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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에베소서 1:23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고 했고, 5:30에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진리는 이 땅에서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교회는 매우 영광스러운 존재임을 말씀합니다. 교회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극히 일부이겠지만 오늘날 교회는 불순하게 되어 영광스러움을 감소시키는 자리에 이르러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4:2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라고 했습니다. 시온의 아들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금에 비교할 정도로 고귀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흙으로 만든 항아리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탄식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시온의 아들들 아닙니까? 우리 성도는 외적 조건이 어떻든지 순금에 비할 정도로 보배로운 존재들입니다. 여러분은 순금과 같이 고귀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보잘 것 없는 항아리가 되지 맙시다. 출애굽기 19장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내게로 인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독수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독수리가 참새를 업겠습니까? 까마귀를 업겠습니까? 아니면 나방을 업겠습니까? 독수리가 업은 것은 새끼 독수리입니다. 하나님이 독수리라는 말씀은 그분의 자녀인 우리도 독수리라는 의미입니다. 새의 제왕인 독수리처럼 삽시다. 참새처럼 살지 맙시다. 나방이 되지 맙시다. 주님의 몸으로서 영광스러움을 잘 보존하십시오. 그 영광스러움을 진흙탕에 빠뜨리지 맙시다. 그 영광스러움을 누리고, 전할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고귀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대로 행할지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목회자로서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저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누구에게도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를 본받으라는 말씀은 단지 신앙만을 본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의 신앙뿐 아니라, 나의 삶, 나의 윤리적 자세, 나의 가치관이나 인생관까지 삶 전체를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아주 두려운 말씀을 이어서 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바울은 단순히 자신만을 본받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너희들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서 우리와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빌립보 교회를 개척한 바울과 디모데와 실라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에서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 중에서 본이 되는 사람들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여겨보라는 말은 자세히 보라, 잘 관찰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따라서 그 사람과 같이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처럼 살라는 말씀입니다. 누군가 나를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있지 마십시오.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며칠 전에 전에 같이 신앙 생활하던 교회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둘째 아이가 결혼을 했는데 사돈댁이 교회는 안 다니는데 자기보다 교회에 대해 더 잘 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잘 알겠어요. 교회에 다녔든지 주변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교회와 교인을 자세히 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속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이 참 쯧쯧쯧’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보고 신앙생활을 하고, 누군가에게 보이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저를 자세히 본다면 저는 부끄러운 목사입니다. 저는 부끄럽지 않은 목사가 되려고 애를 쓰는데 잘 안 됩니다. 저는 제 아내에게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여보, 나는 쓰레기예요.” 그러면 아내가 굉장히 싫어합니다. “당신이 쓰레기면 나는 뭐예요.”라고 해요. 저는 옆에서 자세히 관찰하고 눈여겨보고 기준을 삼을만한 목사가 됐으면 좋겠고,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옆에 있는 교우에게 본이 되는 신앙이 되면 좋겠고, 우리 등대교회는 다른 교회에 본이 되는 교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8에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이 각처에 퍼졌다고 했습니다. 우리 등대교회의 믿음이 각처에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옆에 있는 사람이 여러분을 보고 여러분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16절에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대로’라는 말은 ‘같은 것으로’, ‘똑같은 기준에 의해’, ‘똑같은 규칙에 의해’라는 의미입니다. 기준이 같다는 말입니다. 규칙이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똑같은 규칙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고, 파리에 가면 파리의 법을 따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그곳의 법이 아니라 먼저 성경 규칙을 생각하고 성경의 규칙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세상 법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행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스토이케오입니다. 스토이케오는 ‘줄에 들어서다’, ‘나란히 서다’, ‘일렬로 나아가다’, ‘자기 행동을 맞추다’라는 뜻입니다. 스토이케오는 어떤 줄에 들어서서 자기 행동을 옆 사람과 맞추면서 함께 나란히 나아간다는 의미의 동사입니다.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줄에 들어서서 옆 사람과 열을 맞추고, 보조를 맞추고, 행동을 맞추며, 나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혼자 앞으로 나와도 안 되고, 뒤로 쳐져도 안 됩니다.
군국의 날 열병식을 합니다. 열병식을 할 때 군인들의 총을 든 모습, 모자를 쓴 모습, 경례를 하는 자세가 똑같습니다. 왼손잡이라고 해서 왼손으로 경례하지 않습니다. 왼손잡이도 오른손으로 경례를 합니다. 나는 총을 왼손으로 메는 것이 편하다고 왼손으로 메지 않습니다. 똑같이 오른손으로 멥니다. 군에 있을 때 열병식을 해봤습니다. 옆에 나보다 키가 작은 사람도 있고 큰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과 나는 걸음보폭을 계속 맞추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크게 걷거나 작게 걸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행진을 방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내 길만을 갑니다. 그런데 목표점은 똑같습니다. 내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군국의 날에 에어쇼를 합니다. 비행기 여러 대가 똑같은 속도와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속도로 동일한 방향으로 비행을 하며 쇼를 합니다. 갑자기 빨리 비행을 하거나 위치를 이탈하고 방향을 바꾸면 옆 비행기와 충돌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방향으로 똑같은 목적지를 향해서 전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공동체만을 중시하고 개인의 신앙은 필요 없다고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개인입니다. 신앙은 나와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입니다. 내 신앙으로 자녀가 구원받지 않고, 옆에 있는 집사님 신앙으로 내가 구원받지 않습니다. 나는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항상 옆에 있는 성도를 의식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공동목표를 향해 협력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도 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가슴 아프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8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부인, 섬김, 사랑, 대신 죽음, 희생 등등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들은 십자가의 정신과는 정반대의 삶을 삽니다. 가룟 유다는 십자가의 원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다고 하자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십자가의 배신자가 되지 마십시오. 등대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지 마십시오. 예수님과 원수가 되는 삶을 살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동료, 십자가의 형제가 되십시오. 빌립보 교회 안에는 십자가의 원수들은 세 가지를 행했습니다. 첫째, 배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들의 신은 배요” 둘째,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했습니다.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부끄러움을 가리고 덮어야 하는데 오히려 자랑했습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성도가 됩시다. 셋째, 땅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원수들은 하늘의 일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19절,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들의 신은 배라고 했습니다. 배로 들어가는 것은 음식입니다. 음식은 계속 먹습니다. 아침에 먹고 점심에 먹고, 오늘도 먹고 내일도 먹고, 한 달 후에도 먹고 일 년 후에도 먹습니다. 죽을 때까지 먹는 것이 음식입니다. 음식은 그치지 않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합니다. 신이라는 말은 절대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음식과 육체적 욕망이 그들의 절대적 신이었습니다. 사는 목적이 먹는 것과 욕망을 채우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들은 더 높은 가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욕망에 따라 살다가 멸망의 길로 갈 것입니다. 땅에 살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삽시다.
철의 제국이라 불리며 결코 망할 것 같지 않던 로마가 망한 이유가 사치스러운 식탁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인구는 120만 명 정도이었는데 국가 부양자가 40만 명, 노예가 40만 명, 자립자가 4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립자 40만 명 중에 귀족, 원로원 의원, 고급 관리 등 상류층이 3000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상류층의 음식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치스러웠습니다. 상류층의 만찬은 오후 4시에 시작돼 자정이 넘도록 계속 되었습니다. ㄷ 자형 와대에 누어서 먹고 마시는데 배가 차면 새의 깃털을 목구멍에 넣어 토해내고 다시 먹었습니다. 그동안 식사복만 10회 쯤 갈아입고, 먹는 동안 첩들이 부채질을 하고, 소년 노예가 막대기로 파리를 쫓으며, 여자 안마사는 몸을 주물렀고, 노예들은 변기를 들고 생리 사인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고 합니다. 음식을 잘 먹으라고 먹는 내내 몸을 주무르고, 먹다가 토하고, 먹다가 싸고 아! 로마의 귀족들은 참으로 추하고 더러운 생활을 했습니다. 한 끼 식사가 노예 한 명의 몸값과 거의 맞먹었다고 하니 얼마나 사치스러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게 고대 로마 고귀들의 삶이었습니다. 철의 제국 로마의 귀족들은 배를 신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로마의 멸망 원인 중에 하나는 음식입니다. 음식으로 망한 나라가 로마입니다. 로마가 망한 것은 추한 욕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고대 로마인들처럼 배를 신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연예인들의 사는 집이 종종 텔레비전의 비춰집니다. 대저택입니다. 화려한 장식과 응접실, 7-8개의 침실과 고급스러운 가구, 와인 저장고와 수영장이 있습니다. 얼마나 넓은지 어떤 아파트는 거실이 두 개입니다. 고급 외제차, 캠핑카, 등등을 자랑합니다. 지금 세상은 배가 신이 된 세상입니다. 세상은 지금 멸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갈수록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부자를 비판하거나 연예인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집에 살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급 외제차도 타시고 좋은 집에도 사십시오. 받은 은혜대로 적절하게 누리며 사는 것이 나쁘거나 죄가 아닙니다. 성경은 부도 가난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신은 아닙니다. 돈이 나도 아니고, 돈이 자부심도 아니며, 돈이 나의 정체성도 아닙니다. 돈은 그냥 돈일뿐입니다. 어렸을 때 살던 시골 마을에 종종 이런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반세기 전에 우리 사회의 목표가 돈이었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 됐습니다. 돈이 왕이 되고, 돈이 주인이 되고, 돈이 신이 된 세상이 됐습니다. 돈이라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가 됐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우리가 먹고 쓰고 즐기는 것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내 속에 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찾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소설가 박완서 씨는 돈이 신이 목표가 된 시대에 이런 소설을 썼습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1974년도에 나온 소설입니다. 돈을 추구하는 시대에 부끄러움을 외친 소설입니다.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부끄러운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돈은 없고 가난했지만 양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은 있는데 부끄러운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하늘 시민권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20절,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시민권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폴리튜마로, ‘시민으로 행동하다, 시민으로 합당하게 살다, 원리나 규칙대로 살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폴리튜오)에서 온 단어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말은 ‘하늘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 살다’ 또는 ‘하늘 시민답게 하늘의 원리와 규칙대로 살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현재형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미래형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권을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하늘의 시민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지금 하늘의 시민임을 인식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배가 신인 사람은 이 세상이 다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래서 세상 육욕에 빠져 삽니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영원이 없습니다. 내세가 없습니다. 세상이 끝입니다. 하지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하늘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며 삽니다. 지금 내가 하늘의 시민임을 잊지 마십시오. 천국 시민권은 죽으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순간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믿는 순간 우리 인생은 새롭게 출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적이고 세상적이며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엄청난 일이 우리 안에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나의 주인,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늘 시민권을 발급받은 하늘의 시민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아픔을 안고 살아가지만 항상 내가 천국 시민권을 가진 자임을 인식하며 사십시오. 이 시민권을 붙잡고 사십시오.
21절에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바울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몸을 낮은 몸이라고 했습니다. 낮은 몸이라는 말은 죽을 몸, 죄의 몸, 고통당하는 몸, 연약한 몸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낮은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아픔, 고통, 슬픔, 낙심, 절망, 우울함, 상처, 미움, 시기심, 분노, 열등감, 등등의 나쁜 감정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 낮은 몸은 장차 예수님의 몸처럼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입니다.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낮은 몸을 당신의 몸과 같이 영광스럽게 변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낮은 몸이 높은 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이 오실 날을 사모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20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우리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립시다.
서울 망우동에 가면 금란교회가 있습니다. 고(故) 김홍도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교회입니다. 김홍도 목사님의 사모님의 이야기입니다. 사모님이 김 목사님과 결혼하기 전 처녀 때의 일입니다. 사모님이 옷을 사러 가면 같이 간 엄마나 언니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언니, 목사님 사모님이라면 이런 옷을 입을까?” 자기 옷을 사러 와서 뜬금없이 사모님의 옷에 대해 물으니까 언니는 “왜?”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모님은 “아니야.”라고 대답을 합니다. 또 신발을 사러 가도 “언니, 목사님 사모님이라면 이런 신발을 신을까?”라고 물었습니다. 아직 목사님과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옷을 입든, 신발을 신든, 무엇을 하든 ‘사모님이라면 이렇게 할까? 사모님이라면 이런 말을 할까?’라고 묻고 생각을 했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와 결혼하려고 마음을 먹고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아직 목회자와 선을 본 것도 아니고, 목회자를 만난 것도 아니지만 목회자와 결혼을 한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하늘 시민임을 인식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하늘 시민처럼, 아니 하늘 시민으로 사세요. 독수리처럼 사세요. 하나님의 자녀로 사세요. 나방처럼 살지 마세요.
빌립보는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 2세가 점령한 후 구역을 더 확장한 다음 자신의 이름을 붙인 도시입니다. 후에 이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로마 황제 옥타비안이 로마의 퇴역 군인들을 이곳에서 정착해 살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빌립보 시민들은 대부분 로마의 시민이었고, 로마 시민의 특권을 그대로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처럼 채찍을 맞지 않았고, 과격한 행동을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체포되지 않았으며, 법적인 소송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황제에게 호소할 특권을 소유했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직접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이들은 라틴어를 사용했고, 로마식으로 옷을 입었으며, 퇴역군인들은 황제가 하사는 하는 토지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빌립보시의 사람들은 공물을 바치지 않아도 됐고, 재산을 소유하고 팔 수 있는 특권을 누렸을 뿐 아니라 지방 총독의 간섭을 받지 않고 시 행정을 스스로 운영하는 권리와 책임을 소유하는 등 정치적인 특권도 누리고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16:12에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라고 했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라는 말은 유럽의 끝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터키에서 에게 해를 건너 첫 번째로 도착한 유럽의 첫 성입니다. 빌립보는 유럽 끝에 유치해 있었지만 이곳 사람들은 로마시민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로마시민의 특권으로서 많은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지만 하늘의 시민의식을 가지고 하늘의 특권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트레이더스 옆에 와이시티 아파트가 있습니다. 이 아파트의 소재지는 아산입니다. 그런데 이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천안 봉서중학교에 다닐 수가 있습니다. 원래는 행정구역 안에 있는 중학교에 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행정 구역 밖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한성아파트 옆 사거리에 있는 원형육교를 와이시티에서 천안시에 기증한 것입니다. 와이시티 아파트에 사는 주민의 자녀들이 천안에 있는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천안시에 요청을 한 것입니다. 이 아파트에 사는 중학생들은 아산에 살지만 천안으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아산 시민인데 천안 시민의 권리를 누린 것입니다. 제가 아산에 있는 교회 부목사로 사역할 때 이 아파트에 입주를 시작했습니다.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이 아파트에 입주를 해서 심방을 왔는데 그 집사님은 천안으로 이사를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집의 주소는 아산인데 천안으로 이사를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요? 주소지는 아산인데 아산의 도심은 먼데 천안 도심은 바로 옆입니다. 우리 육신은 이 세상이라는 행정구역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은 이 세상 행정 구역 밖에 있는 하늘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이 땅에 살지만 우리의 본향은 하늘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하늘 시민의 특권을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산에 있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중등부를 지도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30년 전의 일입니다. 여학생 한 명이 중등부에 새로 왔습니다. 어디 사느냐고 물었더니 천안에 산다고 했습니다. 천안에 사는 아이가 왜 아산까지 왔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소가 천안과 아산의 경계이었습니다. 천안과 아산 경계에 동방마트가 있었습니다. 천안과 아산의 경계이지만 동방마트의 소재지는 아산입니다. 이 마트를 천안 사람들이 더 많이 이용했습니다. 그 마트 남쪽으로 아파트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아파트에 사는 아이였습니다. 지금은 신도시가 들어왔지만 그때는 허허벌판에 동방마트와 그 아파트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주소를 듣자마자 “왜 거기가 천안이니? 아산이지!”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천안이라고 대답한 이유가 있습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주소지는 아산이지만 그의 생활권은 대부분이 천안이었습니다. 주소만 아산일 뿐 생활은 천안에서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아이는 자신이 천안에 산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는 어디 사냐는 말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천안에 산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아산사람인데 천안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 시민권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하늘 시민임을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천국 국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주소는 천국입니다. 이 땅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천국 시민으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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