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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욥이 고난당할 때 얼마나 힘들고 막막했는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23:8-9) 앞과 뒤는 공간적 의미에서 앞과 뒤입니다. 또 앞과 뒤는 시간적 의미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입니다. 하나님이 과거에도 내 삶에 안 계셨고, 현재에도 안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미래에도 하나님은 내 삶에 안 계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왼쪽에서 일하시나 만날 수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데 모두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오른쪽에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다는 말은 나를 향한 돌이키심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투명인간이 됐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찾고, 또 찾았는데 하나님을 어디서도, 어떤 일에서도, 그리고 언제고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투명인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욥은 고통 속에서 한 줄기를 빛을 느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나는 지금 내가 가는 길을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은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의 끝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 길 끝에서 나는 순금과 같이 나올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1980년대에 송골매라는 가수가 있었습니다. 송골매의 구창모 씨는 모태신앙인입니다. 젊을 때 신앙을 떠났었지만 지금은 교회 집사입니다. 송골매의 <한 줄기 빛>(이응수 작사)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하늘 끝에서 내려온다 내 머리위에 떨어진다 / 한줄기 빛이 내려앉아 내 마음을 밝혀준다 / 사랑하는 이의 눈빛처럼 저 높으신 이의 손길처럼 / 한줄기 빛이 내려 앉아 내 자리를 밝혀준다 …… 하늘 끝에서 내려온다 내 머리 위에 떨어진다 / 한줄기 빛이 내려앉아 내 마음을 밝혀준다 / 발아래까지 내려온다 가슴 속까지 스며든다 / 한줄기 빛이 내려앉아 내 온몸을 감싸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작가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저 높으신 이라고 했습니다. “한 줄기 빛이 저 높으신 이의 손길처럼 내려온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늘에서 비춰지는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억
홍수로 땅이 물에 150일 동안 잠겨있습니다. 물이 가장 높은 산보다 15규빗 더 차올랐다고 했습니다. 7:20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모든 산들이 다 잠겼습니다. 온 세상이 물 뿐입니다. 방주는 직사각형의 상자입니다. 키도 없고, 노도 없고, 돛대도 없습니다. 앞과 뒤도 없습니다. 설령 노가 있어도 노 저어 갈 곳도 없습니다. 방주는 물결이 치는 대로 이리저리 떠다녔습니다. 만경창파에 일엽편주입니다. 창문이 있었지만 방주 안은 어두컴컴했을 것입니다. 미드라쉬에 보면 방주 안은 온통 짐승들의 냄새로 코를 찔렀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창을 열고 한 번씩 환기도 시키고 밖도 내다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 않았습니다. 온통 물뿐입니다. 5개월 동안 물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노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노아 가족은 방주 안에서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요? 미드라쉬는 노아 가족은 방주 안에서 동물들에게 밥을 주었다고 했습니다(창6:21). 현대의 과학자들은 동물들이 방주 안에 있는 동안 동면에 들어갔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크루즈선처럼 쉬거나 즐길 수 있는 장소가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밖에 보이지 않고, 어두컴컴하고, 답답하고, 동물 냄새로 가득 찬 방주 안에서 노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의 약속처럼 생명을 보존하기는 했는데 앞으로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그렇다 치고 내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막막했을 것입니다.
그때 방주 안에 한 줄기 빛이 비추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억입니다. 1절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억하다’는 말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아니 8장 전체에서 하나님이라는 말 외에 가장 중요한 단어를 꼽는다면 그것은 ‘기억하다’입니다. 여기서 기억하다는 말은 잃어버렸던 기억을 다시 생각해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어 살려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기억하다는 말의 의미는 ‘은혜를 베풀다’ 또는 ‘도와주다’입니다. 하나님이 곤경에 처해 있는 어떤 대상을 위해 당신의 은혜로운 행위를 시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기억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노아는 지금 망망대해 위에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은혜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은혜 밖에 있습니까?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은혜 밖의 인생은 비극이고 공허이며 파멸입니다.
기억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자카르인데 이 말은 ‘마음에 깊이 새기다, 기억하다, 권념하다, 방문하다,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동사가 하나님이 주어일 때 종종 물리적인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레가 붙습니다. 하나님의 의도, 태도 혹은 행동이 무언가를 향해 있음을 나타내줍니다. 하나님께서 방주 안에 있는 노아와 노아의 가족과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향해 계시며, 그들에게 도움을 주시려고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노아와 그 가족에게로 향해 있습니다. 자카르라는 말이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데 노아와 관련해서 처음 나오고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잊어버리고, 안중에도 없으며, 생각하시지도 않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기억 속에 없다는 것은 저주이고, 멸망이며, 인생 최고의 비극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큰 어려움과 곤란 속에도 하나님의 기억 속에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있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있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노아의 무엇을 기억하셨을까요? 창세기 6장에 노아의 신앙적인 성품이 나옵니다. 성경은 노아는 의인이었고, 당대에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 것이 노아의 신앙적인 성품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길이 300규빗(약 150m), 넓이 50규빗, 높이 30규빗 크기의 엄청난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노아는 이 초대형 방주를 산에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산에 나무로 초대형 상자를 만드는 노아를 사람들이 비웃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면서 많은 갈등을 했을 것입니다. ‘계속 만들어야 하나? 이걸 왜 만들어야 하지? 이거 미친 짓을 아닐까?’ 온갖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노아처럼 끝까지 갑시다. 방주를 다 만들자 하나님은 노아에게 가족들을 데리고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끝까지 모두 순종했습니다. 6:22에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했고, 7:5에도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순종하는 모습을 기억하셨을까요? 아닙니다. 1절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방주 안에 있는 사람과 동물들을 기억하셨습니다. “방주에 있는”이라는 말은 “방주 안에 있는”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방주 안에 있는 노아와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을 기억하셨습니다. 노아의 순종과 헌신과 신앙의 성품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신앙은 정말 놀랄만한 것이고 칭찬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것은 방주입니다. 만약 노아의 신앙이 하나님의 기억의 대상이었다면 노아의 다른 가족과 동물들은 기억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방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기억하셨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까지 모두 기억하셨습니다.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은 방주 밖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기억하셨습니다.
여러분! 방주 안에 계십시오.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의 방주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가 노아의 방주처럼 답답한 곳으로 보일 거 같아요.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아요. 세상을 보십시오. 이 세상에 먹고 놀고 보고 즐길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교인들은 그 즐거운 휴일 날 교회 앉아 있습니다. 답답해 보이지 않을까요?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교회는 훈련(수련)이다(Church is discipline.)”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방주처럼 신앙의 수련장입니다. 신앙훈련 잘 받으십시오. 교회는 헌신, 섬김, 순종,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믿음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기억하십니다.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방주 안에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방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억하실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바로에게 학대를 당했습니다. 학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23~25에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습니다. 창세기 6:20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셨습니다. 여러분! 언약의 말씀 안에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마음 속에 말씀이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사야 55:11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것은 당신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을 열면 우리에게 빛이 비칩니다.
하나님이 또 무엇을 기억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려 할 때 아브라함이 소돔에 살고 있는 조카 롯 때문에 기도를 여섯 번 올립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롯이 지체를 하다가 늦어지자 천사들에게 요청해 가까이 있는 소알 성으로 도망합니다. 천사들은 소알로 피하는 롯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창19:22) 천사들은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안전하게 도망갈 때까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롯의 삼촌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 19: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으로 아브라함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엘가나에게 한나와 브닌나라는 부인이 둘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아들을 많이 낳았는데 한나는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브닌나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한나의 마음을 격동시킵니다. 한나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미친 듯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한나에게 아들을 주십니다. 사무엘상 1:19-20에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은 후 3남 2녀를 더 낳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도하는 한나를 기억하셨습니다. 기도가 하나님을 우리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이사야 62:6-7에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기도해보십시오.
사람을 잊어버리는 존재입니다. 요셉이 강간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정치범들이 갇히는 옥에 갇혔습니다.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자가 요셉이 있는 옥에 같이 갇히게 됐습니다. 두 사람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요셉이 두 사람의 꾼을 해석해주었는데 그 해석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되고, 떡 맡은 관원장은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요셉은 술맡은 관원장에게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하지만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40:23에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고 했습니다. 술맡은 권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않았다는 말은 어떤 도움도 은혜도 베풀지 않았고, 그를 위해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굳이 고급 관리가 감옥에 있는 사람을 언급해서 손해볼 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지 모릅니다. 사람은 기억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잃어버립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혀버린 요셉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역사의 무대로 이끌어 올리십니다. 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정확한 순간에 당신의 백성들을 구덩이에서 건져내십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말은 단순히 생각에서 끝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구체적으로 의지와 행동 그리고 당신의 언약에 대한 헌신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 하나님께 내가 잊힌 존재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노아도 그랬을 것입니다. 5개월 동안 하나님의 음성도, 주변 환경의 변화도 전혀 없었습니다. 노아는 망망대해에서 일엽편주 마냥 하염없이 떠다닐 때 자신이 하나님께 잊힌 존재가 아닐까라고 생각한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를 잊지 않고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역사의 무대로 등장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마치 하나님이 없는 사람처럼 살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기억합시다. 세상에 있을 때 주님을 기억합시다. 일을 하다가 주님을 기억합시다. 집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쇼핑을 하다가, 식사 후에 잠깐 커피를 마시다가도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을 불러봅시다. 주님! 주님! 곤란하고 답답한 일을 만나면 우리를 기억하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요청해봅시다. 주님!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답답한 일에 빠졌습니다.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주님!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이곳에 방문해주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하나님의 바람
1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방주에 있는 노아와 동물들을 기억하시고 땅 위에 바람이 불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바람이 히브리어로 루아흐입니다. 루아흐는 바람, 영, 숨, 호흡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1:2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영이 루아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바람이 혼돈하고 공허한 세상에 불어왔습니다. 우리 공허하고 혼돈한 마음에는 하나님의 바람이 불어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바람이 여러분의 인생에 불어오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이 물뿐인 지구를 가슴에 품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총신대학원 유재원 구약학 교수는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는 말을 하나님이 지구를 가슴에 품고 굴리셨다고 해석했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품에 안고 손으로 쓰다듬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극한 애정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사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간섭하심의 표현입니다. 바람이 불자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물이 줄어들었고, 배는 아라랏 산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람만 불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창도 닫아버리셨습니다. 2절에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홍수의 근원을 차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창을 닫고 열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우리 고통의 근원이 사라집니다. 병의 근원, 불행의 근원, 우울증의 근원, 괴로움의 근원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바람이 불어와야 합니다. 이 바람이 불어야 상처 나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삶이 바뀝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바람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바람이 우리에게 불어오길 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는데 홍해가 가로막았습니다. 뒤를 보니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홍해를 향해 내밀자 동풍이 불어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고 땅을 말려버렸습니다. 출애굽기 14:21-22에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라고 했습니다. 바람이 불어 물을 물러가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물을 말려 마른 땅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바람이 근원까지 고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가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자 하나님께서 바람으로 메추라기 떼를 몰고 오셨습니다. 민수기 11:31에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 쯤에 내리게 한지라”고 했습니다.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바람이 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우리에게 불어와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바람이 우리에게 불어오길 기원합니다. 하룻길을 약 30km이고, 두 규빗은 약 90cm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친 사방으로 직경이 30km 높이 90cm의 메추라기가 덮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추라기를 주어다가 구워먹고, 삶아먹고, 지져먹고, 튀겨먹었습니다. 입에서 고기 냄새가 나도록 실컷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바람이 우리 삶에 불어와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저녁 때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오실 때 바람이 불었습니다. 창세기 3:8에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오실 때 바람이 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바람 소리에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평상시 같았으면 하나님께 뛰어나갔을 텐데 죄를 짓고 나니 뛰어나가질 못하고 도망갔습니다. 바람 소리에 하나님을 느꼈지만 하나님에게서 도망갔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지나고 있습니다. 풍랑이 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이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4:24-25에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라고 했습니다. 바람 사이로 주님이 걸어오실 때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내니 두려워말라고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님이시어든 나를 명하여 바다 위로 오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오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주님을 보고 주님께로 갑니다. 바람도 파도도 보지 않고 오직 주님만 보고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바람과 파도로 주님을 시야에서 놓치자 바다로 빠져버렸습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바람과 파도가 일어납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바람을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그 바람 속에서 주님을 느끼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입으십시오. 아담과 하와처럼 도망가지 마시고 주님께 나오십시오. 마귀는 세상에, 우리 삶에 바람을 일으켜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노아처럼 망망대해에 혼자 떠 있는 느낌이 들 수가 있습니다. 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답답함이 기약도 없이 계속 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유령이라고 소리 지르던 제자들처럼 주님이 어디 계시냐고 한탄하지 말고 모진 사람 속에서 주님을 기억합시다. 우리를 기억하시는 주님을 놓치지 맙시다. 우리 삶을 거스르는 바람과 파도 사이로 우리를 기억하시고 찾아오시는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바람이 세게 불고 파도가 세차게 몰아쳐도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물 속에 빠지지 맙시다. 주님이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파도와 바람 속에서 주님을 경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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