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계정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
2 == 2 ok!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에 귀신이 많아요. 지옥에 끌려간 귀신들이 불 속에서 고생을 하는데 새끼 귀신 하나가 눈물을 흘리며 한탄을 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예수님을 믿을 걸.” 새끼 귀신이 한탄을 하니까 귀신의 괴수 사탄이 “이놈아, 울지 말고 이를 갈아라. 네 놈이 눈물을 흘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라고 호령을 해요. 이게 지옥입니다. 지옥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이를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원한을 품고 부드득 이를 가는 곳입니다. 미워하는 마음, 증오의 감옥에 갇혀서 원망을 하는 곳이 지옥입니다(곽선희 목사 사도행전 강해 중에서). 다윗은 고통의 삶을 사는 중에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라고 노래를 합니다. 줄로 재어준 구역은 다윗은 인생을 가리킵니다. 자신 인생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실로 아름답도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아름답다는 말은 빛난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이 아름답고 빛이 난다는 것입니다. 제 삶을 돌아봤습니다. ‘내 삶은 아름다운가?’ 부끄럽고 아프고 답답하고 연약한 삶이에요. 제 삶을 생각하니 우울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생각하니 제 마음이 밝아졌어요. 예수님이 제 삶을 아름답게 해요. 은혜가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해요. 은혜가 없다면 우리 인생은 너무 억울해요. 예수님을 믿으세요. 은혜 받으세요. 주님 안에서 새 사람을 입으세요.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다가 갑자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7절,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나를 훈계하신’이라고 했고, 또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밤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무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다윗은 하나님을 송축했습니다. 송축은 무릎을 꿇고 찬양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갑자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격한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신하가 왕 앞에 갑자기 엎드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왕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극에서 종종 신하들이 자세를 가다듬고 왕을 향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소리를 높이는 장면을 봅니다. 다윗이 왜 갑자기 하나님 앞에 엎드려 찬양을 올릴까요? 그것은 자신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섭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다윗은 무릎을 꿇고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 곳곳에 성도들의 찬양과 고백이 나옵니다. 성도에 삶에는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억지로, 형식적으로 부르는 찬양이 아니라 속에서 터져 나오는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내 인생에 아름다운 노래를 주십시오.” 저는 거의 매일 같이 여러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어떤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 사람에게 인생의 노래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이 놀랍고 아름다운 노래를 주시기기를 축복합니다.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밤마다’라는 말은 ‘밤의 한 경점에서’, ‘깊은 밤에’, ‘매일 밤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밤이라는 말은 시간적인 밤이기도 하고, 환경적인 밤, 마음의 밤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지금 깊은 밤 같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잠 못 이루는 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밤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기도입니다. 다윗은 잠 못 이루는 밤에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깊은 밤 기도 중에 말씀이 다윗의 양심을 두드렸습니다. 여기 양심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킬르야인데 이 말은 신장, 콩팥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양심,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캄캄한 밤에 말씀이 다윗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훈계하셨고, 다윗은 하나님의 훈계를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깊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도하는 다윗을 훈계했습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면서 “다윗! 그러면 안 돼지. 그건 양심 없는 짓이지.”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윗의 심장을 쿵쾅쿵쾅 두드리며 다윗을 바른 길로 가게 한 것입니다. 지금 양심의 소리가 다윗을 타이르고 있습니다.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라는 말씀을 개역성경은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라고 번역했고, NIV 성경은 “밤에도 내 심장(마음)이 나에게 지시합니다.”(even at night my heart instructs me)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에 두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의 심장을 두드리면서 여러분을 가르치고 훈계할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무언가를 잘못을 하면 심장이 콩쾅콩쾅 뛰었습니다. 심장이 두근두근하면 소리를 냈습니다. 안절부절 했고,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비벼댔습니다. 혹시 들키지나 않을까 무서웠습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밤중에 깼는데 제 가슴 속에 ‘이건 네가 잘못한 것이다.’라는 음성이 마음 속에 울려 퍼졌습니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서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일어나 교회로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린 시절 뭔가를 잘못했을 때 심장이 쿵쾅쿵쾅 뛰면서 불안해했던 경험이 없으십니까? 우리는 모두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잘못을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습니다. 양심이 두드려도 반응이 없는 돌 심장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우리 심장에 둡시다. 여러분의 심장 속에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 음성에 순종하십시오. 주님의 말씀 앞에서 민감하게 뛰는 심장을 가집시다.
“쾅쾅쾅쾅 ~ 쾅쾅쾅쾅 ~ ” 이렇게 시작하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운명 교향곡은 베토벤의 아홉 개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품인 <베토벤 교향곡 5번>입니다. 이 곡은 1805년경에 작곡을 시작해서 1808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운명 교향곡>이라는 제목은 베토벤이 붙인 것이 아니라 후에 일본 사람이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베토벤이 1악장 동기를 가리키면서 ‘운명은 이와 같이 문을 두드린다.’라고 말했다는 베토벤의 비서 안톤 쉰들러의 증언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쾅쾅쾅쾅 ~ 쾅쾅쾅쾅 ~ ” 이 소리는 원래 심장이 뛰는 소리라고 합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정명훈 씨가 이 곡을 지휘한 동영상을 찾아서 봤더니 정명훈 씨는 “쾅쾅쾅쾅 ~ 쾅쾅쾅쾅 ~ ” 이 부분을 지휘봉을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내리꽂은 다음 심장을 두드리듯 지휘봉을 막 흔들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전설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이 부분을 지휘할 때 주먹을 쥔 다음 명치 부분에서 위아래로 막 두드리는 시늉을 했습니다. 심장을 두드리는 퍼포먼스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곡은 연주가 시작되고 끝마칠 때까지 어느 악기에서든지 멈추지 않고 “따다다 단! 따다다 단!”을 계속 연주한다는 것입니다. 바이올린이 하지 않으면 첼로가 하고 있고, 첼로가 하지 않으면 목관악기나 금관악기 아니면 타악기가 그 리듬을 계속 멈추지 않고, 연주하는 것입니다. 마치 심장이 멈춤 없이 계속 뛰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심장은 계속 뜁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의 양심은 계속 뛰어야 합니다. “쾅쾅쾅쾅” 양심의 심장이 멈추면 안 됩니다. 사람은 양심이 죽으면 안 됩니다.
이 곡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귓병을 앓고 있어서 거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베토벤이 집 근처에 있는 숲 속을 산책하다가 갈림길이 나오자 베토벤은 멈춰 서서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맞서 싸울 것인가? 음악가가 소리를 들을 수 없다니…. 음악을 포기해야 되는 것일까?' 베토벤은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어. 운명과 맞서 싸워야지'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소리를 오선지에 옮겨 적었습니다. 그건 바로 쿵쿵쿵 뛰는 심장 소리였으며, 그 소리가 자신의 가슴을 자꾸 두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따다다 단! 따다다 단! 베토벤은 피아노 건반을 힘차게 두드리며 연주해 나갔습니다. 연주를 마친 후 옆에서 음악을 듣고 있던 제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베토벤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라네.” 이렇게 만들어진 제5번 교향곡 악보 첫머리에 베토벤은 “암흑에서 광명으로”라고 적었습니다. 베토벤은 심장의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암흑에서 광명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곡이 작곡될 때 베토벤은 청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나폴레옹이 유럽을 점점 점령해가는 혼란기였습니다. 이 곡을 들으면 빈틈없이 짜진 곡의 진행도 그렇지만 더 놀라운 것은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이겨낸 예술가의 위대한 정신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처럼 쉬지 않고 양심을 두드리는 말씀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양심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노크 소리를 들으십시오. 주님의 소리를 “아니야!”라고 하며 외면하지 마십시오. 저는 제 심장이 아주 강하게 쿵쾅쿵쾅 계속 뛰었으면 좋겠어요. 늙어도 심장이 힘 있게 쿵쾅쿵쾅 뛰었으면 좋겠어요. 양심의 심장이 아주 힘 있게 쾅쾅쾅쾅 계속 뛰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심장이 뛰는지 안 뛰는지 나를 깨우지 못하는 있으나 마나한 심장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너무 약하게 뛰어서 심장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힘이 없게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심장이 계속 내 영혼을 깨우고 각성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뛰지 않는 양심의 심장을 갖지 마세요. 힘없는 양심이 심장을 갖지 마세요. 죽어버린 양심을 갖지 마십시오. 죽을 때까지 생생하게 살아있는 심장을 가지십시오. 늙어서 손과 발에 기력이 빠지고, 눈이 희미해지고, 감격이 무뎌져도, 심지어 기억력이 희미해지고 치매가 와도 쿵쾅쿵쾅 뛰는 믿음의 심장을 가지십시오. 양심이 없는 사람이 되지 마세요.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베토벤이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어둠에서 광명으로 나온 것처럼 다윗은 양심의 소리를 듣고 어둠에서 광명으로 나왔습니다. 캄캄한 밤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한 것입니다.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흔들리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모트입니다. 모트는 ‘비트적거리다, 비틀거리다, 흔들리다, 미끄러지다, 이탈하다’라는 뜻입니다. 계속 흔들리며 뒤집어집니다. 다윗은 인생이 비트적거리고 뒤집어져 정상 괴도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 속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중심을 잡았습니다. 이 세상은 갈대처럼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이 세상은 계속 우리를 흔듭니다.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가치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 흔들리지 않는 가치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입니다. 이사야 51:6에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시편 102:26-27에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밤에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하나님을 앞에 모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는 나의 앞입니다. 내 뒤도, 내 옆도 아닌 나의 앞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앞에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뒷전에 모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뒷전인 삶을 살지 마세요.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앞에 모시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하나님께서 동산에 거니시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때 아담과 하와는 재빠르게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창세기 3:8에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물음은 “네 자리가 왜 바뀌었니? 네 자리가 왜 어두컴컴한 나무 뒤편이 됐니? 네가 있어야 할 자리는 내 앞이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앞에 모시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사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말씀 앞에 서십시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앞에 모셨더니 하나님이 다윗의 오른쪽으로 가셨습니다.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왼쪽도 있는데 다윗은 왜 하필 하나님이 오른쪽에 계신다고 했을까요? 우리는 오른쪽으로 바른쪽이라고 합니다. ‘오른쪽’이라는 말은 ‘옳은 쪽’이란 말에서 왔습니다. 독일어에서도 오른쪽은 바른 쪽이란 의미이고, 영어에서도 오른쪽이 바른쪽이라는 의미입니다. right는 좋다(good), 적합하다(proper), 적당하다(fitting, 어울리다), 곧다(straight, 곧바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왼쪽은 약하다(weak), 어리석다(foolish)는 뜻입니다. ‘의로운’이라는 말이 영어로 righteous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쪽에 계시다는 말은 의로운 쪽, 바른 쪽에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오른쪽에 계시다는 말은 다윗이 바른 쪽, 옳은 쪽,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 41:10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 오른쪽에 계십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옳은 쪽에 서십시오. 다윗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의로운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편법이나 꼼수를 부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쪽이 아니라 의로운 쪽에 계십니다. 바른쪽에 서십시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 편에 서십시오.
오른쪽이라는 말은 권능, 능력, 축복, 구원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5:6에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내 원수를 부수신다고 하셨습니다. 시편 17:7에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치는 사람들을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오른손으로 주님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신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48:13-14에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에브라임 머리 위에 오른손을 올렸습니다. 에브라임을 므낫세 보다 더 크게 축복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오른쪽에 계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능력을 베풀고, 구원을 하시며, 복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오른쪽에서 다윗에게 한없는 지지를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오른쪽에 계신다는 하나님은 내 구원이시고, 내 능력이시며, 나를 보호하는 방패라는 뜻입니다. 내 힘과 내 능력이신 하나님이 내 오른쪽에 계십니다. 사람 때문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돈, 일, 직장, 성공, 실패, 말, 상처, 슬픔, 우울함, 미움, 분노에 때문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약해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오른쪽에서 붙잡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시류에 흔들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견고한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살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고통이 기쁨으로
10절에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스올은 죽은 자가 거주하는 지하 세계로 죽음을 상징합니다. 스올은 지옥으로도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다윗은 지금 스올,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또 ‘멸망시키지’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죽음과 멸망을 생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이 갑자기 한 밤 중에 기쁨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9절,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다윗은 얼마나 좋았는지 마음도 기쁘고, 영도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라는 말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 넋이 즐거워’라고 번역했고, 표준새번역성경은 ‘이 마음 기쁨으로 가득 차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임승필 목사님은 ‘제 영혼 뛰놀며’라고 번역했습니다. 마음과 영혼에 기쁨이 오니까 몸도 평안해졌습니다.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스올 같은 고통이 어떻게 큰 기쁨으로 바뀌었습니까?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신 결과로 오는 기쁨과 평안입니다. 삶의 상황이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 밤 중에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깨닫는 순간 지옥이 갑자기 천국으로 바뀌었습니다. 평안은 말씀과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멸망시키다(10절)는 말이 히브리어로 솨하트입니다. 솨하트는 ‘구덩이’, ‘함정’, ‘무덤’, ‘웅덩이’, ‘스올’, ‘썩음’, ‘파멸’ 등등의 뜻입니다. 이 말을 NIV 성경은 부식(decay)로 번역했고, NKJV 성경은 부패(corruption)라고 번역했으며, NEB는 구덩이(the pit)로 번역했습니다. 구덩이에 있다는 말은 썩는다는 의미입니다.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말은 인생 구덩이에서 썩지 않게 그대로 두지 않고 건져낸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떠나 인생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그 구덩이에서 썩을 지경이 됐습니다. 그때 다윗이 하나님을 다시 모셨더니 하나님이 다윗을 인생 구덩이에서 건지셨습니다. 시편 40:2에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관계의 구덩이, 질병의 구덩이에서 건져주시기를 기원합니다.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죽음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보여주셨고, 다윗은 그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어떻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을까요? 말씀입니다. 다윗은 말씀에서 생명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에서 우리가 빠진 인생 구덩이에서 나오는 길을 알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에 우리 인생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이십니다. 예수님께 길이 있습니다. 다윗은 주님 때문에 다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길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오라흐입니다. 오라흐는 여행길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인생 여행길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인생은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다윗을 다윗이 되게 한 것은 90%가 사울 왕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통해 다윗을 훈련하셔서 다윗이 됐다는 말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지만 다윗은 죽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이 다윗의 인생을 견고하게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습니다. 그 계획의 아름다움과 그 섭리의 빛이 남을 알았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아래에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빛이 나는 것입니다. 한주간도 그 아름다움과 빛 가운데 행하시길 축복합니다.
이전글 | 하늘 시민권 |
---|---|
다음글 | 내 인생이 아름다운 구역에 있음이여 |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