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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조회수 : 32회

본문 : 시편 18:1
주일오전예배 | 2025-01-12
설교자 : 서요한 목사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 여자를 아담에게 이끌어 가셨습니다. 아담이 여자를 보자마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사랑 고백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님의 뼈요 하나님의 살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뼈와 살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이사야 54:5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고 했고, 호세아 2:16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2:16에는 내가 너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그리려고 중매함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신랑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신부라고 했습니다. 아담에게 하와가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인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과 같은 존재입니다. 고린도전소 12: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했고, 에베소서 5:30에는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 지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뼈요 주님의 살인 것입니다. 또 주님은 우리를 피로 값 주고 사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100억 주고 사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피로 사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피 같은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피와 같은 귀한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애칭이 있습니다. 그 애칭이 무얼까요? 제가 구글에서 검색을 해봤습니다. 저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구글에서 제가 알고 있는 답과 같은 대답을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검색을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여수룬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답과 일치했습니다. 여수룬은 정직한 자, 의로운 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는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애칭은 여수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수룬이라고 부르십니다. 사랑받는 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그 증거가 교회마다 붙어 있습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계속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고백을 해야 할까요? “고맙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할까요? 그 답이 본문에 있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힘의 근원, 힘의 원천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점점 강해집니다. 사무엘하 5:10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했고, 역대상 11:9에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점점 더 강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점점 더 강하게 하는 힘이십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도망자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힘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왕권과 최고의 권력과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상황을 볼 때 사울은 점점 강해져야 하고, 다윗은 점점 약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다윗은 도망을 다닐수록 힘이 강해졌고, 사울은 쫓아갈수록 힘이 약해졌습니다. 사무엘하 3:1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점점 강해져갔지만 사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점점 약해져갔습니다. 

저기 뒤에 걸려있는 시계 바늘이 돌아가는 힘은 시계 뒤판에 꽂혀 있는 배터리에 있습니다. 배터리를 갈아주면 처음에는 배터리가 강해 시계 바늘이 힘차게 빨리 돌아갑니다. 그래서 시간을 맞춰놓고 한 달 정도가 지나면 2분 정도가 빨라집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배터리가 약해지면 시계 바늘도 힘이 없어 아주 조끔씩 느려집니다. 1분 느려지다가 2분이 느려지고 나중에는 시계 바늘이 1011시에서 멈춰섭니다. 힘이 없어 12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세상적인 힘은 시계의 배터리와 같이 점점 쇠약해집니다. 여기 전등에 불이 들어오는 힘은 발전소에 있습니다. 발전소가 멈추면 여기 등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승용차가 움직이는 힘은 오일에 있습니다. 오일이 다하면 승용차는 멈춥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힘은 약해지지 않습니다. 고갈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점점 더 강해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점점 강하게 하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자 기라성 같은 장수들이 다윗 수하로 몰려들었습니다. 요셉밧세벳은 혼자 적군 병사 팔백 명을 죽였습니다. 삼마는 백성들이 다 도망갈 때 블레셋 군대를 혼자 막아설 정도로 괴력을 지닌 장수였습니다. 엘하난은 골리앗의 동생 라흐미를 죽였습니다. 라흐미의 창 자루는 형 골리앗처럼 베틀 채와 같았습니다(삼하21:19). 브나야는 사자가 구덩이에 빠지자 구덩이에 내려가 맨 몸으로 사자를 때려죽였습니다. 브나야는 사자가 빠진 구덩이에 뛰어 들어갈 정도로 용맹한 장수였습니다. 다윗에게 이런 용사들이 즐비했습니다. 다윗은 내 힘은 강한 군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솔로몬이 쓰는 그릇은 다 금이었습니다. 솔로몬의 부의 기틀을 놓은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이길 때마다 수많은 전리품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내 힘은 수많은 금은보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내 힘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자신감은 지갑에서 나온다.” “인격은 지갑에서 나온다.” “남자의 힘은 두둑한 지갑에서 나온다.” 돈이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돈이 힘이고, 자신감이라는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힘도 세고 자신감도 강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돈이 없으면 힘도 없고, 자신감도 없다는 것입니다. 돈이 힘인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돈, , , , 금 등등 가진 것을 힘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돈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 기가 죽습니다. 돈이 많으면 알아서 머리를 숙입니다. 직장이 좋으면 머리를 숙입니다. 건물이 있다고 하면 기가 죽습니다. 연예인들은 돈을 모으면 건물과 땅을 삽니다. 건물이 힘입니다. 돈도 벌지 말고, 땅도 사지 말고, 건물도 사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땅도 사고 건물도 사고 좋은 집도 사십시오. 그래서 잘 사십시오. 저는 여러분이 잘 살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힘이 아닙니다. 그걸 힘으로 삼지는 마세요. 

사람들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좋은 머리, 학벌, 일류대졸업장이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머리도 좋고, 배울 만큼 배운 사람입니다. 배경도 좋은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자랑할 만한 배경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선교사가 됐습니다.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성공리에 끝내고 2차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2차 전도 여행 중에 빌립보에서 성공적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승승장구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아테네로 갔습니다. 아테네는 철학의 도시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철학자들과 논쟁을 버립니다. 자신이 갈고 닦은 지식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한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말쟁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사도행전 17:18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 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고 했습니다. 여기 말쟁이라는 말은 이삭을 주워 먹는 참새들판에서 곡식을 주워 먹는 까마귀를 나타내는 단어이기도 하고, 시장에서 쓰레기를 줍거나 마차에서 떨어지는 음식 찌꺼기를 줍는 사람을 나타내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에게 바울은 그저 말 잘하는 말쟁이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유일하게 선교에 실패한 곳이 아테네입니다. 왜 승승장구하던 바울이 아테네에서 실패했을까요? 그것은 지식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선교에 실패하고 고린도로 가서 선교 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서 장막 만드는 일을 합니다. 이때 바울이 얼마나 힘이 빠지고 약해졌는지 후에 이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바울은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머리와 지식, 자신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대 실패였습니다. 아테네에서 쫓겨나다 시피해서 고린도로 갔습니다. 얼마나 좌절했는지 고린도에 왔을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습니다. 이때의 실패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지식은 힘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아주 제한적인 힘입니다. 아주 조그만 힘입니다. 절대적인 힘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적인 힘입니다. 하나님의 힘은 내가 약할 때 내 안에서 더 강해집니다. 

분당한울교회의 김근수 원로목사님이 젊었을 때 입대를 했는데 육군본부의 중앙정보장인 김재규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1970년대의 일입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가진 때였습니다. 그때 김재규 밑으로 같이 간 사람이 김 목사님을 포함해서 세 명이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백으로 왔더랍니다. 그곳은 아무나 못가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김 목사님은 아무 백도 없이 김재규 밑으로 들어간 거예요. 명문대도 아니고 신학교를 다니다가 왔어요. 게다가 김 목사님이 키도 아주 작으십니다. 김재규가 김 목사님을 보니까 학벌도 없고 배경도 없고 게다가 키도 작아요. 아무나 못 오는 자리인데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온 거예요. 그런데 김 목사님은 아주 당당해요. 무서워하는 게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보이는데 누구 앞에서도 기가 안 죽어요. 김재규가 김 목사님에게 질책하듯이 이렇게 묻더랍니다. “너는 누구 백으로 왔어?” 김 목사님이 큰 소리로 대답했답니다. “, 하나님 백으로 왔습니다.” 그랬더니 김재규가 깜짝 놀라더랍니다. 다 자기 앞에서 설설 기는데 자기를 무서워하지 않거든요. 아무 배경도 없었으니까 정말 하나님 백으로 간 거 맞죠. 제대할 때 김재규가 잡더랍니다. 내가 네 앞길 다 열어줄 테니까 제대하지 말고 자기랑 있자고 하더래요. 김 목사님은 나가서 목사가 돼야 한다며 제대를 한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김재규 밑에 있는 사람들이 네 무덤 네가 판는 거라며 겁을 주며 나가지 말라고 하더래요. 주변에서 다 바보라고 하더래요. 그런데 나중에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 저격하면서 중앙정보부가 끝났잖아요. 세상 권세, 세상 힘이라는 게 이런 겁니다. 김재규가 세상을 얼마나 쥐락펴락했습니까? 김 목사님에게 제대하지 말라고 잡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추풍낙엽이 됐습니다. 세상 힘을 의지한 사람의 말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 것일까요? 첫째,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9:20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힘이라는 말은 아주 강력하게 지배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말씀에는 아주 강력하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붙잡는 것이 하나님을 내 힘으로 삼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해야 합니다. 머리를 잘리고 힘의 근원을 잃은 삼손은 블레셋 군대에게 포로가 돼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됐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신전 축제 때 삼손을 다곤 신전으로 끌어다 놓고 재주를 부리게 했습니다. 신전 지붕에 블레셋 사람 3천 명이 앉아있었습니다. 신전 안에 있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수만 명은 족히 됐을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 수만 명이 삼손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때 삼손은 다곤 신전의 두 기둥을 잡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사사기 16: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기도할 때 삼손에게 잃어버렸던 힘이 다시 생겨 맨손으로 신전을 무너뜨렸습니다. 이제까지 사용했던 힘보다 더 큰 힘이 생겼습니다. 성경은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다고 했습니다. 기도가 하나님을 내 힘으로 삼는 것입니다. 말씀이 힘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라함입니다. 라함은 레헴(자궁)이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자궁은 아기가 자라는 곳입니다. 라함은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라함은 엄마가 아기에게 베푸는 깊고 부드러우며 아주 친밀한 사랑입니다. 아기에 대한 애정으로 마음이 물처럼 완전히 녹아진 엄마의 사랑입니다. 세상에 엄마와 아기처럼 친밀한 관계가 있을까요?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엄마가 아기를 사랑하는 부드럽고 친밀한 말로 표현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자신을 엄마와 아기의 관계처럼 아주 가깝고 친밀한 사이로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저 봉서산에 가만히 서 있는 나무와 같은 분이십니까? 아니면 길에 박혀 있는 돌멩이 같은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엄마와 같이 친밀하고 가까이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한 달 정도 전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진짜 관심은 어떤 사람들의 마음 보다는 제자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 지에 깊은 관심이 있으십니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이것은 믿음 차원의 질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로 믿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본을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 나의 주인,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이 고백,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나를 구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으십시오. 예수님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구세주이십니다. 우리는 수 없이 이것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떠나시기 직전에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과 식사를 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친히 떡과 고기를 구워 아침을 준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으라.” 이 말을 좀 더 친근하게 바꾸면 얘들아! 우리 같이 아침 먹자.”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앞 문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얘들아!”(아가야!)라고 부르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부르듯이 제자들을 친밀하게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아이에게 하듯 떡과 고기를 떼어주십니다. 그런 다음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때 예수님이 사용한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가페입니다. 아무 조건 없는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말입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물으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를 물으십니다. 그것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주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더 나아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을 깊이 사랑하십시오. 주님을 엄마 대하듯 친밀하게 대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다윗처럼 진실하고 친밀하게 예수님께 고백해보세요. 아기가 엄마를 부르듯 예수님을 불러보세요. 산에 굴러다니는 감정 없는 돌멩이 대하듯 하지 마십시오. 로봇을 대하듯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쇳덩어리 대하듯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16).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주신 날에>  

다윗은 하나님께 이 고백을 언제 했을까요? 부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제목이 아주 깁니다. 시편에 부제가 있는데 두 번째로 긴 부제입니다. 가장 긴 부제가 붙은 시편은 60편입니다. 보통 제목은 짧게 붙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제목을 아주 길게 붙였습니다. 이렇게 부제를 길게 표현한 이유는 시를 쓰게 된 동기를 정확하게 기록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말을 많이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말을 많이 할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많이 말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말을 하셨습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나타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말을 했는지 생각해봅시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나타내고 표현하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게 제목을 길게 잡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말을 많이 했습니다. 

다윗은 이 시를 지은 때를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건져주신 날에여러분! 좋은 일이 있을 때 무엇을 하십니까? 가족들 아니면 친구들과 맛있는 것 먹으러 가시나요? 뒤풀이를 하러 가시나요? 사람들은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이 있는 바로 그 날에 은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뢰어 이르되라는 말을 직역하면 자세히 말하다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모든 원수에게 구원하신 날에 하나님을 아주 자세하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대충 한 두 마디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모두 세세하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노래로 만들어서 정성껏 찬양하고 있습니다.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는 말은 찬양대 지휘자의 인도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겪은 일을 노래로 만들어서 공예배 때 찬송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세하게 고백해봅시다.  

전에 사역하던 교회에 제가 맡은 교구에 속한 집사님이 해주신 이야기입니다. 이 집사님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미국에 사는 동생 가족이 왔습니다. 동생은 필라델피아의 아주 좋은 저택에 살고 있었고, 동생 부부에게는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대화 중에 할아버지가 미국에 있는 좋은 집을 자기 가족에게 사준 것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큰 아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동안 할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다니 갑자기 아이 러브 유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모두 웃었다고 합니다. 이런 때 보통 사람들은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할아버지,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할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아이는 자기의 가족에 대한 할아버지의 마음을 안 것입니다. 그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이 아이는 할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안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에 대해 사랑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그 사랑의 손길에 사랑으로 응답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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