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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집으로 돌아오라 모든 것이 다 용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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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계시록 2:5~7
주일오전예배 | 2025-06-15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올리브 열매는 신이 내린 선물(열매)라고 불릴 정도로 사람 몸에 좋은 건강식품이라고 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감람열매라고 번역했습니다. 올리브기름은 올리브 열매를 쪼개서 틀에 넣고 네 번에 걸쳐서 짭니다. 네 번째 나오는 기름은 잿물을 섞어서 비누를 만듭니다. 세 번째 나오는 기름은 화장품 재료와 치료약으로 사용합니다. 두 번째 나오는 기름은 성전 관유와 식용으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제일 처음으로 나오는 기름은 성전의 금등대를 밝히는 데 사용합니다. 성전에서 사용하는 올리브기름을 짤 때는 햇볕을 가장 많이 받는 나무의 가장 꼭대기의 열매만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5분 이내에 나오는 기름만을 성전의 촛대에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순수한 신앙, 하나님에 대한 열심입니다.

 

성막의 성소 안에는 성소를 밝히는 등()대가 있습니다. 제사장은 등대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등대를 살폈습니다. 출애굽기 27:20-21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여기 순수한’(자크)이라는 말은 맑고 청결하고 깨끗하다는 의미입니다. 제사장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순수하고 깨끗한 올리브기름을 등대에 주입하고, 타버린 심지는 자르고 깨끗한 심지로 갈아주었습니다. 또 등불이 탈 때 틴 기름을 깨끗하게 닦아주었습니다. 등대에 불순물이 들어간 기름을 주입하면 연기가 나고 불이 침침해질 것입니다. 성소 안은 매운 연기로 가득 찰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금촛대(등대)를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순수한 기름을 태우는 불로 세상을 비추는 금촛대입니다. 보통 기름은 성경에서 성령을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금촛대를 보살피는 제사장으로 묘사합니다. 1:13-14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을 가지시고 금촛대인 교회를 살피십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서 타고 있는 불이 순수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에베소 교회의 불이 순수한 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순한 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불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등대교회가 순수한 불인지 살펴봅시다. 내 속에서 타고 있는 불이 순수한 신앙의 불인지 메케한 연기가 나는 이상한 불인지 계속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서요한 목사가 엉뚱한 소리를 하는지 잘 보셔야 합니다. 또 옆에 있는 사람이 신천지가 아닌지, 이단이 아닌지, 또 이상한 말을 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영어 성경은 첫 번째 사랑(first love)라고 번역했습니다. 첫 번째라는 말은 순서적으로 첫째이면서 최고, 으뜸이라는 의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주님을 최고, 으뜸으로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었다는 말은 이제 주님이 에베소 교회에 첫째가 아니라 둘째, 셋째, 넷째가 됐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뒷전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게 첫째가 됐다는 의미입니다. 전에는 주님이 안방이셨는데 이제는 뒷방에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전에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에 첫 번째이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주님은 두 번째, 세 번째가 됐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은 몇 번째이십니까? 첫 번째이신가요? 말로만 그런 것은 아닙니까? 마음만 주님이 첫 번째이시면 안 됩니다. 행동도 주님이 첫째이셔야 합니다. 또 처음 사랑이라는 말은 순수한 신앙, 뜨거운 신앙, 열정적인 신앙이라는 의미입니다. 처음에 에베소 교회는 순수했고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순수하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주님에 대한 열정, 뜨거움, 순수함이 있습니까?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주님은 뒷전이 아닙니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생각하라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떨어지다는 말이 헬라어로 핍토입니다. 핍토는 ‘(물체가) 떨어지다, 쓰러지다, 드러눕다, 박살나다, 무너지다는 뜻입니다.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은 아주 높은 차원의 것입니다. 높이 있는 것은 떨어질 수 있습니다. 떨어지면 다시 제자리에 올려놓아야 됩니다. 에베소 교회의 처음 사랑이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바닥으로 떨어진 그 처음 사랑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그렇게 내버려뒀습니다. 여러분의 처음 신앙이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전에는 교회에 가고 싶었고, 예배가 좋았으며, 기도가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좋지 않습니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게 더 좋고, 쇼핑하는 게 더 좋습니다. 그렇다면 처음 사랑이 바닥에 떨어진 것입니다. 설교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예배 시간에 자꾸 딴 생각이 드십니까? 그러면 처음 사랑을 잃은 것입니다. 세상의 육적인 것에 너무 많은 자극을 받아 영적인 것이 식욕이 떨어진 것입니다. 영적 밥맛이 떨어진 것입니다. 떨어지다는 말은 추락하다는 의미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높은 사랑이 추락한 채로 있었습니다. 여러분! 처음 사랑이 추락한 상태로 있으면 안 됩니다. 원래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었다는 것은 영적 날개가 꺾인 것입니다. 떨어지다는 말은 타락하다는 의미입니다. 요즘은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타락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술주정뱅이가 되는 것은 타락입니다. 게임, 유튜브, 도박에 빠지는 것은 타락입니다. 성적 쾌락에 빠지는 것은 타락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타락은 주님에 대한 처음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타락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창녀와 세리의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의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처음 사랑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라는 말은 계속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한번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생각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죽을 때까지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우리가 처음 사랑을 잃지 않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생각하지 않는 신앙은 망합니다. 너무 가슴 아픈 말인데요. 에베소 교회는 망했습니다. 최고의 사도요, 최고의 선교사요, 최고의 신학자인 바울이 개척한 교회입니다. 그 사도의 제자인 디모데가 목회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에 사랑의 사도인 요한이 목회한 교회입니다. 초대 교회 중에 가장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모든 교회에 모범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망했습니다. 없어졌습니다. 왜요? 자신들의 신앙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이대로 괜찮은지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할 때 생각을 많이 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생각합니다. 생각하기 싫은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도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이 없는 설교는 힘이 없습니다. 생각할 때 영화 보며 생각하지 않습니다. 게임하며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며 생각하고 성경 보며 생각합니다.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생각하려고 애씁니다. 제 생각할 때 저의 의존대상은 성경이고, 성령님이시고, 주님이십니다. 메시지는 성경을 의존한 깊은 사색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이 상태의 신앙이 괜찮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돈 생각하며 생각하고, 쇼핑하며 생각하고, 텔레비전을 보며 생각한다면 바른 생각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의존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의존하며 생각해야 합니다. 그때 바른 생각이 나옵니다. 성경도 안보고 기도하지 않으면서 생각하는 생각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생각입니다. 마귀적인 생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내 신앙 이대로 괜찮은지 생각하십시오. 이상한 불이 아닌지, 연기가 나는 신앙이 아닌지 생각하십시오. 주님을 의지하면서 생각하십시오. 고부라진 생각하지 마십시오. 에베소 교회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고부라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이정도면 됐지. 주님은 우리 보고 뭘 더하라는 거신지.”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 같습니다. 바른 생각을 하지 않으면 에베소 교회처럼 사라집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을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텔레비전, 핸드폰, 인터넷, 유튜브 때문에 현대인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계속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회개하라

 

주님은 두 번째로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회개는 뉘우칠 회() 자에, 고칠 개() 자를 씁니다. () 자는 마음 심(=) 자와 매 양 매() 자가 합쳐진 글자입니다. 매양 매는 많다, , 항상이라는 의미입니다. ()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계속해서 마음이 쓰인다는 의미입니다. 후회한다, 뉘우친다, 돌이킨다는 의미입니다. ()는 자기 기() 자에 칠(채찍질하다) ()자가 합쳐진 말입니다. 사람 몸이 구부러져 있습니다. 개는 구부러져 있는 것을 매로 때려 편다는 의미입니다. 회개는 자기가 하는 일을 후회하고 매로 때려 바로 잡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돌아서서 가는 것입니다. 유턴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동쪽이 서쪽이 되고, 서쪽이 동쪽이 되며, 앞쪽이 뒤쪽이 되고, 뒤쪽이 앞쪽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완전히 돌아서는 것입니다. 지금 가는 길을 180도 유턴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포기입니다. 지금 가는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돌아서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여러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진정으로 회개하십시오.

 

74 더하고 3입니다. 4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수이고, 3은 하늘을 가리키는 수입니다. 천국을 삼층천이라고 합니다. 이 땅을 가리키는 수와 저 하늘을 가리키는 수가 합해진 수가 7입니다. 7은 완전수입니다. 일곱 교회라는 말은 오고 오는 시대의 모든 교회를 가리킵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모든 교회, 모든 성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건 아무개 집사에게 하는 말씀이고, 나와는 상관이 없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가 첫 사랑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신앙으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생각하라, 회개하라는 말씀은 주님이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이 지금 내 귀에 들려져야 합니다. 지금 들려지지 않으면 잠을 자는 것입니다. 어제 소리처럼 들으면 안 됩니다. 초창기 한국 교회는 회개가 많았습니다. 30년 전에도 회개를 많이 했습니다.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 교회가 회개하지 않습니다. 성전에서 울지 않습니다. 울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한국의 오순절이라고 불리는 성령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당시 평양은 기독교 인구가 3%였습니다. 평양은 몇 집 건너 술집이 하나씩 있을 정도로 환락가였고 점집 또한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평양 시내에 술이 잘 팔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술집이 하나 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상점의 문이 닫혀 주일에는 장사가 되지 않을 정도로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이 부흥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길선주 장로입니다. 1903년부터 이미 한국 땅에는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들은 이 부흥의 불길을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하기 위해서 1907년 신년 초에 전국적 특별집회를 갖기로 계획하였습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신년특별집회가 열렸습니다.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이 집회에 전국에서 약 1500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1주일 동안 열심히 기도했는데에도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일부 선교사님들은 평상시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안 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주일 저녁 예배시간에 길선주 장로가 설교 대신에 자신의 죄를 자백했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1년 전에 친구가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니 내 집 살림을 돌보아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잘 돌보아드릴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을 관리하며 미화 100달러 상당을 훔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그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길선주가 이렇게 회개하자 교회당을 억눌렀던 이상한 힘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날 밤 예배는 7시에 시작되었는데 새벽 2시가 지나도록 사람들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이 집회에 직접 참석하였던 정익로 장로는 이날 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날 밤 길선주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 찼으며 순결과 성결로 불붙었다. 그는 길선주가 아니었고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는 원래 눈이 어두워서 나를 잘 보지 못하였을 것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도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죄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질 때 나타납니다. 길선주의 회개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 교회는 놀라운 오순절의 은혜를 경험하게 됐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부흥했는지 평양 시내에 술장사가 너무 안 되니까 길선주 목사님을 타락시키기 위해 젊고 예쁜 여인을 속이 훤히 비추는 옷을 입혀 길선주 목사님 방으로 은밀히 들여보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여인을 보자마자 주님! 나 죽게 됐습니다. 나 죽게 됐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라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 여인이 아무 짓도 못하고 슬그머니 목사님의 방을 나갔다고 합니다. 회개가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지금 신앙을 회개하십시오. 회개하지 않는 신앙을 회개하십시오. 회개가 사는 길입니다. 회개가 처음 사랑의 회복입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

 

예수님은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처음 행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처음 감정만 찾지 말고, 처음 행동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회개는 처음 감정만 갖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처음 마음에서 나오는 처음 행위까지 찾는 것입니다. 회개는 처음 감정과 처음 행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감정에서 끝나는 것은 진짜 회개가 아니에요. 그런데 앞에서는 처음 사랑이라고 했는데, 뒤에서는 처음 행위라고 했습니다. 처음 행위가 처음 사랑입니다. 참 사랑은 행위와 분리가 안 됩니다. 사랑이 행위입니다. 사랑이 최고의 행위이며, 으뜸가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사랑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 예배는 사랑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찬양도, 우리의 봉사와 섬김도 사랑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에서 시작되지 않는 행위는 위선이고, 형식이며, 가짜입니다. 사랑 없는 예배는 형식뿐이고, 사랑 없는 봉사와 섬김은 위선이며, 사랑이 없는 기도는 가식입니다. 우리의 신앙적인 모든 행위는 사랑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회개는 처음 마음과 처음 행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 막달라 마리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는데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멀리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것을 끝까지 지켜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을 자기 무덤에 장사할 때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두 사람이 무덤 곁을 끝까지 지킵니다. 이때 살로메는 빠진 것 같습니다. 안식 후 첫 날에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살로메 등 여러 명의 여인들이 향품을 사가지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갑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때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무덤에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계시를 받고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서 빈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무덤으로 가서 무덤 문에서 울면서 서 있습니다. 거기서 자꾸 무덤 안을 들여다 본 것 같습니다. 천사의 계시는 갈릴리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의 무덤을 떠나지 않습니다. 울면서 계속 거기에 있습니다. 제자들과 여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계시를 믿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활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울며 무덤을 떠나지 않고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자신을 보이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아직 하나님께 올라가지 않았다며 붙잡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한 여러 가지 신학적 해석이 있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예수님이 아직 누구에게 자신을 나타낼 때가 아니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덤을 떠나지 않는 마리아에게 자신을 안 보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은 믿음도 소망도 아닌 사랑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도 끝나고, 소망도 없어진다. 하지만 사랑은 영원히 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미국의 레이 앤더스 목사님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 갔는데 남자 화장실 거울에 이렇게 써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가롯) 유다야, 집으로 돌아오라. 모든 것이 다 용서되었다.” 목사님은 이 글귀를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일 수가 있을까? 가룟 유다도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면 용서받을 수 있었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즉시로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우고, 옷을 입혔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은 아들의 모든 죄를 이미 다 용서하고 계셨습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됐습니다. 모든 것이 다 용서 되었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용서하셨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돌아오기만 하면 됐습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 인물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 됐습니다. 우리는 주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과거 현재의 죄를 다 용서했습니다. 심지어 미래의 죄까지 다 씻어버렸습니다. 돌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십시오. 처음 신앙으로 돌아가십시오.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오셔서 나의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하십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금등대가 있습니다. 성소에는 창문이 없습니다. 등대가 꺼지면 완전히 캄캄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촛대가 옮겨지는 것은 빛을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저 하늘에 태양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구는 영하 270도가 된다고 합니다. 다 얼어 죽는 것입니다. 태양열에 의한 지구 대기의 대류 현상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 구름이 생기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고,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마실 물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수력발전, 풍력발전도 안 됩니다. 태양이 사라진다면 지구는 태양의 인력에서 벗어나 지구 공전 속도인 초속 30km나 되는 엄청난 속도로 우주 어딘가를 향해 똑바로 날아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른 천체와 충돌해 한 순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태양이 없어지면 다 끝나는 것입니다. 촛대가 없어지면, 빛이 떠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전에 제가 한 번씩 가던 오리요리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제가 천안 처음 왔을 때 어떤 분이 거기서 밥을 사주셨습니다. 맛도 맛이었지만 몸에 좋은 보양식이이었습니다. 반찬도 맛있었습니다. 음식 중에 호박 식혜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음식이었습니다. 천안에 와서 처음 알게 된 집입니다. 그 이후로 누가 밥을 먹자고 하면 거기로 갔습니다. 사람들이 물어보면 그 집을 추천했습니다. 어느 날 갔는데 메인 메뉴가 바뀌었습니다. 옛날 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호박식혜도 맛이 그대로이고, 다른 반찬도 맛이 그대로였습니다. 주인도 그대로였고, 식당 이름도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메인 메뉴에서 옛날 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 식당에는 다시 가지 않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습니다. 진리도 있었고, 정의도 있었고, 봉사와 섬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랑 하나가 바뀌었습니다. 그 하나 때문에 에베소 교회는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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