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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비둘기

조회수 : 12회

본문 : 창세기 8:6~12
주일오전예배 | 2024-12-22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교회마다 강대상에 투명 아크릴판을 세웠습니다. 아크릴 판을 맞추러 광고 회사에 갔더니 교회 강대상에 할 거라고 하니까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어떤 교회냐고 묻지도 않고 교회라니까 무료로 해주는 거예요. 믿음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강대상에서 세워진 아크릴 판을 보면서 저 아크릴 판을 만드는 사람은 누가 하나님께 얼마나 충성을 했기에 코로나19로 다 어려울 때 이런 번창하는 복을 받을까? 아버지가 충성하셨나? 할아버지가 충성하셨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학교, 병원, 식당, 동사무소 등등 아크릴판을 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코로나19가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인데 아주 소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복이었습니다. ‘복을 받으려면 이런 복을 받아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말세에 여러분에게 이런 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고린도후서 2:15-16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주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서 나는 그 향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썩은 냄새이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로운 냄새이었습니다. 하나의 향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의 악취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입니다. 바울의 사도직이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의 향기이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의 악취였습니다. 제가 목사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싫은 악취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좋은 냄새입니까? 아니면 썩은 냄새입니다.

예레미야 2:31너희 이 세대여 여호와의 말을 들어 보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캄캄한 땅이 되었었느냐 무슨 이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나라가 망해갈 무렵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광야 같이 황량하고 캄캄하고 답답하며 재미없게 느껴졌습니다. 반면에 바알 우상은 이스라엘에게 오아시스 같고, 고급 소파 같았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사막이십니까? 캄캄합니까? 아니면 가시밭이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망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은혜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황량한 사막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시밭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빛이시고, 힘이시고, 오아시스이시며, 안식처이십니다.

방주는 직사각형의 상자입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 방주는 답답하고, 재미없고, 한심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으로 피한 사람들과 동물에게 방주는 피난처이었고, 안식이었으며, 생명이었습니다. 교회가 이 시대 사람들에게 재미없고 답답하며 한심스럽게 보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쉬는 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듣는 것이 얼마나 이상해보이겠습니까? 하지만 교회에 피한 사람들에게는 안식처입니다. 여러분에게 교회가 생명의 향기가 되고, 소파처럼 편안한 영혼의 안식처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광야 같고, 재미없는 곳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찬송, 예배, 기도, 말씀이 답답하고 재미가 없으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영혼이 망하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은혜받을 수 있을 때 은혜받으십시오. 오늘은 방주에서 날린 비둘기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비둘기는 신자의 영혼을 아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시편 68:13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비둘기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동물들은 방주 안에서 1년 정도를 살았습니다. 방주 안에서 비둘기는 무엇을 했을까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동면(하면)입니다. 모든 동물은 주변의 온도(기후)가 갑자기 변하면 잠을 잔다고 합니다. 홍수로 지구에 급격한 기후 변화가 있었습니다. 창조과학회원들은 방주 안에서 동물들이 동면(하면)을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분들의 주장이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동물들이 홍수 때 동면을 했다면 세상은 지축이 움직이고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몰아치며 하늘이 열려 세상이 뒤집어져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중에 방주 안에는 극한 평안과 고요가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기가 막힌 은혜와 평강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평강이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4:8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4편은 애가입니다. 이스라엘에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다윗이 아주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지은 노래입니다. 쿠데타로 세상이 난리가 났는데 하나님이 다윗을 눕게 하시고, 잠을 재우셨으며, 안전하게 살게 하셨습니다. 시편 127:2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항상 달콤한 잠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노아와 그 가족이 비둘기를 비롯한 다른 동물들을 돌봐주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21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 전에 노아에게 방주 안에서 먹을 양식을 저축하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370일 동안 먹을 양식을 냉장시설도 없던 시대에 어떤 형태로 보관했을까요? 노아는 썩는 것을 막기 위해 양식을 건조 상태로 저장했을 것입니다. 창조과학회원들은 양식의 건조 중량이 총 1990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저장한 먹이로는 주로 밀, 보리, , 귀리 등의 곡류와 건초, 각종 식용씨앗, 압축한 건초 펠렛, 말린 고기, 말려서 압축한 고기나 분쇄한 가루, 말린 과일, 말린 생선, 말린 벌레, 시럽, 설탕, 소금 등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아는 아주 다양한 먹거리를 말린 상태로 보관했습니다. 물은 어떻게 공급했을까요? 창을 열고 물을 떠서 먹었을까요? 아마도 노아는 지붕에 홈을 파서 내리는 비를 방주 안으로 끌어들여 식수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 안에서 비둘기에게 잘 건조되고 맛있는 여러 종류의 먹이와 깨끗한 물을 주었습니다. 방주에 들어오기 전 비둘기는 천적들의 위험을 무릎 쓰고 들과 산으로 다니며 먹이를 구했습니다. 풀숲과 흙속을 헤쳐 가며 먹이를 겨우겨우 찾아냈습니다. 먹이를 먹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물은 냇물이나 웅덩이에 고인 물, 흙탕물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잘 건조되고 맛있는 다양한 음식과 깨끗한 물을 시시때때로 먹고 있습니다. 비둘기는 방주 안에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방주는 비둘기에게 안식처이었습니다. 세상이 뒤집어져 세상의 모든 비둘기가 물에 빠져 죽을 때 이 비둘기는 선택을 받아 살아남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비둘기가 있었을까요? 그 많은 비둘기 중에 단 일곱 쌍, 14마리의 비둘기만 살아남았습니다. 이런 특별하고 놀라운 은총이 있을까요? 방주 안의 비둘기는 정말 놀랍도록 신비로운 은총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 믿으십시오. 예수님 믿으십시오. 예수님이 인류의 유일하신 구세주,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제가 눈으로 봤고 귀로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구원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이 노아의 홍수처럼 뒤덮여 있는 세상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은 정말 놀랍고, 신비로우며, 아주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은혜는 없고, 이것보다 더 놀라운 복은 없습니다. 세상이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점점 악해져갑니다. 그래서 참 안타깝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며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3:1). 우리는 노아 때의 비둘기처럼 죄악이 노도와 같이 출렁여 사람들이 고통하는 때에 구원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영혼의 방주 안에서 영혼의 양식을 먹여주시고, 영혼의 생수를 먹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황량한 사막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아시스이시고, 안식처이십니다. 광야가 아니에요. 맛없는 빵이 아니라 생명의 빵이에요.

비둘기의 귀소(회귀)본능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귀소본능이란 동물이 자기 서식처나 자기 둥지로 되돌아오는 성질이나 능력을 말합니다. 귀소성, 회귀성이라고도 합니다. 비둘기는 동물 중에 귀소본능이 매우 강한 새로 꼽힙니다. 인터넷, 전화 등 통신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 비둘기는 전서구(傳書鳩)로 쓰였습니다. 전할 전(), 글 서(), 비둘기 구()자를 써서 편지를 전하는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비둘기는 날개가 매우 강한 새로 시속 123Km에서 150km의 속도로 날 수 있습니다. 먹지 않고 쉬지 않고 하루 종일 날 수 있습니다. 비둘기는 하루 동안 1000km 이상을 날 수 있는 새입니다. 사람들은 비둘기의 회귀성과 나는 능력을 이용해 편지나 필름을 다리에 묶어 날려 보내 긴급한 상황에서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2009625, 오클랜드 대학 마이클 워커 교수와 코듈라 모라 박사는 비둘기들은 지구 자기장에 반응하면서 정확하게 자기 집을 찾아간다고 뉴질랜드 헤럴드등이 보도했습니다. 지구는 커다란 자석이고, 위도나 경도에 따라 자기장의 세기가 달라지는데, 이를 장거리를 이동하는 전서구 비둘기가 민감하게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비둘기는 일종의 위성항법장치(GPS)를 타고 난 셈입니다. 일부에서는 비둘기가 자기장 외에도 태양 고도나 지구 중력, 후각(냄새), 청각(소리)을 활용한다고 합니다. 비둘기를 마취해서 다른 지역에 가져다 놔도 마치가 풀리면 다시 집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1918년 미국과 독일 사이의 전쟁 당시 미국은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많은 수의 통신용 비둘기를 날렸습니다. ‘쉐어 아미’(cher ami)라는 비둘기는 한쪽 눈과 다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도착해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전달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에서는 이 비둘기에게 훈장을 수여했으며, 현재는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박제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에린튼 박사는 여러 전문가와 함께 비둘기가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헬리콥터를 타고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 비둘기들은 영국에서 바다를 건너 프랑스로 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2나 되는 거리였습니다. 새벽에 영국에서 풀려난 비둘기들은 일단 높은 상공으로 날아가 크게 원을 그리면서 주변을 살폈습니다. 덮어놓고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방향설정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비둘기들은 그렇게 방향설정을 하고 일정한 코스로 프랑스 쪽으로 정확하게 날아갔습니다. 비둘기는 아무 데나 가지 않습니다. 비둘기는 반드시 자기가 살던 집으로만 날아갑니다.

노아가 창으로 날려 보낸 비둘기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방주에서 나온 비둘기는 무작정 아무데나 정신없이 날아갔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둘기는 방주의 창에서 나와 틀림없이 방주 위의 하늘로 높이 날아올라 방주를 몇 바퀴 돌았을 것입니다. 비둘기는 항상 이렇게 합니다. 비둘기는 방향을 잡은 후에 한 곳으로 계속 날아갔을 것입니다. 그곳이 어디일까요? 틀림없이 비둘기는 방주에 들어오기 전에 자기가 살던 곳으로 날아갔을 것입니다. 방주에 들어온 지 1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알을 낳고, 새끼를 돌보며, 먹이를 구하기 위해 다니던 곳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곳의 냄새를 잊지 않았습니다. 비둘기는 본능적으로 자기가 살던 옛 보금자리로 날아갔을 것입니다. 마치 쇠가 자석에 인정사정없이 끌리듯 비둘기는 자기 살던 보금자리에 끌렸습니다. 홍수가 다 쓸어버려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지만 비둘기는 자기가 과거에 살던 옛날 집을 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얻기가 무섭게 비둘기는 그곳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습니다. 이제 자유입니다. 비둘기는 자유롭게 날아갔습니다.

우리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고, 말씀도 들으며 영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생활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육적인 본능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옛 성품은 죽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교회 오시기 전 세상에서 즐기던 어떤 것이 마음 속에 언뜻언뜻 그림처럼 그려지기도 하지 않습니까? 지금 말씀을 듣고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는 정욕과 욕심과 시기와 미움과 세상적 즐거움의 음흉한 그림자가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지 않습니까? 비둘기가 방주 밖을 자신의 날개로 마음껏 날아갔던 것처럼 우리의 육적 본능은 날개를 단 비둘기처럼 매우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죄악을 즐기던 그 장소로 다시 날아가고 싶습니다.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황성철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한쪽 다리를 많이 저는 장애인이십니다. 강의 시간에 자신을 동대문에서 장사하는 장돌뱅이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고, 신학을 공부하고, 박사가 돼서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지만 날씨가 더운 여름날이면 장돌뱅이 시절 동대문에서 장사를 하다가 막걸리를 한잔 들이키던 때가 생각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때처럼 한 잔 들이키고 싶은 생각이 밑에서부터 올라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인간적인 본성과 정욕과 욕망이 살아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면서 종종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애굽에서 먹던 고기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추억하며 다시 애굽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았고, 찬송을 부르며, 영적 생활을 하지만 우리는 옛날에 애굽에서 먹던 그것을 다시 먹고 싶어 합니다. 저는 은혜를 잊어버리고 정욕을 채우기 위해 세상을 헤매는 그리스도인들을 종종 봅니다. 베드로후서 2:22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 하고 있습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우리 속에 여전히 짐승 같은 성향이 살아있다는 베드로의 사자후를 가슴에 새기십시오.

비둘기는 아직 마르지 않은 세상에서 잠시도 발붙일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비둘기는 날개가 강해 하루에 1000km를 쉬지 않고 날 수 있는 새입니다. 심지어 먹지 않고 하루 종일 날 수 있는 새입니다. 그렇다고 계속 날 수는 없었습니다. 비둘기는 쉴 곳을 찾았습니다. 저 멀리에 펼쳐진 들판이 깨끗하고 쉴 만한 곳처럼 보여 힘을 내서 날아가서 앉았지만 아직 마르지 않아 발이 빠져 급하게 다시 날아올랐습니다. 비둘기는 두리번거렸습니다. 들판 끝에 커다란 바위가 있어 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날아갔지만 진흙으로 뒤덮여 있어 역시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둘기는 더 높이 날아올라 앉을 곳을 찾았습니다. 저 멀리 부러진 나무가 보여 나무라면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죽을 힘을 다해 날아갔지만 온갖 오물로 뒤덮여 있어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둘기는 동쪽으로 서쪽으로 남쪽으로 북쪽으로 쉴 곳을 찾아 동분서주했지만 아 세상에는 쉴 곳은 없었습니다. 반면에 까마귀는 시체 위에서 잘 놀고 있었습니다. 시체 위에 앉아서 시체를 뜯으며 간간히 비둘기를 바라보았습니다. 뭐 때문에 저러지! 답답한 비둘기! 까마귀의 눈에 비둘기가 얼마나 바보 같이 보이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비둘기는 천성적으로 썩은 것은 딱 질색입니다. 비둘기는 냄새나는 곳을 피해서 날아갑니다.

9절에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라고 했습니다.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라는 말씀을 우리말 성경은 비둘기가 앉을 곳을 찾지 못해라고 번역했고, 표준새번역 성경은 그 비둘기는 발을 붙이고 쉴 만한 곳을 찾지 못하여라고 번역했습니다. 발붙일 곳이라는 말은 앉아서 쉴 곳, 안식할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비둘기는 먹지 못했고, 마시지 못했고, 쉬지 못했습니다. 비둘기에게는 쉴 곳이 필요했습니다.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해 지쳐있는 모습은 안식처를 찾아 헤매는 현대인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비둘기인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는 결코 안식할 곳이 없습니다. 비둘기는 세상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을 잘 묘사해줍니다. 다윗은 자신을 세상에서 고난당해 쉴 곳 없는 비둘기에 비유했습니다. 시편 68:13,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다윗은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비둘기입니다. 그것도 황금 비둘기입니다. 결코 세상에서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까마귀가 아닙니다. 까마귀라고 오해도 하지 마십시오. 까마귀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의 한 마리 비둘기입니다. 그것도 황금 비둘기입니다. 비둘기가 안식할 수 있는 곳은 방주 밖에 없습니다. 아무데나 가지 마십시오. 비둘기는 아무 것에나 섞이지 않습니다.

전에 어떤 집사님 댁 심방을 간 적이 있습니다. 거실, 주방, 식당이 따로 있는 넓은 집이었습니다. 거실에서 예배를 드리고 식당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제가 앉은 자리 맞은편에 고급 장식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장식장 층층에 고급스러운 여러 그릇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층에는 넓은 공간 한 가운데에 컵만 하나 딱 있었습니다. 그 컵은 전체가 금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저게 다 금인가가 궁금했어요.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빛깔이 다 금 같이 보였어요. 식사를 하고, 과일을 먹고, 차를 마시려고 하는데 집사님이 장식장을 열더니 그 금 컵을 꺼내면서 목사님! 이거 진짜 금이에요.”라고 해요. 그러더니 그 컵에 차를 주시는 거예요. 장식장 층층이 여러 고가의 그릇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그릇들은 다 섞여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층에는 그 컵만 있어요. 다른 것은 없어요. 집사님이 그 금 컵을 다른 것과 섞어서 놓지 않았어요. 구별해 놓았어요. 오직 그 컵만 있어요. 왜요? 이 그릇은 금이거든요. 다른 것과는 차원이 다르거든요. 우리는 아무데나 가서 섞여 노는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의 비둘기입니다. 황금 비둘기입니다.

비둘기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두 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요나와 토르입니다. 요나는 집비둘기이고, 토르는 산비둘기입니다. 본문에서 비둘기는 요나입니다. 집비둘기입니다. 노아는 산비둘기가 아니라 집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됐습니다. 헬라어로 비둘기를 뜻하는 단어가 두 개입니다. 하나는 페리스테라이고 다른 하나는 튀르콘입니다. 전자는 집비둘기이고, 후자는 산비둘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하셨습니다(10:16).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둘기는 산비둘기가 아니라 집비둘기입니다. 집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요? 집비둘기는 주인에게 매우 충성스럽습니다. 전서구로 활용되는 새는 집비둘기입니다. 집비둘기는 아주 먼 거리에 있어도 주인의 집으로 찾아가 편지를 전달해줍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여러 종류와 섞여 살아도 때가 되면 주인을 잃어버리지 말고 주인께 돌아오라는 의미입니다. 때가 되면 주인께 오는 새가 비둘기입니다. 오직 주인되신 예수님께만 충성하라는 의미입니다. 때가 되면 주인께 돌아오십시오. 주인께 충성하십시오.

비둘기는 방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안식하던 곳에서는 이제 더 이상 안식할 수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쓰러지고 엎어지고 뒤집어졌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이 더러워졌다는 사실입니다. 비둘기는 이제 그곳에서 안식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비둘기는 방주의 노아 품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방주가 자신의 새로운 안식처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영혼은 비둘기처럼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며 관찰해보지만 예수님 안에 있지 않고는 발에 안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오랫동안 날아다녀 보아도 결국 자기 자신의 합당한 안식처로 돌아오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하나님을 떠나서는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안식이나 영광을 절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황금으로 입혀진 황금 비둘기입니다. 까마귀가 아닙니다. 까마귀로 착각하지 마시고 비둘기로 사십시오. 옛날로 돌아가지 마시고 비둘기로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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