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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주변인, 경계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아웃사이더, 줄여서 아사라고 합니다. 주변인이라는 말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둘 이상의 이질적인 사회나 집단에 동시에 속하여 양쪽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아니하는 사람.” 현대인들 중에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서 서성이는 주변인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주변인인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삶을 맴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사십시오. 그런데 교회에도 주변인이 있습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그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년, 2년 혹은 몇 년 주기로 이 교회, 저 교회 옮겨 다닙니다. 영적 주변인이 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주변에서 서성이지 마십시오. 교회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예수님은 진짜 살아계신 구세주,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내 인생을 맡겨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분이십니다. 결단을 하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고 맞아주십니다.
여호수아 2장에 보면 기생 라합이란 여인이 성벽에 거주했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2:15에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성벽 위에”란 말이 히브리어로 ‘성벽의 벽면 안에’라는 의미입니다. 여리고의 성벽이 꽤 두꺼웠던 것 같습니다. 성벽에 여러 개의 방이 있었는데 라합은 그 방 중에 하나에 거주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라합이 성벽 위에서 휴게실 또는 오락실 정도를 운영하는 주모 정도로 생각합니다. 성벽에 근무하는 병사들이 오다가다 거기서 쉬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라합이 창녀였을 것으로 해석합니다. 어쨌든 라합은 성 밖도 아니고, 성 안도 아닌 성의 안과 밖의 경계선인 성벽에서 살았습니다. 라합은 철저하게 여리고에서 주변인, 경계인이었습니다. 아사 중에 아사입니다. 그런 그가 신약성경을 열면 첫 번째 페이지에 있는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하게 있습니다. 마태복음 1:5-6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했습니다. 여리고 성의 주변인이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 멤버 중의 멤버가 됐습니다. 아사 중에 아사가 인사 중에 인사가 됐습니다. 라합이 주변인에서 하나님의 나라 핵심 멤버가 된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결단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신 일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를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 정탐꾼들 앞에서 라합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2:11) 라합은 결단을 하고 이스라엘의 정탐꾼 두 명을 목숨 걸고 숨겨주었고, 탈출시켜주었습니다. 이 결단이 라합을 여리고 성의 주변인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 멤버가 되게 했습니다. 때때로 성도들에게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지난 주에 이어서 까마귀 스토리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 보내자 까마귀가 땅에 물이 마르기까지 날아서 왕래했다고 했습니다. 6절,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왕래하다’는 말은 ‘가고 오고하다’라는 뜻입니다. 까마귀는 가고 오고했습니다. 까마귀는 어디를 가고 오고했을까요? 까마귀는 물이 마르기 시작한 세상과 방주 사이를 가고 오고했습니다. 왕래하다는 히브리어로 야차입니다. 야차는 ‘나아가다’, ‘나가게 하다’, ‘출입하다’, ‘왕래하다’, ‘발행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까마귀가 물이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땅 위를 날아다니다가 다시 방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까마귀는 땅에 물이 다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방주 안으로 들어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까마귀가 어디로 돌아왔을까요? 캠벨 몰간이라는 성경학자는 까마귀가 돌아오기는 했지만 방주 안이 아니라 방주 위고 갔다고 했습니다. 까마귀는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방주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방주 위에 앉았습니다. 까마귀는 강한 새입니다. 용기 있고, 두려움이 없는 새입니다. 까마귀는 물이 말라가는 땅 위를 마음껏 날아다니며 놀았습니다. 까마귀는 세상에서 노는 재미에 푹 빠졌습니다. 하지만 쉬지 않고 계속 날 수는 없었습니다. 쉬기도 했을 것입니다. 까마귀는 그럴 때마다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방주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고, 방주의 지붕 위에 앉아서 쉬었습니다. 왜 까마귀는 방주 안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방주 안이 답답하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자유롭게 살고 싶었을까요? 방주 안에서 구속받는 게 싫었을까요? 까마귀의 심정을 어찌 알겠습니까? 어쨌든 까마귀는 방주 안보다는 방주 밖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캄캄한 방주 안에 1년 이상을 갇혀 있었습니다. 다시 답답한 방주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서 놀다가 지쳐서 쉴 곳이 필요하면 한 번씩 방주로 날아와 지붕에 앉아서 쉬었습니다.
예배 후에 여러분은 까마귀처럼 세상으로 날아갈 것입니다. 세상을 마음껏 힘 있게 나십시오. 저는 여러분이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마음껏 날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다음 주에는 꼭 다시 교회로 돌아오십시오. 세상에 좋은 게 많습니다. 갈 곳도 볼 것도 먹을 것도 많습니다. 또 먹고 살아야 합니다. 바쁩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까마귀처럼 세상 일과 세상 놀이에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마십시오. 세상이 좋고 할 일이 많고 바빠도 세상에 너무 깊이 빠져 교회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까마귀 신자는 되지 마십시오. 까마귀는 지쳐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지쳐서 돌아오지 마시고 때가 되면 돌아오십시오. 곤고할 때 주님께 와야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때가 되면 주님께 오십시오. 식사 때가 되면 식사를 하고, 잠잘 때가 되면 잠을 자듯이 때가 되면 주님께 오십시오.
어느 날 욕심 많은 여우가 포도밭을 지나가다 담 너머로 탐스럽게 익은 포도 열매를 발견했습니다. 여우는 포도밭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았고, 울타리 사이에 난 구멍을 발견했습니다. 여우는 그 구멍 사이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여우의 몸이 구멍보다 컸기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우는 꾀를 냈습니다. 사흘을 굶어 구멍을 통과할 정도로 몸을 홀쭉하게 만들었습니다. 여우는 구멍을 통과해 포도를 실컷 먹었습니다. 배부른 여우는 다시 포도원을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빵빵해진 배가 구멍에 걸려 나올 수 없었습니다. 여우는 하는 수 없이 사흘을 다시 굶어 몸이 홀쭉해져서야 포도밭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 사이에 포도원 주인에게 잡혔다면 여우는 어떻게 됐을까요? 지나친 욕심은 더 갖지 못함에 대해 괴로움과 피폐함을 만들고 결국 자기 자신을 망가뜨립니다.
노아는 방주로 다시 날아오는 까마귀를 보고 매우 반가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방주의 창으로 오지 않고 지붕에 앉았습니다. 노아가 손짓을 하고, 소리를 지르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까마귀는 방주 위를 맴돌며 까악까악 소리를 낼뿐이었습니다. 노아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노아가 까마귀를 기다리고 바랐던 것처럼 우리 주님은 여러분이 다시 주님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교회는 왔는데 주님 품에 안기지 못하고 주님 주변에 서성이는 주변인, 까마귀 신자가 되지 마십시오. 교회에 오셨으면 결단하고 주님의 품에 안기십시오. 찬송에 빠져보십시오. 기도 빠져보시고 예배에 빠져보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안식과 평안이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 좋아 돌아오지 못하는 까마귀 신자가 아니라 때가 되면 돌아오는 비둘기 신자가 되십시오.
어느 날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저는 여러 사람과 집 안에서 함께 있었습니다. 방도 있고, 거실도 있고, 주방도 있었습니다. 집안은 밝고 평안했습니다. 그런데 현관에도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집 안과 현관 사이에 문이 있었고, 현관과 밖 사이에도 나가는 문이 있었습니다. 집 안과 현관 사이에 있는 문은 닫혀있었지만 밖으로 나가는 출입구의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현관에 있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고,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현관에 계속 있었습니다. 현관은 빛이 있었지만 조금 어두웠고 불편해보였고 앉을 곳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벽을 기대어 있었습니다. 저는 꿈을 깨고 ‘이게 무슨 꿈일까?’ 생각했습니다. 문득 교회에는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고, 문 근처나 교회 근처에서 서성이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성경이 아니고 그냥 개인적인 꿈입니다. 참고만 삼을 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 문간에서 서성이지 마십시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냥 안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집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십니다. 교회 주변을 맴도는 까마귀 신자가 되지 마십시오. 영적 주변인이 되지 마십시오. 서성이지 마십시오. 당당하게 들어오십시오. 자신 있게 찬송하시고, 힘 있게 기도하십시오. 내 집 소파에 앉는 것처럼 편안하게 앉으십시오. 내 침대에 눕는 것처럼 편안하게 앉으십시오.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마십시오. 교회의 주인은 목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교회의 주인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똑같은 자녀들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당당하게 들어오십시오. 집에서 아버지 눈치를 보며 밥 먹는 아들이 없고, 아버지 눈치 보며 앉아있는 딸은 없습니다. 당당하게 예배드리시고, 당당하게 말하십시오.
까마귀는 물 위를 날아다니며 무엇을 했을까요? 많은 성경주석가들이 까마귀는 물이 말라가는 땅 위를 날아다니며 땅 위에 널브러져 썩어가는 동물들의 사체를 뜯어먹었을 것이라고 동일하게 말합니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까마귀가 3-4주 정도 왕래하면서 먹고 살았던 것을 보면 맞는 말입니다. 온 세상에 동물의 사체가 널려 있었고 적당하게 썩어 있었습니다. 까마귀는 너무 좋았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썩은 고기들이 세상에 널려있었습니다. 까마귀의 세상이었습니다. 물을 만난 고기처럼 까마귀는 시체를 뜯어먹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 시체 위에서 뜯어먹다가 싫증이 나면 저 시체에서 뜯어먹었습니다. 때로는 마르지 않은 땅에 앉아 발이 진창에 빠져 발에 진창이 묻기도 했습니다. 진창에 빠져 깜짝 놀라서 푸드득 거리다가 날개와 몸에 진창이 튀었습니다. 까마귀의 온 몸은 썩은 시체와 진창으로 더럽혀졌습니다. 하지만 까마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삶이 좋았습니다. 까마귀는 더러운 삶을 즐기며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너무 좋아 방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까마귀의 삶을 살면 안 됩니다. 세상에는 부정한 것투성이입니다. 부정한 일이나 부정한 것에 손을 대지 마십시오. 시체처럼 썩어가는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다 썩을 것들입니다. 없어질 것들입니다. 시체 위를 맴돌다가, 시체 위에 앉고, 시체를 만지고, 시체를 뜯어 먹는 까마귀의 삶을 살지 마십시오. 영혼을 더럽히는 일에 손대지 마십시오. 한때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시체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름이 참 기분이 나쁩니다. 죽은 체하고 아무데서나 누워있는 놀이입니다. 사람들이 아슬아슬한 나뭇가지 위에, 철로 위에, 심지어 고층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 누워서 이 놀이를 합니다. 이 시체놀이를 하다가 아파트 난간에서 떨어져서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까마귀처럼 영적으로 시체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까마귀처럼 부정한 것에 앉고, 부정한 것을 즐기고, 부정한 것을 먹습니다. 이 세상 부정한 것에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요한복음 6:27에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고 했습니다. ‘썩을 양식’이라는 말을 NIV 성경은 ‘상하는 양식, 망치는 양식’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세상에는 영혼을 망치는 음식이 있습니다. 썩을 양식이라는 말을 KJV와 NASB는 사라지는 양식, 죽을 양식, 파괴될 양식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세상에는 먹으면 사라지는 양식이 있습니다. 세상 죽어 없어지는 썩어가는 양식을 탐하지 마세요. 까마귀처럼 시체 놀이 하지 마세요. 까마귀 신자가 되지 마세요.
까마귀는 방주의 지붕을 더럽혔습니다. 까마귀는 세상에서 놀다가 몸에 묻은 썩은 시체, 진창을 방주 위에 앉아서 털어버렸습니다. 까마귀는 방주의 지붕을 더럽히고, 지붕 위를 맴돌면서 까악까악 짖어댔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살다보면 알게 모르게 내가 더러워집니다. 부정한 것으로 교회를 더럽히지 말아 주세요. 까악까악 까마귀 소리를 내 다른 사람을 불안하게 말아주세요. 까마귀처럼 죽음의 말들을 입으로 쏟아내 교회를 더럽히지 말아주세요. 까마귀처럼 더러워지면 주님께만 털어놓으십시오. 십자가를 가슴에 품으세요.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주님이 다 씻어주십니다. 예레미야 15:10에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어머니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를 나게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입니다. 예레미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평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 욕, 미움, 원한을 품어내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로하십시오. 십자가를 안으십시오. 그 피가 내 모든 아픔과 더러움을 씻어버립니다.
일제 강점기에 이상이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이상은 경성공업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의 건축과 기사로 특채되어 입사한 수재입니다. 경성공업고등학교는 현재의 서울대 공대에 해당합니다. 이상은 1934년도 7월 24일에서 8월 8일까지 15일 동안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라는 시를 연재합니다. 원래는 30편을 연재하려고 했는데 신문사에 “연재가 미친놈의 잠꼬대냐?”, “그게 무슨 시란 말인가”, “당장 집어치워라” 등등의 독자들의 투서가 빗발쳐 15편까지 연재하고 중단했습니다.
오감도라는 말은 없습니다. 건축과 기사였던 이상이 조감도라는 말에서 가져온 말입니다. 조감도는 새 조(鳥), 볼 감(瞰), 그림 도(圖) 자를 써서, 새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표현한 지도나 그림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bird's-eye view라고 합니다. 새의 눈으로 본 세상이 조감도입니다. 새가 하늘에서 본 이 세상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참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감도에서 오자는 까마귀 오입니다. 까마귀 오(烏)는 새 조(鳥) 자에서 점 하나를 뺀 글자입니다. 이 점은 눈을 나타냅니다. 까마귀는 전신이 온통 검은 깃털로 뒤덮여 있어 검은 눈의 위치가 잘 안 보이기 때문에, 새 조에서 눈을 나타내는 획 하나를 지워 버려 ‘눈이 없는 새’를 나타내고자 한 상형자입니다. 몸도 까맣고, 눈도 아주 까만 까마귀의 눈으로 본 세상이 오감도입니다. 까막눈이라고 하잖아요. 까마귀의 눈으로 본 세상은 어떨까요?
일제 강점기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조선이라는 나라를 까마귀의 까만 눈으로 본 세상이 오감도가 아닐까요? 참 진리를 잃어버리고 거짓에 속아 넘어가 어둠 속에서 헤매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보면서 눈이 보이지 않는 까마귀를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이 오감도에 보면 13명의 무서운 아해들이 나옵니다. 13인의 아이들은 눈이 없기에 맹목적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썩은 고기를 좋아하는 까마귀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마십시오. 까만 눈으로 세상을 보지 마십시오. 참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을 구하십시오. 비둘기의 맑은 눈으로 세상을 봐주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면서 “너희는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한 눈으로 세상을 봐주십시오. 세상에 빠져버린 까마귀 신자가 되지 마십시오. 까마귀 눈으로 시체를 뜯어먹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마십시오. 세상에 있다가 때가 되면 돌아오는 비둘기 신자가 되십시오.
노아는 땅에 물이 마른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창을 열고 까마귀를 한 번, 비둘기를 세 번 내보냈습니다. 노아는 비둘기는 7일 간격으로 날려 보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비둘기를 날려 보내고 비둘기가 돌아왔을 때 7일을 셌습니다. 왜 6일도 아니고 8일도 아닌 7일을 셌을까요? 노아는 방주 안에서도 빠지지 않고 안식일을 지킨 것입니다. 7-8장의 노아의 홍수 기록을 읽다보면 많은 숫자가 나옵니다. 600, 601, 150, 1, 2, 7, 10, 17, 27, 40 등등입니다. 대부분의 숫자가 1-2번 나오고, 2와 40이 4번 나옵니다. 그리고 7은 7회 나옵니다. 노아는 방주 안에서 7일을 기준으로 날짜를 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7일 기준으로 날짜를 세셨습니다. 홍수 전에 노아에게 앞으로 7일 후에 비가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7:4,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7:10,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노아도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7일을 기준으로 날짜를 셌습니다. 방주 안에서도 7을 세면서 안식일을 지킨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살 때 노아처럼 7일 세면서 주일을 기억하십시오.
어렸을 때 주인공이 무인도에 표류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무인도에 표류하자 동굴 벽에 표류된 날짜를 하나씩 표시했습니다. 비스듬히 아래로 네 번을 긋고, 한 번은 가로로 그렸습니다. 여러분도 보셨을 것입니다. 표류된 날짜를 5일 단위로 묶었습니다. 5일, 10일, 15일, 20일, 25일 …. 무인도에서는 모든 날이 다 똑같은 날입니다. 평일과 휴일의 구분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날이 그날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인도나 사회에서나 특별한 날이 있습니다. 바로 주일입니다. 방주 안에서의 삶은 매일 똑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날이 그날이었습니다. 날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방주 안에서도 7을 세면서 안식일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날이 그날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날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7을 기준으로 돌아갑니다. 다니엘 9:24에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역사를 70이레로 정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안식일인 주일을 기억하고 꼭 주일을 지키십시오.
미국 이글스필드 한인교회 고영민 목사님이 미국의 한 호텔에 머물게 됐습니다. 객실에서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나갔는데, 엘리베이터 앞에 까만 옷에 까만 모자를 쓴 아빠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서 있었습니다. 정통파 유대인 부자였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왔는데 먼저 온 자기들이 타지를 않고, 목사님에게 먼저 타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로비로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고 목사님이 버튼을 눌렀습니다. 회전문으로 호텔 밖으로 나갈 때도 목사님이 먼저 회전문을 움직이자, 두 사람이 회전문으로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전원을 켜지 않습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우스운 일입니다. 유대교 랍비 마빈 토게어는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인류 역사상 가장 고난을 많이 받은 민족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BC 721년에 망했습니다. 지금부터 2745년 전의 일입니다. 남유다는 BC 586년에 망했습니다. 지금부터 2610년 전입니다. 2745년, 2610년 동안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인은 여전히 유대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른 민족이었다면 벌써 사라져 없어졌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흩어져 살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두각을 나타내며 살고 있는 비결이 안식일을 지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 속에서도 지켜낸 안식일이 삶의 원천이 된 것입니다.
고 황수관 박사님은 살아 있을 때 환자들에게 숨이 차고 땀이 날 정도로 매일 30-60분씩 일주일에 3-5일 정도의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고 늘 권했습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일주일에 3일 이하로 운동하면 효과가 없다고 합니다. 운동 효과를 보려면 최소한 일주일에 3일 이상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3일에서 하루를 늘려 4일을 하면 3일 보다 효과가 월등하게 좋고, 5일을 운동하면 4일을 한 것보다 월등하게 좋다고 합니다. 하루 차이인데 효과가 아주 많이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5일에서 6일로 하루를 늘이면 효과가 나아지기는 하지만 3일에서 4일, 4일에서 5일로 늘였을 때처럼 효과가 많아지지는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7일을 운동을 하면 오히려 운동효과가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 박사님은 환자들에게 늘 3~5일 정도 운동을 하는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우리 몸은 일주일에 하루 쉬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몸이 쉬는 것처럼 영혼도 쉬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일에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27에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날입니다. 꼭 우리의 안식일인 주일에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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