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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은 AD 95년에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 숭배를 거부하다가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밧모섬은 에게 해에 있는 3000여개의 섬 중에 하나로 터키 에베소에서 서남쪽으로 60km 지점에 있습니다. 요한이 유배될 때 밧모섬은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량한 돌섬으로 중형 죄수들이 수감되는 수용소였습니다. 여름에는 무더위에 시달려야 했고, 겨울에는 땔감이 없어 불 없이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습니다. 밧모섬은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든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때 요한의 나이는 88세 아니면 90세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1900년 전 90세는 아주 고령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이 섬에서 죽어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죽음의 땅에서 새로운 소명을 받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고, 하늘이 열리는 환상을 보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환상으로 본 것을 기록하라는 새로운 사명을 받습니다. 1:19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예수님께서 밧모섬에서 죽어가는 요한에게 편지를 써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주님의 편지입니다.
일곱 교회 중 첫 번째 교회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첫째라는 것은 대표, 으뜸, 1등이라는 의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초대 중에 대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뛰어난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인데 바울은 AD 67년 6월 29일에 참수형을 당합니다. 돌에 목을 대게하고 참수를 했습니다. 바울의 제자였던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디모데도 목회를 하는 중에 에베소시의 아르테미스 축제 때 열광하는 군중들을 향해 말씀을 선포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합니다. 그 후에는 요한이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도 황제 숭배를 거부하다가 밧모섬에 유배됐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고령이었던 요한이 밧모섬에서 살아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한도 밧모섬에서 살아나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목회했던 두 목사가 모두 순교를 당했고, 세 번째 목회자인 요한까지 순교 직전에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교회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고민했을 것입니다. 요한도 에베소 교회의 운명을 걱정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순교 당할 즈음에 베드로도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불에 타서 죽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마지막 남은 제자입니다. 세상 권력이 교회 지도자들을 죽이고,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 박해의 끝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교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그때 요한의 눈에 들어온 환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끌리는 옷을 입으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1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목사이고,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입니다. 1:20에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고 했습니다. 7은 성경에서 완전수로 쓰였습니다. 일곱 교회는 지상의 모든 교회를 가리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주님은 오른손으로 목사를 잡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 사이를 거니시고 계십니다. 붙잡다는 말이 헬라어로 크라테오(κρατέω)입니다. 크라테오는 ‘단단히 붙잡다, 붙들어 매다, 온 마음으로 기대다, 어깨에 매달리다, 등에 기대다, 등을 껴안다, 고정되어 있다’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시다는 말은 그냥 볼펜이나 핸드폰을 쥐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단단하게 꽉 잡고 있다, 뒤에서 꼭 끌어안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신다고 했습니다. 거닌다는 말이 헬라어로 페리파테오(περιπατέω)입니다. 페리파테오는 ‘옆에서 함께 걷다’는 뜻인데 비유적으로는 ‘살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교회 속에서 거니시며 교회인 성도와 함께 살고, 성도들을 살피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밧모섬에 수감되어 있는 에베소 교회 사자인 사도 요한을 끌어안고 계시고, 지도자, 목사가 없는 교회의 성들과 함께 걷고 계시며, 함께 살고 계십니다. 계시록 22:13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고, 주관자라는 뜻입니다. 역사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등대교회 사자인 서요한 목사와 등대교회인 여러분을 등 뒤에서 끌어안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단단히 붙잡고 계십니다. 우리 사이를 거니시며 교회인 우리를 살피십니다.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입니다. 학교에서 누가 저에게 지폐를 주었습니다. 오래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한 장은 아니고 두세 장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500원짜리는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500원짜리 지폐가 있던 때입니다. 지금 제 기억으로 붉은 색을 띄고 있었으니까 1000원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5000원짜리 같기도 해요. 당시 엄청 큰 돈이었습니다. 라면 1봉이 2-30원할 때입니다. 그 돈이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저는 너무 신이 났습니다. 저는 이 큰 돈을 어떻게 집까지 안전하게 가져갈 수 있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주머니에 넣는 것도 불안하고 가방에 넣는 것도 불안했습니다. 저는 어린 마음에 오른손에 꼭 쥐고 가는 게 제일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가면서 친구들과 걷고, 뛰고, 놀기도 했습니다. 저는 중간 중간 돈이 손에 있는지 확인을 했습니다. 돈이 잘 있었습니다. 손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보니 돈이 없었습니다. 망연자실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마을에 들어오기 직전 언덕길을 올라올 때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기억이 없습니다. 다 왔다고 생각하고 친구들이 정신없이 놀다가 어디서인지도 모르게 돈을 쥔 손을 펴버리고 손에 돈이 있었는지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집으로 들어왔던 것입니다. 집에 돌아와서 다른 일을 하다가 갑자기 돈 생각이 난 거예요. 정신없이 뛰어갔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손에 있는 것을 지키지 못합니다. 손에 있는 것도 잃어버립니다. 마귀는 우리 손에서 우리 것을 아주 쉽게 빼앗아갑니다. 마귀에게는 일도 아닙니다. 정유재란 때 왜군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코를 베어갔습니다. 참 잔인했죠. 그때 “눈을 뜨고 코 베어간다.”는 속담이 생겼습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코를 베어가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손에서는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0:28-30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여기 ‘빼앗다’는 말이 헬라어로 하르파조입니다. 하르파조는 ‘훔치다, 빼앗다, 채어가다, 가지고 달아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여러분 마음 속에 예수 이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속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혀 있습니다. 아무도 주님의 손에서 여러분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손에서 채어가거나 훔쳐갈 수 없습니다.
창세기는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창5:24) 동행하다는 말이 걸어간다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 하나님과 걸어간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걷는다는 말이 믿는다는 말과 연관되어 쓰였습니다. 로마서 8:4에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영을 따라 행하는” 이 말씀을 직역하면 “(성)령을 따라 걸어가는”입니다. 또 고린도후서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이는 믿음으로 걸어가고’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등대교회 사이에 거니십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 사이를 그리고 여러분들 사이를 걷고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걸어가십시다.
에베소 교회는 정말 놀라운 교회였습니다. 2-3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행위는 인간적인 행위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수고는 단순한 수고가 아닌 피를 흘릴 정도로 고된 수고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피를 흘릴 정도로 수고했습니다. 인내는 박해의 고통을 오래 참음입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믿음의 행위와 희생을 아셨습니다. 또 에베소 교회는 악한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스스로 사도라고 하는 가짜 목회자들, 이단들, 사이비들, 이상한 신앙을 분별해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믿음에 대해 반역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부지런히 섬겼습니다. 여기 ‘게으르지 아니한’(코피아오)이라는 말은 얼마나 수고했는지 쓰러질 정도로 피곤하다는 의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을 위하여 너무 많이 수고해 피곤했고, 지쳤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주님을 위해 얼마나 땀을 흘리고 수고했는지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셨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원 2학년 개강 수련회 때 아프리카 감비아 이재환 선교사님이 강사로 오셨습니다. 이재환 선교사님은 굉장히 유명한 분이십니다. 선교사님의 사모님이 어느 날 그룹 모임 중에 앞으로 콜라를 마시지 말자고 하더래요. 감비아 선교사님들이 팀을 이루어서 선교를 같이 하신 거 같아요. 사모님 말씀은 선교를 하려면 현지인처럼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려면 콜라를 마시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1980년대의 아프리카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프리카에 아무것도 없던 때입니다. 얼마나 더워요. 선교사님들의 낙 중에 하나가 팀 본분에 있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콜라를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하지 말자는 거예요. 선교사님들이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으시더래요. 이재환 선교사님이 제가 어떤 교회에 있을 때 강사로 오셨는데 티코를 타고 오셨어요. 이분이 개강 집회 중에 하신 말씀 중에서 아주 가슴 깊이 남은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피곤하고 싶습니다.” 이 말을 울먹이면서 두 세 번을 하시는 거예요. 이 말이 아직까지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어요.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시고, 주님을 위해 피곤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지칠 정도로 먹고 놀고, 밤이 새도록 텔레비전 보고,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술을 마시잖아요. 죽을 일을 목숨을 걸고 해요. 먹방을 보니까 사람들이 혼자 짜장면을 20그릇을 먹어요. 라면을 10개 이상 혼자 먹어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피곤하고, 주님을 위해서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수고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죽을 일은 목숨 걸고 하면서 생명을 위한 일에는 관심이 없어요. 회개하세요. 주님을 위해 사십시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개척하고 떠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습니다. 성령 받기 전이었지만 에베소는 아볼로가 있던 곳입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성경에 능통하고 언변이 좋고, 주님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님을 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볼로가 얼마나 똑똑한지 성경은 말로 유대인을 눌러버렸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8:28에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말로 유대인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말로 유대인을 이겨버렸습니다. 바울, 아볼로, 디모데, 사도 요한 같은 기라성 같은 목회자들이 거쳐 간 교회이니 에베소 교회 사람들이 얼마나 잘 배웠겠습니까? 에베소 교회는 정말 모든 행위에 있어서 모범적이었고, 탁월한 교회였습니다. 주님께 너무 많은 칭찬을 듣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탁월한 교회를 향해서 치명적인 일갈을 하십니다. 그것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4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 사랑’이라는 말을 공동번역 성경은 ‘처음에 지녔던 사랑’이라고 번역했고, 영어 성경은 ‘첫 사랑’(first love)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처음 사랑은 에베소 교회가 예수님을 알고 처음에 지녔던 사랑이고, 예수님에 대한 첫 사랑입니다. 첫 사랑은 순수한 사랑입니다. 첫 사랑은 떼가 묻지 않은 사랑입니다. 뜨거운 사랑입니다. 가슴이 설레고 가슴을 졸이는 사랑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에 대한 이 첫 사랑, 순수하고, 가슴 설레는 사랑이 있으셨습니까? 이 첫 사랑을 지금도 가지고 계십니까?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이 있던 교회입니다. 책망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카타입니다. 카타는 ‘~ 반대하여, ~거슬러’라는 뜻입니다. 너를 책망한다는 말은 너를 반대한다, 너를 거스른다는 의미입니다. 2-3절과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내가 처음 사랑이 없는 믿음의 행위를 반대한다, 사랑이 없는 수고와 오래 참음을 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처음 사랑이 없는 교리, 사랑이 없는 부지런함을 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셨습니다. 목숨을 버려서 세운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처음 사랑이 없는 헌신을 반대하실까요? 바울은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 전서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무엇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 있는데 사랑이 없으면 다 없는 것 아닙니까? 결혼을 하는데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결혼식은 가짜입니다. 결혼식은 설레고, 기쁘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다면 위선이고, 우울이고, 슬픔입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차도 사주고, 집도 사주고, 명품도 사주고, 다 주는데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앙꼬 없는 찐빵 같은 부부가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용돈도 많이 주고, 좋은 학원 보내주고, 먹을 것 입을 것 다 해줘도 사랑을 주지 않는다면 껍데기만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이 빠진 수고와 헌신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가짜 사도를 분별하고, 이단을 가려낼 만큼 확고한 기독교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리는 신앙을 세우는 기초입니다.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교리는 시체일 뿐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성경은 형식주의에 지나지 않는 책이 되지 않을까요? 사랑이 없는 성경은 바리새인의 교과서입니다. 이 십자가에 사랑이 없다면 그냥 나무토막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고, 사랑이 성경의 핵심주제이며, 사랑이 십자가의 본체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 신앙의 꽃이요 왕관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꽃이 없는 꽃이 되는 것입니다. 꽃대만 있다면 얼마나 허무할까요? 꽃이 없는 꽃대는 화병에 꽂아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쓰레기통에 버려집니다. 교회에 사랑이 없다면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교회의 가치는 사랑에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하십니까? 사랑으로 예배하십시오. 찬양하십니까? 사랑으로 찬양하십시오. 봉사하십니까? 사랑으로 하십시오. 사랑이 신앙생활의 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미국의 르네 스피츠는 버려진 아기들을 돌보는 국립병원 의사였는데, 위생적인 환경에서 충분한 음식을 주면서 양육했는데도 아이들이 여위고 건강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사망률이 높았습니다. 스피츠는 이것에 대해 의문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르네 박사는 멕시코로 휴양을 갔습니다. 그는 그곳 인근에 있는 고아원의 아이들의 건강 상태가 좋은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시설도 뒤떨어지고 비위생적이며 음식도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밝고 건강했습니다. 스피츠 박사는 그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면서 연구해 결과를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고아원 이웃에 사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여인들은 고아원에 와서 아이들을 안아주기도 하고 쓰다듬어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노래를 불러주고 함께 놀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열악한 여건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밝고 건강했던 비결이었습니다. 사랑해주고 관심을 기울여 주는 게 열쇠였던 것입니다. 르네 스피츠 박사는 이 병의 이름을 마라스무스라고 했습니다. 마라스무스는 소비된다는 뜻입니다. 에너지 부족으로 몸의 조직이 지속적으로 소진되는 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잘 먹어도 건강하지 않고, 여위고,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마라스무스를 피부접촉결핍병이라고도 부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해 생기는 병입니다. 한 마디로 사랑부족병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영적으로 마라스무스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다 갖춘 교회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목회자들이 목회를 했습니다. 가장 큰 교회였습니다. 부흥했고, 풍요로우며, 명예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가 없었습니다. 사랑이 없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다 있는데 사랑이 없다면 다 없는 것입니다. 다 없는데 사랑이 있다면 다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알맹이는 없어지고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마라스무스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좋은 집에서, 좋은 것을 먹고 입고 쓰면서 살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생활이 아주 호화롭습니다. 정말 잘 살아요.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이 아파요. 조금 아픈 게 아니라 아주 많이 아파요. 불안 장애, 양극성 장애, 우울증, 해리 장애, 강박 장애, 인격 장애, 조현병, 망상장애 등등 정신질환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원인은 모른데요. 참 이상하죠. 아픈데 원인은 없어요. 이런 질병을 정신질환이라고 합니다. 저는 정신질환이 아니라 마음질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질환이나 마음질환이나 그 말이 그 말이지만 저는 이런 병들은 마음이 아픈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마음이 아플까요? 사랑이 식어져서 아픈 게 아닐까요? 현대인들은 마라스무스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도 영적 마라스무스 병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 교회가 아픕니다. 왜 아플까요? 세상에 사랑이 식는 것처럼 교회도 사랑이 식기 때문이 아닐까요? 은혜에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아픈 것이 아닐까요? 은혜를 잃어버리지 맙시다. 사랑을 잃어버리지 맙시다. 교회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성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교회가 사랑을 잃으면 다 잃은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7-8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끝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고, 사회가 메마르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합시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합시다. 주를 향한 마음이 식지 않도록 합시다. 교회의 능력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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