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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컴퓨터를 만들고, 그 운영체제의 이름을 ‘윈도우즈’(Windows, 1985년), ‘창문들’이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보면 모니터는 창문 모양입니다. 컴퓨터 앞에 앉는 것은 창문 앞에 앉는 것입니다. 컴퓨터로 어떤 작업을 하다가 다른 작업을 하려면 작업을 하던 창을 닫고 새로운 창을 엽니다. 우리는 컴퓨터를 하면서 창을 닫는다고 하고, 새 창을 연다고 합니다. 빌 게이츠는 자신이 만든 컴퓨터가 세상과 소통하는 창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세상과 고통하고 있습니다. 컴퓨터를 통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보고, 들으며, 정보를 얻습니다. 컴퓨터로 보고, 컴퓨터로 말하며, 컴퓨터로 듣습니다. 컴퓨터가 소통의 창이 됐습니다. 윈도우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바탕화면이 파란색이었습니다. 후에 바탕화면에 사진작가 찰스 오리어가 찍은 푸른 들판에 파란 하늘이 있는 사진을 넣었습니다(ppt). 이로 인해 이 사진은 세계 10억 명 이상이 본 유명한 사진이 됩니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이 사진을 바탕화면으로 선정한 이유를 “고객에게 제공하려고 하는 체험(자유와 가능성, 조용함, 따뜻함)을 이 사진이 예시해주고 있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세상과의 소통, 자유, 가능성, 조용함, 따뜻함 등이 윈도우(창)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컴퓨터라는 창을 통해 자유와 소통이 아니라 매임, 속박, 단절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컴퓨터, 핸드폰, 게임, 유튜브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나는 말하고 있는데 상대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데 벽에다가 말하는 느낌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데 꽉 막힌 느낌입니다. 소통이 아니라 단절입니다. 문을 닫고 방에서 혼자 컴퓨터나 핸드폰을 하고 있습니다. 한 집에 있는데, 한 공간에 있는데 딴 세상에 있는 느낌입니다.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만들어진 컴퓨터의 창이 오히려 단절을 낳고 있습니다. 컴퓨터는 가상공간입니다. 현실이 아닙니다. 컴퓨터가 현대인들에게 매우 위험한 창이 되고 있습니다. 컴퓨터 창을 경계하십시오. 컴퓨터 창을 닫으십시오.
하나님도 창문을 만드셨습니다. 2절,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하늘의 심판의 창문이 닫혔다고 했습니다. 말라기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문이 히브리어로 아루바인데 이 말은 격자, 창문, 수문이란 뜻입니다. 하늘의 문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늘의 창문이라는 뜻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늘에 축복의 창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창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은 창문에 붉은 줄을 달았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창에 붉은 줄이 없는 집은 다 멸망당했지만 창에 붉은 줄이 달린 라합의 집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핸드폰, 컴퓨터의 가상현실에 갇히지 마십시오. 그 창은 진짜 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이 실제 창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로 난 창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으로 구원을 경험하고, 자유를 얻고, 하나님과 소통하십시오. 하나님의 창이 진짜 창입니다.
창
물이 점점 물러가고 말라 산봉우리가 보인 후 40일이 지났을 때 노아는 방주의 창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은 방주 윗부분에서 아래로 한 규빗 되는 지점에 창문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6장 16절,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방주의 높이가 30규빗(약 15m)였으니까 창은 방주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방주에는 창이 오직 하나만 있었을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방주를 삥 둘러서 여러 개 있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어쨌든 창은 방주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방주 안은 캄캄했습니다. 사면이 막혔습니다. 하나님은 어둠과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노아와 그 가족이 방주에서 위를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중에서도 위를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사면이 박힌 중에서,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창문의 제작에 대한 명령은 6:16에 나오지만 그 쓰임(목적)은 본문 6절에 나옵니다. 노아는 창문을 열고 땅에 물이 얼마나 말랐는지 보았고,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이 창은 크게 세 가지 용도로 쓰인 것 같습니다.
첫째, 창은 방주에 빛이 들어오는 통로였습니다. 국어사전에 창문은 ‘공기나 빛 따위가 통하도록 벽이나 지붕에 만들어 놓은 작은 문’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창문이라는 단어가 두 개입니다. 하나는 초하르(6:16)이고 다른 하나는 할론(8:6)인데 두 단어 모두 빛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문은 빛의 통로입니다. 방주의 안과 밖을 역청(pitch)으로 칠했습니다. 역청은 검은 색이나 갈색이었기 때문에 방주 안은 더욱 캄캄하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을 열면 빛이 들어왔습니다. 창문은 막힌 공간에 빛이 들어오게 하는 장치입니다. 창문은 윗부분에 있었습니다. 빛이 위에서 들어왔습니다. 창으로 하늘이 보였습니다. 방주의 창은 하늘의 창, 빛의 창이었습니다. 창은 아래가 위를 바라보는 곳입니다. 노아는 창으로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빛이 들어오는 창이 있습니까? 영혼의 창이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성경이 우리 영혼의 창입니다. 시편 119:130에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열면 캄캄한 영혼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집니다. 성경을 여십시오. 성경을 열어 빛이 내 영혼 속으로 들어오게 하십시오. 성경이 내 영혼의 창입니다. 이 성경이 나에게 자유를 주고, 소통을 하게 하며, 따뜻함을 줍니다. 컴퓨터의 창이 자유와 조용함과 소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2025년도 달력이 나왔습니다. 어떤 분이 요즘 달력을 안 만드는데 뭐 하러 달력을 만드느냐고 해요. 하지만 만들었습니다. 달력에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걸어놓은 것은 집에 빛을 걸어놓는 것입니다. 말씀을 집에 걸어놓으십시오. 빛을 벽에 걸어놓으십시오. 말씀을 걸어놓는 것은 빛을 걸어놓는 것입니다.
방주에 창을 만들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창을 연 사람은 노아입니다. 하나님이 창문을 열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창은 노아가 열었습니다. 내 영혼의 창은 내가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시지 않습니다. 창을 닫아놓고 ‘답답하다’, ‘캄캄하다’, ‘우울하다’, ‘속상하다’, ‘길이 안 보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막혀있다’라고 하지 마십시오. 창을 여십시오. 하나님의 빛이 내 영혼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 빛을 쐬어야 내 영혼이 따뜻하고, 평온과 고요함을 느끼며,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빛입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예수님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빛입니다. 내 마음의 창을 열고, 인생의 창을 열고, 교회의 창을 엽시다.
요한복음 1:1~5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의 증언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 빛이 사람들에게 비추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 깨닫지 못했을까요? 마음의 창을 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창을 열고 빛을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창을 닫고 어둠 속에서 캄캄하다고 하지 마십시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빛을 맞이하십시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둘째, 창문은 방주를 환기시키는 통로였습니다. 창문은 실내의 오염된 공기를 밖으로 내보내고, 실외의 깨끗한 공기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통로입니다. 만약 방주에 창문이 없었다면 수많은 동물이 내뿜은 이산화탄소와 악취로 숨이 막혔을 것입니다. 미드라쉬는 방주 안이 동물 냄새로 코를 찔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창문이 있음으로 나쁜 공기를 밖으로 내보내고, 좋은 공기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교회가 신약 시대의 방주입니다. 교회는 창문을 열어야 합니다. 교회의 창문이 무엇입니까? 예배, 기도, 찬송이 교회의 창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 찬송이 내 영혼을 숨 쉬게 합니다. 사람은 호흡을 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예배, 기도, 찬송의 문을 닫으면 영혼의 호흡이 막힙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일입니다. 기도하십시오. 예배하십시오. 찬송하십시오. 하늘을 향해 창을 여십시오. 기도의 문을 여는 것은 하늘을 향해 문을 여는 것입니다. 창(할론)이라는 말이 굴뚝이라고도 번역됐습니다. 창이 지붕 쪽에 있어서 굴뚝 역할도 했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늘을 향해 숨을 쉬는 것입니다. 사람은 땅의 존재이며 동시에 하늘의 존재입니다. 사람은 육신의 호흡을 해야 하지만 영혼의 호흡도 해야 합니다. 하늘을 향해 숨을 쉬십시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사람의 호흡은 대부분 폐로 이루어지지만 피부에서도 호흡이 이루어집니다. 모공과 땀구멍을 통해 탄산가스와 각종 노폐물이 밖으로 나가고, 산소가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화상을 심하게 입으면 피부호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명에 위협을 줍니다. 활성산소(산소찌꺼기)가 모공과 땀구멍으로 배출되지 않으면 피부가 급격히 노화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호흡을 잘 해야 건강합니다. 사람에게는 폐로 하는 호흡이 있고, 피부로 하는 호흡이 있으며, 영혼으로 하는 호흡이 있습니다. 여러분! 영혼도 호흡을 합니다. 영혼이 호흡을 해야 영혼이 건강합니다. 먼저 영혼이 건강해야 육신이 건강합니다. 요한삼서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영혼이 잘 되어야 범사가 잘 되고 육신이 강건합니다. 여러분! 영혼으로 호흡을 하게 하십시오.
다니엘은 12-3세 때 세계 최대의 제국인 바벨론의 왕궁으로 끌려갔습니다. 포로들은 왕실 대학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왕이 먹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왕의 음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왕의 음식을 먹은 다른 포로들보다 더 건강했습니다. 눈에 띌 정도로 훨씬 건강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 때문입니다. 은혜 때문에 영혼이 강건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끌려간 후부터 70년 이상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다니엘 6:10에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를 윗방에 올라가서 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지는 것을 알고도 기도의 창을 닫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어떤 순간에도 영혼의 창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음식을 먹고, 최고로 좋은 옷을 입고, 최고의 저택에서 살며 최고의 대우를 받았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기도했을까요? 다니엘에게 기도는 영혼의 창문이었습니다. 기도의 창을 닫지 마십시오. 기도의 창을 항상 열어놓으십시오.
마귀는 우리 성도들의 영혼의 창을 닫으려고 합니다. 오염된 공기로 영혼이 늙고 병들게 하려고 합니다. 기도의 문이 열려 있어야 우리 육신이 늙어도 영혼이 날로 새로워집니다. 기도의 창을 닫지 마십시오. 저와 함께 우리 교회 기도의 창을 엽시다.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며, 하늘을 향한 우리 교회의 창을 엽시다.
셋째, 창은 방주 밖의 상황을 알 수 있는 통로였습니다. 노아는 창을 통해 홍수 후에 비가 그치고, 바람이 불어 땅에 물이 말라가는 상황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만약 창문이 없었다면 노아는 홍수 후에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창문을 통해 노아는 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바른 지식이 소망을 갖고,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 보내게 했습니다. 현대의 사람들이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 세상의 지식을 바로 깨닫게 하는 지식의 창입니다. 잠언 1:7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했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했습니다. 근본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레쉬트입니다. 레쉬트는 시작, 처음, 맏물, 으뜸,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이 지식의 시작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창입니다. 신앙의 창을 통과한 지식만이 참된 지식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믿음의 창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창으로 보지 않고, 이성의 잣대로 보는 지식은 바른 지식이 아닙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십시오. 바른 신앙의 창을 가지십시오.
까마귀
노아는 창을 열고 까마귀를 한 번, 비둘기를 세 번 칠일 간격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제일 먼저 내보낸 새가 까마귀입니다. 7절,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노아는 왜 까마귀를 제일 먼저 내보냈을까요? 교회에 앉아있으면 봉서산에서 가끔 까악까악 하는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면 제 마음 속에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까마귀는 재수없는 새인데...’입니다. 그러면 제가 얼른 ‘아니지.’라고 생각을 바꿉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까마귀를 흉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까마귀를 신령한 새로 예언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고구려 깃발에 그려져 있는 삼족오(三足烏)는 까마귀입니다. 중국 전설에서 까마귀는 태양의 정기를 받은 새입니다. 고대 아랍에서는 까마귀를 예언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까마귀는 몸 길이가 50cm 날개 길이는 40cm로 큰 새에 속합니다. 독수리에 비하면 많이 작지만 독수리나 매 같은 맹금류들과 맞짱을 뜨는 담대하고 강한 새입니다. 까마귀는 독수리가 와도 도망가거나 숨지 않습니다.
“까마귀 언어” 연구가인 일본 국립종합연구대학원의 쓰카하라 나오키 조교는 15년 동안 2천 개 이상의 까마귀 울음소리를 수집해, 까마귀의 행동과 비교, 분석해 까마귀는 최소한 40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밝혀냈습니다. 그에 따르면 까마귀가 “까~까~까~” 우는 것은 먹이를 발견했을 때 동료들에게 알리기 위해 내는 소리입니다. 까마귀어로 하면 “여기 먹이가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또 “깍깍깍”하는 울음소리는 매 같은 위험한 새가 있을 때 동료들에게 알리거나 경계가 필요할 때 내는 소리입니다. 까마귀어로는 “위험하다.”에 해당합니다. 보금자리로 돌아갈 때는 “콰~콰~”하고 웁니다. 이것은 “안전하다”는 의미입니다. 까마귀는 이밖에 “안녕” 등의 인사도 한다고 합니다. 까마귀는 영리하고 기억력이 매우 뛰어난 새입니다. 또 까마귀는 강하고 용맹한 새입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노아가 까마귀를 가장 먼저 날려 보낸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비추어 볼 때 노아는 까마귀를 통해 땅에 물이 어느 정도 말랐는지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노아는 까마귀에게 어떤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방주 안으로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까마귀는 노아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까마귀는 물이 말라가는 세상을 최초로 본 새입니다. 새 세상이 된 후 새 하늘을 최초로 날아본 새입니다. 최초로 방주 밖으로 나간 생명체입니다. 까마귀에게는 정말 큰 은혜와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까마귀는 그 특권과 은혜를 누리기만 했을 뿐 자신의 사명을 망각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명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은혜만 누리고 사명은 감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까마귀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기대를 하시고 복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까마귀처럼 살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기도할 때마다 복을 받았고, 복을 누렸으면, 사명도 감당해야 합니다. “축복! 축복! 축복!”하며 축복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축복을 받았으면 그에 맞는 삶을 살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복만 알고 사명은 모르는 까마귀의 삶을 살지 마십시오.
“경남 산청의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한 학생이 대구의 중학교로 가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대구까지 학교를 보내는 것은 쉬운 상황이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자식의 앞날을 위해 결정했습니다. 지금도 버스로 산청에서 대구까지 4시간 걸립니다. 1950년대이었으니 얼마나 많이 걸렸겠습니까? 하지만 아들은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들은 68명 중에 68등이라는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실망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성적표의 68등이라는 숫자를 1등으로 고쳐 아버지께 갖다드렸습니다. 그런데 어설픈 거짓말이 뜻밖의 일로 번졌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1등을 축하한다고 재산 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마을잔치를 연 것입니다. 아들은 자신의 거짓말 때문에 가장 큰 재산이었던 돼지를 아낌없이 포기한 아버지의 모습을 평생 죄책감으로 마음에 담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 이후 이 아들은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박사가 되고, 대학교수가 되고, 대학교 총장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결혼해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중학생이 된 어느 날 아들은 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요...“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막았습니다. ”알고 있었다. 그만해라. 손자 듣는다.“ 경북대학교에서 총장을 역임했던 박찬석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자식의 뻔한 거짓말에도 묵묵히 기다려주신 아버지의 마음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시골 가난한 집에서 농사짓고 돼지를 기르던 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기대와 믿음의 크기만큼 성장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복을 받았으면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렇다고 노아가 까마귀를 통해 전혀 정보를 얻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까마귀가 왕래했다는 것은 아직 땅에 물이 다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있을 곳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까마귀는 정착할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노아는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땅이 말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얻었습니다. 하지만 까마귀는 노아에게 긍정적인 도구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아가 까마귀의 행태를 살펴서 얻은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까마귀와 같은 도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잠언 16:4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악한 날에 쓰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악한 날에 쓰이는 악의 도구는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뒤에 나오지만 비둘기 같은 선한 도구가 되십시오.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 왕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라고 명령하셨지만 바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애굽에 나타나는 동기가 됐습니다. 바로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온 천하에 나타났습니다. 출애굽기 9:16에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바로는 악의 도구였습니다. 악의 도구가 되지 마십시오. 선한 도구, 은혜의 도구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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