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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전에 한학을 깊이 공부하신 노인에게 복음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에 갑니다.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오직 믿음으로만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느냐며 기가 막혀 하고, 손 사레를 치며, 믿기를 거부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너무 어이없어 했던 그분의 표정이 생각이 납니다. 세상에 그런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주 형편없게 생각했습니다. 그 분이 주장하는 구원, 그러니까 극락왕생하는 길은 오랜 수련을 통한 깨달음이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게 뭐예요? 깨달음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식입니다. 지식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바울, 요한 같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지식주의라는 이단입니다. 영적인 지식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식, 깨달음을 추구했습니다. 고대 종교는 깨달음, 득도, 이런 것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고대 헬라 철학도 깨달음, 지식을 강조했습니다. 죄송하지만 현대 종교는 철학의 변형입니다. 헬라 철학에 신적 요소를 가미했을 뿐입니다. 생각해봅시다. 깨달음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사람이 어느 정도 깨달아야 구원을 받을까요? 조금 더 깨달은 사람은 천국가고, 조금 덜 깨달은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되는 건가요? 깨달음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머리가 나빠서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나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는 것이 아주 어렵지 않을까요? 만약 깨달음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천국에는 머리가 좋은 사람들, 일류대 졸업생이 절대다수 많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정말 잘 깨닫지 못하는 무식쟁이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됐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엉뚱한 소리를 해댔는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요한복음 8:43에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들을 줄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구원 받는데 문제가 조금도 없었고, 제자가 되는데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 무식쟁이들이 최고의 제자가 됐습니다.
또 이 세상의 종교는 구원의 조건으로 선행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착한 일을 어느 정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람이 어느 정도 착해야 하는 거죠? 또 사람의 착함과 착하지 않음의 경계선은 뭔가요? 제 아이들이 고등학교 때 봉사를 시간으로 계산해서 대학을 가는데 참고 자료로 삼았습니다. 봉사를 시간으로 계산해서 몇 시간 이상은 합격, 몇 시간 이하는 불합격처리 한 것입니다. 학교처럼 착한 일을 점수로 환산을 해서 60점 이상은 천국, 60점 이하는 낙제 점수로 지옥이라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착한 일을 59점까지 하고 갑자기 죽었습니다. 1점이 모자라서 지옥에 간다면 억울하지 않을까요? 제가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게다가 선행, 봉사, 자선은 가난하고 먹고 살기 어렵고 바쁜 사람은 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선은 시간도 있고, 건강하고,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 유리합니다. 착하게 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도 착하게 살라고 합니다. 착한 사람이 되십시오. 좀 유치하게 한 번 더 생각해봅시다. 돈을 구원의 기준이라고 생각해봅시다. 돈이 구원의 기준이라면 돈을 얼마나 벌면 구원받는 것입니까? 2억이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열심히 돈을 모으다가 1억 9천 9백 9십 9만 9천 9백 9십 원까지 벌고 죽었다고 생각해봅시다. 10원이 모자라서 지옥을 가야 하나요? 키가 구원의 기준이라고 생각해봅시다. 175cm 이상은 천국, 이하는 지옥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천국에는 키가 큰 사람이 많이 갑니다.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이 갑니다. 유치원생, 어린이는 전부 지옥입니다. 174.9mm인 사람은 0.1mm 부족해서 지옥을 가야 합니다.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닐까요? 외모가 기준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여기 앞에 앉아계신 집사님이 기준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이 집사님 보다 못하면 지옥, 잘 나면 천국이라고 가정해봅시다. 이 집사님과 다 똑같은데 코가 약간 삐뚤어진 분이 있어요. 코 때문에 지옥 갔어요. 이런 식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착한 것도 필요하고 자선도 필요하지만 이 세상에 어떤 인간적인 행위나 조건이 구원의 기준이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반드시 선해야 하지만 사람의 성품에서 구원의 요소를 찾으면 안 됩니다. 인간이 구원의 조건을 정하고, 인간에게서 구원의 원인을 찾으면 반드시 불공평한 일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억울한 일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선행, 봉사, 깨달음, 참선, 수도생활 등등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천국과 이 세상의 대학과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코로나 전에는 고등학생들이 대학을 잘 가려면 봉사 시간이 많을수록 유리했습니다. 봉사 점수 많이 따서 대학을 가는 것처럼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점수를 따야 천국을 간다면 대학과 천국의 차이가 뭐죠. 이런 구원론을 자력 구원론이라고 합니다. 봉사하고 착하게 살고 열심히 참선하며 애를 쓰고 노력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는 추측 하에 정한 기준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들이 주장하는 구원론은 자력구원론입니다. 내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구원의 기준이 있습니다. 인간의 힘이 아니라 외부적인 힘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타력구원론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통로가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8: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구원의 기준은 믿음입니다. 믿음만큼 공정한 구원의 조건이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믿을 수 있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불이익도 없습니다. 유리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린이도, 노인도, 천재도, 머리가 나쁜 사람도 심지어 치매에 걸린 사람도 믿을 수 있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중에 한 명으로 꼽히는 뉴턴이 노년에 치매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이도 잊어버리고 생일도 잊어버렸으며 가까운 친구나 제자들이 찾아와서 인사를 해도 뉴턴은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제자 중 하나가 뉴턴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기억나시는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이 무엇인가요?” 그 때 뉴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게 꼭 두 가지는 있지…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라는 것이라네.” 누구나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믿음은 차별이 없습니다. 이사야 42:3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꺼져가는 등불과 같이 연약하고 의미한 믿음도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이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없는 새롭고 신비로운 사조입니다. 이 세상 어떤 종교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왜요? 그들은 믿을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씀, 땀 흘림, 수도, 깨달음, 자선, 봉사, 등등, 인간의 노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만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왜요? 교회는 믿을 수 있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믿을 수 있는 분이 있습니다. 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믿을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래서 믿음을 외칩니다. 여러분은 믿을 수 있는 분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믿음을 외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 값을 완전히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십자가의 순결이 내 순결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내 부활 생명이 됩니다. 발전소에서 발생한 전기가 여기서는 빛으로 있습니다. 이 빛은 발전소와 전등 사이에 전깃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깃줄은 전기가 통하는 통로입니다. 믿음은 전깃줄과 같습니다. 믿음은 나와 예수님을 연결하는 영적 전깃줄입니다. 믿음이라는 전깃줄이 나와 예수님을 연결해줍니다. 착함이 필요하고, 자선이 필요하지만 이것이 예수님과 나를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연결해줍니다. 이 전선이 연결되어 있으면 예수님의 생명이 내 생명이 되고, 예수님의 의가 내 의가 되고, 예수님의 천국이 내 천국이 되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결론, 믿음의 목적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받는다는 말은 ‘획득하다, 얻는다, 가져온다, 적합한 보상을 받다’라는 뜻입니다(코미조). 여기서 영혼은 사람의 영육간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영육간의 생명을 가져옵니다. 믿음의 합당한 보상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깨달음이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믿으면 깨달아집니다. 깨달으려고 하지 마시고 믿으려고 하십시오. 믿으면 깨달아집니다. 믿으면 보이고, 믿으면 이해가 되고, 믿으면 능력이 됩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그때 귀신들린 자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그때 귀신이 쫓겨나가고 아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믿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은혜가 있으면 믿어집니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내가 믿어지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고 의지할 때 구원얻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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