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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모든 상황에서 예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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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스라 3:1~13
주일오전예배 | 2025-11-16
설교자 : 서요한 목사

곰을 잘 잡는 용맹한 사냥개가 있었습니다. 그 사냥개는 어릴 때 곰에게 타격을 입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 사냥개를 애지중지했습니다. 사냥꾼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더 용맹한 사냥개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곰 사냥에 뛰어난 암캐를 찾아냈습니다. 사냥꾼은 그 둘을 교배해서 새끼 5마리를 얻었습니다. 사냥꾼은 더 욕심을 냈습니다. 개들이 곰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어릴 때부터 곰 고기를 먹였습니다. 그리고 새끼 곰을 개들의 우리 옆에 두고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개들은 사냥꾼의 바람처럼 곰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사냥개가 됐습니다. 드디어 이 젊은 사냥개들은 첫 곰 사냥에 나섰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곰을 보고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냥개들은 자신의 힘을 알지 못하고 무모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의 부모들은 곰을 홀로 맞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냥개들과 서로 힘을 합치고 꾀를 내어 곰을 몰아갔지만 이 젊은 사냥개들은 무턱대로 달려들었습니다. 결국 개들은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개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요? 사람도 똑같습니다. 뇌의 편도체에 이상이 오면 사람은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아주 드물게 발생하는 희귀질환입니다. 또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낮으면 위험을 감지하지 못해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위험은 피하라는 생존신호입니다. 피하지 않으면 위태합니다. 두려움은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감정입니다. 두려움을 느낄 줄 알아야 어떤 위험이 있는지를 알게 되고, 그 위험에 맞추어 대처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기분 나쁜 감정이지만 꼭 필요한 감정입니다. 그럼에도 두려움은 극복해야 할 감정입니다. 두려울 때 그 두려움을 참고 견디며 생존을 소원하는 감정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불안, 염려, 두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하시고 기쁨과 감사, 행복의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1장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유대인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이고, 2장은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그리고 3장부터 6장까지는 성전의 건축 과정입니다. 돌아온 사람은 총 49,897명입니다. 일반 백성이 42,360, 남종과 여종이 7,337, 노래하는 자가 200명입니다. 일반 백성하고, 종을 따로 계수했습니다. 종을 백성의 숫자에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종을 사람 취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돌아온 사람 중에 종이 제일 많습니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제일 많이 돌아왔습니다. 이 종들은 성전의 종들입니다. 성전에서 청소, 설거지 등의 잡일을 하던 잡부입니다. 종들이 성전에서 섬기면서 경험한 특별한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종이 되십시오.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종이 되셨습니다. 섬기러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오자마자 자기들의 고향을 찾아갔습니다. 자기들의 뿌리를 찾아서 돌아간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 사람들이 7월이 되자 예루살렘에 다시 모입니다. 1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하나 둘씩 모인 것이 아니라 일제히 모였습니다. 각자의 고향으로 흩어지면서 7월에 다시 모이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성경에 이스라엘이 페르시아에서 언제 돌아왔는지, 언제 도착했는지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전 건축을 하기 위해서 모인 달과 날짜는 정확하게 기록했습니다. 왜 날짜와 시간을 기록했을까요? 그 날에 모여서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공동체의 약속입니다. 예배는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것입니다.

 

레위기 23장에 보면 유대인의 7대 절기가 있습니다. 1월 달에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이 있습니다. 초실절에서 50일째 되는 날을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7월 달에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이 있습니다. 앞에 세 개가 있고, 중간에 하나가 있고, 세 개는 뒤에 있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이 7월에 모인 이유는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1일은 나팔절입니다. 나팔절은 나팔을 불어서 잠자는 영혼을 깨우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는 절기입니다. 교회는 말씀의 나팔을 불어서 영혼을 깨우는 곳입니다. 목사는 나팔수입니다. 10일은 속죄일입니다. 1년 동안의 죄를 한 번에 사해주는 절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속죄일에 모여 지난 세월 동안의 죄를 회개한 것 같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한꺼번에 씻는 능력이 있습니다. 15일부터 22일까지 8일 동안은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초막절은 광야에 초막을 짓고 지내면서 40년 광야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신명기 1:31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기억과 감사가 초막절이 갖는 의미입니다. 돌아온 유대인들은 절기를 지키며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감사했던 것입니다.

 

32절부터 5절까지 번제를 드렸다는 말이 다섯 번 나옵니다. 번제는 제물 전부를 태워서 드리는 제사로 헌신과 충성을 의미합니다. 돌아온 유다인들은 예배를 드리면 헌신을 다짐한 것입니다. 또 나팔절(5)과 초막절(4)을 지켰다고 했고, 상번제(4)를 드렸고 했습니다. 상번제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유대인들이 성전 건축을 하기 위해 7월 달에 모여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예배입니다. 그것도 집중적으로 반복적으로 계속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달 이상을 예배를 드리고, 절기를 지킨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제일 먼저 잃어버렸던 예배를 회복했습니다. 성전 건축에 앞서 먼저 예배와 기도로 준비한 것입니다. 예배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운전을 해서 조금 먼 거리를 다녀왔습니다. 가기 전에 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자동차 타이어 교체입니다. 올 초에 엔진오일을 교체하러 카센터에 갔는데 정비하시는 분이 타이어 교체할 때가 됐다고 했습니다. 제가 주로 시내에서 주행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타이어 교체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 계속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멀리 갈 일이 생겼습니다. 고속 주행하려니까 같이 가는 사람의 안전히 걱정됐습니다. 그래서 타이어를 교체했습니다. 출발 전날 저녁에는 가스 충전을 가득 했습니다. 또 졸릴까 싶어서 전날에는 잠을 충분히 자려고 했습니다. 예배는 해야 할 일의 준비입니다. 예배는 낡고 묶은 타이어를 새 타이어로 교체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독일 선교사로 갔다 오셨습니다. 사모님이 남편이 독일에서 선교하는 동안 대학에서 틈틈이 공부를 했습니다. 선교도 바쁜데 공부까지 하려니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일 힘든 때가 시험 기간이었다고 합니다. 사모님이 이런 말씀을 해요. “시험 기간이 되면 스테이크를 아주 세게 먹고 며칠을 밤새워 가며 공부 했어요.” 시험 전에 고기를 먹어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거예요. 고기를 잔뜩 먹고 시험 기간을 견뎠다는 거예요. 예배와 기도는 앞으로 할 일에 대한 준비이며 충전입니다. 휴가를 가잖아요. 쉬면서 충전하는 것입니다. 조용필의 노래 중에 <충전이 필요해>라는 곡이 있습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하루해가 저물어 오늘 밤을 준비해 나를 위로해 주는 그곳에 달려가 시간이 필요해 여유가 필요해 힘이 다 빠져 지쳐버린 내게 충전이 필요해 세상 위로 올라 이 밤은 나를 위한 업그레이드 (업그레이드) 허무해진 일이 많아 힘겨워 속이 다 타 차가운 마음 뜨겁게 채울 충전이 필요해 > 예배는 힘의 충전입니다. 예배는 준비입니다.

 

부흥회를 하고, 특별새벽기도를 합니다. 고난 주간에 금식도 합니다. 왜 부흥회를 하고, 왜 특별기도회를 할까요? 영적 힘을 비축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닥칠 일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 건축을 하기 위해 모여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절기를 지키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왜요? 시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해꾼이 있습니다.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산에 데리고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세 사람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애굽에 7년 풍년이 있었고, 7년 흉년이 있었습니다. 7년 풍년에 요셉이 한 일이 7년 흉년을 대비한 것입니다. 평안할 때 예배하며 영적 흉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경기도 용인에 <새에덴교회>가 있습니다. 주일에 5부 예배를 드립니다. 장로님 한 분은 1부에서 5분까지 전 예배를 다 드립니다. 똑같은 설교를 5번 듣는 것입니다. 1부 예배가 730분에 있습니다. 새벽 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녁 7시에 저녁 예배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 하시는 말씀이 너무 좋대요. 그런데 우리는 주일 날 낮에 오면 저녁 때 절대 안 오시죠. 수요일도 오고, 새벽에도 오면 안 됩니까? 커피숍은 자주 가잖아요. 에어로빅, 필라테스, 헬스, 쇼핑은 몇 번 씩 가는 교회는 여러 번 오면 안 됩니까? 돌아온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 예배했습니까? 준비하는 것입니다. 학교 가려면 가방을 쌉니다. 여행가면 준비합니다. 그런데 신앙은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칼 바르트는 예배는 인간 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중대하고, 가장 긴급하며, 가장 영광스러운 행동이다.”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이 예배드리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 9:11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승냥이 굴이 되게 하겠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져서 돌무더기가 됐고 들짐승이 사는 곳이 됐습니다. 예루살렘이 폐허가 됐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주변에는 원수들이 있습니다. 예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배한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3절에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라고 했는데 이 말씀을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비록 그 땅 백성들로부터 나온 두려움이 그들 위에 있다고 할지라도입니다. 두려움이 그들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두려움이 그들을 덮쳐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할 상황이 아닌데 예배한 것입니다. 예배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에마>인데 이 말은 급속도로 공포가 엄습해 공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황상태. 엄청난 공포입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배 중에 한 집사님이 어둡고 질린 얼굴로 정신없이 뛰쳐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쫓아가서 집사님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그 집사님이 교회 천정이 무너질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워 안에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습니다. 예배하는 중에 두려움이 집사님을 덮쳐 버린 것입니다. 집사님이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간 것입니다. 그때 제가 집사님 싸우세요. 천정 안 무너져요. 견디세요. 그래야 공황장애 이깁니다.”라고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아무 것도 못하게 마비시킵니다. 두려움은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공포는 사람을 기가 막힌 행동을 하게 합니다. 천정이 무너지다니요. 공포가 유대인들을 덮쳤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한 것입니다. 두려움을 견딘 것입니다. 3절 말씀을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들은,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이 두렵기는 하지만, 제단이 서 있던 옛 터에 제단을 세우고, 거기에서 아침 저녁으로 주께 번제를 드렸다.” 유다인들이 하나님의 제단을 세운 동기가 엄청난 공포 때문입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혼자 앉아 큰 칼을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장군은 전쟁을 앞에 두고 애간장이 끊어질 정도로의 두려움과 마주한 것입니다. 하지만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두려움과 싸웠습니다. 조선왕조 500년에 이처럼 멋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군의 배는 열두 세 척이고, 적군의 배는 133(330, 500)입니다. 두려움이 엄습해오지만 이순신 장군은 피하지 않았습니다. 견뎠습니다. 견디니까 이기게 됐습니다.

 

인생이 두려움입니다. 산다는 것은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죽음, 실패, 시험, 취업, 직장, 앞길, 결혼, 건강 등등 두려움, 걱정, 염려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불안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 불안과 두려움은 인간이 살아가도록 돕는 감정입니다. 미국 일리노이 주에 SM이라는 여성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여인은 세 아이의 엄마입니다. 어느 날 이 여자의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강도가 여자의 목에 칼을 들이 댔습니다. 여자가 강도에게 어서 찔러.”라고 했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 신경생리학 박사 안토니오 다마시오는 이 여인의 뇌편도체에는 공포라는 감정이 없다고 합니다. 이 여성의 질병은 우르바흐-비테 병으로 추정합니다. 두려움이 없으면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게 하는 가장 중요한 감정입니다. 생존신호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를 알게 되고, 그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를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소중한 감정입니다. 두려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두려움은 극복해야 할 감정입니다. 예배로 두려움과 싸우십시오. 개업할 때, 이사했을 때, 일을 시작할 때, 좋은 일이 있을 때, 나쁜 일이 있을 때, 불안할 때, 예배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승리는 예배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앉을 곳이 있었을까요? 산소가 넉넉했을까요? 빛이 있었을까요? 18912월에 남아메리카 해안의 포클랜드 제도 부근을 항해하던 제임스 바틀리가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15시간 만에 구출됐습니다. 위장의 소화액으로 온몸의 털이 녹고 피부도 하얗게 변했습니다. 레이너라는 잠수부는 고래 입속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레이너는 당신이 고래 뱃속에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 어떤 두려움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공포라고 했습니다. 요나는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도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다가 실신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지하 감옥에 던져버렸습니다. 두 사람은 밤 중에 깬 후에 아픈 몸을 일으켜 찬송했습니다. 다니엘은 30일 동안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했습니다. 예배할 수 없을 상황에서 예배하고,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도하는 것이 가장 큰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예배를 계속해서 드리고 났더니 힘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을 준비합니다. 7절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욥바는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도망갈 때 배를 탄 곳입니다. 지금의 텔아비브입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의 행정수도로 유대인들이 살지만 그 때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두려웠지만 두려움을 극복하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백향목은 나무의 제왕, 신의 나무라고 불리는 나무입니다. 단단하고 썩지 않는 나무 중에 최고의 나무입니다. 백향목은 2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나무로 1년에 1-2센티 밖에 자라지 않습니다. 가격이 엄청나게 비싼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를 레바논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돈이 다 어디서 왔습니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는 바벨론 포로들이 준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잘 사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어렵게 사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들의 헌금으로 지은 성전입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매이듬해 2월에 공사를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7월에 모여서 먼저 예배를 회복하고, 자제를 준비한 다음 이듬해 2월에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입니다. 예배는 행동의 시작입니다. 루이스 기글리오는 예배는 우리의 관중문화가 아니라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실제로 스포츠 경기에 뛰어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마비시켜버립니다. 그런데 예배는 행동하게 합니다. 예배는 내 삶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삶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배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10절에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의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여호와를 찬송했다고 했고, 11절에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불렀다고 했습니다. 12절에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했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질렀다고 했습니다. 백성이 어찌나 크게 외치는지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고 했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이 함께 예배하자 두려움이 찬양과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예배하자 불안과 염려가 감격과 함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두려울 때 예배하십시오. 불안, 염려가 여러분을 엄습해올 때 예배자가 되십시오. 예배가 두려움을 기쁨과 함성으로 바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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