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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어떤 사람이 재밌는 실험을 했습니다. 비둘기를 새장에 가두고, 20초마다 버저와 함께 먹이통에 고개를 내밀 수 있는 문을 열었습니다. 몇 번의 실험을 반복하자 비둘기는 버저가 울리면 먹이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 번을 반복한 후에 버저와 먹이통의 문을 무작위로 섞어서 실험했습니다. 버저는 울리는데 먹이통의 문은 열리지 않게 했습니다. 반대로 먹이통의 문은 열리는데 버저는 울리지 않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비둘기가 매우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비둘기가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했을까요? 이때 비둘기들은 여러 가지 행동을 했습니다. 어떤 비둘기는 고개를 끄떡였고, 어떤 비둘기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고, 어떤 비둘기는 구석에 가서 머리를 막았습니다. 또 어떤 비둘기는 먹이통의 문을 쪼아댔습니다. 그러는 중에 시간이 돼서 먹이 통 문이 열렸습니다. 이때 비둘기는 자신이 방금 한 행동 때문에 먹이를 먹게 됐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먹이통이 다시 열릴 때가지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습니다. 고개를 끄떡이던 비둘기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고, 머리를 막던 비둘기는 계속 머리를 막았습니다. 비둘기는 그 행동을 반복하면서 그 불안한 상황을 통제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연을 조건화시킨다고 말합니다. 스키너의 <비둘기 미신 실험>입니다. 동물에게도 사람과 똑같이 미신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 실험입니다. 동물과 사람은 생존본능으로 동일하게 미신적 행위를 합니다.
스포츠 선수에게서 이런 행동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은 서브를 넣기 전에 엉덩이에 낀 바지를 뺍니다. 그 다음에는 어깨를 만지고, 그 다음에는 코를 만집니다. 그 다음에는 귀를 만집니다. 나달은 서브를 넣기 전에 이 행동을 꼭 합니다. 나달의 징크스입니다. 전 농구선수 서장훈은 농구 시합을 할 당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하고, 같은 시간에 연습을 했습니다. 똑같은 루틴을 결벽증이 생길정도로 유지했습니다. 서장훈은 경기에서 지게 되면 경기 당시에 입고 있던 옷을 바로 버렸습니다. 이유는 다음에도 그 옷을 입게 되면 또 경기에서 질 것만 같은 불안감, 징크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장훈 씨는 징크스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도 징크스입니다. 저는 서장훈이 이혼한 이유가 징크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야구선수인 류현진은 선수시절 이겼을 때 먹은 음식을 계속해서 먹었습니다. 스포츠 선수들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하죠. 사람들은 자신의 어떠한 행동이 이후 미래의 상황을 좌우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행동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우연을 조건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렇게 됐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을 징크스라고 하는데 스키너는 동물과 인간이 미신적인 행동을 동일하게 한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밝혀냈습니다. 영어로 징크스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재수 없다고 합니다. 징크스는 미신입니다. 그 물건은 꼭 거기에 두어야 합니다. 그걸 할 때는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거길 갈 때는 꼭 그 길로 가야 합니다. 징크스라고 부르는데 사람이 가진 본능적인 미신입니다.
미신이 생기는 이유는 불안, 두려움, 절박함, 초조감 때문입니다. 사람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불안을 잠재우고 싶어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데서 오는 불편한 기분을 달래고 싶어 합니다. 사람은 절박한 상황에서 통제감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높은 스트레스와 절박함, 불안이 겹치면 뇌에 과부하가 오고 그러면 비논리적인 일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미신에 빠지는 것입니다. 비둘기처럼 어떤 특정 행동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미가와 그 어머니는 자기들이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신앙이 삐뚤어졌습니다. 샤머니즘 기독교를 만들어버렸습니다. 불안, 두려움, 절박한 상황에서도 삐뚤어지지 마시고 그냥 똑바로 가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평안하십시오. 오늘 본문은 미가와 그의 어머니의 미신 신앙에 열두 지파 중에 한 지파인 단지파가 빠져들게 되는 사건입니다.
단 지파는 그때까지 아직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1절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19장에는 단지파가 블레셋 지역을 기업을 받아 그 땅을 점령하고 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19:40~46 “일곱째로 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들의 기업의 지역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 사알랍빈과 아얄론과 이들라와 엘론과 딤나와 에그론과 엘드게와 깁브돈과 바알랏과 여훗과 브네브락과 가드 림몬과 메얄곤과 락곤과 욥바 맞은편 경계까지라” 단 지파는 이미 여호수아 시대에 정복한 가나안 땅 중에서 기업을 분배받고, 그 땅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분배받은 땅을 다 정복한 것은 아닙니다. 아직 일부는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사기 서론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34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단 지파가 기업을 분배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기업으로 분배받은 땅에 남아있던 가나안의 원주민들에게 여호수아 시대에 정복한 땅을 다시 빼앗기고 그 땅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단 지파가 분배받은 땅에는 철병거를 가진 블레셋 사람들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 지파를 산으로 쫓아버리고 평지에는 발도 못 붙이게 했습니다. 단지파가 산지족이 된 것입니다. 비참하게 됐습니다. 이 비참한 생활이 단 지파를 미신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운 일이 와도 똑바로 가십시오. 삐뚤어지지 마십시오. 말씀만 의지하십시오.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단 지파는 블레셋을 이길 수 없자 거주할 새로운 땅을 찾게 됐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주신 기업을 버리고 자기들이 정복하기 쉬운 땅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지파에서 용맹한 사람 다섯 명을 뽑아 북쪽으로 보내 자신들이 거주할 만한 땅이 있는지 정탐하게 한 것입니다. 2절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그들의 가족 가운데 용맹스런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정탐하고 살피게 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땅을 살펴보라 하매 그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니라” 에브라임 산지는 단지파가 살던 블레셋 지역에서 북쪽입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기업을 분배받는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나팔입니다. 나팔은 떨어지다는 뜻으로 기업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기업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단 지파의 기업은 제비를 뽑아서 얻은 것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잠언 16:33에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기업은 하나님이 작정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연히 얻은 것이 아닙니다. 재수가 나빠서 그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단 지파는 빼앗긴 기업을 다시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업은 히브리어로 나할라인데 이 단어는 재산, 상속, 소유, 유산이라는 뜻입니다. 제비를 뽑아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제비분깃이라고도 했습니다. 기업(나할라)은 일반적으로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가리키는데 포괄적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순종의 대가로 주신 선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빈손으로 나왔습니다. 따라서 기업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단 지파는 하나님의 선물을 포기한 것입니다. 기업의 신약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 7장에 144,000이 나오는데 열두 지파 중에 단 지파가 없습니다. 단 지파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포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주권을 포기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구약의 기업은 오늘 내 현실의 삶에 주어진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아내, 남편, 자식, 부모, 형제, 집, 물질, 직장, 신앙, 교회, 삶의 터전 그리고 나 자신을 기업으로 내게 주셨습니다. 내 현실의 삶이 기업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지키세요.
예수님의 비유 중에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달란트는 탤런트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탤런트는 재능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달란트를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란트는 자기가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달란트의 의미는 단지 재능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달란트는 화폐입니다. 달란트는 종이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돈입니다. 달란트의 의미는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달란트는 나의 현실의 삶입니다. 그것이 돈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그것이 재능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실이 나의 달란트입니다. 하나님은 그걸 하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청년 때 다녔던 교회에 유치원이 있었는데 그 유치원을 운행하는 차량이 15인승 토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봉고차는 시속 80km이상을 달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유치원을 계속 운행하다 보니 항상 저속 운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속 운행에 길들여져서 고속 운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달란트는 현실입니다. 기업은 현실입니다. 영어로 현재가 present입니다. 선물도 present입니다. 현재는 선물입니다. present는 pre-(앞에)와 s(being)와 명사를 만드는 어미 -ent의 합성어입니다. 선물은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입니다. 현재는 선물입니다. 한자로도 현재는 지금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것이 선물입니다. 기업은 나의 현실입니다. 다윗은 시편 16:6에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단 지파에게 줄로 재서 블레셋 지역을 주셨습니다. 유다 지파 다음으로 강한 지파가 단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단 지파는 기도도 해보지 않았고, 정복 시도를 해보지도 않고, 적이 강하다는 이유 때문에 겁을 집어먹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다른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땅으로 간 것입니다. 고대 로마의 사상가인 세네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구에서 별까지 가는 길 중에 쉬운 길은 없다.”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업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아내, 남편에게 최선을 부모,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십시오.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직장, 사람, 그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주님께 하듯 하십시오. 좋은 일도 감사하시고, 나쁜 일도 감사하십시오. 있는 것을 감사하고, 없는 것도 감사하십시오. 모두 하나님이 주신 기업입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제 더는 당신이 원했던 것들을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시작하세요.” 여러분! 현재라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 하나님의 선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단 지파 용사 다섯 명은 북쪽으로 옮겨가다가 우연히 미가의 집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은 미가의 집에서 레위 청년을 만납니다. 3절 “그들이 미가의 집에 있을 때에 그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리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하니” ‘그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고’라고 했습니다. 레위 청년과 단 지파 용사들이 전에 친분이 있었든지 아니면 비슷한 사투리를 썼던 것 같습니다. 단 지파와 유다 지파는 붙어있었습니다. 아마도 두 지방은 억양이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단 지파 용사들은 같은 사투리를 쓰는 레위 청년에 대해서 자세히 물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남쪽 사람이 에브라임 산지까지 오게 됐는지 자세하게 물어본 것 같습니다.
단 지파의 용사들은 레위 청년에게 묻습니다.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이에 대해서 레위 청년은 자신이 거기에 있는 이유가 돈 때문이라고 노골적으로 대답합니다. 4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이러이러하게 나를 대접하고 나를 고용하여 나를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느니라 하니라” 고용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사카르입니다. 사카르의 뜻은 ‘예를 갖추어 모셔오다’라는 뜻인데 ‘돈을 주고 어떤 사람의 노동력을 산다’는 의미입니다. 레위인은 돈 때문에 여기 있다고 노골적으로 말을 했습니다. 레위인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한 이유는 너희들이 나에게 더 많은 돈을 준다면 나는 너희들에게로 갔다는 암시입니다. 레위인은 하나님이 구별한 사람들입니다. 레위인이라면 하나님이 나를 여기로 인도하셨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레위인은 돈 때문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양심의 가책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레위 제사장의 말에는 하나님이 전혀 없었습니다. 비록 말 뿐이었지만 미가는 계속 하나님을 말합니다. 17:13 “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17:12 “미가가 그 레위인을 거룩하게 구별하매” 미가에게는 그래도 레위인을 대접하려는 정서가 남아 있어서 아비로 삼고, 물질로 잘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비록 말과 형식뿐이었지만 미가의 마음에는 신앙적인 정서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레위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돈이었습니다. 돈에 자신을 팔지 마세요. 눈 앞의 이익 때문에 신앙을 팔지 마세요. 돈의 노예가 되지 마세요. 성공의 노예가 되지 마세요.
지금은 월세가 비싸지 않지만 제가 여기 처음에 왔을 때는 좀 비쌌습니다. 지금 보다 거의 두 배였어요. 개척 할 때 저를 아시는 분들이 여기 월세를 알고 첫 번째로 한 말이 “목사님 계산 잘 못한 것 아니에요?”입니다. 너무 비싼 것 아니냐는 거예요. 유지가 되겠냐는 말입니다. 주변의 목사님들도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다들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냐는 거예요. 맞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제가 계산을 잘못한 한 거 맞습니다. 여기로 오는데 돈 생각은 안했습니다. 제가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여기에 왔는데 제 마음에 ‘아, 여기구나’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개척을 준비하면서 이런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이 산골짜기로 보내시나요?”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여기서 개척을 하려고 했는데 건물주가 교회 탑을 세우지 못하게 해서 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때 저는 ‘하나님이 여기에 교회가 있기를 원하시는구나!’라는 확신을 다시 한 번 갖게 됐습니다. 제가 여기로 온 이유는 하나님이 여기에 교회가 세위지기를 바라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에 개척한 후에 가깝게 지내던 집사님이 와서 “목사님! 여기는 접근성이 좋지 않아요. 전철역이 있다든가 교통이 좋다든가 해야 하는데 여긴 그게 없어요.”라고 해요. 위치가 답답하니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말이에요. 맞습니다. 우리 교회는 접근성이 좋지 않습니다. 그때 제가 마음에 든 생각이 이런 것입니다. ‘집사님, 교회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 집사님은 목이 좋은 곳에서 장사하시는 분이에요. 장사는 목이 좋아야 해요. 하지만 교회는 꼭 시장성이 좋은 곳에 세워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사람들의 말처럼 접근성이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앞에 큰 건물이 가리고 있어서 교회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코로나 기간에 동사무소 직원들이 교회마다 다니며 예배드리지 말라고 권고할 때 우리 교회는 오지를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왔는데 알고 보니 교회가 있는지 몰랐다는 거예요. 교회가 안 보였던 거예요.
전에 제가 전에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요. 제가 여기로 오기로 결정하고 나서 교회 권사님이 여기 보다 두 배가 넘는 곳인데 이곳의 월세 반값에 줄 테니 오라는 거예요. 관리비도 없고 월세만 내라고 했으니 1/3가격입니다. 게다가 옥상까지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까 너무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이것저것 따지면 1/4, 1/5 가격이었어요. 훨씬 싸고, 훨씬 넓어요. 게다가 저 보고 상가 관리를 좀 하면서 마음대로 쓰라는 거예요. 권사님이 80이 넘으셔서 건물관리가 어려우셨던 거예요. 너무 좋은 조건이에요. 제가 얼마나 거기로 가고 싶었겠어요. 그런데 제가 마음을 접은 이유가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로 온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가 사는 곳으로 오면 자기가 나머지는 다 책임을 지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대답도 안 했습니다. 들은 척도 안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인 단 1퍼센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한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한 목사님이 아프리카(?)에서 한 프랑스인을 만났습니다. 이야기하는 중에 목사님은 프랑스인이 선교사라는 알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은 20년(?) 동안 아프리카 선교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선교사님에게 20년 동안 몇 명을 선교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프랑스 선교사님은 한 명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미국 목사님은 깜짝 놀라서 프랑스 선교사님에게 “그런데 왜 여기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성과도 없으면서 왜 여기 있냐는 것입니다. 프랑스 선교사님은 “하나님 때문입니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 있으라고 하셨고, 그래서 자신은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은 사명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곳입니다. 그렇다고 영적인 것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육적인 것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각자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여러 가지 은사에 의해 교회가 유지됩니다. 예배라는 것은 거룩한 일입니다. 그런데 물질이 필요합니다. 마이크가 있어야 하고 의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돈이 교회의 주인은 아닙니다. 성도는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렇다고 성도에게 세속적인 것이 필요 없지 않습니다. 돈이 있어야 세상을 살아갑니다. 집이 있어야 하고, 옷을 입어야 합니다. 하지만 돈을 신으로 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영적인 복도 받아야 하지만 육적인 복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영적인 은사도 있고, 육적인 은사도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다양하게 채워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 아니라 주님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라는 물음에 레위인은 돈이 나를 여기로 인도했고 돈 때문에 여기 있다고 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여기로 인도했고,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그 대가는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 보다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버린 단 지파의 용사들이 돈 때문에 고용된 제사장에게 우리가 가는 길이 잘 될지 묻습니다. 5절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버리고 하나님이 없는 길을 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어보는 대상은 가짜 제사장입니다. 가짜 제사장은 선뜻 잘 될 것이라고 하며 살롬을 선포합니다. 6절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 진짜 제사장이라면 “하나님의 기업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떠나지 말라.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지 말라. 믿음으로 정복하라. 순종하면 그 땅을 하나님이 주신다.”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짜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잘 될 것이라고 합니다. 묻는 자도 답하는 자도 전혀 하나님과 관계 없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습니다. 가짜 제사장이 단 지파가 하나님이 없는 길을 가도록 도운 것입니다. 단 지파가 미가의 미신 신앙에 빠진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믿음으로 똑바로 가면 승리합니다. 오직 하나님 바라보면 이깁니다. 말씀을 버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가는 길에 승리가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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