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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드고아의 목자가 이상으로 받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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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아모스 1:1~2
주일오전예배 | 2024-12-01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아모스라는 이름의 뜻은 무거운 짐을 지는 사람’, ‘’, 또는 사명자입니다. 사명은 무거운 짐과 같은 것입니다. 선지자들에게 말씀은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짐을 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짐을 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를 위하여, 누군가를 위하여 짐을 지는 사람이 되십시오. 짐을 안 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짐에 은혜가 있고, 그 짐이 나를 지켜주고, 나를 붙잡아주며, 나를 존귀하게 합니다. 아모스서는 남 유다의 웃시야가 통치하기 시작했던 BC 763년과 여로보암 2세의 통치가 끝나던 BC 753년 사이에 기록됐을 것입니다. 아모스서는 17권의 선지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책입니다. 엘리야, 엘리사 같이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기도로 하늘을 닫기도 하고 하늘을 열기도 하는 선지자를 행동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을 말씀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행동의 선지자들이 기적을 일으켰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망해갔고, 망한 후에 남은 자들을 위해 말씀이 기록됐습니다. 말씀의 선지자 중에 첫 번째 선지자가 아모스입니다.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기적보다는 말씀이 더 필요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으며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 내 형제 5 명이 이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가 있다고 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부자는 죽은 자 중에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에게 듣지 않으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자가 있어도, 다시 말해서 기적이 일어나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병도 고쳐지고, 아픔도 치유되고, 하는 일도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정말 더 필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을 가지세요. 호세아서의 주제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아모스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5:24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아모스는 부패한 사회에 정의를 부르짖었습니다. 최초의 말씀의 선지자가 기록한 선지서의 주제가 사회의 공의입니다. 사회는 공의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공의가 세워지도록 기도합시다. 

 

 

아모스는 드고아의 목자였습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5-16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드고아는 지중해를 기준으로 할 때는 해발 780m이고, 사해를 기준할 때는 1140m인 고지대로 유대광야 또는 드고아 들이라는 불리는 목축지대입니다. 고지대이기 때문에 농사 보다는 목축으로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양떼를 가진 목자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아모스는 이 드고아 들에서 목축을 하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모스 선지학교에 다니던 선교사 지망생이 아니었고, 제사장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7:14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과 산에서 목축을 하며 혼자서 성경보고 묵상하던 평범한 사람을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일상에서 주님과 보내던 사람을 선지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목사가 아니라 평신도를 선지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아모스 시대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쪼개져 있었습니다. 아모스는 남쪽 유다 사람으로 북쪽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왜 하나님은 북쪽에서 선지자를 일으키시지 않고 남쪽에서 그것도 평신도를 선지자로 부르셔서 북쪽으로 보내셨을까요? 그 이유는 북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들이 대부분 가짜였기 때문입니다. 아합 시대 북 이스라엘에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이 있었고, 여호와의 선지자가 400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백성이 아니라 아합 왕 한 사람을 위해 예언을 했고, 하나님이 아니라 정부에 충성을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국가에서 돈을 받을 목적으로 예언하는 가짜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선지자가 직업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습니다. 

푸틴이 러시아의 정권을 잡은 뒤 해외의 러시아 정교회를 모스크바 총대주교 아래에 두기로 계획하고 사제들을 포섭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그들과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피를 흘리는 전쟁을 하는 푸틴을 지지했습니다. 러시아가 수년 동안 피를 흘리지만 정교회 누구 하나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종교가 권력자의 시녀가 된 것입니다.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교육학 교수님 중에 독일에서 공부를 한 정일웅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정 목사님이 독일 유학 생활 중 어느 주일 아침에 교회를 가는데 담임목사님이 하이킹 복장으로 사이클을 타고 어디를 가시더랍니다. ‘예배 시간이 다 됐는데 담임목사님이 어디를 가시지?’라고 생각하며 교회를 갔더니 목사님이 휴가 기간이었습니다. 목회자가 휴가라고 주일에 교회를 가지 않았습니다. 독일에서는 목회자의 사례를 정부에서 줍니다. 독일의 목회자는 공무원인 셈입니다. 독일 목사님들이 가짜 목사라는 말은 아닙니다. 직업으로 생각하는 목회자를 진짜 목회자라고 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중국에 가면 삼자교회가 있습니다. 삼자교회는 중국이 1949년 공산화된 이후 형성된 교회입니다. 삼자교회는 일원화된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실행하기 위한 대중 운동의 일환인 삼자혁신 운동을 통해 생겨났습니다.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삼자회에 가입한 교회를 삼자교회라고 합니다. 삼자회는 중국 공산당과 인민정부의 영도 아래 전국의 기독교 신도들을 단결하여 조국을 사랑하면서 국가의 법령을 준수하고 자치, 자량, 자전의 삼자를 지지해 나가자.”를 주장합니다. 삼자교회는 중국공산당의 사회주의 개조와 국가건설이란 목표에 의해 당과 국가에서 원하는 교회와 기독교인으로 거듭나는 의식화 교육의 일환으로 사회주의 교육을 학습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공산당의 목적을 위해 공산당의 다스림 아래 있는 가짜 교회입니다. 

미가서 3:5-6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먹고 살기 위해 예언하는 가짜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발람은 물질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하려다가 할 수 없자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음행의 덫을 놓았습니다. 선지자들은 타락했고, 여호와의 종교가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 교회와 목사, 성도가 변질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순결하고 거룩하도록 기도합시다. 

1997년에 상영된 박중훈 주연의 <할렐루야>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박중훈은 전과 5범입니다. 교도소 출소 후에 시골교회 목회자를 사칭해 큰 교회에서 개척 자금을 뜯어내려고 하다가 그 교회에서 잠깐 동안 목회를 하게 됩니다. 어느 날 교회 어떤 성도가 말썽쟁이 아들(차태현)을 지도해달라며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박중훈 앞에서 건들거리며 반쯤 누운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있습니다. 박중훈이 바르게 앉으라고 여러 번 타일렀지만 차태현은 한 술 더 떠 책상에까지 다리를 올려놓습니다. 참다가 화가 난 박중훈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인생에 태클이 여기서 들어오나? 마음잡고 목사질 좀 하려고 하니까 여건이 안 되네.”라며 담배를 입에 뭅니다. 그리고 차태현을 두드려 팹니다. 목사가 아니라 목사질을 하는 가짜 목사가 있습니다. 목사가 직업화가 되었습니다. 

북한 평양에 가면 봉수교회가 있습니다. 봉수교회는 김일성이 1988'세계학생청년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외국인들에게 보이기 위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세워진 교회입니다. 봉수교회는 철저히 관제화된 교회로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세운 가짜 교회입니다. 김일성은 간부 부인들 중에 충성도가 높은 빨갱이 여성들’ 200명을 뽑았습니다. 진짜 교인이 생길 요소를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특별 사상 교육도 시켰습니다. 북한 정부는 그들에게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 이유를 교회나 성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투쟁 활동이다. 미제와의 반미 성전에 떨쳐나선 남조선 종교계 인사들을 쟁취하기 위한, 그리고 조국의 통일을 위한 숭고한 투쟁이다.”라고 했습니다. 중국의 삼자교회 보다 더 심한 교회가 평양의 봉수교회입니다.  

그런데 북한봉수교회에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이들이 교회에 가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경험을 합니다. 소위 북한 정부에 맹종하는 빨갱이 여성들에게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믿음이 생기자 교회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예배 시간 보다 두 시간 빨리 나와 찬송하고 말씀을 보며 기도하는 열성분자들이 생겼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목격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찬송가가 들려오면 청년 몇 명이 나타나 교회 담장에 기대어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것이었습니다. 보위부가 그들을 체포해 조사해보니 놀랍게도 평양음악대학교 작곡반 학생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찬송가를 들은 음대 학생들이 예배당에 들어 갈수 없자, 교회 담장에서 찬송가의 곡조를 채보하였던 것입니다. 그 학생들은 경고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또 예배드리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교회 옆길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 11시가 되면 교회 근처에 수백 명이 나타나 교회를 향해 서서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12시에 예배가 마쳐지면 모두 사라졌습니다. 보위부가 이들 일부를 잡아 조사해 보니 기독신자들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조선에는 더 이상 기독교인들이 없다고 확신했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조사하는 중에 나이 많은 한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수를 믿는가?”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비록 내가 교회 들어가서 예배를 보지 못하고 찬송은 못 부르더라도, 내가 교회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합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저는 평양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40년 이상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울면서 말한 여인은 성분이 좋은 간부의 부인이었습니다. 북한의 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세워진 가짜 교회에 성령님의 역사를 나타났습니다. 

가짜 교회에서 가짜 목사가 설교하고, 가짜 성도가 찬송을 불렀는데 진짜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가짜 교회가 진짜 교회를 바뀌어갔습니다. 가짜들끼리 모여서 흉내만 냈는데 진짜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예수 이름의 능력이고,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수없이 찬송을 부르고 말씀이 선포되는데 가짜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진짜 목사가 설교하고, 진짜 성도가 찬송을 부르는데 가짜 목사, 가짜 성도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의 새 바람이 불어와 가짜가 진짜로 변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시대의 조국의 교회가 변질되지 않고 오히려 더 구별되고, 더 거룩해지도록 기도합시다. 저는 목사로서 더 구별되고, 여러분은 성도로서 더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참된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모스는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는 말을 개역성경은 묵시 받은 말씀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묵시와 이상은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상은 눈으로 보는 것이고, 말씀은 귀로 듣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귀로 들었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았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는 것은 계시의 말씀이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피상적이거나 추상적인 말씀이 아니라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은 피상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학자들은 이 여호와라는 말이 히브리어 하야에서 온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야는 영어에 비동사로 존재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분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2절에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며라고 했습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이 부르짖으시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8: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 중에 실제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는 말은 계시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삶으로 경험했다는 의미입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도 확실합니다. 그런데 몸으로 경험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졌다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1 더하기 12.” 산수 문제처럼 머리로만 이해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진 바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정도가 아니라 혀로 맛을 봤다고 했습니다. 시편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신을 맛으로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맛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맛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시길 바랍니다. 

스타 푸르트라는 과일을 들어보셨습니까? 제가 이 과일에 대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이 과일은 별처럼 생겼고, 원산지는 말레이시아이며, 색깔은 밝은 연두색이지만 노란빛을 띱니다. 모과처럼 상큼한 향이 나고, 맛은 새콤달콤합니다. 스타 프루트의 과육은 혈압을 낮추고, 잎에는 콜라겐 보호 성분이 있어 피부 진피층을 보호 및 강화해 피부를 더욱 탄력 있게 만들어줍니다. 스타 프루트에는 뉴로톡신이라는 물질이 함유되어 있어 뇌와 신경조직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의 경우 신장에서 여과되지만, 신장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은 섭취를 주의해야 합니다. 제 설명을 들으니 스타 푸르트가 어떤 과일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런 것은 그냥 피상적인 앎에 불과합니다. 무슨 소리지 하는 분이 계셨을 것입니다. 제가 태어날 때부터 스타 푸르트를 먹으면서 산 말레이시아 원주민들 보다 이 과일에 대해 이론적으로 조금 더 잘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말레이시아 원주민 보다 제가 이 과일에 대해 더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제 지식은 그냥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말레시아 원주민들은 실제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과일이 어떤지 몸으로 느끼며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들은 사람은 본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본 사람은 맛을 본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들어야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맛보아야 합니다. 시편 119:103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꿀보다 더 달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꿀보다 더 단 음식이 많지만 그때는 꿀보다 더 단 음식이 없었습니다. 최고로 단 꿀보다 더 단 것이 말씀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눈으로 읽은 정도가 아니라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말씀을 꿀처럼 달다는 진리를 경험해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은 말씀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말씀을 마음과 몸과 삶으로 경험하고 누리며 살고 있으십니까? 오감으로 하나님을 경험해보십시오. 주님을 맛본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소설가 고든이 쓴 햇살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길에서 과일을 팔며 성경을 읽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길에서 과일이나 파는 소녀가 무슨 성경을 읽나 싶었던 한 신사가 말을 걸었습니다. “너 같은 아이가 성경을 읽어서 뭐에 쓰려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중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난 너보다 훨씬 더 많이 공부하고 대학도 나왔단다. 성경도 읽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볼 수는 없어.” “하지만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계신 걸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본 적이 있니?” 신사의 질문에 소녀가 대답했습니다. “눈이 멀어 태양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따뜻한 햇살의 기운을 느낄 수 있지요.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을 때 제 마음도 햇살처럼 하나님을 느낀답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영혼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살아계십니다.  

 

 

2,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다는 단어는 사자가 울부짖는다는 의미입니다. 사자가 울부짖으면 동물들이 두려워 떱니다. 아모스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소리가 마치 사자가 들판에서 포효하는 것처럼 크고 두렵게 들렸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소리를 내신다고 했습니다. 여기 내신다는 말은 뇌성(천둥)을 발한다는 의미입니다. 천둥이 치면 세상이 진동하고 귀가 떨리며 마음이 흔들립니다. 아모스의 귀에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소리가 온 천지를 울리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소리가 사자의 울부짖는 소리처럼 크고 두렵게 들리십니까? 아니면 모기 소리처럼 하찮게 들리십니까? 이 시간 성령의 음성이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처럼 내 귀와 마음을 울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장가처럼 들리십니까? 여러분! 말씀의 소리가 소귀에 경 읽기처럼 되면 안 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내 귀가 떨리고, 내 가슴이 저며야 합니다. 말씀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러면 사자가 들에서 부르짖을 때가 언제일까요? 사냥을 한 후입니다. 사자가 사냥을 하려고 할 때는 풀 속에서 몸을 낮추고 소리를 죽이고 있습니다. 소리를 내거나 모습을 보이면 사냥감이 다 도망갑니다. 사냥감을 잡으면 그 때 사냥감을 앞에 놓고 앞발로 사냥감을 움켜쥐고 고개를 빼고 하늘을 향해 포효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이 사자의 사냥감처럼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여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사냥감처럼 되었을까요?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 긍휼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한 말씀을 알아야 하지만 불길한 말씀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에게 진노의 손이 아니라 은혜의 손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이 심판의 손이 아니라 복의 손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 뇌성을 발하신다는 말은 이미 번개는 쳤고, 이제는 천둥소리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저 멀리에서 번개가 치면 몇 초 후에 천지를 진동시키는 천둥소리가 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뇌성처럼 임박해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북조 이스라엘 사람들은 벧엘과 단에 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 송아지가 하나님이라며 섬겼습니다. 거기서 가짜 예배가 드려졌고, 가짜 찬송과 기도가 행해졌고, 가짜 말씀이 선포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이 모두 진짜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모스가 예루살렘과 시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난다는 말은 하나님은 벧엘과 단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너희들은 가짜에게 예배하고, 가짜 말씀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이사야 2:3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종교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이라는 말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영적으로 예루살렘이며 시온입니다. 등대교회가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루살렘이 되길 바라며, 진짜 말씀이 선포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진짜 예배가 드려지고 진짜 찬송이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울리는 꽹과리가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울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엘리 시대에 사무엘에게 내가 이스라엘 중에 행하는 일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상 3:11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행하시기 전 선포 되는 말씀 앞에 가슴을 찢고 엎드립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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