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계정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
2 == 2 ok!
저는 어렸을 때 어른들이 논에서 모내기를 하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어른들이 20-30명씩 무리를 지어서 함께 모내기를 해요. 오늘은 김 씨네, 내일은 이 씨네, 모레는 황 씨네, 품앗이라고 하죠. 논이 정말 많아요. 똑같은 일을 한 달 이상을 반복해요. 정말 지루하고 힘이 드는 일이예요. 이때 어른들은 노래를 부릅니다. 농요죠. 가사는 잘 기억에 나지 않아요. 어른들은 장단에 맞추어 함께 흥얼거리셨어요. 어른들은 노래를 따라서 하나로 움직였어요. 장단에 맞추어 어른들이 허리를 숙였다 폈다가 해요. 줄을 띄우는 사람도 장단에 맞추어 띄어요. 노래는 흥을 돋구어줍니다. 힘이 나게 합니다. 일의 고단함을 잊게 합니다. 노래는 노래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어린 제 마음에 그게 참 재밌어 보였어요. 힘든 일인데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가 한번 저도 어른들 사이에 끼어서 일을 하게 됐는데 힘들어서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더라고요. 그 일을 어른들은 몇 날이고 계속했던 거예요. 노래를 부르면서.
1995년에 상영된 영화 <쇼생크 탈출>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배경은 1947년 교도소입니다. 교도소는 온통 회색입니다. 아주 삭막합니다. 앤디(팀 로빈슨)라는 죄수가 교도관의 허락도 받지 않고 교도소 전체에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틀어줍니다. 앤디는 살인 누명을 쓰고 들어온 전직 은행원입니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순간 모든 죄수들이 어안이 벙벙해 정지 상태가 됩니다. 이 순간을 레드(모건 프리먼)라는 죄수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난 지금도 그 이탈리아 여자들이 뭐라고 노래했는지는 모른다. 사실은 알고 싶지 않다. 모르는 채 있는 게 나은 것도 있다. 난 그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가슴이 아프도록 아름다운 얘기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 목소리는 이 회색 공간의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마치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우리가 갇힌 새장에 날아 들어와 그 벽을 무너뜨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짧은 한 순간 쇼생크의 모두는 자유를 느꼈다.” 음악이 교도소 안에 있는 모든 죄수들을 하나로 묶어줬습니다. 음악이 수십 년간 교도소에 갇혀 있는 죄수들에게 자유를 느끼게 해줬습니다. 이게 노랩니다. 여러분! 힘든 세상 노래하며 삽시다.
구약 성경에는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이라는 3대 절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 절기가 되면 수십 명씩 무리를 이루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해발 765m의 높은 지대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형은 험산 준령입니다. 이런 지역을 걸어서 가는 것입니다. 여자, 노인, 아이가 섞여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주 고단하고 힘든 일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를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합니다. <성전순례시>라고도 합니다. 성전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부른다고 해서 <계단송> 또는 <층계송>이라고도 합니다. 시편120편에서 134편까지 15편의 시가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던 계단송입니다. 이 계단송은 광야를 함께 순례하는 순례자들의 마음을 고무시켰습니다. 고단한 순례자들의 마음을 위로해줬습니다. 그리고 순례자들을 하나로 묶어주었습니다.
시편 122편은 계단송 중에 세 번째 노래입니다. 순례자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도다” 이스라엘 절기가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순례의 길을 떠나기 위해 준비를 합니다. 준비를 마친 마을 사람들이 시인을 찾아와 여호와의 집에 함께 올라가자고 초청을 합니다. 그때 시인의 마음이 기뻤습니다. 시인은 왜 기뻤을까요? 한바탕 신나게 즐기러가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하와이의 호놀룰루 와이키키 해변으로 휴가를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입니다. 기도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좋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교회 오는 것이 좋으셨습니까? 순례의 길은 몇 주, 몇 달이 걸리는 긴 여정입니다. 가는 중에 노숙을 해야 하고, 길에서 밥을 먹어야 합니다. 길이 좋지 않습니다. 먹는 것 자는 것 다 불편합니다. 씻지도 못합니다. 게다가 날씨는 매우 덥습니다. 좋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순례자는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감격하며 좋아하고 있습니다. 기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사마흐입니다. 사마흐는 그냥 조금 기뻐하는 정도가 아니라 감격하는 기쁨입니다. 울컥 하는 기쁨입니다. 가슴 뭉클한 기쁨입니다. 가슴이 막 뛰는 기쁨입니다. 시인은 친구의 성전에 올라가자는 말에 뛸 듯이 기뻐하며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오실 때 기쁘셨습니까? 아니면 마지못해 억지로 오셨습니까? 의무감에 오셨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것이 기쁨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시인은 성전에 올라가는 일을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시인은 성전에 올라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교회에 오실 때 하나님에 대한 만남 때문에 기뻐하셨습니까? 흥분과 감격이 있으셨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시인에게 왜 그렇게 기쁨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만날 때 영혼이 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 어디에도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님의 품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사람들이 성전에 올라가자고 할 때에 기뻐하고 감격한 것입니다. 시인처럼 교회에 오실 때 여러분에게 기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왜 초청하셨을까요? 쉼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쉼은 영혼의 안식입니다. ‘쉬게 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아나파우오입니다. 아나파우오는 ‘쉬게 하다, 기운이 나게 하다, 힘을 보충하다, 젊게 하다, 원기를 회복하다’는 뜻입니다. 아나파우오의 아나는 ‘위로’라는 뜻의 전치사이고, 파우오는 ‘멈추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헬라어로 쉰다는 말은 위로 멈춘다는 뜻입니다. 영혼의 안식(쉼)은 모든 세상 일을 멈추고 위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내게 와서 내 멍에를 매라고 하셨습니다. 멍에는 두 마리 소를 하나로 묶어줍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맨다는 말은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뜻입니다. 영혼의 쉼은 예수님과 연합할 때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주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는 영혼의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쉼은 일상의 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벗어나서 휴가도 가시고, 좋은 데도 가시고, 맛있는 것도 드세요. 사람에게 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일상에서 진정으로 벗어나는 길은 저 하늘을 향해, 위에 계신 하나님을 항해 멈추는 것입니다. 전후좌우의 모든 일을 멈추고 위에 계신 하나님을 향할 때 우리 영혼은 진정으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우리 영혼이 당신의 품안에 돌아가 쉴 때까지 나에게 결코 평안이 없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람의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사람들에게 성전에 올라가자고 할 때 기뻐한 것입니다.
오늘은 주일입니다. 교회에 오셨다는 것은 세상 일을 멈추고 위를 바라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생각도 멈추고, 염려도 멈추고, 근심, 걱정, 두려움, 슬픔도 멈추세요. 그리고 오직 위쪽만을 바라보세요. 십자가만을 바라보세요. 한 쪽을 살짝 열어놓고 근심하며 위를 바라보지 마세요. 찔끔 찔끔 바라보지 마세요. 근심, 걱정, 두려움의 문을 다 닫은 다음에 위를 온전히 바라보세요. 하나님을 바라보시려면 온전히 바라보세요. 그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 영혼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하게 하십시오. 이 시간은 모든 것을 다 멈추세요. 그것이 영혼이 쉼을 얻는 방법입니다. 성전에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전에 오는 것이 기쁜 것입니다. 성전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면 성전에 오는 의미가 없습니다. 와도 그만이고 안아도 그만이 됩니다. 억지가 됩니다. 시인은 성전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전만 생각하면 좋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맛있는 것, 장난감, 인형을 사준다고 하면 좋아합니다. 어떤 아이들은 PC방에 가자고 하면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쇼핑센터에 가자고 하면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가는 것이 좋으십니까? 근사한 카페요? 아니면 맛집이나 백화점이요? 시인처럼 성전에서 나아가는 것을 기뻐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억지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시인처럼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십시오.
두 번째로 시인이 기쁜 이유는 함께 여행하는 순례자들 때문입니다. 광야를 혼자 걸어가는 것은 힘들뿐만 아니라 외롭고 쓸쓸한 일입니다. 또 위험한 일입니다. 들짐승과 강도가 출몰할 수도 있고, 예기치 못한 어려운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것은 서로에게 큰 힘과 위안이 됩니다. 그런데 함께 가는 사람이 원수라고 생각해보세요. 순례의 길이 아주 고역이 되는 거예요. 반대로 함께 가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는 길이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여기 ‘가자’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할라크입니다. 할라크는 ‘걷다, 산책하다’는 뜻입니다. 성지 순례자들은 몇 주를 함께 걷습니다. 순례의 길이 무거운 걸음이 되느냐 아니면 행복한 산책이 되느냐는 함께 가는 사람에 달려 있습니다. 시인은 사람들이 함께 순례를 떠나자고 했을 때 기뻐했습니다. 왜요? 함께 하면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교회에 좋은 사람이 있어요. 나를 잘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교회에 오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교회에 싫은 사람이 있어요. 가시 같이 자꾸 나를 찌르는 사람이 있어요. 고부라지고, 토라지고, 시기하고, 심통 부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교회에 오는 것이 싫지 않겠습니까? 목회를 하면서 저는 그런 소리를 가끔 들었습니다. 목사님 저 사람 때문에 교회 오기 싫습니다. 이럴 때 정말 난감합니다. 우리는 장망성을 떠나 저 하늘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난 영혼의 순례자들입니다. 등대라는 배를 타고 함께 항해하는 영혼 순례자들입니다. 나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이 이 배에 탄 것이 기뻐야 합니다. 나 때문에 이 배에 탄 것이 힘들면 안 됩니다. 제발 찌르지 마세요. 심술부리지 마세요. 이 배에서 내리고 싶게 하지 마세요. 교회 오기 싫게 하는 사람이 되지 마세요. “오늘 그 사람이 안 왔네. 오늘 편안히 예배할 수 있겠네.” 안 오면 좋은 사람이 되지 마세요. 안 오면 궁금하고 보고 싶은 사람이 되세요. 그래서 천국 가는 신앙의 순례의 길이 고난의 행군이 아니라 행복한 산책이 되게 합시다.
기쁨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헨리 나우웬). 첫 번째는 차별화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내가 뭔가 다르다고 느낄 때 희열을 느낍니다. 1등을 하면 기쁩니다. 이것은 차별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경기에서 승리합니다. 이것도 차별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인정받으면 기뻐요. 이것도 차별화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성공, 출세, 승진, 합격 모두 차별화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사람은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고, 상대방 보다 더 출세하고 싶어 하고, 남들보다 더 고가의 명품을 쓰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세상은 차별화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나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차별화가 성공이고 출세고 기쁨입니다. 사람들은 다르다고 느낄 때 기뻐합니다.
두 번째는 연대감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 같다는 동질감을 느낄 때 기쁨을 느낍니다. 이것은 나이, 피부색, 사상, 이념을 뛰어넘어 사람들과 내가 하나라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다른 이들이 날 사랑하고 있고, 나 역시 그들을 사랑한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그들의 미소와 눈물이 나의 미소와 눈물이고, 그들의 기도와 소망이 나의 소망과 기도이라고 생각될 때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사람들은 같다고 느낄 때 기뻐합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죠? 어떤 때는 다르다고 느낄 때 행복해하고, 어떤 때는 같다고 느낄 때도 행복해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때 기쁘십니까? 고가의 명품을 둘렀을 때 기쁘십니까? 죄송하지만 그거 쓰레기 같은 마음이 아닙니까? 어떤 분이 비싼 넥타이를 선물해주셨어요. 그것도 세 개나. 넥타이 하나에 양복 한 벌 값이더라고요. 제가 촌스러워서 그런지 아무리 봐도 좋은지 모르겠어요. 가만히 보니 뱀 그림이 있어요. 뱀 그림이 있는 걸 하고 강단에 올라갈 수 없잖아요. 버렸습니다. 어떤 것이 크리스천이 추구하는 기쁨이어야 합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우리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추구하는 기쁨과 다른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세상과 다른 기쁨을 주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세상과 똑같은 기쁨을 누리려고 합니다.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누가복음 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들은 사람들과 같이 서지 않고 따로 섰습니다. 나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옆에 있는 사람과 같지 않다고 했습니다. 짧은 기도에 같지 않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과 같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신앙을 다른 사람과 차별화시켰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들의 신앙이 옆에 있는 사람과 다르다는 것에 희열을 느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차별화의 기쁨을 갈구합니다.
순례자들은 몇 주 동안 함께 먹고 함께 자며 동일한 곳을 향해 여행을 합니다. 시온산이 가까워질수록 순례객의 무리들이 많이 보입니다. 전국방방곡곡에서 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동일한 곳을 향해 걷습니다. 여기서 부르는 찬양과 저기서 부르는 찬양이 같습니다. 저기서 부르는 하나님과 여기서 부르는 하나님이 같습니다. 순례자들은 함께 순례자의 노래를 부르며 걷습니다. 나이도 성별도 고향도 피부색도 다릅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부르는 노래는 같습니다. 믿음은 하나입니다. 가는 곳도 하나입니다. 그들은 동일한 곳을 향해 나아가며 영적 동질감을 느낍니다. 이 동질감이 느낄 때 저들의 슬픔이 내 슬픔이 되고, 저들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영적 동질감에서 오는 기쁨을 얻는 곳입니다. 목표가 같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시인은 예루살렘 성문 안에 들어서서 예루살렘을 아주 반가운 사람처럼 대합니다. 2-3절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시인은 예루살렘을 아주 반가운 친구처럼 부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시인에게 예루살람은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친구 같은 존재였습니다. 또 군대 갔다가 오랜만에 온 애인처럼 설레는 존재였습니다. 시인은 얼마나 좋은지 성문 안에 들어서자 너무 감격해 그 자리에 한참을 멈추어 서서 성을 감상하고 있습니다. “오 나의 친구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다. 나의 벗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구나!” 시인은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온 것을 감격해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우리 교회에 오셨던 인도네시아 김승수 선교사님이 설교 중에 한 아이가 발에 뭐가 찔려서 피가 나는데 절룩거리며 네 시간을 걸어서 교회 왔다고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사람들이 2-3시간을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서 교회에 온다고 합니다. 교회에 오는 것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감격이 있기를 바랍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을 ‘잘 짜여진 성읍’처럼 건설되었다고 했습니다. ‘잘 짜여진 성읍’이라는 말을 개역성경은 ‘조밀한 성읍’이라고 했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은 ‘치밀하게 갖추어진 성읍’이라고 번역했고, NIV성경은 ‘단단하게 서로 연결된 도시’(city that is closely compacted together)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김정우 교수(총신대학원 구약학)는 “촘촘하게 짜인 성읍”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아주 치밀하고 단단하게 잘 건축된 성입니다. 하나님은 성은 아름답고, 조밀하고, 잘 짜진 든든한 성입니다.
‘잘 짜여진’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하바르입니다. 하바르는 ‘연합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함께 매듭으로 묶여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 성안의 모든 건물들이 서로 조화롭고 촘촘하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조화를 이루며 아주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예루살렘의 모든 건물처럼 예루살렘에 올라온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절기 때마다 성전에 모여 예배하고 교제함으로 서로 하나임을 확인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과 내 삶의 터전이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와 성전은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과 성전은 아주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각 지체라고 했습니다. 나와 교회는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아주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면 교회 소개란이 있습니다. 교회 소개를 보면 모든 교회가 똑같습니다. 담임목사, 부교역자, 장로, 안수집사, 권사, 교회 시설 등등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런 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죄송하지만 이게 교회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한 교회는 교회 소개란에 성도들이 가정에서 생활하는 모습, 아침에 출근하는 모습, 직장, 일터에서 일하는 모습, 사회 생활하는 모습이 올려 있었습니다. 정말 맞는 설명이 아닐까요? 보이는 이 건물은 그냥 예배당입니다. 건물이 교회는 아닙니다. 사람이 교회입니다. 나와 교회는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나와 성전은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나와 주님은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사람의 몸이 아주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주님과, 긴밀하고 조밀하고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이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지나는 순례자들입니다. 순례의 길은 먼 길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에게 좋은 순례자가 됩시다. 심통 부리는 순례자가 되지 맙시다. 병든 순례자가 되지 맙시다. 우리는 모두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순례 길은 먼 길입니다. 백종원 씨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정말 저를 위해 일했어요. 다만 좀 멀리 봤을 뿐. 수익을 남기기 위해 플러스알파를 했는데, 그게 칭찬으로 돌아왔죠. 칭찬에 맛 들여 욕심을 줄이니 사는 게 편해졌어요. 내 삶이 좋아지려면 주변 여건도 좋아져야 해요. 슈퍼카 타고 싶으면 길을 뚫어야죠. 비행기 띄우려면 활주로를 내야 해요. 비포장도로에서 나 혼자 달리면 무슨 맛이에요?” 혼자서 성공하고, 혼자서 멀리 가는 것보다 늦더라도 다 같이 가는 것이 좋더라는 말입니다. 케냐 서부에 사는 루오 민족에게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청년 혼자서는 빨리 달리고, 노인과 함께라면 천천히 가지만, 청년과 노인이 함께 가면 멀리 간다.” 청년의 힘과 노인의 인내와 지혜가 합해지면 우리는 보다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소생크 탈출>은 영어로 <쇼생크 구원>(The Shawshank Redemption)입니다. 일본에서는 <쇼생크 하늘에>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번역은 내용을 담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앤디는 비록 교도소에 수담되어 있었지만 하늘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 자유는 음악을 통해 얻었습니다. 앤디는 교도소에 음악을 틀었다는 이유로 2주간 독방 신세가 됩니다. 앤디가 2주 후에 독방에서 나오자 교도소 동료들이 독방이 죽음이었을 것이라고, 일주일이 일 년 같았을 것이라고, 한 마디씩 합니다. 그때 앤디가 동료 죄수들에게 독방에 모차르트가 있었다고 합니다. 독방에 음악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의아해 하는 동료들에게 앤디는 음악을 머리로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슴으로도 들었다고 말합니다. 가슴 속에 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인데 앤디는 머리로 가슴으로 들었습니다. 앤디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음악이 아름다운 거야. 누구도 빼앗을 수 없거든. 음악에 대해서 그렇게 안 느껴봤어?” 그렇게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음악의 힘입니다. 여러분! 인생길을 걸어가시다가 힘이 드시면 노래를 하십시오. 노래하며 저 하늘의 성을 바라며 순례의 길을 계속 갑시다.
| 이전글 | - | 
|---|---|
| 다음글 | 사랑이 없다면 반대하신다 |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