들로 만드셨습니다. 야곱의 형제들이 기근 때문에 애굽에 내려왔을 때 바로의 신하들이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전에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사람들이 싫어했는데 애굽에서는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고난이 요셉을 성숙하게 한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채색옷을 입히지 마시고 광야로 보내십시오. 그것은 자녀를 살리는 길이고, 잘 되게 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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