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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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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사기 17:7~13
주일오전예배 | 2025-05-11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사람들은 좋은 일이 있으면 재수가 좋다고 합니다. 아주 좋은 일이 있으면 운수 대통했다고 하죠. 반대로 나쁜 일이 있으면 재수가 없다고 합니다. 나쁜 일이 겹쳐서 일어나면 액운이 꼈다고 하기도 하고, 마가 꼈다고 하기도 합니다. 재수가 정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재수가 나쁜 때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재수가 좋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4:4-5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말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선합니다. 하나님이 나쁜 일을 선하게 바꾸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감사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재수가 좋고, 나쁜 일이 생기면 재수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 있든 나쁜 일이 있든 항상 좋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욕하고 저주했습니다. “떠나가거라. 이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야, 이 악당아! 여호와께서 네가 사울의 집안에 흘린 피를 모두 네게 갚아 주시는 것이다.” 그러자 아비새라는 장수가 시므이의 목을 베겠다고 합니다. 그때 다윗은 시므이가 저주하게 두라고 하면서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사무엘하 16:11-12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다윗은 사람들의 저주와 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믿음대로 하나님은 욕과 저주를 선으로 갚아주셨습니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다윗은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저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풀어버리셨다면 이 세상 무엇이 우리를 저주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에게는 저주가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불안, 근심,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십시오. 저주로부터 자유하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로 우리의 저주를 풀어버리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십시오.

 

 

 

미가의 어머니가 은 1100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너무 속이 상해서 자신의 돈을 훔쳐간 사람을 향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온갖 악담과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돈을 자기의 아들이 훔쳐간 것이었습니다. 큰 일 났습니다. 아들이 저주를 받게 생겼습니다. 모자는 저주의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모자는 저주를 풀기 위해 신당을 세우고, 우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었습니다. 또 자기 아들 중에서 하나를 뽑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꺼림칙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레위 지파 중에 아론의 후손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찜찜했는데 때 마침 베들레헴에서 한 레위 청년이 왔습니다. 7-8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습니다. 베들레헴에는 레위인이 거주하는 성읍이 없습니다.

 

여호수아 2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이 살도록 지정하신 성읍 48개가 있습니다. 레위인들은 이곳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는 레위인이 살도록 지정된 성읍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디였는지 모르지만 이 레위인은 원래 자신의 거주지를 벗어나 베들레헴으로 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레위인은 자신이 사역을 해야 할 사명지(근무지)를 이탈한 것입니다. 왜 레위인은 자신이 살아야 하고 사역을 해야 하는 거주지, 근무지를 이탈해 다른 곳에서 살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먹고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득의 십일조를 레위 지파에게 주었습니다. 레위인은 그 십일조로 생활을 했습니다. 레위인은 하늘 나라 공무원입니다. 그런데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 않았고, 레위인을 잘 대접해주지도 않아 레위인들의 생활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레위인은 자신을 잘 대접해줄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난 것 같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의 사역지를 떠나 떠돌이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레위인을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청년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나아르입니다. 나아르는 아이, 소년, 청년, 젊은이, 소인, 종 등을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쓴 것을 보면 레위인이 꽤 젊었던 것 같습니다. 청년의 특징은 정의감, 진리, 열정, 순수함이 아닐까요? 이래봬도 제가 젊었을 때 사명감으로 가슴이 불탔습니다. 열정이 넘쳤습니다. 제가 사역하던 교회에서 특별새벽기도회가 5시에 한번, 630분에 한 번 두 번했습니다. 저는 통학을 하면서 새벽기도를 두 개 다 참석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교회에서 자기도 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망향기도원 산 속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한 밤 중에 천안까지 걸어오기도 했어요. 제가 전도사 때 구두가 딱 한 켤레 있었습니다. 이 구두는 교회 숙소에 같이 있던 후배 전도사의 아버지가 신던 것입니다. 구두가 그것 밖에 없어서 그것만 신고 다녔어요. 구두 밑바닥 창이 두 개로 붙어 있었는데 오래 신었더니 아래 창의 가운데가 다 닳고, 그 틈으로 이물질이 들어가니까 위창과 떨어졌어요. 겨울방학 때 중등부 아이들을 데리고 에버랜드를 갔어요. 아이들을 데리고 눈썰매를 탔는데 눈 위에 발을 대고 내려오니까 그 벌어진 틈으로 눈이 계속 들어가서 구두 바닥이 불룩해졌어요. 구두를 벗어서 눈을 빼고 있으니까 이근하 선생님이 있었는데 저를 안타깝게 쳐다보더라고요. 그게 불쌍한 건가요? 부끄러운 건가요? 저는 그때 부끄럽지도 않았고 불편하지도 않았어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저는 사역자로서 행복했고, 기뻤고, 감사했으며, 소명감으로 가슴이 뜨거웠어요. 이 레위인은 젊은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뜨거움, 사역에 대한 열정이 어디 갔을까요? 그는 먹고 살기 위해 부름 받은 사역지를 이탈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유다 가족에 속한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족은 한 집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 보다는 넓은 의미로 혈연적 유대를 가진 친족을 집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지파별로 친족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 강한 연대성을 형성하고 함께 정치, 경제, 종교 생활을 하며 살았습니다. ‘유다 가족에 속한이라는 말은 유다 지파에 속한 한 씨족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대구 달성에 가면 달성 서 씨 집성촌이 있습니다. 집성촌은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집성촌을 다른 말로 동족마을이라고 합니다. 씨족 사회인 것입니다. 고대는 씨족들이 모여 강한 연대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베들레헴에 한 레위 청년이 거류했다고 했습니다. 거류했다는 말은 레위인이 유다인 집성촌인 베들레헴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유다인들이 이 레위인을 잘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는 암시입니다. 신명기 26:11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추수 때에 이 레위인과 함께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12:17~19너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과 네 서원을 갚는 예물과 네 낙헌 예물과 네 손의 거제물은 네 각 성에서 먹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너는 삼가 네 땅에 거주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이 레위인을 저버렸습니다. 자기들끼리만 자 먹고 잘 살은 거예요. 그래서 이 레위인은 떠돌이가 됐습니다.

 

미셸 마페졸리의 부족의 시대라는 책이 있습니다. 현대는 개인주의 시대였습니다. 미셀은 이제 개인주의는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했습니다. 포스트모던 대중사회에 새로운 부족이 출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씨족이나 혈족 같은 고대적 의미의 족장 중심의 부족이 아니라 이슈, 물건, 사건, 문화, 스포츠, , 종교 등 다양한 관심사에 따라 불규칙하게 재편되는 소집단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카톡 단톡방이 있습니다. 어떤 유명 연예인 팬클럽 회원들이 단톡방을 만들고 어디서 모이자고 하면 물, 도시락, 간식을 사서 일사분란하게 모입니다. 어떤 카페가 있죠. 무슨 일이 있으면 회원들이 죽자 살자 달려들어 여론을 바꿔버립니다. 온라인 쇼핑몰 마켓 컬리도 그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마켓 컬리의 CEO는 주부입니다. 그래서 주부의 마음을 잘 압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새벽배송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관심 분야가 같으면 누구든지 환영합니다. 이런 소집단이 계속 생겨나는데 결집력이 대단해요. 미셀은 이 소집단을 신부족이라고 했어요. 이 시대는 신부족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부족이 사회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영적 의미에서 신 부족입니다. 새로운 가족입니다. 예수님 공생애 사역 중에 가족이 찾아오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머님과 형제들이 왔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미셀은 지금 <신부족시대>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신부족시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오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누구든지 들어오면 환영해주고, 반겨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신부족입니다. 배격하고, 자기들끼리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의 유다 씨족들은 이 레위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레위인이 시원치 않았을까요? 말씀을 잘 전하지 못했을까요? 아니면 인격이 별로였을까요? 어쨌든 레위인은 베들레헴에서 이방인, 나그네, 외톨이였습니다. 결국 그는 거주할 다른 곳을 찾고자 베들레헴을 떠났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떡이 풍부한 곳입니다. 교회는 떡을 누구에게나 나누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이방인, 나그네가 있으면 안 됩니다. 싫은 사람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미가가 자기 집에 찾아온 레위인에게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습니다. 9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어디서부터 오느냐는 말은 출신이 어디냐는 뜻입니다. 레위인은 나는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간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레위인은 베들레헴에서 왔을 뿐이지 베들레헴 출신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이 레위인이 태어나고 자란 레위인의 성읍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 출신이라고 합니다. 레위인은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출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신의 출신지가 무의미해졌어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며,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십니까?

 

사라가 임신을 못하자 자신의 종 하갈을 자기 남편에게 주어서 자기 대신 아들을 낳게 했습니다. 하갈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고 주인 사라를 멸시합니다. 사라가 속이 상해 남편에게 말하자 남편이 당신의 종이니 당신의 마음대로 하라고 합니다. 사라가 하갈을 학대했습니다. 하갈은 집을 나갔습니다. 그때 광야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하갈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여호와의 사자가 몰라서 물었을까요? 네 출신이 어디냐는 것입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냐는 것입니다. 네 인생의 현주소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 현주소를 망각하고 왜 떠돌이가 됐느냐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너의 현주소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자신의 현주소를 잃어버렸습니다. 레위인은 하늘나라 공무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무원의 신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욥기에 보면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천상총회입니다. 그 사이에 마귀도 서 있습니다. 욥기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귀도 천사들 가운데에 왔습니다. 하나님이 마귀에게 너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출신을 묻는 말입니다. 이 말은 너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느냐는 의미입니다. 마귀가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1:7) 이 말을 우리말 성경은 땅에서 여기저기를 왔다 갔다 하다 왔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사탄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 저기 왔다 갔다 하며 돌아다녔습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은 너는 왜 주소를 잃어버렸느냐는 의미입니다. 마귀는 출신이 천국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을 잃어버렸습니다. 마귀는 어떤 존재일까요? 마귀는 자신의 현주소를 잃어버리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떠돌이입니다.

 

마태복음 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도 보면 귀신이 있을 곳을 찾아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귀신은 떠돌이예요. 떠돌이처럼 살지 마세요. 세상을 배회하지 마세요.

 

건강상의 이유나 특별한 일이 있어 사역을 하지 못하는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또 특별한 사역 때문에 한 곳에 머물지 못하시고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시는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또 퇴임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 많은 목회자들이 특정 사역이 없이 떠돌이처럼 다니고 있습니다. 어떻게 목사가 됐는지 모르지만 교회도 가지 않고, 사역도 하지 않으면서 목사라고 합니다. 진짜 목사 맞습니까? 교인들도 이상해졌습니다. 성도들 중에서도 주일 어떤 특별한 사역 때문에 다른 교회를 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직책에서 퇴임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 교회를 가지도 않고, 본 교회가 없는 떠돌이 교인들이 있습니다. 봉사, 사람들과의 관계, 헌금, 십일조 등 구속받지 않고 교회를 다닙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왔습니까? 누구입니까? 그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레위인처럼 신앙의 현주소를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죄송하지만 소속도 없이 떠도는 교인들은 귀신을 닮은 것은 아닐까요?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고갱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그리고 자살을 하지만 실패하죠. 가장 오른쪽에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가 있습니다. 아기는 눈을 질끈 감곤 고개를 돌린 채, 자신이 태어난 세계를 외면하려 합니다. 그 위의 개 한 마리 또한 아기와의 시선을 외면합니다. 세 여인은 또한 아기를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곳에 모인듯하지만, 사실은 모두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엔 혼자라는 의미입니다. 아이는 그렇게 자라 그저 그런 청년이 됐습니다. 그가 위를 쳐다보며 뭐를 따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따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소년은 이미 그것을 따서 먹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쉽게 따는데 어떤 사람은 안 됩니다. 왼쪽에 노인이 한 명이 있습니다. 고갱의 당시의 모습 같습니다. 그 옆에 여인이 있는데 딸입니다. 고갱은 사랑하는 딸을 쳐다보지 못합니다. 그림의 뒷부분이 이상한 우상이 있습니다. 생의 저 너머를 표현한 것 같습니다. 생의 저 너머는 어디일까요?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에 고갱은 이렇게 답합니다. “온 곳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며, 갈 곳도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학문이 발달했지만 인생이 어디서 와서,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지도 아직 모릅니다. 허무합니다. 저는 고갱의 물음에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로 갈 것이다.” 내가 어디서 왔으며, 내가 누구이며,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른다면 인생은 허무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끄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은 것이 찜찜했던 미가는 레위인에게 자신의 집의 제사장이 되어달라고 요청합니다. 10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제사장이 되는 대가는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음식입니다. 숙식이 제공되고, 연봉까지 있습니다. 신당을 만들고, 에봇, 드라빔, 우상을 만드는데 은 200이 들었으니 은 10이면 굉장히 큰 돈입니다. 미가의 마음 속에 레위인을 잘 대접해야 한다는 종교적 정서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가는 어떤 회사의 사장이 직원을 채용하든 레위인을 자기를 위한 제사장으로 채용하고 있습니다. 미가가 나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위해 제사장을 이용하고 있어요. 미가도 문제지만 레위인도 문제입니다. 레위인으로서 권위, 체면, 사명감이 전혀 없습니다. 돈을 얼마 준다고 하니까 그것으로 만족해합니다. 돈에 목회자가 자신을 팔았습니다.

 

제가 전도사, 부목사 생활을 20년 이상을 했습니다. 제가 전도사 때 사역지를 옮기려고 하는데 마침 학교 동료가 자기 교회에서 전도사를 구한다고 이야기를 해요. 관심이 없었습니다. 듣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교회가 어려워 1년 정도는 사례를 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다른 곳을 접고 무조건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교회 중직에 있던 분이 나중에 제 사례를 가지고 장난을 쳤어요. 목회자 사례를 좌지우지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거 같아요. 제가 사역지를 서울로 옮기게 됐습니다. 기도하고 알아봤는데 두 곳에서 연락이 왔어요. 한쪽은 조건이 좀 열악하고 다른 한쪽은 좀 좋아요. 사택도 넓고, 사례도 더 많고, 그 외에 다른 조건도 좋아요. 제가 어디로 가고 싶었겠어요. 그때는 제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이나 있었으니 당연히 조건이 좋은 교회로 가고 싶었죠. 자꾸 거기로 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요. 제가 돈 때문에 순수성을 잃는 거예요. 그래서 조건이 좋은 쪽 교회에서 연락이 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정말 연락이 안 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런 거는 금방 응답해주시더라고요. 여러분의 자신을 눈 앞의 이익 때문에 팔지 마세요. 레위인은 자신을 돈에 팔았습니다. 성직도 돈에 팔았습니다.

 

미가는 레위인이 자신의 제사장이 됐으니 이제 어머니의 저주를 복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3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미가의 신앙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서가 마음에 조금 남아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도 있고, 형식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법대로 하지 않습니다. 제 멋대로 섬깁니다. 중세 수도원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수도복을 입었다고 수도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가와 그 어머니가 신당을 세웠습니다. 신당은 신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신이죠. 하나님인가요? 귀신인가요? 이 신당에서 여러 신이 섞였습니다. 신당에서 하나님의 이름도 부르고 우상의 이름도 불렀습니다. 이 말은 신당에 하나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미가와 그 어머니에게 형식만 있었다는 뜻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으면 안 됩니다. 경건의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형식과 내용을 같이 갖춘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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