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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고등학교 때 태일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똑똑하고, 착하고, 믿음이 좋은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태일이가 교회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십자가상의 강도가 받은 구원을 부끄러운 구원이야!” 일생 동안 온갖 나쁜 짓을 하다가 죽기 몇 시간 전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강도의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뭘 알겠어요. 저는 그때부터 강도의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십자가상의 강도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강도는 천국에 가서 부끄러워하며 살고 있을까요? 하나님이 이 강도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구원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는 어디에도 부끄러운 구원이란 표현은 없습니다. 강도의 구원은 구원이 인간의 어떤 선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가르쳐주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구원받은 백성은 자신이 받은 구원의 은혜에 대해 모든 영광과 찬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구원은 은혜 의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강도는 은혜를 입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강도의 구원은 은혜에 의한 감격적 일이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염치없는 구원도 없고, 부끄러운 구원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온전한 구원, 완전한 구원, 넘치는 구원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으세요? 우리가 믿음으로 받은 구원은 부끄럽고 부족한 구원이 아니라 완전한 구원, 충만한 구원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 한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에 학력고사 190점 전후를 맞고 서울대 법대에 합격한 학교 선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정확한 점수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너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이지만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60여명의 학생들을 놓고 거짓말을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고민이 돼서 지난 주간에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았더니 82년도에 200점 이하, 180점 대를 맞고 서울 법대에 합격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당시 서울대 법대는 학력고사 340점 만점에 310-320점 이상을 받아야 됐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0점 이하를 맞은 선배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서울대 법대에 지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에 서울대 법대에 미달 사태가 났습니다. 서울대에서 교수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학생을 입학시킬 것인지 불합격시킬 것인지. 점수가 조금도 아니고 너무 미달이어서 학교 당국이 고민을 했습니다. 이 선배의 부모님과 선배가 서울대를 찾아갔습니다. 합격만 시켜준다면 열심히 공부를 하겠다고 교수님들에게 다짐을 했습니다. 결국 서울대는 이 학생을 합격시켜주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제가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이 학생의 서울대 합격은 부끄러운 일일까요? 아니면 감격적인 일일까요? 이것에 대해 사람들마다 의견을 달리하겠지만 저는 감격적인 일 또는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대 역사에 유일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다른 학생들이 기분이 나쁠까요? 억울할까요? 불쾌할까요? 하지만 학교 내규에 몇 점 이하는 불합격이라는 규정이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어떤 선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으로 감격과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예수님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한 포도원에 들어가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더위와 싸우며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품꾼이 마감 직전인 다섯 시에 포도원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한 시간 정도 밖에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거리를 찾아서 새벽 일찍 시장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 하루 종일 시장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답답하고 우울했습니다. 그런데 마감 직전에 주인의 부름을 받고 일하러 포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일이 끝났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얼마나 주었을까요? 포도원 주인은 한 시간 일을 한 사람에게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동일한 품삯을 주었습니다. 다른 일꾼들이 억울했을까요? 불쾌했을까요? 하지만 주인은 그들에게 계약한 대로 품삯을 지불했을 뿐입니다. 이 품삯은 부끄러운 품삯일까요? 아니면 감격적인 품삯일까요? 너무 감격적인 품삯일 아닐까요? 우리의 구원은 매우 감격적인 사건입니다.
일생 동안, 교회와 사회에 여러 분야에서 아주 큰 기여를 한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천국 문에 이르렀을 때에, 한 사람이 그 앞에서 지켜 서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바울 선생이었습니다. 바울 선생이 천국에 들어가려는 그 사람을 붙잡았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이곳을 통과하려면 약간의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당신이 일평생 행한 일들을 점수로 계산해서 1000점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 정도 점수라면 자신이 있다는 듯이 “1000점이라고요? 별로 대단한 것 같지는 않군요.”하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바울 선생이 말을 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점수에 보탬이 될 만한 이야기를 다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30년 동안이나 선교기관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교사들을 해외로 파송했지요.” “아! 그래요? 정말 대단하군요. 1점입니다.” “네? 1점이라고요? 아니, 그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까? 참, 이상하군요. 하지만, 계속하겠습니다. 저는 충실한 가장이었습니다. 한 여인과 결혼하여 무려 50년 동안을 살면서 가정에 충실했고, 아이들도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목사, 선교사, 선생님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은 늘 행복했답니다.” “정말입니까? 당신은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요즘에 당신 같은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2점을 더 가산해드리겠습니다.” “네? 2점이라고요? 참으로 알 수가 없는 일이군요.” 그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1000점을 만들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조바심이 난 그는 계속 자신의 과거 행적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지난 60년 동안 한 번도 교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매일 새벽 기도회에 참석했고, 주일에는 장년부 성경공부를 인도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모든 면에서 훌륭한 사람입니다. 또, 1점 가산입니다.” 바울의 말에, 그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 겨우 4점이군요. 그런데, 난 어떡하죠? 더 이상은 점수에 보탬이 될 만한 이야기가 없는데…. 예수님, 저는 어떡하면 좋습니까? 저는 천국에 들어갈 만한 사람이 못되나 봅니다. 제발 이 죄인을 용서해주십시오! 이제는 정말 주님 밖에 없습니다. 제게 구원을 주실만한 분은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때, 갑자기 바울선생이 그 사람을 바라보고 선언했습니다. “자, 이제야 당신은 1000점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천국에 들어가도 좋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한 것은 그 사람이 세상에서 내세워왔던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하고 예수님만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만 받은 감격적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강도의 구원은 염치없는 구원도 낯 뜨거운 구원도 아닌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으로 받은 감격적인 사건입니다. 만약 이 강도의 구원이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한다면 이 강도가 받은 은혜는 부끄러운 은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시기 위해서 구원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사야 26:19에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 놓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라고 했습니다.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주님의 은혜는 이슬처럼 신선하고, 영롱하며, 빛난 은혜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어두운 은혜가 아니라 빛나는 은혜입니다. 흙탕물 같은 칙칙한 은혜가 아니라 찬란한 은혜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정죄가 아니라 우리를 감격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때문에 감격, 감사, 찬양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도는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이사야 60:8에 “저 구름 같이, 비둘기들이 그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것 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냐”라고 했습니다. 여기 구름과 비둘기가 누구입니까?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구름 같이,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비둘기가 같이 날아온다고 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어떤 일을 했을까요? 이 강도가 구원받은 다음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악행을 멈추는 일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7:38에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두 강도는 함께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뭐라고 욕했을까요? 당시 통용되는 일반적인 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강도는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던 악행을 즉시로 멈추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죄 뿐만 아니라 지난 날의 나쁜 습관도 멈추어야 합니다. 이 강도는 그 동안 수많은 악행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그 악행들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이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한 강도는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그 강도는 이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40-41절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두 강도는 동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강도는 자기 동료 강도를 정직하게 꾸짖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지만 자신의 죄를 눈감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죄도 눈을 감습니다. 잘못된 일을 침묵하는 행동은 그 죄에 대해 동의해주는 것입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강도는 예수님을 믿은 후 자신의 악행을 멈추고, 동료의 죄를 꾸짖었습니다.
그런 다음 강도는 회개했습니다. 이 강도는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이유가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악이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입니다. 강도는 자신이 지은 죄를 진솔하게 인정했습니다. 믿음과 회개는 쌍둥이입니다. 자동차 바퀴 두 개가 나란히 굴러가야 하듯이 믿음이란 바퀴는 회개란 바퀴와 나란히 굴러가야 합니다. 회개의 바퀴가 고장이 나면 믿음의 바퀴는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회개 없이 온전히 설 수 없습니다. 회개가 없는 믿음은 가짜이거나 병든 것입니다. 회개하는 믿음이 건강한 믿음, 진짜 믿음입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날마다 회개하시고, 순간순간 회개하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회개입니다. 교회에 오면 제일 먼저 회개하십시오. 강도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강도의 믿음은 회개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진짜였습니다.
그런 다음 강도는 예수님을 변론했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야유를 하며, 욕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위해 변론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도가 예수님을 변론했습니다. 예수님이 억울한 판결을 받고 고난을 당하실 때 예수님을 변론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도가 예수님을 변론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이 고난받으실 때 유일한 변론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 강도는 예수님이 당한 형벌은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강도의 믿음은 부끄러운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 옆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샛별과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부르는 캄캄한 밤에 바닷가에서 홀로 빛나는 등대와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이 용기가 이 사람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강도는 예수님을 향해 정확하게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 강도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로마서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강도는 아무도 없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인 거리에서 공개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믿음에 있어서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사람들 앞에서 숨기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을 유다 사로잡혀왔다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다니엘서는 다니엘이 기록했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이 유다 포로임을 밝히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하만과 모르드개가 나옵니다. 하만은 왕 다음으로 막강한 권세를 가진 사람이고, 모르드개는 왕궁을 지키는 문지기입니다. 하만이 왕궁을 들어갈 때 사람들이 하만에게 절을 했지만 모르드개는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만은 자신에게 절을 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박해했습니다. 그때 모르드개는 자신이 유다인임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는 고난을 당할 때 자신이 유다인임을, 하나님의 백성임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매우 혼란합니다. 혼란한 중에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이 교회를 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내가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임을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에 다니는 것이 부끄러워서 숨기고 있습니까? 강도는 십자가에 달려 조롱당하시는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강도는 짧지만 매우 놀라운 기도를 올렸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세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강도는 죽어가면서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나를 기억하소서!” 기억은 매우 소중합니다. 왜 사람들은 박물관을 만들고 역사관을 지을까요?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사진을 찍을까요? 왜 메모를 할까요?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기억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기억을 하지 못하면 매우 섭섭해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잊힌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치매환자의 가족이 겪는 아픔은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잊힌다는 것은 정말 큰 아픔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잊히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언젠가 잊힌 사람이 될 것입니다. 국군의 날 비행기가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날아갑니다. 하지만 잠시 후에는 비행기가 지나간 흔적도 없습니다.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듯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 인생의 비행을 다 마치면 금방 잊힌 사람이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지만 주님이 기억해주시는 사람이 되면 세상이 기억해주지 않아도 두렵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주님이 기억해주시면 족합니다. 강도는 주님께 천국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해달라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강도처럼 우리도 기도합시다. “주님! 나를 기억해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강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강도에게 내가 네게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은행 금고의 열쇠를 가진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진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로버트 펠드먼의 「우리는 10분에 세 번 거짓말 한다」란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처럼 사람들은 10분에 세 번씩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 1998년에 처음 상영한 <라이어>(거짓말)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거짓말이라는 연극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이 연극을 국민연극이라고 부릅니다. 작년 12월까지 45,000 상영했습니다. 최장 기간 동안 상영된 연극입니다. 영국의 사회학자 라크만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연인이나 어머니와의 대화에서도 3분의 1이나 절반이 거짓말이었다고 합니다. 세상은 거짓말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이 강도를 진실하게 대해준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강도에게 진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가장 진실하게 대해주시는 분은 아내도 남편도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진실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실 때 끝까지 함께 했던 사람은 아이러니 하게도 이 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마지막 동반자로 강도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동반자는 왕도, 귀족도, 베드로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 같은 사람도 주님의 동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흉악한 강도와 함께 하시는 것을 기쁘게 여기셨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의 별명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죽을 때는 흉악한 강도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저런 사람이 교회 다니네.” 제가 묻겠습니다. “저런 사람이 다니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다녀야 할까요?” 교회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교회에 갈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라고 욕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이 교회 다니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교회는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닐 수 있습니다. 만약 다닐 수 있는 사람과 다닐 수 없는 사람을 나눈다면 이미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욕을 먹는 사람을 부르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립니다. 그렇다고 옛날 그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당신 같은 사람이 교회에 다니느냐는 말을 듣지 않도록 변화됩시다.
예수님의 마지막 동반자는 강도 중에 강도였으며, 악인 중에 악인이었습니다. 마태복음(마가복음)은 강도라고 했고, 누가복음은 행악자(카쿠르고스)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무장한 강도였고, 강도질을 하면서 사람도 죽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로마 정부에 대항하는 반란군이었을 것입니다. 로마 정부는 이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했고, 당시 십자가형은 최고형이 선고된 사람에게 내려진 사형입니다. 이들에게 선고된 십자가형은 공정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강도가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했을 때 예수님을 조롱하던 강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악한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십자가형을 인정할 만큼 흉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최고형을 받은 흉악한 죄인들과 주님은 마지막을 함께 하셨습니다. 흉악한 두 강도 사이에 있다는 것은 강도들의 두목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 강도의 두목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무가치한 사람에게까지 주님은 다정하게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은 내가 너와 천국까지 동행하겠다는 약속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이 음성이 들려졌습니까? “네가 장차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을 때 여러분의 영혼의 귀에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라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이 음성이 여러분의 심령 깊은 속에 울려 퍼지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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