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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가장 낮은 자리를 선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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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 14:7~14
주일오전예배 | 2025-10-05
설교자 : 서요한 목사

학술 토론회를 심포지엄라고 합니다. ‘심포지엄은 고대 그리스에서 술을 마시며 대화와 토론을 나누던 연회인 심포시온에서 유래했습니다. 심포시온은 문자적으로 함께 마신다는 뜻입니다. 플라톤의 향연에 보면 여러 인물들이 술을 마시며 사랑의 본질에 대해 토론을 합니다. 심포지엄이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는 지중해 연안에 자리 잡고 있어서 기후가 아주 좋습니다. 기후가 좋다보니 배우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광장에서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그리스에서 철학, 수학, 기하학 등이 발달했습니다. 돈 있고, 배우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잘난 척 하기, 아는 척 하기, 있는 척 하기, 이것이 심포지엄의 시작입니다. 세상 문화는 과시 문화입니다. SNS 계정을 보유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만19~59세 사람을 대상으로 SNS에 어떤 게시물을 올리는지 물었더니, ‘자기 과시용 43%’, ‘일상 기록용 30%’, ‘정보 공유용 27%’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과시욕 때문에 사회는 더 냉혹해져 인간미가 사라집니다.

 

1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유대인 안식일 날에 바리새인 중에 지도자 한 명이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이 모임은 심포지엄 형식으로 진행됐던 것 같습니다. 1부는 식사, 2부는 토론을 하는 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랍비로 불렸고, 당시 유대 지역에서 최고의 유명 인사, 최고의 셀럽이셨습니다. 바리새인 지도자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청해 식사를 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구경꾼들에게 보란 듯이 나는 너희들은 말 한 번 붙이기 어려운 사람을 집으로 초청해서 같이 밥 먹고 대화하는 존재야!’라고 과시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신 이유가 자기 과시, 자기 자랑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9:23-24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자랑하면 안 될까요?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 자랑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4를 보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한다면 자랑하면 안 됩니다. 자랑이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바울이 약한 것을 자랑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약한 자의 약함 위에 당신의 능력을 덧입혀주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9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또 주 안에서만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0: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또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여러분은 나를 자랑하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자랑하십니까?

 

 

 

7절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한 지도자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안식일에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예수님 외에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함께 초대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식사자리에 앉으면서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경쟁을 했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원문 성경에는 높은 자리 앞에 어찌나’, ‘얼마나라는 부사가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서로 앉으려고 심하게 경쟁한 것입니다. ‘높은 자리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토클리시아입니다. 프로토클리시아는 첫 번째라는 뜻의 프로토와 눕는 자리라는 뜻의 클리시아의 합성으로 문자적으로 눕는 자리 중에 첫 번째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 로마의 상류층과 같이 쿠션에 기대어 반쯤 누워서 식사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 만찬을 허리에 띠를 띠고 서서 급히 먹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이었습니다. 누워서 천천히 먹는 것은 자유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종은 서서 급히 먹지만 주인은 편안한 자세로 천천히 먹습니다. 식사가 종에게는 끼니를 때우는 일이지만 주인, 자유인에게는 쉼과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끼니를 때우는 행위를 넘어 은혜, 공급하심, 감사, 행복입니다. 식사는 단순히 음식을 먹고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흡수하는 육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채우심과 공동체의 관계를 위한 영적 행위입니다. 이 식사가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2000년대 후반에 미국 시애틀에서는 디너처치운동(식탁교회운동)이 생겼습니다. 뉴욕에 가면 주님의 식탁 선교회가 있습니다. 우리의 식탁은 주님의 식탁이라는 것입니다. 식탁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식사 자리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예배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식탁에서 세리와 죄인들을 만나셨습니다. 초대 교회는 매일 기도하고, 매일 함께 떡을 뗐습니다. 우리는 식사를 할 때 감사기도를 올립니다. 식사기도는 육적인 것을 섭취하지만 단순히 육적인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으로 승화하는 행위입니다. 한 때 이런 글이 유행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요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요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성경시대 유대인들의 식탁 모양은 디귿자(혹은 U) 모양으로 트리클리니움이라고 합니다. 가장 상석은 왼쪽 끝에서 두 번째 자리이고, 그 다음은 가장 상석에서 왼쪽, 그 다음은 오른쪽입니다. 주인은 가장 상석의 오른쪽에 앉아 식사 모임을 주관했습니다. 말석, 가장 낮은 자리는 오른쪽 끝자리입니다. 가운데 열린 부분에서 종들이 봉사했습니다. 사람들은 주인을 중심으로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기댔다고 했는데(13:23) 요한은 예수님의 오른쪽에 앉은 것 같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는 식탁이 직사각형으로 그려져 있지만 원래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자 모양의 트리클리니움에서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 넣는 자가 나를 팔리라고 하신 것을 보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왼쪽에 앉은 것 같습니다. 최후의 만찬 순간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빼고 가장 상석에 앉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두 번째 자리, 상석에 앉힐 정도로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배신했습니다. 우리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우리는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에게 머릿짓을 하며 예수님께 예수님을 팔자가 누군지 여쭈게 했다고 했는데 베드로는 가장 말석에 앉아 요한에게 머릿짓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다투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여기 보다는 말이 자세히 관찰하다’, ‘주목하여 보다는 뜻입니다. 1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엿봤다고 했는데 7절에서는 예수님이 그 사람들을 자세히 보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삐뚤어진 눈으로 예수님을 엿봤지만 예수님은 온전한 마음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어느 수도원에 훌륭한 수도원 원장님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원장 스승님을 존경했습니다. 하지만 한 제자를 유난히 편애하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편애하시는 것을 스승님께 항변했습니다. “스승님은 왜 공평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인데, 스승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자들의 불평과 불만은 점점 자랐습니다. 이 상황을 걱정하시던 스승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너희 신앙심을 판단하기 위한 문제를 내겠다.” 제자들은 모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스승의 말을 듣습니다. 원장 수도사는 모든 원생들에게 새를 한 마리씩 건네주며 말합니다. “지금부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가서 이 새를 죽여서 가져오너라.” 제자들은 곧바로 숲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잠시 후 제자들이 하나둘 돌아와 의기양양하게 죽은 새를 스승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났는데 스승의 총애를 받는 제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급한 수도사들이 원장을 향해 비난했습니다. “스승님! 이 친구는 결코 스승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이 간단한 일을 하는데도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이런 사람을 총애하시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저희 생각을 알아주십시오!” 수도원 원장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기다려도 제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걱정이 된 원장과 원생들은 제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얼마 후 숲에서 새를 들고 있는 제자를 발견했습니다. 스승이 물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새를 죽이고 돌아오라는 문제를 모두 간단히 해결했는데, 어찌하여 너는 아직까지도 새를 죽이지 못한 것이냐?” 제자가 대답합니다. “스승님께서는 분명 이 새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가서 죽이라 하셨지만 이 세상에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은 없었습니다.” 제자의 대답에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짓자, 스승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제자가 대답합니다. “나무 뒤에 숨어 베려고 해도 하나님이 보고 계셨고, 바위틈에 숨어 새를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그제야 스승이 이 제자를 유독 총애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경건은 내가 하나님을 엿보고, 목사를 엿보고, 성도를 엿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엿보지만 성도는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명료합니다. 예수님은 잔치에 초청을 받았을 때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쓰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잔치에 나 보다 나이가 더 많거나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참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손님일수록 늦게 옵니다. 자기 보다 더 존경받는 사람이 왔을 때 앉은 자리를 높은 사람에게 내어주고 모든 손님이 보는 가운데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끝자리로 가게 될 것입니다. 다른 자리는 이미 다 차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면 모든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높은 자리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가장 끝자리에 앉으면 주인이 더 나은 자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에 대한 결론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겸손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핵심 주제 중에 하나입니다. 다윗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편 22:6)”했고, 바울은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4:13)고 했습니다. 겸손은 모든 시대에 가장 거룩한 성도들의 특징입니다. 겸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나타내주는 표지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9에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덕목을 가르치면서 사랑을 먼저 언급하지 않고, 겸손을 제일로 꼽았습니다(12:1-10).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기독교의 제일 되는 덕목으로 겸손을 최고로 들었습니다. 온타리오 토론토의 그레이스펠로우십처치의 담임 목사 팀 찰리스는 교만은 최악의 죄악인 반면, ‘겸손은 최고의 미덕이라고 했습니다. 플러머(Plummer), “겸손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통행권이다.”라고 했습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미덕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죽어서 천국엘 갔습니다. 그 때 천국 문에 앉아 있던 예수님이 벌떡 일어나셔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라고 하시면서 얼싸 안고 환영했습니다. 천국에 갔을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환영해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지옥에 떨어져서 귀신이 환영해주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 장로님이 오니까 역시 예수님께서 벌떡 일어나셔서 내가 너의 눈물을 아노라. 네가 내 교회를 위해 흘린 땀과 눈물을 안다. 이제 영원한 안식을 얻으라.”면서 적극 환영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오니까 예수님이 가만히 앉아서 손만 내미시더니 응 왔어? 들어가 봐!”라고 하시더랍니다. 이런 반응에 목사님이 너무 섭섭해서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라고 하시니 감사하기는 한데 이유나 좀 알았으면 합니다. 예수님! 저 집사님, 저 장로님에 비해서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딱 한 마디 하셨습니다. “, 내가 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이 자리에 앉으려 그랬지?” 웃자고 만든 이야기이지만 교훈은 섬뜩합니다. 교만은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다가 천국에서 쫓겨났고, 아담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다가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지난 주간에 설교 준비를 하려고 가까운 대학 도서관에 갔습니다. 건물 사이사이에 나무를 예쁘게 심어놨어요. 콘크리트 건물 사이마다 나무가 있어서 삭막한 공간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해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무가 없다면 참 세상이 삭막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우리 교회 성도님과 저도 이 세상의 하나님의 나무 같은 존재가 되어 세상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삭막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무 같은 존재가 되십시오. 사람을 찌르는 가시나가 아니라 편안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나무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한 건물 모퉁이를 지나는데 건물 모퉁이가 기역자예요. 그 기역자 구석에 나무를 심었어요. 그리고 그 구석에 맞게 나무 가지를 삼각형으로 잘랐어요. 정돈이 잘 되어 있는 것을 보니 학교 정원 담당하시는 분이 나무가 자랄 때마다 공간에 맞게 계속 가지를 잘라주는 거 같아요.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나무는 불평 없이 그 자리에 있어요. 자르면 자르는 대로, 그늘이 지면 그늘이 지는 대로 그냥 구석 끝자리에서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있어요. 거기를 지나면서 저게 나무의 겸손인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여러분! 끝자리, 구석자리로 갑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개념의 잔치법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잔치에 초대할 사람은 전에 나를 자신의 잔치에 초대했던 사람도 아니고, 내가 앞으로 초대받고 싶은 사람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내 잔치를 자신의 잔치로 갚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잠언 22:16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부자를 잔치에 초청하는 것은 낭비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갚아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갚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갚을 수 없는 사람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개념 잔치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서 11:1-2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는 말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자선 또는 구제에 대한 말씀으로 보는 것입니다. 구제하는 것이 어찌 보면 물 위에 음식을 던지는 것처럼 어리석고 무의미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돌아올 것을 기대하거나 계산하지 않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결국 좋은 결과가 되어 자신에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는 말씀은 재앙의 날에 구제가 당신을 구제한다는 것입니다.

 

1992429일에 LA에 흑인 폭동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2,000개가 넘는 한인 가게들이 약탈과 방화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이로 인한 한인 사회의 피해액은 1조 원을 넘었습니다. 당시 한인 타운 대부분이 파괴되고 타버리는 등 쑥대밭이 됐습니다. 그때 흑인들이 직접 나서서 보초를 서면서까지 지켰던 한인 상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가게의 주인은 바로 인근 주민들에게 마마(Mama)’로 불렸던 홍정복 씨입니다. 지역 주민들이 말하는 당시 일화를 살펴보면 어린 나이에 엄마가 돼 아이 기저귀와 우유를 살 돈이 없는 여성이 망설이고 있자 홍씨는 가방에 물건들을 챙겨주고 귓속말로 돈은 다음에 주세요.”라 말하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맥주 캔을 훔쳐 달아나는 청년의 뒤에 대고는 조심해, 넘어질라라고 걱정의 말을 건넸고요. 한번은 가게를 찾은 한 남성이 생계 보조비로 받은 수표로 술을 사며 홍 씨에게 나머지는 현금으로 바꿔 달라.”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술에 취한 그가 혹여 허투루 돈을 쓸까 걱정한 홍 씨는 남성의 집에 전화를 걸어 부인에게 거스름돈을 직접 받아가도록 챙겨주기도 했습니다. 10대 흑인 청소년들이 우르르 가게에 들어와도 감시의 눈초리가 아닌 부드러운 미소로 맞이해줬죠. 홍 씨의 가게를 한 번이라도 찾은 사람들은 다 그를 마마라고 부르며 좋아하게 됐다고 해요. 당시 경찰은 할리우드 등 백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만 보호하고 한인타운 치안에는 손을 놓고 있었는데요. 이 가운데 홍 씨의 가게는 LA 한인가게 중 유일하게 폭동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아 눈길을 끌었습니다. 흑인들이 자발적으로 불침번을 서면서 교대로 그의 가게를 지켜줬기 때문입니다. 구제가 재앙의 날에 홍 씨를 구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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