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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우리 교회가 돌무화과나무와 같은 곳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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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 19:3~4
주일오전예배 | 2025-07-27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저의 첫째가 세 네 살 때입니다. 집 앞에 빌라가 있었는데 1층은 주차장이었고 2층부터 주택이었습니다. 1층에는 기둥만 여러 개 있습니다. 낮에는 차가 없습니다. 여기서 아이와 술래잡기를 종종 했어요. 기둥 뒤에 숨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를 금방 찾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저를 못 찾습니다. 저는 기둥 뒤에서 얼굴을 살짝 내밀고 아이의 움직임을 다 보고 있습니다. 아이가 저를 찾기 위해 이쪽 기둥으로 갔다가 저쪽 기둥으로 갔다가 하지만 제가 아이의 움직임을 보고 이리저리 움직이니까 저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아이가 저를 찾게 해주려고 아이의 뒤쪽에서 기둥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아이 뒤쪽으로 살짝 지나가는 거예요. 그래도 아이가 못 찾아요. 아이들은 시야가 좁잖아요. 저는 아이가 저를 찾을 수 있도록 머뭇거리면서 더 천천히 지나갑니다. 그래도 못 찾을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저는 발자국 소리를 살짝 내면서 지나갑니다. 그제야 찾아요. 아이가 내가 아빠 찾았다며 아빠를 잡고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해요. 사실은 찾은 게 아니라 아빠가 찾게 해준 거죠.

 

 

 

1836-37절에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당신이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당신을 찾을 때까지 천천히 지나가셨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 앞으로 지나가실 때 머뭇거리기도 하시고, 서성이시기도 하시면서 천천히 가셨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삭개오가 집에서 나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소리가 들렸고,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키가 작고, 사람들이 많아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고민하다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가려고 앞으로 뛰어가는 쪽으로 천천히 따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움직임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가 당신을 찾게 해주신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찾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을 알아주지 않아도, 모른 척 스쳐지나가도, 심지어 일부러 피해가도, 주님은 늘 그 자리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신 앞을 지나가시는 주님을 찾으십시오. 맹인은 자신의 앞을 지나가시는 주님을 찾아 눈이 떠져 보게 되었고, 삭개오는 예수님을 찾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무에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아이들이 이미 올라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른이 그 장난꾸러기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올라가는 일은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입니다. 나이가 적게는 50대 초중반, 많게는 60대 중반은 되었을 것입니다. 나이 60에 예수님을 보겠다고 작은 키로 뒤뚱거리기도 하며 버둥거리기도 하며 나무에 오르는 일은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우스꽝스러운 행위입니다. 삭개오는 명품 옷과 명품 신발을 착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무에 오르느라 옷과 신발이 많이 망가졌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입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사회적 지위, 사회적 자존심, 체면, 자기 자신을 다 내려놓고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삭개오의 사모함이 정말 놀랍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내 앞으로 지나가시고, 기다리시는데도 내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나를 내려놓지 못해서 아닐까요?

 

욥은 하나님이 분명히 계신데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욥기 23:8-9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하나님이 앞에도 뒤에도 안계시고, 왼쪽과 오른쪽에도 안 계시대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대요. 그런데 하나님은 다 보고 계셨거든요. 욥 바로 옆에 계셨거든요. 하나님은 계속 욥 주변을 서성이시고 머뭇거리시며 지나가셨거든요. 욥기 9: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왜 욥이 자신의 앞을 지나가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을까요? 내가 지금 너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의롭다는 것입니다. 19:6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와 억울함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옆에 계신데 하나님을 찾지 못했어요. 욥은 고난을 30년 동한 당합니다. 욥이 자신의 의와 억울함을 내려놓았다면 더 일찍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내 주변에서 서성이시고, 일을 하시는데 내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내려놓지 못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몽골 이용규 선교사님의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님이 두 살 아들 동연이에게 가게에서 장난감을 사줬습니다. 동연이는 얼마나 좋았는지 두 팔로 장난감을 꼭 움켜쥔 채로 가게를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계산을 하기 위해서는 장난감을 계산대에 올려놓아야 했습니다. 직원이 동연이의 팔에서 장난감을 넘겨받으려고 했을 때 동연이는 울며 장난감을 꼭 쥔 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연이는 장난감이 자기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잠시 계산대에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내려놓기 전에는 진정한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영적 어린 아이인 우리는 내려놓으면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움켜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잡고 있는 한 그것은 우리 것이 되지 못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내려놓으면 다 잃어버려. 너 망해. 망하지 않으려면 꼭 움켜쥐고 있어야 해. 그래야 네 것이 돼.”

 

 

 

1980년대 가수 <시인과 촌장>이란 그룹의 멤버인 하덕규 씨가 작사 작곡한 <가시나무>란 노래가 있습니다. 내용을 볼 때 가시나무는 사람에 대한 은유입니다. 사람이 가시나무라는 것입니다. 하덕규 씨가 방송생활을 하다가 회의를 느낍니다. 자신에게 방송생활이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를 다니게 됩니다. 교회를 다닌 후에 다시는 세상 가요를 부르지 않기로 하고 ccm만을 부릅니다. <가시나무>ccm입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이 김()입니다. 지난 71일 기준으로 김가가 5천만 명 중에 10,689,959 명이라고 합니다. 1/5입니다. 그 다음이 이() 가입니다. 이가가 7,306,828 명입니다. 그 다음이 박() 가입니다. 박가가 4,192,074입니다. 그런데 김가, 이가, 박가 보다 더 많은 성이 내가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도 찌르고 나도 찌릅니다. 사람이 가시나무입니다. 그래서 나도 아프고 다른 사람도 아파요. 그래서 외로워요. 마흔에 읽은 쇼펜하우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고슴도치 가시에 관한 우화가 나옵니다. 어느 마을에 고슴도치 형제가 살았습니다. 겨울이 됐습니다. 고슴도치 형제는 너무 추워 둘이 꼭 안았습니다. 그때 가시가 서로를 찔렀습니다. 가까이 오지 말라며 형제는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형제는 너무 추워 다시 껴안았다 따가워 다시 멀어지고 다시 껴안고 멀어지고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가 형제는 너무 가깝지 않고, 너무 멀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기로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관계에서 꼭 필요한 것이 거리두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가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실제 고슴도치는 사랑을 하면 가시를 눕힌다고 합니다. 고슴도치는 사랑 앞에서 가시를 내려놓습니다. 그래서 고슴도치는 사랑하는 상대는 가시로 찌르지 않습니다. 고슴도치는 아내, 자식, 친구를 찌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아내 앞에서, 자식 앞에서, 그리고 주님 앞에서 나라는 가시를 내려놓읍시다.

 

기독교 신앙은 내가, 내가.” 하던 것을 주님이, 주님이”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나의 인생의 주인이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오셨다면 이 시간 나를 내려놓으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더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내려놓아야 진짜 내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내려놓은 만큼 채워주십니다. 많이 내려놓을수록 더 많은 것을 주십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대저택에 있을 때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나무에 올라갔을 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미국의 작가인 네빌 고다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 여러분! 주님 앞에서 내려놓읍시다.

 

여기서 3km 떨어진 곳에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기독교 대학의 교수들이 다니는 교회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식사를 준비할 사람이 없어서 부목사님 사모님이 식사를 준비해요. 교수라고 아무도 밥을 안 해서 부목사님의 사모님을 밥을 하는 거예요. 부목사님의 사모님이 밥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제가 토요일에 국수국물을 냈습니다. 아내 안 시켰어요. 제가 하고 싶어서 제가 했어요. 저 아는 목사님 한 분도 토요일에 성도님들이 드실 밥을 직접 준비했습니다. 사모님 안 시키고 당신이 직접 했어요. 지금은 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못하는데 몇 달 전까지 하셨어요. 봉사는 누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수가 무슨 큰 벼슬이라고 교회에서 봉사를 못해요. 학교에서만 교수지 교회에서는 교수 아니라 똑같은 성도잖아요. 세상 직분 가지고 으스대는 곳이 교회예요. 그게 뭔데 못 내려놓고 서로 교수라고 목에 힘주고 있어요.

 

저 군대 있을 때 군종 목사님께 설교 시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사단장, 투 스타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사단장이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싶은데 사병들이 다 하니까 뭐 할 게 없어요. 고민하다가 사단장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물었어요. “목사님! 제가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싶은데 할 게 없네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주일날 제복을 입고 오셔서 교회 문 앞에서 서서 사병들이 오면 맞아주시고, 사병들이 들어가면 전투화 정리를 좀 해주세요.” 신발을 벗고 들어갈 때입니다. 사단장이 그 주부터 별 두 개를 달고 교회 현관 앞에 서서 사병들을 맞이했습니다. 인사도 하고, 손도 잡아주고, 전투화도 정리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단이 뒤집어졌어요. 사병들이 부대에 돌아가서 교회 안 다니는 사병들에게 교회가면 사단장이 나와서 인사하고 안수도 하고 전투와도 정리해준다고 했어요. 온 부대에 소문이 났어요. 그랬더니 교회에 사람들이 미어터지는 거예요. 사단장 구경하러 사병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군 목사님은 대위입니다. 사단장 보다 계급이 한참 아래입니다. 나이로 따져도 한 참 아래입니다. 거의 아들벌입니다. 사단장이 목사님에게 나를 뭐로 보고 그런 일을 시키느냐고 하지 않았어요. 계급, 나이, 권세 다 떼고 순종했어요. 사단장이 나이, 계급, 자존심 내려놓으니까 부대가 뒤집어지잖아요. 자존심, 직책, , 세상 명예 그까짓 게 뭔데, 그게 뭘 그리 대단하다고 못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나와서 목에 힘주고 있을까요? 그러니까 주님을 못 만나죠? 백날 예수님을 믿어도 발전이 없죠. 삭개오처럼 나를 주님 앞에서 내려놓읍시다.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돌무화과나무는 신약성경에서 여기만 나오는 식물입니다. 돌무화과나무 잎은 뽕나무 잎처럼 생겼습니다. 뽕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은 뽕나무라고 번역했습니다. 열매가 무화과와 비슷한데 당도는 무화과보다 떨어져서 돌무화과라고 했습니다. 백뽕나무, 애굽무화과나무라고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돌배, 개복숭아가 있죠. 맛이 많이 떨어집니다. 돌무화과나무 열매는 떫습니다. 열매가 열리면 나무에 올라가서 열매에 일일이 바늘로 구멍을 내고, 올리브기름을 바르면 열매가 달콤해집니다. 구약성경 아모스서에 아모스 선지자가 자신을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 뽕나무가 돌무화과나무입니다. 무화과보다 상품성은 떨어집니다. 그러다보니 길가에 이 나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열매는 성경 시대에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들의 귀한 식량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먹지 않습니다.

 

여리고 성은 종려나무 성읍이라고 불릴 정도로 종려나무가 많습니다. 돌무화과나무 보다 종려나무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왜 종려나무가 아니라 뽕나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을까요? 그것은 종려나무는 올라가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종려나무는 전문가가 아니면 못 올라갑니다. 아무나 올라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돌무화과나무는 올라가기가 쉽습니다. 이 나무의 특징은 가지가 사람이 올라가기 쉬운 형태로 뻗어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키 작은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이 나무에서 삭개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만납니다. 저는 우리 등대교회가 사람들이 쉽게 오를 수 있는 가지가 있는 돌무화과나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올라가기 어려운 나무가 아니라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나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쉽게 걸터앉을 수 있는 가지가 있는 돌무화과나무처럼 되면 좋겠습니다.

 

교회 뒤에 봉서산이 있잖아요. 산에 가면 등산복 차림의 사람도 있지만 그냥 편한 옷을 입고 온 사람도 많아요. 아주 간혹 치마를 입고 올라온 사람도 있고, 구두나 단화를 신고 온 사람도 있어요. 일을 하다가 올라왔는지 자켓을 그대로 입고 온 사람도 있어요. 봉서산은 아무 때나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입니다. 새벽 3-4시에도 오르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산에 다니면서 우리 교회가 봉서산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하나님이 저보고 그러시는 것 같아요. “네가 봉서산 돼라.”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 내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 살길 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 삶의 한절이라도 그 분을 닮길 원하네 / 사랑 그 높은 길로 가기 원하네여러분이 봉서산이 되어주세요. 여러분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지를 내어주는 돌무화과나무가 되어주세요.

 

불당동 신도시 지역에 있는 교회입니다. 여러분도 오가 가다 많이 본 교회일 것입니다. 지금은 수천 명 모이는 큰 교회가 됐지만 불당동 신도시 지역으로 가기 전에는 수십 명 모이는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처음 거기로 갔을 때 등록교인보다 출석 교인이 훨씬 많았습니다. 몇 십 명이 아니라 몇 백 명이 많았습니다. 등록을 안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제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임직투표를 하는데 한 장로님이 투표용지를 어떤 분에게 줬더니 자기는 이 교회 성도 아니라며 그냥 가더래요. 그 교회에서 10년 이상을 봐서 당연히 교인인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니래요. 호서대 교수님 중에 한 분이 대전에서 박사 학위를 공부할 때였습니다. 그쪽에 신도시가 들어설 때입니다. 그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등록교인이 300명인데 주일날 출석은 500-600명이라는 거예요. 등록 안하고 다니는 거예요. 요즘은 사고도 많고, 상처도 많고, 문제가 많아서 사정에 따라서 조심하느라 등록을 안하고 조심조심 다니시는 분이 꽤 있는 것 같아요. 현대 교회의 큰 아픔이죠. 정말 슬픈 일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는데 오늘 교회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곳이 됐습니다. 어려워서 교회를 못 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등대교회는 그 모든 문제, 아픔, 상처, 슬픔, 고통을 주님 앞에 다 내려놓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봉서산이 되어주세요. 아무 때나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걸인이 와도, 깡패가 와도 눈치 주지 마시고 손을 잡아 주세요.

 

 

 

삭개오는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부모님은 삭개오가 순수하게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돈벌레가 됐습니다. 돈과 성공을 위해서 신앙도 팔아먹고, 양심, 가족, 친구, 이웃, 나라까지도 팔았습니다. 창녀가 몸을 파는 사람이라면, 세리는 나라와 백성을 피를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개와 세리, 창녀와 세리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인간 말종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돌무화과나무는 이 인간 말종에게 자신의 가지를 내어주었습니다. 돌무화과나무가 삭개오에게 너 같은 나쁜 놈에게 내 가지를 내어줄 수 없어. 당장 내려와. 너는 내 가지에 앉을 자격이 없어.”라고 소리치지 않았어요. 우리 등대교회가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인간 말종 같은 사람도 올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와도 돌무화과나무처럼 자신의 가지를 흔쾌히 제공해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누구나 편하게 오를 수 있는 봉서산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누구나 오를 수 있는 돌무화과나무 같은 곳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돌무화과나무 아래 서시더니 삭개오를 바라보시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고 하십니다. 시선을 삭개오에게 고정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의 시선이 이곳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시선이 여러분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 중에 삭개오를 콕 찍어서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지극히 개인적인 부르심입니다. 군대에 갔습니다. 입소 대에서 일주일, 논산훈련소에서 일주일, 306 보충대에서 일주일 대기했습니다. 대기를 하는 동안 기간 병들이 작업을 시킵니다. 기간 병들이 대기병들을 조그만 운동장에 열을 맞추어서 세워놓더니 1열부터 3열까지 작업을 시키고 나머지는 내무반에 들어가서 쉬라고 했습니다. 오후에 또 모이게 하더니 7열에서 10열까지 작업을 시켜요. 다음 날입니다. 이번에는 열이 아니라 행으로 일을 시킵니다. 오늘은 1행부터 3행 작업. 오늘은 57, 10행 작업. 이런 식이에요. 모일 때마다 자기가 선 줄이 걸릴까 조마조마해요. 걸리는 사람은 매일 작업을 하고, 안 걸리는 사람은 매일 쉬는 거예요.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장난하듯 무더기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성도는 덤핑처리 된 존재가 아니에요. 주님의 시선이 이 시간 이곳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콕 찍어 부르셨듯이 나를 콕 찍어서 부르셨습니다.

 

이사야 43: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영적인 이스라엘, 영적 야곱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지명하여 부르셨듯이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명해서 부르셨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라는 말을 우리말 성경은 내가 네 이름을 불렀으니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요한아! 너는 내 것이다.” “영윤아! 너는 내 것이다.” 꼭 찍어서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성도는 덤핑처리 된 물건이 아니에요.

 

김춘수의 <>이란 시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셨고, 예수님이 이름을 부르셨을 때 삭개오는 꽃이 됐습니다. 신약성경 2천년 역사 가운데 여리고 성에서 기억되는 사람은 삭개오 한 사람 뿐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셨을 때 삭개오는 여리고성의 꽃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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