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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삭개오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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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 19:7~8
주일오전예배 | 2025-08-17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어떤 사람이 개와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졌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을 개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기분이 나빠서 개를 이기려고 달리기 연습을 했습니다. 다시 개와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이번에는 비겼습니다. 사람들이 개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기분이 여전히 나빴습니다. 달리기 연습을 더 열심히 해서 드디어 개를 이겼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개보다 더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개에 관련해서는 무슨 말을 해도 유쾌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개는 주로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됐습니다. 개떡 같네, 개가 똥을 마다한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 개 보다 못한 인간, 등등의 말들을 자연스럽게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런 말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개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개를 우리 아기라고 하고, 자신을 개 아빠, 개 엄마, 개 동생이라고 자연스럽게 호칭합니다. 개가 가족 구성원 중에 하나가 됐습니다. 애완견이라고 하지 않고 반려견이라고 합니다. 개하고 함께 먹고, 개와 함께 산책을 하며, 개와 동행을 합니다. 개가 인간의 반려자가 됐습니다. 개의 신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이 개를 이렇게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개는 주인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개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 14장에 갈렙 기사가 나옵니다. 갈렙을 소개하면서 여호와께 충성했다, 온전히 좇았다는 말을 세 번 합니다. 45년을 한결같이 개처럼 주님께 충성한 사람이 갈렙입니다. 원래 갈렙은 이방인입니다. 마귀의 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의 개가 됐습니다. 갈렙의 신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렸을 때 집에서 항상 개를 키웠습니다. 애완견이 아니라 똥개입니다. 동네 어른들이 여름이면 집에서 키우는 개를 여름마다 돌려가면서 식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몇 년에 한 번씩 집에서 키우는 개가 바뀌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집에서 키운 개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똥개인데 검은 색 털이 길고 누가 가림마를 타서 털을 양쪽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털이 가지런했습니다. 제 눈에 꼭 명견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나가면 따라오려고 하고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제가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펄쩍펄쩍 뛰면서 저를 반갑게 맞이해줍니다. 제가 집에 가까이 오면 벌써 안에서 뛰는 소리가 들립니다. 쇠말뚝에 쇠줄로 매놓았는데 쇠줄이 세게 당겨져 쇠줄이 부딪히는 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립니다. 좋아서 색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밖에까지 들립니다. 제가 가까이 가면 바닥에 뒹굴고, 제게 앞발을 제게 올리려고도 합니다. 쓰다듬어 주면 좋아서 뒤로 벌러덩 눕습니다. 저를 반갑게 반겨주는 그 개가 얼마나 좋은지 벼룩이 있고 흙 마당에 뒹구는 개를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곤 했습니다. 어느 여름 날 제가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그 개가 없어졌습니다.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이 데리고 간 거예요. 그 해가 우리 집 차례였던 거예요. 마당이 휑한 거예요. 얼마나 허전한지요.

 

주인이 나갈 때 꼬리를 흔들며 따라 나와서 한참을 바라봅니다. 집 주인과 떨어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집에 들어갈 때 집 번호키를 누르고 있으면 벌써 안쪽에서 마중 나와 발로 문을 긁고 짖어댑니다. 자식이나 부인은 안 나와도 개는 나옵니다. 가족은 기분이 좋으면 나와 보고, 기분이 안 좋거나 바쁘면 안 나와요. 하지만 개는 한결같이 반겨줍니다. 주인이 집에 들어오면 따라다닙니다. 주인이 앉아 있으면 옆에 쭈그리고 앉습니다. 가만히 주인과 함께 있어줍니다. 사람들이 개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인을 보고 이렇게 좋아하는 동물이 있을까요? 우리나라 반려 동물 중 75.6%가 개라고 합니다(2022). 많은 분들이 자식, 아내, 남편은 없어도 사는데 개 없이는 못 살아요. 가까이 사는 사람이 개를 한 마리 키우는데 가족과는 산책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못 봤는데 개와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합니다. 낯에도 수시로 해요. 가족과는 산책을 하는 것을 못 봤어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개처럼 나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나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개처럼 기뻐할 수 없을까?’ ‘주님을 개처럼 사랑할 수 없을까?’

 

 

삭개오가 있습니까?

 

성경에 예수님을 만날 때 개처럼 좋아했던 인물이 있을까요? 예수님을 만날 때 주인을 만난 개처럼 정말 기뻐했던 인물이 삭개오입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 중에서 아무 조건 없이 예수님을 최고로 반갑게 맞이한 사람이 삭개오입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시자 삭개오는 나무에서 조금도 지체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바로 내려와서 기뻐하며 예수님을 영접했고, 즉시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5-6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삭개오의 태도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냥 평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삭개오처럼 기뻐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이 스토리는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이 좋으십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좋으십니까? 교회에 오는 것이 좋으십니까? 얼마나 좋으십니까?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를 향해 작은 키로 막 뛰어가는 삭개오처럼 좋으십니까? 삭개오는 주님을 만났을 때 마치 집에 돌아온 주인을 만나는 개처럼 좋아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렇게 좋은 일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삭개오가 있습니까?

 

성경에 예수님을 삭개오처럼 기뻐하며 자기 집으로 영접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나병환자는 치료받고 예수님께 감사인사도 없이 집으로 그냥 가버렸습니다. 맹인을 고쳐주셨습니다. 맹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까? 아닙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이 병 고침을 받고, 은혜를 입었지만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한 사람은 아주 소수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서 묵으시도록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여러 차례 듣고, 예수님의 기적을 눈으로 목격한 후에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집에 가셨을 때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셨을 때 아주 극진히 영접했습니다.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한 한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을 이렇게 영접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 돼서, 썩은 냄새가 나는 전혀 살 가망이 없는 오빠를 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삭개오를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신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날 삭개오는 예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럼에도 삭개오는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했고, 자신의 재산의 1/2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셔서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돼지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그 마을에서 떠나기를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것이 그 마을 사람들에게 경제적 부담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헌금 때문에 부담스러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차 한 잔에 7-8천 원이고, 빵 한 조각에 5-6천 원 합니다. 예수 믿는 기쁨이 밥 한 끼, 빵 한 조각의 가치도 안 되는 것인가요?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의 아버지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맹인은 거지였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기 수입원이 끊어져서 예수님을 싫어했을까요? 자기 아들이 맹인이었다가 눈을 뜬 것은 정말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아버지는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할까 해서 예수님을 언급하는 것조차 꺼렸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제가 가까이 지내던 권사님 한 분이 계신데 슬하에 3남매가 있어요. 큰 딸과 큰 아들은 교회를 다니지만 열심은 없어요. 평범하게 신앙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막내아들은 교회 여기저기 열심히 봉사했어요. 이런 아들 때문에 권사님이 부담스러운 게 하나 있었어요. 그것은 막내아들이 저렇게 열심히 신앙 생활하다가 목회자가 된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 한 분이 예배를 드리는데 몸에 진동이 왔어요.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한 것 같습니다. 집사님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집사님이 이때 막 거부를 했어요. “주님! 저 이런 거 싫어요.” 몸을 흔들며 막 거부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참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은사주의자고 신비주의자도 아니지만 신앙생활에 신비한 체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이 좋으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깊게 믿는 것이 부담이십니까? 저는 삭개오의 신앙을 개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삭개오는 이런 인간적인 부담을 뛰어넘어 예수님을 개처럼 조건 없이 기뻐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삭개오가 있습니까? 네 자리에서 빨리 내려오라는 말씀에 빨리 내려올 삭개오가 있습니까?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겠다는 말씀을 듣고 즐겁게 자기 집에 영접할 삭개오가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뛰고, 예수님 때문에 자신을 내려놓고 나무에 오르고,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는 삭개오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3년 사역 동안 수많은 사람의 아픔을 고치시고, 매인 것을 풀어주시고, 복음으로 자유를 선포하셨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삭개오가 유일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렇게 큰 은혜를 받았지만 예수님을 부담스러워했고,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기꺼이 영접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 이쪽으로 오십시오.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제게는 최고의 영광이며 최고의 기쁨입니다.”라고 말할 삭개오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망설이지 마십시오. 지체하지 마십시오.

 

 

2. 세리와 죄인의 친구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시자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여기 수군거리다는 말이 헬라어로 디아공귀조인데 이 단어는 와글와글 떠들다, 수군거리다, 불평하다는 뜻입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의 뒤에서 들릴락 말락 한 소리고 살짝 수군수군 거린 것이 아니라 아주 큰 소리로 왁자지껄하며 막 대놓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낸 것입니다. 이 동사가 미완료로 쓰였습니다. 한두 마디 욕을 하다가 만 것이 아니라 계속 불평하고 욕을 한 것입니다. ‘뭇 사람이라는 말을 우리말 성경은 모두라고 번역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이 유대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미음과 증오의 대상이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삭개오 때문에 자신을 욕하는 소리를 모두 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삭개오와 함께 있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제 아이들이 잘하건 못하건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이 없습니다.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습니다. 제 자식이라는 것이 기쁘고 자랑스럽고 행복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같은 마음이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저희 교회 집사님이 다니는 회사의 사장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저를 만나고 싶어 해서 교회로 오라고 했습니다. 사장이 교회 다니는 분이세요. 사장과 직원이 한 명 같이 와서 그 회사를 다니는 우리 교회 집사님 욕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의 말을 들어보지 않았으니 진위를 알 수 없지만 그 사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집사님이 많이 잘못한 것 같았습니다. 직원을 한 명 증인으로 데리고 온 것을 보면 사실인 것 같았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듣다가 더 듣고 싶지 않아서 제가 막 울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동생처럼 생각하는 집사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이 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해가 생겨서 그 집사님이 다른 교회로 갔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잘못한 것에 대해 처벌은 받아야 하겠지만 사람을 죽이고 와도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무조건 우리 교회 성도편인데.’ 그 집사님이 제 마음을 몰라주더라고요.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의 일입니다. 성도님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교회 권사님 한 분이 시내 중심가의 어떤 메이커 가게에서 물건을 훔쳤다는 것입니다. 사장님이 CCTV를 프린트해서 자수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가게 유리에 붙여놓았습니다. 거리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100m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 거리의 중앙에 있는 가게입니다. 그 권사님은 그 지역 토박이라 그 지역에서 발이 넓은 분이에요. 그 권사님을 아는 분이 지나가다보니까 그 권사님인 거예요. CCTV 성능이 안 좋아서 그 권사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봐도 누군지 모르지만 그 권사님을 아는 사람은 바로 알아보겠더래요. 그래서 가게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오라고 할 테니 유리에 붙인 걸 떼 달라고 했대요. 그래서 그 권사님이 오셔서 훔쳐간 거 다 변상하고 일이 끝났습니다. 이 이야기를 다 하시고 그 분이 하시는 말이 교회 창피해서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권사님이 계를 들었는데 그 계원들이 그 사실을 알고 그 권사님이 창피하다고 계를 깼대요. 이야기를 다 듣고 제가 이 사실을 교회에서 누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 한 분, 권사님 한 분, 그리고 자기까지 세 사람이라는 거예요. 제가 그 장로님께 전화를 했더니 그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교회 망신이라는 거예요. 오래 돼서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 치리를 해야 하나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담임목사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실을 누가 아냐고 물어보셔서 세 사람이 안다고 했습니다. 제가 정말 목사님께 놀랬어요. “서 목사! 박 장로님 조 권사님의 입을 막아라. 교회 소문나면 권사님과 그 자녀들 교회 못 다닌다.” 지역이 좁으니까 다른 교회로 갈 수도 없는 거예요. 사람들은 창피하다고 그 권사님을 손절했어요. 같은 교회 다니는 거 창피해했어요. 그런데 목사님은 그 사건을 덮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권사님을 대하셨습니다. 그런 권사님이 그 교회에 나온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그러시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제가 우리 교회 교인끼리 싸웠다고 생각해봅시다. 잘 한 사람과 못한 사람이 있을 겁니다. 잘잘못은 가려야겠지만 제가 잘한 사람 편 들지 않습니다. 부자라고, 배운 사람이라고, 편 들지 않습니다. 잘했든 잘못했든 저는 모두의 편입니다. 제가 누구의 편을 들었다고 누가 말을 한다면 그것은 100프로 거짓말입니다.

 

 

사람들은 삭개오 때문에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삭개오와 함께 있는 것을 싫어하지도 않으셨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늘도 세상 사람들은 삭개오 같은 사람들이 교회 다닌다고 비난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도 나 같은 사람이 교회 다니는 것을 허락해주십니다. 나 같은 사람이 목사이고, 나 같은 사람이 교회 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기뻐하십니다. 내가 죄를 짓던, 내가 사람들에게 욕을 먹던, 내가 주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던 여전히 주님은 내 옆에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시험에 들면 주님을 원망하고 교회 안 나오고 제 마음대로 행합니다. 어떤 사람이 집에서 키우던 개를 잡다가 놓쳤습니다. 옛날 이야기입니다. 주인이 혹시나 싶어서 메리 ~ 메리 ~ 하고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를 죽이려고 때리고, 칼을 목에 들이댄 주인에게 다시 돌아오더래요. 결국 개는 주인에게 죽었습니다.

 

 

3. 삭개오의 회개

 

삭개오는 자기 때문에 예수님의 입장이 아주 난처해지셨고, 욕을 먹고 계신다는 것 때문에 민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굳게 결심하고 일어나서 예수님과 모든 사람 앞에서 맹세를 하듯 선언합니다.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가 서서라고 했습니다. 여기 선다는 말이 서다, 세우다, 굳게 서다, 확고한 마음을 가지다, 확정하다, 고정하다는 뜻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에 모이니까 흥분해서 실행하지도 않을 것을 즉흥적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마음 먹은 것을 반드시 실행하겠다는 굳게 각오하고 모든 사람들에서 선언하듯 말한 것입니다.

 

 

레위기 6:5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누구 것을 속여서 빼앗았다면 1/5만 더해서 주면 됩니다. 그런데 네 배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했습니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에서 시작해 행동의 열매로 끝을 맺어야 합니다. 마음만 변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저는 삭개오가 이렇게 선언하는 순간 예수님을 욕하던 군중의 야유와 원성소리가 탄성과 환호로 바뀌었다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박수를 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로 인한 예수님의 난처함이 영광스러움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몇 주 전에 한웅재 목사님이 만드신 <소원>이라는 찬양을 했습니다. “삶의 작은 일에도 그 맘을 알기 원하네 / 그길 그 좁은 길로 가길 원해 / 나의 작음을 알고 그분의 크심을 알면 / 소망 그 깊은 길로 가길 원하네 /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 내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제가 찬양을 고르는데 주님이 꼭 이 찬양을 하라고 하시는 거 같아요. 이 찬양을 하려고 연습을 하다보니까 가사에 하나님”, “예수님”, “라는 말이 한 번도 안 나오는 거예요. “그분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올 뿐이에요. 게다가 멜로디가 꼭 가요와 비슷해요. 제가 이 찬양을 처음 대할 때 뭐 이런 찬양이 다 있나. 이게 찬양이야.”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이 찬양에 대해 간의 거부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연습을 하다가 이 찬양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찬양을 연습을 했어요. 그런데 제 마음에 주님이 불러도 괜찮아!’라는 마음을 자꾸 주시는 거 같아요. 그때 제가 본 것이 이 노래를 만드신 분이에요. 악보 우측 상단에 한웅재라고 쓰여 있어요. 한웅재 목사님이 만든 찬양이 매우 영성이 있어요. 그래서 다시 이 찬양을 연습을 했어요. 제가 이 찬양을 다시 부르면서 느낀 게 하나 있어요. 그것은 가사 내용에 주님, 하나님, 믿음, 말씀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가사 자체에 그 모든 것들이 녹아있구나!’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이 찬양을 그렇게 오래 전에 알게 됐지만 그렇게 은혜스럽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걸 깨닫고 나니까 너무 은혜스러운 거예요. 제게 새 노래처럼 다가왔어요.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는 하나님, 예수님, 주님, 말씀, 믿음이라는 말을 많이 해요. 그런데 삶에는 하나님이 안 계세요. 입에서는 하나님이 나오는데 손과 발에서는 하나님이 안 나와요. 어떤 분이 제 설교를 듣더니 제 설교에 예수님의 피가 없대요. 그래서 제가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 때마다 피, 십자가를 외쳐야 하나요. 제 설교 속에 그게 녹아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녹아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녹아 있는 삶, 십자가가 스며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부끄럽지만 우리 모두 예수님이 녹아있는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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