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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세리의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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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 18:9~14
주일오전예배 | 2025-06-22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스노비즘이란(Snobbism) 말이 있습니다. 본질, 알맹이에는 관심이 없고, 과시하기 위해 껍데기만 빌려오는 성향 및 허영을 일컫는 문화사회학 용어입니다. 고상한 척, 신사인척, 지성인인 척 하는 속물근성을 이르는 말입니다. 성경에도 스노비즘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얼마나 성령이 충만했는지 성도들이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전부 내놓고 필요에 따라 썼습니다. 내 것, 네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일에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참여했습니다. 두 사람은 재산을 팔아 교회에 내놓으려고 하다가 아까운 생각이 들었는지 일부를 감추고 일부만 드리면서 전부를 드린 것처럼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다는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은데 성령 충만한 것처럼 보이고 싶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가짜 헌신은 스노비즘, 세속적인 속물근성 때문입니다. 크리스천 중에는 영적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 있는 척. 헌신하는 척, 위신 때문에 봉사하는 척, 모두 영적 스노비즘입니다. 영적 스노비즘의 문제는 하나님 보다 사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우상숭배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신앙적 행위들을 자신들의 명예나 위신을 높이는 일에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명예 추구의 도구가 됐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외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적 허세, 영적 스노비즘입니다. 영적 허세, 속물근성을 버리고 순수한 신앙을 가집시다.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해발 800m의 높은 고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해발 200m이고, 사해는 해발 430m입니다. 요단강에서 보면 예루살렘 성전은 1000m 이상의 고지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성전에 가는 것을 성전에 올라간다고 표현합니다. 높은 곳에 올라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성전에 올라간다고 표현하는 진짜 이유는 성전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입니다. 이 경외심이 성전의 올라가는 성도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고조시켰습니다. 영적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려는 신앙적 열망입니다. 성전에 가는 것은 영적 상승입니다. 껍데기만 올라가면 안 됩니다. 마음도 올라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성전에 오실 때, 또 예배할 때 마음 속에 영적 상승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간 이유는 이스라엘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란 높으신 하나님에 대한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의 엎드린 이야기입니다. 기도는 경외입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낮아지고 가난해졌습니다. 기도하자 하나님이 그를 높이셨습니다. 한나는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사무엘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찬양은 마음이 가난하고 낮은 자들의 노래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은 마음은 가난하지도 낮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전에 올라갔지만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경외심도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경외는 경외심이 조금도 없는 경외였습니다. 껍질만 경외였습니다. 성전에 올라왔지만 어떤 영적 열망도 없었습니다. 순전한 경외심으로 성전에 올라오십시오. 영적 열망을 갖고 오십시오. 그 경외심을 하나님이 받으셔서 여러분의 마음에 영적 상승이 있기를 바랍니다. 찬양 한 소절에, 말씀 한 마디에 감동이 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올라갈 때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부릅니다.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 15편의 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입니다. 성전 순례의 노래입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 올라갈 때 찬양을 했을 것입니다. 그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습니다. 11절 끝에 감사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감사한 내용을 보십시오. 감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정죄뿐입니다. 9절에 사람을 멸시한다는 말이 헬라어로 엑수데네오입니다. 엑수데네오는 멸시하다’, ‘경멸하다’, ‘업신여기다’, ‘무시하다’, ‘몹시 얕보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은 감사, 찬양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경멸했습니다. 그의 감사에는 성전 제단에서 드려지는 제사의 사죄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에 은혜에 대한 감사,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십자가가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핵심입니다. 바리새인은 감사한다고 했지만 감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정죄였습니다. 잘난 체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찬양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찬양도 보이지 않습니다. 찬양이란 부유하신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노래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은 마음이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노래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감사는 감사 없는 감사였고, 찬양 없는 찬양이었습니다. 진정한 찬양의 제사를 드립시다.

 

바리새인은 어떤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다고 했고,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기도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의 기도에는 기도는 전혀 없고 자기 자랑만 있습니다. 그는 어떤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섰지만 어떤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기도 없는 기도였습니다. 얼마 전에 아내가 까지 않은 콩을 사왔어요. 까서 밥에 넣어주는 줄 알았더니 콩을 통째로 쪄서 주더라고요. 까서 먹다보니 알이 꽉 찬 게 있고, 어떤 거는 알이 하나만 들었어요. 쭉정이나 다름이 없어요. 까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요. ‘쭉정이를 왜 팔았지?’ 하나님께 쭉정이를 팔지 맙시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는 예배 때 기도하고, 기도하고 싶을 때 기도하고, 식사 때마다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 정말 기도해야 합니다. 그냥 멍하니 눈만 감고 앉아있으면 안 됩니다. 기도가 있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모임이 있을 때 한 분이 대표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도 후에 어떤 분은 옆에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식사를 할 때 다시 기도를 합니다. 방금 기도한 것을 잊은 것일까요? 기도 없는 기도를 한 때문일 것입니다.

 

세리는 의롭다함을 받고 바리새인은 의롭다함을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왜 바리새인은 의롭다함을 받지 못했을까요? 바리새인은 스스로를 너무나도 좋은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그는 불의한 사람들과 같지 않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의롭다는 것입니다. 또 그는 자신을 아주 신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그는 매주 금식하고, 십일조를 빠지지 않고 드렸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을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자신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하나님께 어떤 도움이나 은혜를 조금도 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전혀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왜 하나님께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을까요? 너무 선하기 때문에 죄 용서도 필요 없고, 너무 선해서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착해서 천국에 갈 필요가 없고, 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도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그렇지 않습니까? 잠언 16:2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바리새인은 악인들과 자신을 비교했습니다. 토색의 문자적으로 이리처럼 탐욕스러운’, ‘게걸스럽게 먹는이라는 의미로 강도, 사기꾼을 가리킵니다. 불의는 사회의 정의를 해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은 강도, 사기꾼과 비교하며 자신을 성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간음하는 자들, 세리들과 자신을 비교했습니다. 세리와 창기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욕을 먹는 악한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가장 손가락질 받는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을 완전히 성화된 사람처럼 생각했습니다. 저는 노래를 못해 항상 노래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돌아가신 조용기 목사님이 노래를 그렇게 못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전에 부목사로 있던 교회에서 한 목사님이 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에 비하면 서 목사님은 성악가예요.” 제가 조 목사님에 비하면 저는 성악가래요. 19758~10월 김대두(당시 25)는 수원 · 평택 · 양주 일대에서 시골 외딴집에 사는 일가족 17명을 잔혹하게 살해했습니다. 그 사람에 비하면 저는 성자 중에서 성자입니다. JMS 교주 정명석은 여신도들에게 온갖 몹쓸 짓을 하고 17년 형을 받았습니다. 정명석에 비하면 저는 목사 중에 목사입니다. 하지만 바울에 비하면 저는 목사도 아닙니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비추면 저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바리새인의 비교 대상은 이 세상의 악인 중에 악인이었습니다. 나의 신앙을 측정하려면 악인이 아니라 존경받는 사람들과 비교해야 합니다. 기도도 하지 않고, 예배도 자주 빠지는 사람과 비교하면서 이만하면 내 신앙 괜찮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500명 중에 490등 하는 학생이 자기 뒤에 있는 10명과 비교하고 내가 1등이네.”라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꼴찌와 자신을 비교했습니다. 가인, 사울, 가룟 유다 같은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바리새인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의롭게 생각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들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보다 더 많이 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구약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 중에 대속죄일인 710일 하루만 금식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했습니다. 1년이 52주이니까 1년에 104일을 금식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 보다 104배를 더 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바리새인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KJV 성경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드린다고 번역했습니다. 수입이 아니라 재산 중에서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원문도 같습니다. 바리새인은 성경 말씀 보다 더 많이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명령보다 더 많이 했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성경 위에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위에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너무 교만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더 중한 율법의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바리새인은 율법의 껍데기는 지키고 정신은 버렸습니다. 바리새인은 왜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했을까요? 속물근성 때문입니다. 영적허세, 영적 스노비즘 때문입니다.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봅시다.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세리는 멀리 서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성전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넓은 마당이 나옵니다. 이 마당을 <여인의 뜰>이라고 합니다. 문을 한 번 더 통과가면 이스라엘의 뜰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제사장의 뜰이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은 여인의 뜰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여인의 뜰을 기도의 뜰이라고도 합니다. 바리새인은 이 기도의 뜰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전 들어가기 전에 성전 밖에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멀리 섰다는 말에서 세리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성전 밖에 있는 이방인의 뜰에서 기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리는 자신을 감히 기도의 뜰에도 들어갈 수 없는 비천한 존재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세리의 기도는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추측컨대 세리는 이방인의 뜰 중에서도 사람이 오가는 넓은 곳이 아니라 한 귀퉁이에서 누가 볼까 조심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세리처럼 기도하는 자신만의 기도의 뜰이 있습니까? 나만의 기도의 뜰이 있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 중에 당신만의 기도의 뜰을 찾으셨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19명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기도 시간이 되면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행주치마를 뒤집어쓰고 그 자리에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행주치마가 수산나의 기도의 뜰인 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탈릿이라는 수건으로 몸을 감싸거나 머리에 씁니다. 몸과 머리에 수건을 두르면 기도에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 탈릿이 유대인들의 기도의 뜰인 셈입니다. 예수님도 전통에 따라 탈릿을 두르고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겨울에는 새벽기도 시간에 나와서 예배실에 앉아있으면 춥습니다. 그러면 저는 패딩 모자를 뒤집어씁니다. 그러면 훨씬 덜 춥습니다. 그런데 모자를 쓰면 덜 추워서 좋기도 하지만 기도에 더 집중이 잘 됩니다. 나만의 기도의 뜰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기도의 집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문화생활을 합니다. 교회가 문화공간이 되었습니다. 교재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교회에 가면 교회에 기도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도실이 없어지고 카페가 생겼습니다. 교회가 밥 먹고, 차 마시고, 문화생활을 하고, 사람만나는 곳이 됐습니다. 문화와 교재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합니다. 기쁨의 교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두 번째, 세 번째 것입니다. 진짜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먼저예요. 교회는 기도의 집입니다. 교회는 크리스천의 기도의 뜰입니다. 우리 등대교회가 여러분의 기도의 뜰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했지만, 세리는 멀리 서서 기도했습니다. 11절에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기도했다는 말은 없고 멀리 서서 있었다고만 했습니다. 기도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을 보면 세리는 자신의 기도를 기도라고 말하기도 부족하게 여긴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의 몸짓에 그것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감히 눈(고개)을 들 생각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눈(고개)을 드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고개는 아래로 푹 숙여져 있었고, 눈은 땅을 향해 있었습니다. 세리는 죄인이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보는 행위를 불손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비천한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세리의 기도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나와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예배에 하나님에 대한 세리와 같은 경외감이 있습니까?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경외함이 없었지만 세리의 기도에는 경외함이 있었습니다.

 

세리의 기도에는 애통이 있었습니다. 세리는 기도하기 전에 먼저 가슴을 쳤습니다. 여기서 쳤다는 말은 한 번 쳤다는 말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서 계속 쳤다는 의미입니다. 치다는 말이 헬라어로 튑토입니다. 튑토는 상처가 날 정도로 친다는 뜻입니다. 세리는 자신의 가슴을 살살 친 것이 아니라 아플 정도로 세게 쳤습니다. 튑토에서 튀포스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 말은 찍힌 자리, 흔적, 표라는 뜻입니다. 세리는 흔적이 남을 정도로 아주 세게 쳤습니다. 피멍이 들 정도로 가슴을 쳤습니다. 그의 몸에는 기도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몸에 신앙생활을 하다가 생긴 흔적이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 피곤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한 영광의 상처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슴을 쳤다는 말은 마음을 쳤다는 의미입니다. 손과 발이 죄를 짓기 전에 마음이 먼저 죄를 집니다. 그래서 그는 가슴을 쳤습니다. 눈으로 죄를 졌습니다. 안목의 정욕에 빠졌습니다. 더러운 눈을 감히 하나님을 향해 들 수가 없었습니다. 발로 죄를 짓는 곳에 갔습니다. 그래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세리의 몸짓에는 진정한 애통이 있었습니다. 회개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애통함이 있습니까? 조금 안타까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가슴을 찢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세리의 몸짓과 자세가 중요하고 의미심장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세리의 몸짓이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속물근성이 있으면 안 됩니다.

 

이 모든 행동은 세리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들이었습니다. 누구를 의식한 행동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는 기도였고, 아주 순수한 기도였습니다. 세리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없지만 헬라어 원문 성경에는 죄인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이 죄인 앞에 부정관사를 썼지만, NASB는 정관사를 써서 그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죄인이라는 말은 가장 나쁜 죄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죄인 중에 죄인, 가장 더러운 죄인, 가장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죄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세리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가장 끔찍하고 가장 나쁜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라는 주어가 한 번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은 나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나는 의인이고 다른 사람이 죄인이라고 했지만 세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바로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는 회개자였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회개자가 되십시오. 바리새인처럼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나아가는 최고의 방법은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불렀습니다. 사람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사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성전에 나오면 오직 하나님만을 부르십시오. 예배할 때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하십시오. 사람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바라보다 보면 상처를 입습니다. 배신당하고, 찔리고, 서운하고, 빼앗깁니다. 사람들이 왜 우울하고, 공황장애가 오고, 강박장애가 오나요? 사람 때문이 아닌가요? 사람을 바라보면 아파요. 바리새인은 성전에 올라와서 주변의 다른 사람을 둘러보며, 하나님 앞에서 입을 삐쭉거렸습니다. “어이구, 저런 인간이 성전에 올라왔네요! 나는 저런 나쁜 인간과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주변에서 자신을 욕하거나 말거나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자신을 욕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우연을 가장해 암살했습니다. 아주 파렴치한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회개하면서 내가 주께만 범죄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아나 다른 사람에게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다윗의 통탄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해결됩니다. 세리는 하나님 외에 자신의 비천함을 도와줄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비 외에는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불렀습니다. 은혜만을 구했습니다.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일터에 가시면 사람도 만나시고 돈도 버세요. 학교에 가면 선생님을 만나세요. 카페에 가시면 맛있는 커피를 드세요. 그런데 교회에 오시면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교회에 오시면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교회에 오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나에게 호의를 가지소서.” 또는 나와 화해하소서.”입니다. 세리는 죄인이었고, 바리새인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지 못했고, 바리새인보다 더 배우지 못했지만 복음의 핵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화해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나와 하나님과의 화목제물이십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나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내가 예배할 때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은 나를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예배를 받아주신다는 것은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나를 의롭다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안아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씀은 나와 화해하소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가 내게 샬롬입니다.

 

세리는 기도 후에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세리가 기도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세리는 믿음에 대한 고백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의 기도에는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간구가 있었습니다. 세리는 오직 은혜만을 구했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긍휼하심을 구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방편입니다. 우리 기도에 예수님의 구속에 대한 찬미가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중에는 기도라고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리의 기도 중에는 기도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죄의 고백이 전혀 없고 자신의 미덕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세리의 기도는 죄에 대한 고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세리의 기도의 탁월한 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이었고, 자비로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호소였습니다.

 

세리는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받아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세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세리의 가슴에는 은혜로 채워졌습니다. 은혜로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바리새인이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바리새인을 받아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의 가슴에 은혜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가슴은 썰렁했습니다. 세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에 안고 집으로 내려갔지만 바리새인은 은혜 없는 썰렁한 가슴으로 집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갈 것입니다. 모두 의롭다하심을 받고 충만한 은혜를 가슴에 안고 내려가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시는 그 넘치는 은혜로 한 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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