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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미국 프로 야구사에 타이콥이란 전설적인 선수가 있었다. 그는 24년간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며 타율이 3할 이하로 내려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열 두 번이나 타격왕에 올랐다. 초기 9년 동안은 타격왕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싹쓸이 했다. 은퇴할 당시 90개의 메이저리그 기록을 갖고 있었다. 명예의 전당에 홈런 왕 베이브 루스보다 더 많은 표를 얻어 올랐다(98.23%, 베이브 루스 95.1%). 팬들은 열광적으로 타이콥에게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1961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한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야구 관계자는 세 명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의 자녀들조차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타이콥의 지나친 승부욕과 잔인함, 비열함, 편집증으로 인해 '그라운드의 외로운 늑대', '방망이를 든 난봉꾼', ‘가장 악랄한 선수’ 등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참을성 없는 성격으로 걸핏하면 동료들과 싸웠다. 관중석에 난입해 자신을 야유하던 장애인 관중을 흠신 때려 선수의 자격이 영구히 정지되기도 했다.
타이콥의 괴팍한 성격은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었다. 메이저리그에 데뷔할 당시 어머니가 아버지를 총살한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어머니는 집을 침입한 강도로 오인했다고 했지만 타이콥은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았다. 일생을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살았다. 타격할 때마다 그는 아버지를 생각했다.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그를 타격왕으로 만들었다. 어머니에 대한 원한이 그를 최고의 야구 선수로 만들었다. 하지만 타이콥은 그 증오로 일생을 자유하지 못했다. 그의 과거가 그의 현재의 삶을 증오와 분노로 가득하게 했다. 현재 삶이 과거에 갇혀 있는 감옥이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과거의 아픈 기억을 해소할 길을 찾아보아야 한다. 용서는 용서한 그 사람을 먼저 자유하게 한다. 과거를 용서할 때 용서하는 그 사람에게 참 자유가 있다. 과거를 잊을 때 잊는 그 사람에게 참된 행복과 평안이 있다. 오늘 본문에 과거의 원한과 분노를 잊은 사람이 있다. 바로 요셉이다.
1.므낫세
므낫세는 “잊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나샤란 말에서 온 왔다. 그러면 요셉이 무엇을 잊었다는 말일까? 51절을 보자.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이란 형제들에 대한 원한이다. 요셉은 자신의 모든 고난과 형제들에 대한 원한을 하나님이 잊어버리게 하셨다고 했다. 요셉이 과거의 모든 고난을 망각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커서 과거의 고난을 잊게 된 것이다.
그러면 요셉이 당한 고난은 무엇일까? 먼저 형제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요셉의 형제는 디나를 포함해서 12명이나 된다. 그 많은 형제들에게서 요셉은 왕따를 당했다. 여러분! 혹시 왕따를 당해 봤는가? 왕따의 고통에 대해 아는가? 나는 초등학교 시절 왕따를 당한 적이 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시골 마을에서 살았다. 고등학생 형들이 동네 아이들 중에 자기들 맘에 들지 않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아이들을 왕따 시키곤 했다. 2주나 3주 정도 그 아이 하고는 같이 놀지도 못하게 하고 말도 못하게 했다. 만약 형들의 말을 어기고 그 아이와 말을 하거나 같이 놀면 함께 왕따를 당하는 신세가 됐다. 그러니까 꼼짝 없이 형들의 말을 들어야 했다. 어느 날 밖에 놀러 나갔는데 동네 아이들이 나를 살살 피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영문도 모르고 아이들이 가는대로 졸졸 따라 갔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고 놀면서 나는 끼어주지 않았다. 나는 눈치를 채고 집으로 돌아왔다. 2주 정도 지나니까 형들이 풀어주었다. 얼마나 동네가 지옥 같던지 왕따를 안당 해 본 사람은 그 고통을 모른다. 그런데 요셉은 마을에서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왕 따를 당한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형제들에게서 왕 따를 당했다. 형제들이 요셉을 심하게 미워했다. 마을에서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면 집으로 가면 되지만 형제들에게 왕따를 당하면 어디로 가야할까? 이것이 요셉이 당한 첫 번째 고난이다.
두 번째 고난은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한 일이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칠 때의 일이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세겜에 보내 형들의 안부를 알아오게 했다.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갔다. 형들이 (양을 치다가)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서로 죽일 것을 논의 했다. 제일 맏이인 르우벤이 다른 형제들이 요셉의 옷을 찢고 구덩이에 던져버렸다. 형 유다 때문에 목숨은 겨우 건졌지만 이스마엘 상인에게 종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미드라쉬에 보면 요셉은 팔려가면서 형들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의 요구를 냉정하게 뿌리쳤다. 원수가 피를 나눈 형제들이었다. 형제들에게 원한이 사무쳤다. 요셉은 치가 떨렸다. 이가 갈렸다. 복수하고 싶은 원한이 마음 속에서 끓어올랐다.
세 번째 고난은 강간 미수범으로 몰린 일이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할 때 보디발의 아내가 틈만 나면 요셉을 유혹했다. 합리적인 말로 거절했다. 그런데 여인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요셉이 자신을 겁탈하려고 했다며 모함했다. 보디발의 여인의 모함으로 요셉은 강간범이란 누명을 쓰고 지하 감옥에 갇힌다. 교도소에서 제일 지저분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이 강간범이다. 아주 추하고 더러운 죄다. 차라리 살인범으로 몰리는 것이 나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 죄에 걸리면 아무것도 못한다. 사회에서 매장 당한다. 앞길이 막혀버린다. 그런데 요셉은 그 더러운 강간미수범이라는 죄명을 쓰게 되었다. 애굽에서 요셉은 이방인이었다. 억울해도 그의 말을 받아 줄 사람이 없었다. 가장 지저분한 죄의 누명을 썼는데 하소연 할 데도 없다.
네 번째 고난은 옥살이다.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하 감옥에 갇혔다. 인생이 완전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곳까지 내려갔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곳까지 내려갔다. 시간이 갈수록 인생이 좋아져야 하는데 더 나빠졌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요셉의 인생이 역전되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제국의 2인자가 되었다. 엄청난 힘이 생겼다. 조그만 힘이 아니다. 바로는 애굽에서 요셉의 허락 없이 손을 논릴 자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자기를 햇볕 하나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옥에 가둔 시위대장이 바로 옆에 서 있다. 내가 요셉이었다면 제일 먼저 원한을 갚았을 것이다. “네 이놈! 네가 나를 감옥 집어넣었지? 내가 어디를 봐서 네 아내를 탐낼 것 같으냐? 너도 한번 죽어봐라” 보디발의 아내에게는 이렇게 했을 거다. “네 이년 나를 강간범으로 몰아! 젊은 사람의 앞길을 막아도 유분수지. 너도 한번 죽어봐라” 그런데 요셉을 보라! (요셉은) 아들을 낳고 그 원한을 잊기로 했다. 그 분노를 잊기로 했다. 그래서 아들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다.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고 마음의 모든 원한을 므낫세하였다. 원수를 잊었다.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이들을 보면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9-60) 돌로 맞으면 얼마나 아플까? 그런데 스데반은 모든 원한을 잊어버리고 천사와 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온갖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첫 번째 하신 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 인류의 죄를 므낫세 하셨다. 유대인의 죄를 므낫세 하셨다. 사람들의 침뱉음을 므낫세 하셨다. 로마 병정의 학대를 므낫세 하셨다. 사람들의 조롱을 므낫세 하셨다. 십자가의 고통을 므낫세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다. 만약 예수님이 므낫세 하지 않으셨다면 인류는 구원받지 못했다. 십자가의 은혜는 므낫세의 은혜이다. 시편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벤허”라는 영화를 우리는 잘 안다. 벤허(Judah Ben-Hur)는 예루살렘의 제일가는 유태 귀족이다. 어느날 이스라엘에 멧살라라는 새로운 총독이 부임해 온다. 총독의 부임 축하 행진 중에 벤허의 여동생의 실수로 기왓장이 총독의 머리에 떨어진다. 이를 유대인의 계획적인 음모로 보고 멧살라는 벤허 가족을 잡아들인다. 어머니, 여동생, 연인은 감옥에 보내지고 재산은 몰수당한 채 벤허는 노예로 팔려간다. 그 때부터 벤허는 멧살라에 대한 원한의 칼을 간다. 천신만고 끝에 벤허는 자유 시민이 되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에 걸려 나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골짜기에 살고 있었다. 연인이었던 에스더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벤허와 함께 예수님을 만나러 간다. 마침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길이었다. 목말라 하시는 예수님께 물을 갖다 주던 벤허는 오래전 그가 노예로 팔려가던 중 나사렛에서 그에게 물을 떠주던 사람임을 알고 놀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자 갑자기 하늘에서는 천둥 번개가 치고 기적이 일어난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벤허가 연인 에스더에게 이렇게 말을 하며 영화는 끝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 내 손에서 칼이 떠났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 내 손에서 분노의 칼이 떠났다” “예수님께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라고 말하는 순간 내 손에서 원한의 칼이 떠났다”
여러분! 내 가정을 망친 사람에게 내 삶을 파탄 낸 사람에게 내 사업을 파산케 한 사람에게 사무치는 원한이 있는가? 분노가 있는가? 나에게 열등감을 갖게 한 사람에게 미움이 있지 않은가? 나의 자존심을 짓밟은 사람에게 분노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가슴에 응어리 진 것이 있지 않은가? 이 시간 하나님은 우리가 므낫세 하길 원하신다. 원한을 므낫세 할 때 내게 자유가 온다. 벤허가 원한을 므낫세 했을 때 어머니와 동생의 문둥병이 치료받았다. 분노를 므낫세 할 때 내게 평안이 온다. 과거를 므낫세 할 때 내게 참 은혜와 행복이 임한다. 여러분! 여러분의 고난과 원한을 므낫세 하라.
2.에브라임
요셉은 뼈 아픈 과거를 잊어버리기로 결단했다. 그리고 미래는 창대해지길 소망했다. 그래서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 했고 둘째 아들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했다. 에브라임이란 말은 “두 배의 땅”이란 뜻이다. Wenham은 에브라임을 기름진 땅이라는 뜻이라고 했고, Keil은 두 배의 창성함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요셉은 창성하게 되는 것을 소망했습니다. 소망대로 요셉은 다른 형제들 보다 두 배의 축복을 받았다. 다른 형제들은 하나의 지파를 형성했지만 요셉은 두개의 지파를 형성했다. 그래서 400년 후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차지했을 때 두 배의 땅에 거했다. 에브라임 지파가 소유한 땅은 다른 지파 보다 두 배나 넓다.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소원대로 됐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말이 있다. 52절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라고 했다. 여기 수고라는 말은 원래 뜻이 “고통, 고생”(오니)이다. 창성이라는 말은 “열매를 맺다, 결실이 풍부하다, 번성하다”는 뜻이다. 요셉은 애굽에서 고통을 당했다. 아주 죽을 고생을 했다. 그런데 그 고생이 열매를 맺었다. 만약 우리 삶이 고생에서 고생으로 끝난다면 비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요셉의 삶은 고생이 고생으로 끝나지 않고 고생이 열매를 맺었다. 그것도 아주 풍부하게 맺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고생에서 고생으로 끝나는 삶이 되지 않기를 소원한다. 고생이 열매 맺기를 그것도 아주 풍부하게 맺기를 소원한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가 사는 땅을 고통의 땅이라고 했다. 우리가 사는 땅이 우리에게 안락을 제공한다. 하지만 영원히 거주할 곳은 아니다. 요셉은 하늘을 바라본 것이다. 이 땅의 삶은 나그네라는 것이다.
기독교 십자가 신학 가운데 이런 슬로건이 있다. “No Cross, No Glory” (There is no glory without the cross) 십자가 없이 영광도 없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다. 그래서 윌리암 펜은 이런 말을 남겼다.아픔이 없이는 승리도 없고, 가시의 고통이 없으면 왕좌도 없도다. 쓴 고통이 없이는 영광도 없고, 십자가가 없으면 왕관도 없도다. (No pain, no palm; no thorns, no throne; no gall, no glory; no cross, no crown. - William Penn -) 52절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여러분! 여러분이 고난 받은 땅에서 두 배의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한다. 여러분의 삶이 므낫세에서 에브라임 되기를 축복한다.
3. “내가”에서 “하나님이”로
그렇다면 요셉을 므낫세하게 하신 분이 누구인가? 요셉을 에브라임하게 하신 분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요셉을 하나님이 므낫세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에브라임하게 하셨다. 51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52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말을 시작할 때마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여러분 하나님이 하셨다. 그런데 17살 소년이었을 때 요셉은 이렇게 말을 했다. 창세기 37장 6절에 꿈을 꾼 요셉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라고 말한다. 창세기 37장 9절에도 꿈을 다시 꾸고 또 이렇게 말한다. “내가 또 꿈을 꾼즉.....” 말의 시작마다 “내가 내가 내가” 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므낫세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에브라임 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내가... 내가...” 이렇게 말하던 요셉이 이제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하셨다.
요셉은 아주 의미 있는 표현을 쓰고 있다. 51절에 “나로 나의 모든 고난”이라고 했고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이라고 했다. 누가 고난당했는가? 내가 당했다. 내가 상처를 입었다. 내가 아픔을 당했다. 그런데 그 많은 아픔을 잊도록 하신 분은 따로 있다. 고난은 내가 당했는데 그 고난을 잊게 하시는 분이 따로 있다. 바로 하나님이 그 모든 아픔을 잊도록 은혜를 주셨다. 주님께서 눈물을 씻어 주셨다.
52절에 “나로 나의 수고한 땅”이라고 했다. 여기도 나란 말을 두 번이나 쓰고 있다. 내가 수고했다. 내가 죽을 고생했다. 그런데 그 고통에 그 고난에 은혜를 주셔서 창성케 하시는 분이 따로 있었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요셉으로 하여금 그 고통을 잊게 하신 방법이 무엇인가? 어떻게 그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시니까 요셉의 머리 속에서 그 기억을 지워버리셨는가? 아니면 요셉에게 잊어버리라고 협박을 하셨는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가? 요셉이 당한 고통과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요셉이 당한 고통을 능히 삼킬만한 더 큰 복을 주시는 것이다. 풀리지 않는 형들에 대한 사무친 원한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복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요셉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 그 축복으로 아버지까지 지난 날의 고통을 잊게 되었다.
창세기 48:5절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우리는 므낫세가 형임에도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고 하지 않고 에브라임과 므낫세라고 한다. 에브라임이라는 말은 기억하지만 므낫세라는 이름은 기억하지 않는다. 게다가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은 좋아하지만 므낫세라는 이름은 좋아하지 않는다. 야곱이 에브라임이 큰 자가 된다고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브라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므낫세가 있어야 한다. 에브라임처럼 두 배의 땅에 거하기 위해서는 잊을 수 없는 일까지 므낫세 해야 한다. 그 때 우리의 삶에 참된 에브라임이 있다.
한 부부가 이혼하면서 6세 된 아들을 양자로 보냈다. 양부모는 그 아이를 구박하고 상처를 입히곤 했다. 어떤 때는 부부가 어린아이만을 집에 남겨둔 채 며칠씩 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는 구박을 받을수록 자신을 버린 친부모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자라 12살이 되던 해부터 가슴에 칼을 품었다. 언젠가 친부모를 만나면 복수하겠다는 일념에서였다. 그런 그가 22살에 위장이 망가져 위 절반을 잘랐다. 8개월 뒤에 재발하여 또 남은 위장의 절반을 잘랐다. 6개월 후에 다시 재발하자 정신과로 보냈다. 정신과 담당의사가 깊은 대화를 나누는 중에 6살 때에 자신을 버린 부모에 대한 원한으로 생겨난 병임을 알게 됐다. 이에 친부모를 찾아 용서를 구하는 길만이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길임을 알고 친부모를 찾고 보니 아버지는 이미 타계했고 어머니가 살아계셨다. 어머니는 아들의 침대 밑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으나 아들은 3일이 지나도록 어머니에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다가는 4일째 되는 밤에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엄마,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어요.” 하고 한없이 울었다. 모자는 밤새도록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 뒤로 아들의 병이 회복되기 시작한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되찾고 자신을 버렸던 일을 용서하게 되면서 건강이 회복된 것이다. 이것이 용서의 힘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비판이나 고발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이다. 므낫세가 필요하다. 사랑과 자비, 용서와 관용이 세상을 살리는 힘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용서는, 과거를 받아들이면서도 미래를 향해 움직일 수 있도록, 감옥 문의 열쇠를 우리 손에 쥐여 준다. 용서는 미래로 나갈 수 있게 하는 힘과 같다. 므낫세는 우리를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므낫세는 우리를 에브라임으로 나아가게 한다. 여러분의 삶에 므낫세의 축복이 그리고 에브라임의 축복이 함께 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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