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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스스로 굳세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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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학개 2:1~9
주일오전예배 | 2025-07-20
설교자 :

성경에는 세 가지 성전이 나옵니다.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그리고 헤롯 성전이 그것입니다. 1성전은 아버지 다윗이 준비하고, 아들 솔로몬이 지었습니다. 감독이 33백 명, 짐꾼이 7만 명, 산에서 돌 뜨는 사람이 8만 명이었습니다. 피라미드 건축에 2만 명에서 10만 명이 동원됐습니다. 솔로몬 성전 건축에는 153,300명이 동원됐습니다. 또 이웃 나라인 두로의 히람 왕이 기술자와 백향목 보내 성전건축을 도왔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아주 화려한 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BC 586년에 유다가 망하면서 파괴됩니다. 2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이 다시 건축한 성전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은 거의 난민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힘도 없었고, 재정도 아주 빈약했습니다. 도와주는 나라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은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오직 뜨거운 마음으로 정성껏 지은 성전입니다. 하지만 솔로몬 성전에 비해 아주 초라했습니다. 성전건축 과정이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방해꾼들에 의해 건축이 한동안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성전 건축을 하며 많은 좌절과 낙망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성전 건축을 해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견디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포기하지 마세요. 헤롯 성전은 무너진 스룹바벨 성전을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확장 보수한 성전입니다. 세 성전 중에서 가장 웅장한 성전입니다. 헤롯 성전은 하나님의 성전 건축이 믿음이 전혀 없는 정치인의 야욕만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악했는지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이 성경의 성전과는 개념은 다르지만 이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도모합시다. 눈살 찌푸리는 일은 하지 맙시다. 은혜로운 일을 합시다  

인생은 건축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생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삶은 단순히 자신의 인생 건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20~22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성전의 모퉁잇돌(주춧돌)되셨고, 우리는 그 위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성전)로 차곡차곡 지어져 가고 있다고 합니다. 신앙인에게 삶은 ""라는 존재의 성전 짓는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적 건축가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라고 했습니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321일부터 42일까지 13일간 전국 17개 시도에 사는 14~18세 청소년 800명에게 행복의 조건에 대해 물었습니다. 돈이 52.1%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 다음은 부모, 친구, 휴식, 외모 등이었습니다. 돈이 부모 보다 먼저입니다. 사람보다 돈이 먼저입니다. 다 어른들에게 배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돈벌레가 되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상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세상은 더 이상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기는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제가 나이가 조금씩 먹어가면서 드는 생각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 첫째는 마음이 좀 넓고 좋은 노인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는 좀 좋은 신앙인, 좀 좋은 목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이상하고 어려운 세상에서 여러분의 삶이 아름다운 인생 성전으로 지어져 가기를 소원합니다. 아름다운 성전으로 지어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 소명입니다. 아름다운 건축가가 되십시오.

 

 

학개서에 나오는 성전은 제 2의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스룹바벨 성전 건축은 BC 536년에 시작됐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BC 520년까지 16년 동안 중단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지연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는 일들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방해합니다. 교회 사역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들입니다. 믿는 자들이 교회를 더 어렵게 합니다. 저는 등대교회 사역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들로 인해 제 마음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 부흥이 지연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나무가 바람을 맞으며 자라듯 사탄이 일으키는 방해의 바람을 맞으면 교회는 자랍니다. 여기 있는 이 나무가 햇볕도 좋고, 물도 있지만 1년 동안 거의 자라지를 않았습니다. 1년 동안 잎이 말라서 바닥에 떨어지기만 했습니다. 이러다가 죽겠다 싶어서 베란다에 내놓았습니다. 베란다는 햇볕이 여기보다 덜 들어옵니다. 하지만 거긴 바람이 있습니다. 베란다에 내놓았더니 한 달여 만에 20cm정도가 쑥 자랐습니다. 지난 주에 김재훈 집사님이 나무는 바람을 받아야 자란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제가 공감이 됐습니다. 자연에는 바람이 붑니다. 그 바람을 맞으며 나무는 강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는 바람을 맞고 사람은 자랍니다. 교회도 사탄이 일으킨 바람을 맞으며 강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계속 바람을 일으켜 사역을 방해하지만 우리 등대교회는 자라고 있습니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탄의 방해가 있지만 우리 등대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계획)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우리 등대교회는 지금 보이는 화려한 예배당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성전으로 계속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 위에, 믿음의 선진들 위에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보이는 성전인 솔로몬 성전은 무너졌지만 우리는 음부의 세력이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영적 성전을 잘 세워가기를 소원합니다. 사탄이 일으키는 바람 때문에 낙심하지도 마시고 포기하지 맙시다. 계속해서 아름다운 인생 성전을 지어가십시오.  

BC 536년에 중단된 성전건축이 학개 선지자의 격려로 BC 520년에 재개됐습니다. 16년 만에 성전건축이 다시 시작돼 드디어 기초공사가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16년 동안 지연된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힙니다. 그것은 스룹바벨 성전이 솔로몬 성전에 비해 너무 초라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을 눈으로 목격한 유다 포로의 원로들은 스룹바벨 성전의 기초 공사를 보고 크게 낙심했습니다. 3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여기서 보잘것없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번역했습니다. nothing. 얼마나 보잘것없었으면 없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성전건축에 참여한 원로들은 아주 낙심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우리가 이렇게 보잘 것 없어졌나!”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며 괴로워하고 낙심했습니다. 이들이 낙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비교 의식 때문입니다. 똑같은 말씀이 에스라서 3장에 나옵니다. 

에스라 3:11-12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성전 건축을 시작하고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대성통곡하고, 어떤 사람은 기뻐했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대성통곡했을까요? 솔로몬 성전과 자신들이 지은 성전을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솔로몬처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낙심하고 대성통곡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기뻐했을까요? 솔로몬 성전과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뻤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남들과 같이 할 수 없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금수저들과 같이 할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맙시다. 마귀는 우리에게 너는 솔로몬처럼 할 수 없으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아. 괜한 헛수고 하지 마.”라고 속삭입니다. 아담처럼 마귀에게 속지 맙시다. 마귀의 속삭임을 간파합시다. 

미국 새들백 처치의 릭 워렌 목사님은 낙심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낙심은 보편적인 것이라 누구도 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낙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도, 당신도 낙심합니다. 낙심은 흔한 일입니다. 4절 상반절에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스룹바벨은 성전 건축을 주도하는 총독이고,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입니다. 총독은 물론 하나님의 종인 대제사장까지 낙심을 한 것입니다. 낙심은 인간의 본성에 아주 자유스러운 감정입니다. 둘째, 한 번 낙심한 사람은 또 낙심합니다. 낙심은 반복적입니다. 낙심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낙심은 계속됩니다. 셋째, 낙심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낙심한 사람 옆에 있으면 나도 낙심한다는 것입니다. 4절 하반절에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솔로몬 성전을 본 원로들은 소수였을 것입니다. 이 소수의 원로들 때문에 백성들까지 낙심했습니다. 이처럼 낙심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마음 중에 하나입니다.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마음의 병인 우울증, 강박장애, 공황장애, 기분장애, 불안 장애 등은 낙심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낙심이라는 것은 잡초와 같습니다. 잡초는 씨를 뿌리지 않아도 납니다. 뽑으면 다시 납니다. 가꿔주지 않아도 자랍니다. 거름을 주지 않아도 나고, 물을 주지 않아도 납니다. 저의 어머님이 시골에 혼자 계십니다. 옆집에도 또 그 옆집에도 어머니 친구들이 혼자 사셨습니다. 그런데 제 작년에 두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집이 비었습니다. 두 집 마당에 잡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왔다 갔다 하면서 딱딱한 마당에서 잡초가 얼마나 날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마당에 잡초가 숲처럼 무성해졌습니다. 잡초가 제 키보다 더 자랐습니다. 낙심은 씨를 뿌리지 않아도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입니다. 낙심은 뽑아도, 뽑아도 납니다. 우리는 이 잡초들이 우리 마음에서 계속 자라나는 것을 그냥 둬서는 안 됩니다. 낙심이라는 잡초가 마음이라는 밭에 나면 빨리 빨리 뽑아버리세요. 그냥 두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연역함을 강하게 하실 수 있고, 우리 연약함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 낙심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낙심이 될 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낙심해 의욕을 잃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하신 일은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물으십니다. 3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대답할 사이도 없이 계속 물으십니다. 성경을 가만히 보십시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계속 뭔가를 질문하십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고 숨어 있는 아담을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왜 따먹느냐?”고 물으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네가 무엇을 보느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 하나님은 계속 물으실까요? 물음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잘못을 바로잡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질문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로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사명을 감당하다가 이세벨의 협박에 낙심에 호렙산 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굴에 숨었다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고 회부세계와 단절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는 의미입니다. 패배자라는 의미입니다. 아주 비참하고 굴욕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숨을 일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기도로 하늘을 열고 닫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물으십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이 말은 너는 어떠한 존재인데 어쩌자고 이렇게 낙심해 이런 굴에 숨어 있느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신 후에 엘리야를 굴 밖으로 나가서 산에 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종이 굴에 숨어 있는 것을 얼마나 싫어 하셨는지 굴 밖으로 나가게 하십니다. 여러분! 집에만 계시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밖으로 나가십시오. 엘리야가 산에 서자 바람이 지나가고, 지진이 나고, 불이 지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들립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똑같은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복해서 물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이냐?” 이런 의미입니다. 너는 어쩌자고 낙심해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성찰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시기 위해 물으시는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하다가 자신들의 초라한 모습에 낙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거듭해서 물으시는 이유는 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낙심이 되면 여러분 자신에게 물으십시오. 왜 낙심하는지? 어쩌자고 자꾸 낙심하는지? 물으십시오. 시편 42편의 저자는 낙심했을 때 스스로에게 막 따져 묻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5) 시편 11절에도 똑같은 말씀이 반복됩니다. 시인은 거듭해서 자신에게 왜 낙심하고 왜 불안해하는지 계속 따져 물은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낙심이 될 때 왜 낙심했는지, 왜 의기소침한지 자신에게 따져 물으십시오. 질문하면 문제 해결이 시작됩니다. 질문하면 우리 뇌는 레이더처럼 문제의 해결점을 탐지합니다.  

이민규 교수의 모닝 퀘스천이란 책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부지런한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 대부분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냥 열심히만 살고 자신에게 질문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게 가장 무책임한 말은 그냥이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되겠지.’입니다. 그냥. 어떻게 되겠지. 이 무책임한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삶을 멈추고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발명은 질문에서 시작됐습니다. 왜 사과는 아래서 위로 올라가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질까? ? 한 과학자의 이 질문이 세상을 바꿨습니다. 제너는 소를 키우는 목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왜 천연두에 걸리지 않지?”라는 질문을 통해서 종두법을 개발했습니다. 한 과학자의 질문이 수 많은 사람을 전염병에서 구원했습니다. 에드윈 랜드 박사가 딸의 사진을 찍었는데 딸이 물었습니다. “아빠, 왜 지금 바로 사진을 볼 수 없어요?” 이 질문의 영감을 얻어 에드윈은 즉석사진(폴라로이드)를 개발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발명은 에서 시작됐습니다. ?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위대한 사도로 거듭난 것은 예수님의 질문 때문입니다. 실의에 빠져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 고기 잡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물으십니다. 베드로가 근심할 정도로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까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저희 집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저를 따라다니면서 아빠, 이건 왜 이래?” “아빠, 이건 뭐 하는 거야?” “아빠 이건 어떻게 하는 거야?”라고 귀찮을 정도로 묻습니다. 아이들은 묻고 또 묻습니다. 물으면서 답을 차고 생각을 정리합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묻지 않습니다. 그냥 삽니다. 어른이 되면 질문도 필요 없고 답도 필요 없어집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과 사이가 안 좋은 부부의 공통점은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관심 좀 가집시다. 질문하며 삽시다. 물으며 신앙 생활하십시오. 신앙생활에 관심 좀 가지세요. “내 신앙 이대로 괜찮을까?” “나 예수님 믿는 거 맞는가?” “지금 죽어도 천국 갈 수 있을까?” “믿는다고 하는데 이렇게 살아도 될까?” “이 환란을 이길 수 있지?” “내가 이렇게 기도 안해도 되는 건가?” “이렇게 나태하게 신앙생활해도 되는 건가?” 묻고 또 물으십시오. 묻지 않으면 신앙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낙심한 이스라엘에게 묻고 또 물으셨습니다.

 

 

낙심을 이기는 두 번째 방법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격려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질문하신 다음에 격려하셨습니다. 4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굳세게 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하자크입니다. 하자크는 확고하게 되다, 강하게 되다, 굳어지다, 강퍅해지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았다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굳세게 하다는 말이 완악하다(개역 성경, 강퍅하다)는 말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바로가 왜 망했습니까? 마음이 강퍅해서 망했습니다. 바로가 얼마나 똥고집이었는지 아무도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망했습니다. 스스로 굳세게 하라는 말은 바로처럼 고집을 피우다가 망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마귀도 꺾지 못하도록 강해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무릎 꿇지도 마시고 꺾이지도 마십시오. 하나님께만 꺾이십시오. 하나님께만 고개 숙이십시오. 힘을 내는데 조금만 내지 말고 아주 세게 내라는 의미입니다. 마귀에게 지지 말고 극복하라는 말입니다. 마귀를 압도하라는 것입니다. 낙심 앞에서 포기하지 말고 밀고 나가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 스스로를 격려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격려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입니다. 하나님이 80세의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라고 하시니까 모세가 못간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프랑스의 화가 고흐는 젊었을 때, 광산에 들어가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광부 한 사람이 물건을 포장했던 천으로, 셔츠를 만들어 입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등에 부서지기 쉬운 물건이므로 주의해서 다룰 것이라고 인쇄된 글이 그대로 붙어 있었습니다. 고흐는 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서지기 쉬운 것, 그것이 인간입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연계에서 가장 약하다. 한 방울의 물과 한 점의 바람이 인간을 죽일 수 있다.” 인간은 원래 약하고 보잘것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인간을 티끌이라고 했고,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을 질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원래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입니다. 이 보잘것없는 나 자신에 하나님이 더해지면 아주 영광스러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요, 성경입니다. 

<어업in수산>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바닷물의 무게는 137경 톤이라고 합니다. 1,370,000,000,000,000,000. 총량은 약 137천만 입방 킬로미터()로 추정합니다. 지구에 있는 물의 97%가 바닷물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쓰는 수돗물은 바닷물의 양 중에서 0.000001%도 안 됩니다. 여러분의 집에서 쓰는 물은 바닷물에 비하면 보이지도 않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퍼서 써도 줄지 않는 물이 바닷물입니다. 바닷물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우주의 지름은 930억 광년입니다. 빛의 속도로 쉬지 않고 930억 광년을 날아가야 우주 반대편에 도달합니다. 우주 끝에서 보면 지구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 우주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지구에서 돈이 조금 많다고 해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주 저쪽에서 보면 이재용 회장이 가진 돈이네 제 돈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둘 다 보이지도 않아요. 하나님이 저 위에서 보시면 제가 가진 돈이나 빌게이츠가 가진 돈이나 별 차이 없습니다. 힘들여 열심히 살아왔는데, 어쨌든 지금까지 살아보려고 이렇게 저렇게 애를 썼는데, 내가 이루어놓은 일이 시시하고 하찮아 보일 수 있습니다. 내 현실이 보잘것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개그맨 윤성호 씨와 이봉원 씨의 일화가 있습니다. 회식을 했는데 회식비가 200만원이었다고 합니다. 이봉원 씨가 결재를 했습니다. 윤성호 씨가 이봉원 씨가 사업 실패로 빚이 5억 있는 것을 알고 있어서 괜찮냐고 물었더니 이봉원 씨가 “5억 원 없는 거나 5200만원 없는 거나 똑같다고 했다.”고 회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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