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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 작가의 「눈물을 마시는 새」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눈마새>는 신화이면서 판타지적 군주론입니다. 이 책에는 네 마리의 형제 새가 나옵니다. 첫째 물을 마시는 새, 둘째 피를 마시는 새, 셋째 독약을 마시는 새, 넷째 눈물을 마시는 새입니다. 케이건 드라카라는 인물이 이 가운데 가장 오래 사는 새와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케이건은 가장 오래 사는 새는 피를 마시는 새이고,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독약을 마시는 새가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새라고 말합니다.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사는 이유는 피는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피는 마시는 행위 자체가 생명력을 유지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생명이 피에 있다고 합니다. 책이 굉장히 종교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마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래 사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삽니다. 요한복음 6:54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빨리 죽은 이유는 눈물은 너무 해로워 몸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그 해로운 것을 마시기 때문에 가장 빨리 죽는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독약보다 해롭다는 것입니다. 철학적이죠. 영국 정신과 의사 헨리 모슬리경은 “슬플 때 울어야 오래 산다.”고 했습니다. 많이 우세요. 울어야 건강합니다. 안 울면 병이 납니다.
케이건은 왕이란 눈물을 마시는 새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는 사모 페이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그녀가 눈물을 마실 줄 알기 때문에 아라짓 왕국의 북부 왕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모 페이는 눈물을 마시는 새가 되어 왕이 됩니다. 사모는 왕으로서 백성들의 눈물을 대신 마시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줍니다. 결국엔 자신의 희생으로 평화를 이끌어냅니다. 사모는 왕이 되는 과정에서 많은 고통과 희생을 겪지만, 결국에는 백성들을 위한 책임감과 사랑으로 왕의 역할을 완수합니다. 꼭 예수님의 이야기 같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에 마귀의 방해가 끊이지 않았지만 결국 구속의 사명은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피를 주시고, 우리의 눈물을 대신 마셔주셔서 우리의 고통을 치료하셨습니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 책에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눈물을 다 마시셨습니다. 예수님처럼 많은 눈물을 마신 왕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누군가의 눈물을 대신 마실 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의 눈물을 대신 마셔주는 성도가 되세요. 다른 사람의 눈에 눈물이 나게 하는 사람이 되지 마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 광야에 진을 쳤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시기 위해 시내산 구름 속에 강림하셨습니다. 너무 좋은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시내산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 서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출애굽기 20:18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20:21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24:1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여호와께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멀리서만 하나님이 임재하신 산을 바라봤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만나러 오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는 사람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할 위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인간이 근접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거룩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지 이사야 6장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 옆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조차도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또 죄가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오셔도 만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죄송하지만 잘난 체 하지 마세요. 겸손하세요.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성막(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막의 휘장 뒤에 계셨습니다. 이 휘장 뒤를 지성소라고 합니다. 이 지성소에는 대제사장 외에 다른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1년에 한 차례 들어가 속죄소에 숫염소의 피를 뿌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했습니다. 지성소에 대제사장 외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 죽습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들어가면 죽습니다. 또 속죄일이 아닌 다른 날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대제사장이라도 속죄일 외에 다른 날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들어갔다가 즉사했습니다. 속죄소에는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들어가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 사람만, 이 시간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지성소입니다.
휘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분리하는 막이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솔로몬 성전의 휘장의 두께는 20cm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달기 위해 제사장 300백 명이 매달렸다고 합니다. 집 창문에 건 커튼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예수님 시대의 헤롯 성전의 휘장의 두께가 10cm이었다고 합니다. 이 휘장이 얼마나 튼튼한지 황소 네 마리가 양쪽에서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아주 두꺼운 벽이 존재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찢어지지 않는 막이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막을 없애버렸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대제사장이 아닌 사람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속죄일만 나아가는 게 아니라 아무 때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서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했지만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갖게 됐습니다.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이것이 예수님의 피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나이는 저 보다 한참 아래인데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일로 제가 감정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 친구 입장에서는 제가 더 잘못을 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 친구가 괘씸했습니다. 이것도 괘씸하고, 저것도 괘씸했습니다. 마음이 풀리면 만나려고 그 친구를 피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 날 저를 와서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러느냐? 됐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논쟁을 하면 감정만 상할 것 같아서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몇 마디 하다가 다시 언쟁이 생겼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그 친구를 밀쳤는데 그 친구 머리가 하필 벽 모서리에 부딪쳤습니다. 세게 부딪친 것 같지 않아서 신경을 안 썼습니다. 한참을 언쟁을 하다가 그 친구가 돌아섰는데 머리에서 피가 나는 거예요. 피를 보는 순간 화가 났던 제 마음이 확 꺾이는 거예요. 그리고 무조건 미안한 거예요. 그 친구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생각이 안나요. 그 친구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조건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그 친구를 보면 미안해요. 그냥 무조건 미안해요. 심지어 그 친구가 불쌍해요. 그 친구는 아주 부자거든요. 다 가졌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어쨌든 많이 가진 친구예요. 그런데 불쌍해요. 그냥 참 안 돼 보여요. 정말 이상하죠. 그 친구가 제게 뭘 부탁하면 무조건 다 해주고 싶어요. 할 수 없는 것까지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그 친구에 대해서 제 마음이 아주 부드러워졌어요. 완전히 꺾였어요. 이게 피의 능력입니다. 저는 이때 예수님의 피의 위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모진 고통을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며 아주 처참하게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저와 똑같은 마음이시라면 – 물론 똑같은 마음은 아닙니다. - 하나님은 예수님께 무조건 미안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대신 예수님을 죽도록 십자가에 밀어 넣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제 마음과 똑같은 마음이시라면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뭐든 다 해주고 싶으실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23-24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아버지께 구하면 내 이름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이유는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라 아들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이름의 능력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제 마음과 똑같으시다면 우리가 이제까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마음이 우리 속에 흐르는 예수님의 피 때문에 완전히 꺾이셨을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우리가 불쌍하고, 사랑스럽고, 애처로우실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한 없이 부드러워 지셨을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피의 능력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피를 의지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가십시오. 예수님 없는 자처럼 살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마신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도 정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천사도, 마귀도 정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완전히 죄씻음 받았고, 완전히 구원받았습니다.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가까이 오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너희가 지성소로 직접 들어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은 친근성입니다. 복음은 친근한 진리입니다. 무섭고 부담스러운 진리가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 들었으니 깨우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라는 말은 우리 친구 서요한이라는 의미가 아닙니까? 우리 친구 정명기라는 말이 아닙니까? 여기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이며, 베드로와 요한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우리는 주님의 친구입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복음은 친구처럼 친근한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친구처럼 친근하신 분이십니다. 친구는 흉허물이 없습니다. 가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오십시오. 멀리 있지 마십시오. 또 친구는 어디든지 함께 가는 존재가 아닙니까?
초등학교 동기 중에 사과과수원을 하는 현경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현경이네 사과 과수원 옆에 야산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야산에 사과 지하저장고가 있었습니다. 창문이 지상으로 조금 나와 있었는데 어느 해 겨울에 친구들 세 명과 그곳을 지나가다 저장고 창문을 들여다보니까 사과가 보였습니다. 마침 햇볕이 창문으로 들어가 빨간 사과가 반짝 빛이 났습니다. 너무 먹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면 큰 일이 나죠. 그때는 사과 서리를 하고 그럴 때였습니다. 우리는 창문으로 들어가서 사과를 먹고 나왔습니다. 나오려고 하는데 창문이 너무 높은 거예요. 그래서 밑에서 발을 받쳐서 올려주면 한 사람씩 창문을 잡고 나왔습니다. 마지막 친구는 위에서 손을 잡아서 끌어올렸는데 팔 힘이 약해 거꾸로 매달려 발이 먼저 나왔습니다. 몸이 거꾸로 됐을 때 주머니에 있는 장갑 한쪽이 떨어졌는데 떨어진지 모르고 그냥 왔습니다. 결국 그 장갑 때문에 현경이 오빠에게 잡혀서 우리는 함께 나란히 서서 혼나고 군밤 몇 대씩 맞았습니다. 참 좋은 시절이었죠. 사과 서리를 했는데 군밤 몇 대 맞고 끝났으니까요.
예수님은 우리 같은 죄인이 아니셨지만 죄인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 가까이 계셨습니다. 죄인들 옆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말은 창기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의 친구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옆 자리에 서셨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을 싫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을 실 때는 강도의 옆자리에 서셨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고, 나머지 제자들도 다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반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보기가 민망했을 것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와 여섯 명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먹을 것이 구하러 간 것일까요? 아니면 옛날 삶으로 돌아간 것일까요? 어쨌든 예수님이 오셔서 제자들을 “얘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얘들아”라는 말을 NIV 성경은 Friends라고 번역했습니다. 오래 전에 친구란 영화가 있었죠. 영화를 다 보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는데 유오성과 장동건이 친구인데 한 명이 배반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유오성이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친구 아이가?” 예수님이 배반한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친구 아이가?” 친구는 흉허물이 없습니다. 휘장은 찢어졌습니다. 누가 찢었습니까? 하나님이 찢으셨습니다. 모퉁이를 조금 찢으신 것이 아니라 한 가운데를 확 찢으셨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멀리 서 계지 마십시오. 노예와 같이 떨고 있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가까이 나오십시오.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오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시는 것처럼 여러분을 가까이 가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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