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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헨리 클라우드와 존 타운센트가 공동 저술한 『No라고 말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두 사람은 『No라고 말할 줄 아는 남편과 아내』,『No라고 말할 줄 아는 자녀 양육』, 『No라고 말할 줄 아는 데이트』라는 책을 이어서 집필했습니다. 일명 “No 시리즈”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Boundaries, 경계선들입니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이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날마다 해야 하는 중요한 연습 중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경계선 긋기”라는 것입니다.
한 집에 사는 가족이지만 경계선이 있습니다. 친한 친구이지만 친구 간에도 경계선이 있습니다. 너무 친하다고 경계선을 넘으면 안 됩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경계선이 있습니다. 부모라고 해서 자식의 프라이버시를 지나치게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경계선을 잘 긋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Yes와 No라는 말을 통해 경계선을 바르게 설정해주어야 합니다.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에게도 경계선이 있습니다. 요즘 남녀가 만나면 경계선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상대가 너머서는 안될 경계선을 넘으려고 할 때 No라고 말해야 합니다. 살을 맞대고 사는 배우자 사이에게도 경계선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도 지켜야 경계선이 있습니다. “경계선” Boundaries.
모든 것에 경계선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경계선을 긋는 일로 일상화 되어 있습니다. 이 경계선이 잘 못되면 건강하지 않습니다. 삶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 잘못된 경계선 때문에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뼈아픈 실패와 아픔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삶, 성공하는 신앙생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이 경계선이 바로 설정되어야 합니다. 특히 성도는 경건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설정되어진 경계선을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9:12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출애굽기 19:23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산 주위에 경계를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 하셨사온즉 백성이 시내 산에 오르지 못하리이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경계선을 정하셨습니다. 그 경계선을 넘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경계선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영적 경계선이 있습니다.
“영적 경계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131편은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절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절 말씀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교만하지 않겠다’, ‘오만하지 않겠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 원문에는 ‘크지 않았다’, ‘높지 않았다’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의 의미는 “큰 것”, “높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내 마음이 크지 않으며 내 눈도 높지 않습니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전에 보던 개역성경은 이 본문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 마음을 높은 곳에 두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내 눈이 높은 곳을 바라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높은 곳을 바라보는 삶은 다 나쁜가요? 높은 곳에 마음을 두는 것은 다 교만이고 오만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것을 추구합니다. 높은 것을 바라봅니다. 높은 것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삶이 발전하기도 하고 향상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시인은 마음을 높은 곳에 두지 않겠다고 할까요? 왜 시인은 높은 곳을 바라보지도 않겠다고 할까요? 우리에게 큰 비전을 갖지 말고 살라는 말인가요? 삶의 의욕도 목적도 없이 무기력하게 살라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1절 앞에 이런 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시’. 글을 쓴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삶의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얼굴빛이 붉고 눈이 빼어난 사람이었습니다(삼상16:12). 다윗이 얼마나 삶의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었는지 시편18:29에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다윗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성경구절입니다. 다윗은 주님을 의지하고 적군을 향해 달립니다. 적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다시 주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습니다. 그리고 다시 달린다. 이것이 다윗의 삶입니다.
이렇게 삶의 의욕과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 왜 “이제 내가 높은 곳을 바라보지 않겠습니다. 이제 높은 곳에 마음을 두지 않겠습니다.”라며 의기소침한 듯한 말을 할까요? 지금 다윗은 영적 경계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높은 곳이 항상 나쁜 것이 아닙니다. 높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항상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다윗은 성도가 지켜야 할 영적 경계선을 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너머서는 안될 영적 경계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절 하반절에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이 부분이 개역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내가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 “내가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 이것이 바로 영적 경계선입니다. 이전까지 높은 꿈을 가지고 일 해왔다. 어제까지 큰 꿈을 가지고 뛰어 다녔습니다. 아니 성전에 나오기 바로 직전까지 놀라운 일을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교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먼 더 나아가면 오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평생에 열심히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 건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Yes가 아닌 No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선한 열심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다윗은 억울하지 않았을까요? 성전을 지을 수 없는 이유가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개인적인 싸움을 싸웠습니까? 욕심과 탐욕의 싸움을 싸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싸움을 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싸움을 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싸움을 많이 해서 안 된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나쁜 일도 아닙니다. 선한 일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는 일입니다. 성전건축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Yes가 아니라 No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아들에게 넘깁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다윗의 심상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오늘 1절에 나와 있습니다. 바로 영적 경계선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일까지 하겠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이 헛된 욕심입니다. 해도 해도 안되는 것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헛된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높이 두고 높은 것만을 바라는 것이 오만이 될 수 있습니다.
40년 동안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가나안 땅 바로 앞에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에게 허락한 것은 여기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얼마나 들어가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는 여기까지라는 것입니다. Stop!
하나님의 선, 하나님의 경계선, 이 선을 지키시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아! 여기까지구나! 나에게 허락한 것은 여기까지구나!’ 그리고 누구도 원망하지 마세요. 하나님도 원망하지 마세요. 교회도 원망하지 마세요. 이웃도 원망하지 마세요. 부모님도, 자식도, 자기 자신도 원망하지 마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경계선에 멈추세요.
갑자기 1절과 사뭇 다른 분위기가 2절에서 연출됩니다. 2절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미치지 못할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노래하던 시인은 갑자기 “어머니의 품에 있는 젖 뗀 아기의 평화”를 노래합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말입니다. 내 영혼이 고요하고 평안한데 “젖 뗀 아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 젖 뗀 아이일까요? 젖 뗀 아이 보다 젖먹이가 엄마 품에 있는 것이 더 고요하고 평안하지 않을까요? 젖 뗀 아이보다 오히려 젖을 빨고 있는 젖먹이의 모습이 더 고요하고 평안해 보이지 않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나옵니다. 배 속에 있을 때 아이는 엄마와 하나입니다. 탯줄을 통해 아이는 엄마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와 자기 자신을 따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어난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젖을 빨면서 아이는 엄마와 일체감을 느낍니다. 엄마의 젖을 빨면서 아이는 세상 어떤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평안을 느낍니다. 탯줄과 젖은 아이와 엄마를 하나로 이어주는 그 무엇입니다. 엄마와 아이는 젖을 먹이고 먹으며 육체적인 합일을 느낍니다. 아기가 곳 엄마고 엄마가 곧 아기입니다.
그러다가 돌이 되면 젖을 뗍니다. 이때 아기는 엄청난 분리불안을 느낍니다. 그 공포와 불안으로 아이는 울고 소리 지르고 뒹굴기도 합니다. 항상 울기만 하면 젖을 주는 엄마가 이제 울어도 더 이상 젖을 주지 않습니다. 소리를 질러도 젖을 주지 않습니다. 뒹굴어도 젖을 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떼를 써도 젖을 주지 않습니다. 이때 아이는 불안합니다. 초조합니다. ‘엄마가 나를 버렸나? 내가 버림받았나?’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젖을 주지는 않지만 엄마는 여전히 엄마라는 것을 알아 갑니다. 젖을 주지 않지만 엄마는 여전히 곁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때 아이는 다시 안정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다시 평안을 찾습니다.
젖먹이 아기는 전혀 갈등을 모른 체 엄마에 대한 절대적 무조건적 무의식적 신뢰를 합니다. 하지만 젖 뗀 아이는 갈등과 아픔과 분열의 위기를 극복한 후 어머니 품에서 새로운 안식과 평안을 얻습니다. 시인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경험하지 못하면 엄마 품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충분하게 알지 못합니다. 위기와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면 엄마 품이 얼마나 좋은지 올바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 분리불안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엄마 품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젖먹이 아이가 엄마 품에서 젖을 먹으면서 엄마와 육체적 하나를 느낀다. 그러나 젖 뗀 아이는 젖을 먹지 않으면서도 엄마 품에서 엄마와 정신적 하나를 느낍니다. 여러분! 어떤 평안이 더 클까요? 이제 아이는 젖이 필요 없습니다. 엄마 자체로 기쁨을 얻습니다. 엄마와 함께 하는 그것만으로 안식을 누립니다. 엄마 품 자체로 평안을 누립니다. 젖이 필요 없는 경지에 이릅니다. 이것이 젖뗀 아이의 평안입니다.
시편 131편 1절 앞에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시편120편부터 134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131편은 그 중에 한편입니다.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1년에 여러 차례 예루살렘을 향하여 순례의 여행을 한다. 유월절, 오순절, 맥추절에 성전에 올라갑니다. 130편 1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깊은 곳에서” 시인은 깊은 웅덩이에서, 깊은 수렁에서, 깊은 곳에서 부르짖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한 순례의 길 중에 골짜기를 지날 때 이 노래를 불렀다. 시편 130편은 순례자가 인생 순례의 길에서 깊은 수렁을 만났을 때 부르는 노래이다. 인생의 깊은 골짜기를 지날 때 부르는 노래이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나이다.”
시편130편 다음에 있는 노래가 시편 131편이다. 시편 130편이 골짜기를 지날 때 부르는 노래라면 131편은 성전에 들어왔을 때 부르는 노래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지금 젖뗀 어린 아이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성전에서 예배하는 자의 심령을 노래한 것이다. 지금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의 심령을 노래한 것이다. 지금 여러분의 심령이 젖 뗀 아이와 같은가? 아직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떼를 쓰면서 젖을 요구하는 젖먹이 성도가 아닌가? 이제 젖을 떼라. 그리고 하나님의 젖이 없어도 울지 않는 젖을 뗀 아이가 되라. 그리고 하나님 품에서 성숙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십시오. 젖이 없어도 엄마만으로 만족함을 얻는 아이처럼 하나님의 임재만으로 만족과 평안을 누리십시오.
스티브 브라운의 「하나님을 누리는 기쁨」이라는 책의 한 부분입니다. 최근에 뉴욕을 방문했다가 올랜도 집으로 돌아올 때 섬뜩한 경험을 했다.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데, 폭우를 동반한 엄청난 천둥과 번개가 쏟아졌다. 내 옆자리에 젊은 엄마가 앉아 있었고 그녀는 어린 아들을 무릎에 안고 있었다. 나는 몹시 무서웠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비행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그 어린아이였다. 아이는 그런 상황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엄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에 바빴다. 함께 장난을 치는가 하면,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 심하게 흔들릴 때도 재미있다는 듯 깔깔대며 웃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웠던 것은 폭풍우로 기체가 가장 심하게 요동치던 그 시각에도 엄마의 가슴에 안겨 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3절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문 성경에서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문장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그대로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는 해석입니다. ‘바랄지어다’라는 말은 ‘기다리다, 기대하다’는 뜻입니다. 여호와를 바란다는 것은 여호와를 기다리는 삶입니다. 다윗의 신앙의 특징이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편 25: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시편 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편 40: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두 번째 해석은 “여호와 안에서 바랄지어다”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것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하나님 밖에 있습니다. 수도 없이 우리가 바라는 그 많은 것들 중에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경계선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내가 좋고 실고가 경계선이 아닙니다. 돈(이익)도 경계선이 아닙니다. 사랑도 경계선이 아닙니다. 부모님도 경계선이 아닙니다. 배우자도 경계선이 아닙니다. 자식도 경계선이 아닙니다. 선택의 경계선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바랄 수 있지만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은 바라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바란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만을 바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경계선이 흐려진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계선이 혼미해진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계선이 무너진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 멋대로 사는 거예요. 막 사는 거예요. 인생을 막 살면 안 되거든요. 경계선 인격 장애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경증과 정신병의 경계선 상에 위치한다고 해서 <경계선 인격 장애>라고 했습니다. 병명이 굉장히 재밌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계선 인격장애> 경계선 인격 장애의 특징 중에 하나가 내가 누구이고, 나의 가치관이 무엇인지와 같은 정체성 혼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며 사는 거예요. 나 자신에 대해 아는 것 같은데 어떤 때는 모르겠어요. 내가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경계선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을까 불안해합니다. 행동이 충동적이예요. 공허감을 느껴요. 자살충동이 일어나요. 왜 이런 증상이 일어날까요? 경계선이 무너져서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경계선을 정확하게 그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선을 긋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나는 여기까지. 너는 여기까지.
지금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경계선을 긋고 있는 거예요. 라인홀드 니부어의 유명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기도문입니다. “하나님, 제게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냉정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이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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