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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제가 초등학교 때 <뿌리>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아주 인상 깊은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백인 주인이 흑인 노예의 두 손을 묶어서 매달아 놓고 채찍으로 때리면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흑인 노예는 매를 맞으면서도 “쿤타 킨테”라고 대답합니다. 주인이 지어준 미국식 이름을 거부하고 자신의 원래 이름인 쿤타킨테라고 대답합니다. 쿤타, 쿤타킨테...
쿤타 킨테는 1750년 서아프리카 감비아의 작은 마을 주프레에서 태어납니다. 쿤타는 자신의 뿌리가 되는 부족과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쿤타는 숲에서 나무를 베던 중 백인 노예 사냥꾼들에게 붙잡혀 쇠사슬에 묶인 채 미국 버지니아로 끌려갑니다. 주인이 토비라는 이름을 지어주지만 쿤타는 자신의 원래 이름을 고집하며 계속 탈출을 시도합니다. 계속 실패하다가 네 번째 잡혀왔을 때는 발목이 잘립니다. 쿤타는 탈출을 포기하고 노예의 삶을 받아들입니다. 이 사건으로 쿤타는 깊은 상처를 받지만, 자유에 대한 갈망은 더욱 강해집니다. 그는 농장의 다른 노예들에게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의 뿌리가 되는 아프리카 문화와 언어를 기억하도록 격려합니다.
쿤타는 월러 농장의 요리사인 벨이라는 여성 노예와 결혼하게 됩니다. 벨은 쿤타에게 헌신적인 아내이자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줍니다. 그들은 함께 힘든 노예 생활을 견디며 딸 키지를 낳습니다. 쿤타는 키지에게 자신의 아프리카 이름과 문화를 가르치며 딸이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주인은 키지를 윌러라는 백인에게 팝니다. 쿤타는 또 한 번의 상처를 받습니다. 쿤타의 딸 키지는 강압적인 관계에서 주인 윌러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이 사건은 쿤타에게 큰 슬픔과 분노를 안겨줍니다. 쿤타킨테의 7대 손인 뿌리의 작가 알렉스 헤일리는 어린 시절에 외할머니 버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언어학자들에게 들려주어 그 언어가 아프리카 감비아의 어느 지방이라는 것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주프레라는 마을을 찾아가 그 마을에서 살던 쿤타킨테라는 소년이 어느 날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200년 전의 일입니다. 알렉스 헤일리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흑인의 뿌리는 학대받는 비참한 노예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자유인이며 용감한 용사들이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뿌리는 작가의 외가 쪽 가족사를 바탕으로 쓴 역사 소설입니다. 성경은 뿌리를 찾는 책입니다. 에스라서는 뿌리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원래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제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회복, 돌아감입니다. 페르시아에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들이 동기가 되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뿌리인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는 책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뿌리는 이 바벨론의 어떤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 바벨론의 노예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물질과 권세와 사람의 노예, 마귀의 노예가 아니라 영적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의 자유인입니다.
에스라 2장은 유다가 망한 후에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에 최초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갔다는 말은 각자 자기의 뿌리로 돌아갔다는 의미입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뿌리를 찾아서 돌아가는 회복운동입니다. 에스라는 우리의 뿌리는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뿌리는 에덴이라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1장에서 금, 은이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다른 것들은 물품이라고만 하고 금은 계속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4절 “…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 6절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 9절 “…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 10절 “… 금 대접이 … 은 대접 …”, 11절 “금, 은그릇이 …” 에덴동산에 네 개의 강이 있었는데 첫째 강에 순금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에스라가 성경을 기록하면서 금과 은을 반복해서 기록한 이유는 우리의 뿌리는 바벨론의 노예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자유민이라는 것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뿌리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던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저주받은 노예가 아니라 복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뿌리로 돌아가려는 책입니다. 성경은 뿌리를 찾는 책입니다.
2절에 포로 귀환을 인솔했던 지도자 11명이 나옵니다.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여호수아)입니다. 1장에 총독 세스바살이 나옵니다. 세스바살은 스룹바벨의 숙부라는 주장도 있고,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 사안이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스룹바벨은 바벨론의 출생 또는 바벨론의 씨라는 뜻입니다. 스룹바벨이라는 이름에는 ‘바벨론의 슬픔’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이 이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빌론 유배 생활의 깊은 애수와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불에 그슬린 나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스가랴 3장에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고, 마귀는 여호수아에게 손가락질하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 편을 드십니다. 하나님 우리 편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사에게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라고 명령하십니다. 불에 그슬린 나무는 소망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불에 탄 나무를 땅에 꽂아 보세요. 뿌리가 나지 않습니다. 불에 탄 나무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타버린 나무에서 순(싹)이 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벨론 같은 세상에서 불 시험으로 불에 새까맣게 탄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우리에게서 새 싹이 날 것입니다. 여기서 순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뿐입니다.
그 다음에 언급된 그룹은 믿음의 가문들입니다. 3절부터 20절까지 18개의 믿음의 가문들이 나옵니다. “누구 자손이 몇 명이요” 먼저 조상을 언급하고, 그 후손이 몇 명임을 적고 있습니다. 3절 “바로스 자손이 이천백칠십이 명이요”, 4절 “스바댜 자손이 삼백칠십이 명이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바벨론의 한 지역에서 수십 년 동안 함께 모여 살다가 고레스 칙령이 떨어지자 함께 돌아온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흩어지지 않고 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믿음의 가문을 세워갔는지 정말 놀랍습니다. 11명의 지도자들이 나온 다음에 가장 먼저 언급되는 그룹은 제사장이나 레위인 그룹이 아니라 바벨론에서 믿음의 가문을 이루고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믿음의 가문이 되기를 기도하고 비전하십시오. 나 혼자를 넘어서 내 가족 전체가 예수님을 믿고, 가정을 넘어 3대, 4대, 5대 후손들이 믿음의 사람으로 서는 믿음의 가문을 이루도록 기도하십시오.
그 다음에 언급된 그룹은 지역입니다. 21절부터 35절까지 21개 지역이 나옵니다. “어느 지역 사람이 몇 명이요”라고 했습니다. 21절 “베들레헴 사람이 백이십삼 명이요”, 22절 “느도바 사람이 오십육 명이요” 고향 혹은 같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바벨론에 가서도 모여 산 것입니다. 눈에 띄는 것은 31절에 엘람 사람과 32절의 하림 사람입니다. 두 지역 모두 페르시아 지역 같습니다. 유다 각 지역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흩어지지 않고 한곳에 모여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다가 고레스 칙령이 떨어지자 같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 지역에서 오셔서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거 굉장히 중요합니다. 귀환자 명단을 살펴보면 혼자 있다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족이든지, 지역이든지 모여서 함께 했던 사람들이 올라왔습니다. 코로나가 끝났지만 아직도 온라인으로 혼자 예배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을 비판하고 싶지 않지만 비상시에 통신으로 함께 예배와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제사장 그룹입니다. 36절에서 39절에 제사장 가문이 넷 나옵니다. 다윗이 제사장 그룹을 24개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네 개만 나왔습니다. 나머지 20개 반열은 바벨론에서 생활하는 중에 세상에 흡수된 것입니다. 그 다음이 레위인입니다. 제사장은 4289명이고, 레위인이 341명입니다. 레위인이 더 많아야 하는데 훨씬 적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세상에서 살다가 세상에 흡수되어 버린 것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살아도 세상에 흡수되지 마십시오. 느헤미야서를 보면 레위인이 너무 없어서 사람들을 보내 레위인을 찾았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어제 섬 교회 목사님과 통화를 했는데 옆 교회가 비어있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그룹은 느디님 사람들입니다(43~54절). 느디님은 바쳐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성전의 종입니다. 여호수아에 보면 기브온 사람들이 나오는데 기브온 사람들이 느디님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맡겨진 일이 성전에서 물 긷는 일, 나무를 패는 일, 그릇 닦는 일, 청소 등등의 잡일입니다. 성전에서 제일 하찮아 보이는 일들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전의 막 일꾼들입니다. 잡부들입니다. 성전에서 아주 존재감이 없어 보이는 일들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냥 낮은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느디님 사람들은 종살이 하려고 돌아온 것입니다. 제사장처럼 영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솔직히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느디님 사람들은 그냥 바벨론에서 살지 왜 돌아왔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느디님 사람들은 예배의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예배는 섬기는 것입니다.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종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본질입니다. 느디님 사람들은 예배의 본질을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또 이해가 되지 않는 그룹이 솔로몬의 신하 그룹입니다. 55절에 솔로몬의 신하라고 했지만 사실은 종입니다. 솔로몬 시대에 끌려온 전쟁 포로들입니다. 이들의 역할이 느디님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성전의 종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도 다시 돌아옵니다.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닙니다. 게다가 정통 유대인도 아닙니다. 전쟁 포로들이고, 종인데 돌아온 것입니다. 이들의 충성심이 정말 놀랍습니다. 역사서에 성전의 문지기들이 나옵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경비병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일에 매우 자긍심을 갖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84편 기자인 고라 자신은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노래했습니다. 맡은 일이 크든 작든 자부심을 갖고 합시다.
바벨론 포로 1차 귀환자들은 총 49,897명입니다. 일반 백성이 42,360명, 노래하는 자는 200명, 그리고 남종과 여종이 7,337명입니다. 종이 가장 많습니다. 참 이상한 현상입니다. 종들이었지만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낮아질수록 깊은 은혜를 경험하는 것 같습니다. 2장에는 숫자와 가문의 이름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재미로 읽는 것은 아니지만 읽을 때 참 재미없는 부분입니다. 계속 누구 자손이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제가 세어보니 자손이라는 말이 83회 나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중요한 명단입니다. 유다가 망할 때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의 수를 대략 100만 명으로 추산합니다. 20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추산하기도 합니다. 100만과 300만의 중간인 200만이라고 한다면 돌아온 숫자는 2.5프로 밖에 안 됩니다. 정말 적은 수입니다.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고 살았기 때문에 바벨론에 훨씬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2프로도 안 되는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님께는 매우 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 기자는 돌아온 사람들의 가문의 이름을 일일이 하나씩 나열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총 10장이고 페이지는 17페이지입니다. 명단은 2페이지 넘습니다. 약 1/8입니다. 그런데 8장에 2차 귀환자들의 명단이 또 나옵니다. 에스라서의 1/6일이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에스라는 이 많은 사람의 이름을 낫낫이 기록합니다. 너무 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한 것입니다.
티그리스 강 근처에 니푸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니푸르에서 BC 5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라슈 문서(Murashu texts, 455-403년) 700개 정도가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 발굴팀에 의해서 1893년에 발견됐습니다. 이 문서들은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 시기에 활동했던 '무라슈'라는 유력한 가문(또는 회사)의 상업 및 금융 거래 기록입니다. 주로 금전 대출, 토지 임대 및 매매와 관련된 계약서, 영수증, 장부 등의 상업 문서입니다. 여기에 유대인의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28개 정도의 유대인 정착촌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농업, 상업, 은행업에 종사를 했습니다. 저장고에서 발견이 된 문서에 2,500명 정도의 명단이 있는데 70명 정도가 유대인 이름입니다. 당시 200명의 관료 명단이 나왔는데 200명 중에 11명의 유대인이었습니다. 5프로가 넘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바벨론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뀐 사람들까지 포함한다면 유대인이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미국 하원 의원이 440명인데 이 중에 한국인이 세 명입니다. 1프로가 안 됩니다. 상원의원은 100명인데 이 중에 한국인은 한 명에 불과합니다. 인권을 강조하는 시대에도 이정도 밖에 안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에서 재산도 많이 소유했고, 행정직, 상업, 금융업 등등의 각종 직업에서 두각을 꽤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인은 페르시아에서 성공도 하고, 재물도 많이 모으고, 아주 잘 살고 있었습니다. 에스더는 왕비가 됐고, 모르드개는 왕 다음이었으며, 느헤미야는 왕의 최측근이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30년 전에 아산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지금은 아산이 큰 도시가 됐지만 그때 아산은 도시라고 부르기에 작았습니다. 면, 읍 규모 밖에 안 됐습니다. 아산에서 사역하면서 천안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어느 날 퇴근했는데 아내가 지나가는 말로 “이러다가 나 우울증 걸리겠어요.”라고 해요. 아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다는 거예요. 그냥 하루 종일 집에만 갇혀 있는 거예요. 전에 사는 도시 보다 조금 작은 도시로 온 사람의 심정이 이 정도였습니다. 거리도 20km 밖에 안 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천안에서 사역을 하시다가 저 거제도 밑에 섬으로 부임하게 됐어요. 아이들이 학교에 다녀야 하는데 거기에는 학교가 없어요. 아이들이 못가니까 아이들 뒷바라지 하느라 사모님도 남편을 따라갈 수가 없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목사님만 섬에 혼자 가셨어요. 페르시아의 수산(궁), 악메다(궁), 바벨론 궁은 당시 최고의 도시였습니다. 이런 곳에서 유다인들이 수십 년 동안 자리 잡고, 성공해서 사는 거예요. 반면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시골에다가 무너지고, 불타서 폐허가 된 도시이에요. 사람이 살 수가 없어요. 물질, 명예, 권세, 등등의 자신의 삶의 기반을 다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보통 결심과 용기가 아닌 거예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거리는 1600km 전후예요. 버스도 기차도 없습니다. 이 거리를 짐을 싸서 짊어지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걸어서 가는 거예요. 국경을 여러 번 넘어야 합니다. 당시에는 치안이 잘 안 됐습니다. 강도와 산적의 위험이 있습니다. 낮에는 덥고 만에는 추운 지역이에요. 목숨을 걸고 가는 거예요. 오직 신앙 하나 붙잡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거예요. 오직 예수 이름 하나 때문에 세상의 것을 다 포기하고 가는 거예요. 신앙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너무 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1차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이 하나님께는 너무 귀한 것입니다. 명단을 안 쓸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계속 포로 귀환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022년 2월 24일에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2022년에만 우크라이나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간 유대인이 14,680명이었고, 러시아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간 유대인은 37,364명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2023년, 2024년에는 더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귀환했습니다. 전쟁이 없었다면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BC 6-7세기 흩어진 유대인 노예, 유대인 포로들의 후손입니다. 2600년이 지났는데 계속해서 그들이 뿌리를 찾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역사적인 사건이 있을 때마다 계속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자녀를 부르는 마이크 소리입니다. 실패도, 슬픔도 고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2차 세계 대전 때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이 숫자는 전 세계 유대인의 1/3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정말 엄청난 숫자입니다. 이 사건으로 “여호와가 특별히 보살피는 민족”이라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이 뿌리째 흔들립니다. “여호와는 정말 존재하는가?” “우리는 정말 여호와의 선민인가?” 유대 사회에서 신의 존재와 구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회의가 제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홀로코스트가 유대인들을 더욱 강하게 결속시켜주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는 유대 시오니즘 운동, 뿌리 찾기 운동이 가속화됐습니다. 이 사건이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의 안전한 독립 국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강력하게 심어주었고, 결국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어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건국합니다. 히틀러의 학살이 국제사회의 막대한 지지를 이끌어낸 것입니다. BC 586년에 망한 나라가 2534년 만에 다시 세워진 것입니다. 민족적인 극심한 고통이 2534년 만에 다시 나라를 세우게 한 것입니다. 현대판 출애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고통이 유대인들을 더 유대인 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3500년 전에 있었던 출애굽이 이 세상 속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출애굽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은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니에요. 지금도 25000년 전에 출바벨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출바벨론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돈도 벌고, 출세도 하고, 잘 살길 바랍니다. 제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이름이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성공했는데 천국 문에 갔을 때 내 이름이 없다면 이 땅에서 성공한 것이 아무 것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세상에서 잘 되기를 애쓰세요. 그런데 영적인 것은 더 사모하세요. 혹시 이 자리에 어려운 일을 당하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신 분 있습니까?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복입니다. 복 중에 복입니다. 재수가 없는 것도 아니고, 무능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한 것입니다. 기죽지 마세요. 고통은 하나님의 자녀를 부르는 마이크 소리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해서 자기 밖에 모르고 교만해서 버림받는 것보다 실패하고, 병들고, 배신당하고, 고통당하다가 예수님 믿는 것이 훨씬 복이 있는 것입니다. 2011년 일본에 9.0의 지진이 발생해 30미터 높이의 쓰나미가 일본을 덮쳤습니다. 정말 세계 역사에 남을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역사적 사건으로 일본에 결혼율과 이혼율이 갑자기 높아졌습니다. 고난이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더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더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시겠습니까? 세상이 혼란스럽습니다. 세상이 엉망진창입니다. 더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통을 당할 때 더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더 세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겠습니까? 사건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더 애굽에서 나오는 출애굽을 해야 합니다. 고통을 당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찾아 계속 출바벨론을 해서 성경으로, 예루살렘으로, 에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출애굽을 못하면 이 세상에서 얻은 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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