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계정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
2 == 2 ok!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와서 여쭙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돌로 치라고 하면 로마의 법을 어기게 되고, 치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법을 어기게 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질문입니다. 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칠까요? 말까요?”라고 여쭙니다. 바치라고 하면 매국노가 되고, 바치지 말라고 하면 황제의 반역자가 됩니다. 아주 곤란한 질문입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곤란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가을이 되니 아침에 안개가 많이 낍니다. 안개가 꼈을 때 옥상에 올라가서 주변을 둘러보면 도시가 안개에 뒤덮여 있습니다. 이 도시가 온통 뿌옇게 보입니다. 하지만 아침 해가 떠오르면 안개가 모두 사라지고 도시가 말끔해집니다. 가을에 도시가 안개에 뒤덮여 있듯이 이 세상은 불신의 안개로 뒤덮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태양 되신 예수님께서 떠오르실 때 모든 불신의 안개는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불신의 안개가 은혜로 다 걷히고 예수님을 분명하게 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바리새인 중에 지도자 한 명이 안식일에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해서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지도자라는 말을 개역 성경은 두령이라고 번역했고, KJV 성경은 조직의 장(chief)라고 번역했으며, 스탠다드(ESV) 바이블은 통치자(ruler)라고 번역했습니다. 성경 원문은 ‘바리새인들의 지도자들 중의 어떤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 중에서 아주 영향력이 인사가 안식일에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해서 같이 식사를 한 것입니다. 최고 지도자급이었기 때문에 그 밑에 있는 다른 바리새인들도 참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식사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1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초청해놓고 엿보고 있습니다. 6:7에도 아주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되어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도 엿봤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공생애 기간 동안 내내 엿보며 감시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엿보지 마세요. 예수님을 간보지 마세요. 성경을 간보지 마세요. 서요한 목사를 엿보지 마세요. 서요한 목사를 간보지 마세요. 교회에 오셨으면 마음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대면하십시오. 예수님은 살아계신 구세주이십니다.
안식일에 회당 예배가 끝난 다음에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나누는 것은 당시 좋은 풍습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사람들을 초청해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더 경건하고 율법에 더 충실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축복된 날에 은혜로운 자리를 마련하고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큰 은혜를 가장한 큰 함정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창세기 3장을 설교하면서 인류가 타락하기 전에 뱀이 아름답고 고상한 피조물이었다고 했습니다. 예배 후에 식사를 하는데 집사님 한 분이 뱀이 아름답다는 것이 상상이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한 집사님은 제가 너무 비약을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집사님들이 그렇게 말씀하실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뱀이 아름답다고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권모술수에 능합니다. 만약 지금의 뱀의 흉측한 모습과 타락전의 뱀의 모습이 같았다면 사탄은 뱀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사탄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다고 했습니다. 욥기에는 사탄이 하나님의 아들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척 끼어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모두 사탄이 자신을 아주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장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아주 은혜로운 모습으로 가장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간파하셨지만 악인들의 함정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의 함정보다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빠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함정을 팠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마귀의 함정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빠뜨릴 수 있는 함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함정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문제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어떤 함정에도 빠질 수 없으십니다. 여러분! 함정에 빠지거나 나 보다 큰 문제를 만나시면 예수님을 꽉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함정에 더 이상 빠지지 않게 되고, 함정에서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함정보다 크십니다. 예수님은 문제보다 크십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10억 원이 하나님께는 얼마나 될까요?” “그야 푼돈이지!” “그러면 천년은 하나님께 얼마나 되나요?” “내게는 1초에 불과하지!” 이 사람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하나님께 한 푼만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1초만 기다려라.”고 하셨습니다. 내 수준으로 하나님을 계산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십니다.
엿보다는 말이 헬라어로 파라테레오인데 가까이에서 지켜보다, 아주 자세히 관찰하다, 악의를 가지고 살펴보다, 잠복하고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예수님을 간보고, 삐뚤어진 눈으로 봤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사는지 자세히 살펴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14-15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산 위에 올라가셔서 세상을 비추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산 위에 두어 세상을 비추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비추는 빛을 세상이 보고 있습니다. 착한 행실이 성도가 세상을 비추는 빛입니다. 우리는 착한 행실이라는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쁜 행실은 어둠의 빛, 검은 빛입니다. 마귀의 빛입니다. 세상에 어둠의 빛, 마귀의 빛을 비추지 맙시다.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2절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수종병은 인체 조직 안에서 형성되는 액체(수분)가 세포벽이나 신체기관의 빈부분에 고여 몸이 붓는 질병입니다. 현대의학에서는 부종이라고도 하고, 한의학에서는 수병, 수창, 수기라고도 합니다. 물 수(水) 자입니다. 그러니까 물병입니다. 지금은 치료가 가능하지만 성경 시대에는 불치병이었습니다. 물이 체내에서 계속 흐르면서 산소를 운반하고, 노폐물을 밖으로 배출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생기는 질병입니다. 물이 신체의 한 곳에 고이면 살이 붓고 썩습니다. 눈, 팔, 다리, 복부 등 다양한 신체 부분에 부기가 생깁니다. 특히 복부에 물이 차면 심장, 신장, 간장 등을 압박하는데 신장을 압박하면 신장의 기능이 영구적으로 손상되고, 심장을 누르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수종병이 전신에 퍼지면 얼굴이 검고 누렇게 됩니다.
이 수종병의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이 병에 걸리면 끝없는 갈증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더 마릅니다. 몸에 물이 가득 차 있는데 계속 갈증을 일으키는 아주 역설적인 질병입니다. 이런 병의 특성 때문에 수종병을 헬라 사람들은 사람의 욕망에 비유했습니다. 병리학적 이해가 없기 때문에 수종병에 걸린 사람을 돈에 환장한 사람이라고도 했습니다. 민수기 5장에 음행한 여인이 물두멍의 물을 마시면 배가 붓는다고 했습니다. 몸이 붓는 질병은 종교적으로 부정한 병으로,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 병에 걸리면 병에 대한 고통과 사람들의 편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더럽다고 생각했고,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기피하는 질병이었습니다. 욥이 고난당할 때 종기에 걸렸습니다. 이 종기는 악성 나병일 것입니다. 그 시대에 나병은 더러운 병으로 종교적으로 신의 저주처럼 여겨졌습니다. 욥이 고난당할 때 더 없이 힘들었던 것은 친구들과 이웃의 편견입니다. 친구들이 욥에게 계속 나쁜 ×라는 거예요. 수종병에 걸리면 사람들의 편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헬라 사람이면서 의사입니다. 헬라 문화와 수종병에 대해서 아주 잘 알았을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마태, 마가, 요한이 기록하지 않은 수종병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누가는 예수님께서 수종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을 기록했을까요? 누가는 이 병으로 당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가지고 있는 끝없는 욕망을 지적한 것입니다. 7절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라고 했고 16:14에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말씀 보다 돈을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생명보다 높은 자리와 세상 욕망을 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당시 로마의 고위관리였던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썼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세상 욕망은 수종병처럼 먹을수록 목이 마르다는 것을 말하면서 세상 권세가 아닌 참 생명을 좇아 살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원 저자 되시는 성령님께서 이 수종병의 치료 사건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으면서 세상 욕망과 물질을 끊임없이 탐하는 영적 수종병자가 되지 말라고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결혼 30주년을 맞이한 60세 동갑 부부가 있었습니다. 결혼기념일에 천사가 나타나서 두 사람에게 소원을 한 가지씩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먼저 말했습니다. “그동안 워낙 가난하게 살다보니 여행을 못했는데 세계일주 여행을 한번 해보았으면 좋겠네요.” 천사가 항공권과 여행경비를 건네주었습니다. 소원을 말하자마자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본 남편이 아내의 눈치를 슬슬 살피더니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나보다 서른 살 젊은 여자와 살았으면 좋겠네요.” 그 말에 천사는 “그 동안 두 분이 열심히 살아서 드리는 혜택인데 소원을 안 들어 드릴 수도 없고…아무튼 그렇게 원하신다면 이루어 드려야겠지만…그러나 참 이상한 소원도 다 있네요.”라면서 남편을 향해 날개를 폈습니다. 그런데 젊고 예쁜 신부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남편이 폭삭 늙어 90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지나친 욕망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게 합니다.
말씀을 보다가 문득 ‘성경에 말씀이 물에 비유되는 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에서 물은 종종 말씀을 상징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줄줄 암송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물을 많이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의미가 막혀 있습니다. 말씀이 왜곡되고, 믿음이 과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붓고 썩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영적 수종병자들이었습니다. 또 성경에서 은혜가 물에 비유됩니다. 말씀이 왜곡되어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막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회당 안에 있었지만 심각한 영적 수종병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영적 수종병자가 되지 맙시다. 교회에 앉아 있는데 은혜가 막혀 있는 수종병자가 되지 맙시다. 주님 앞에 엎드립시다.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도록 기도합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여쭈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고 했습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혼자 대답을 하고 계십니다. 질문 없는 대답을 하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은 질문 없는 대답을 하고 계실까요?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누가가 계속되는 사람들의 이상한 질문들을 굳이 반복해서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종병자를 데려다 놓고 어떻게 하는지 엿보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예수님이 아시고 그에 대한 답을 하신 것입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질문 같지 않은 이상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혔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고 김희보 교수님의 구약개론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합동 교단에서 유명한 구약학 교수님이셨습니다. 이 교수님은 무엇을 질문을 하면 진리를 너무 쉽게 할려고 하지 말라며 대답을 잘 안 해주셨습니다. 구약 제사 중에 요제를 설명하셨습니다. 요제는 흔들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기도할 때 몸을 좌우로 앞뒤로 흔들면서 하잖아요. 이게 생각이 나서 제가 손을 들고 “교수님! 기도할 때 몸을 흔들면서 하는데 이것도 요제인가요?”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강의실에 웃음이 빵 터졌어요. 교수님이 기가 막히셨는지 대답을 안 하시고 저를 한참 쳐다보시더라고요. 질문이 어이가 없었던 거예요. 너무 터무니없는 질문에 한 참을 대답을 안 하시더라고요. 물론 나중에는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국민일보 가정예배 코너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이 어릴 적에 할아버지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합니다. 한 서당의 훈장이 제자들 중에 3형제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습니다. 첫째는 장원 급제해서 정승이 되겠다고 했고, 둘째는 나라를 지키는 장군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내가 뜬금없이 개똥 세 개를 갖고 싶다고 했습니다. 훈장님이 의아해하며 개똥을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고 묻자 세째가 개똥 하나는 공부를 싫어하면서도 정승이 되겠다는 큰 형의 입에 넣어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보면 우리 시대 정승들의 입에 개똥을 넣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자기보다 겁이 많으면서 장군이 되겠다는 둘째 형 입에 넣어주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훈장은 격앙된 목소리로 그럼 나머지 개똥은 어떻게 할 참이냐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야기를 갈무리했습니다. “살면서 헛된 꿈에 젖은 사람을 칭찬하는 훈장의 입에 세 번째 개똥을 넣어주지 못하면 앞으로 그 개똥은 네 몫이 될 거란다.” 개똥같은 일들이 난무하고, 개똥같은 말들, 개똥같은 질문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개똥, 개똥 하는 세상입니다. 누가는 복음을 기록하면서 개똥같은 바리새인들의 질문, 개똥같은 말들을 굳이 반복해서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만 기록한 것 같습니다. 누가는 진리의 말씀과 개똥같은 말들을 섞고 싶지 않았습니다. 개똥과 생명, 개똥과 진리를 분변하지 못하면 그 개똥이 내 입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개똥을 먹고도 개똥인지 모릅니다. 개똥을 먹고 진리를 먹었다고 좋아합니다. 여러분!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나에게 있도록 기도합시다.
예수님은 수종병 걸린 사람을 데리고 가셔서 고쳐보내셨습니다. 4절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라고 했습니다. ‘데려가다’는 말이 헬라어로 에필람바노(λαμβάνω)입니다. 에필람바노는 ‘꽉 잡다’, ‘단단히 붙잡다’, ‘돕다’, ‘굳게 지키다’는 뜻입니다. ‘어떤 것을 놓치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다’, 또는 ‘어떤 것을 위에서 꽉 붙잡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나 제자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합니다. 오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배에서 뛰어내려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파도를 보고 물 속에 빠졌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에서 꽉 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손으로 베드로를 붙잡았다는 말과 본문의 예수님이 그 사람을 데려가셨다는 말이 똑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수종병자를 손으로 꽉 잡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신의 저주를 받아서 재수가 없다고, 더럽다고 피하는 수종병 걸린 사람을 예수님께서 꽉 잡고 당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고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저 위에서 여러분을 꽉 잡고 계십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조금 전에 “주님여 이 손을 꼰 잡고 가소서”라는 찬양을 불렀죠. 이 곡은 과거 한국교회가 정말 많이 불른 복음성가입니다. 이 곡은 시카고에 살던 “토마스 도르시”라는 유명한 피아노 연주가가 지은 노래입니다. 1930년대의 일입니다. 어느 날 토마스는 세인트 루이스로 연주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한참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함성을 받으며 연주를 하고 있는데 행사 주체 측으로부터 작은 쪽지를 전달 받습니다. “당신의 아내가 위독합니다.” 전보를 받은 그는 즉시 시카고로 돌아갔습니다. 시카고에 도착한 그를 기다린 것은 아들을 낳다가 죽은 아내의 싸늘한 주검뿐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날 밤에 아기도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함께 묻어야 했던 그는 큰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왜요?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부당하게 대우하십니까?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예배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찬양하지 않겠습니다.” 토마스 도르시에게 찾아온 이 큰 슬픔은 그로 하여금 비탄과 절망에 빠지게 했습니다. 평생을 쌓아온 그의 믿음이 한 순간 무너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후 한 없이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 날, 토마스는 선생님으로 근무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한 학교를 방문하게 됩니다. 밖에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흰 눈이 쌓여 있는 창 밖 운동장을 보니 그의 눈에 이런 글귀가 들어왔습니다. “Precious Lord Take My Hand” “존귀한 주님 내 손 잡아 주소서” 이 구절이 계속해서 그의 가슴에 맴 돕니다. 마침 교실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피아노 한 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날 피아노를 치며 불멸의 가스펠을 작곡합니다. “Precious Lord Take my hand”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 주님여 날 도와주소서 /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토마스 도르시의 영혼은 이 찬양을 통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 은혜를 끼칩니다. 주님께서 저 위에서 여러분을 꽉 잡고 가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부정하다며 기피하는 수종병 걸린 사람을 손으로 꼭 잡고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 고쳐서 보내셨습니다. 보내다는 말이 헬라어로 아폴뤼오입니다. 아폴뤼오(ἀπολύω)는 ‘풀어주다’, ‘해방시키다’, ‘자유롭게 하다’, ‘놓아주다’, ‘돌려보내다’, ‘용서하다’, ‘구원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허락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아무런 조건 따지지 않고 이유 없이 구원해주셨다. 조건 없이 해방시켜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유가 있다면 불쌍해서입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유가 없습니다.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예수님 믿으십시오. 십자가의 구속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이 수종병에 걸린 사람이 너무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누군지 왜 병에 걸렸는지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병을 고쳐주시고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어떤 대가나 아무런 이유 없이 덮어주는 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십자가는 조건도 이유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지난 주간에 교회 복도를 왔다 갔다 하는데 어떻게 들어왔는지 메뚜기가 한 마리가 복도 벽에 붙어있어요. ‘어떻게 들어왔지! 메뚜기가 들온 건 처음이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잡을까 하다가 잡지 않았습니다. 금요일에 복도에 청소기를 돌리는데 그때까지 메뚜기가 그대로 있어요. 그냥 둘까 했어요. 커다란 왕파리, 말벌, 나방 같은 날짐승이 복도에 자주 들어와요. 안 잡으면 꼭 주일날 예배드리는 시간에 들어와서 예배를 방해를 해요, 그 생각이 나서 청소기로 메뚜기를 빨아들였어요. 그리고 청소기를 계속 돌리는데 갑자기 메뚜기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쓰레기통 안은 숨쉬기도 힘들고 캄캄하고 답답해서 엄청 고통스러울 텐데 … 그냥 두면 꼼짝없이 죽을 텐데 … 내가 너무 잔인한가? 메뚜기도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인데 …’ 그냥 메뚜기가 불쌍한 거예요. 이런 생각을 하다가 지난 주일에 오 집사님이 바이올린 나사 하나가 예배실에서 빠졌는데 혹시 못 봤느냐는 말이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청소기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해서 청소기를 열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겸사겸사해서 청소기 먼지 통을 빼서 옥상에 올라가서 뚜껑을 열었어요. “햐 ~” 정말 더럽고 지저분하다라고요. 쌓인 먼지가 짙은 검은 색이에요. 죽은 벌레도 있더라고요. ‘지옥이 이럴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마나 더러운 지 마스크를 착용안하면 병에 걸릴 것 같더라고요. 그 속에 초록색의 메뚜기가 보여요. 초록색 메뚜기가 시커먼 먼지, 머리카락, 쓰레기, 덤불 같은 거에 얽혀 있어요. 그 속에 있는 메뚜기가 예뻐 보였습니다. 메뚜기가 예쁘다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더러운 것을 다 해치고 손으로 메뚜기를 잡아서 옥상 화단 풀 속에 풀어줬어요. 초록색의 생명체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요. 메뚜기는 복도로 들어왔다가 청소기에 갇혔습니다. 그러다가 자유를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쓰레기 통 같은 바리새인들 틈바구니에서 수종병자를 꽉 잡고 데려가셔서 병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수종병자의 생명이 예수님께 너무 귀했을 것 같아요.
쓰레기통 같은 세상에서 세상 욕망에 사로잡혀 영적 수종병에 걸려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구원하셨습니다. 아무 조건 없습니다. 이유 없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사랑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 이전글 | 사랑이 없으면 |
|---|---|
| 다음글 | 뱀의 유혹 |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