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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6편에는 <다윗의 믹담>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다윗의 믹담>이라는 말이 1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NIV 성경은 번역할 때 다윗의 믹담이라는 말을 1절에 포함시켰습니다. 단지 시의 제목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목에는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 부제에 시를 지은 사람이 있습니다. 또 시의 성격이 나옵니다. 이 부제를 알아야 시가 주는 영적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 150개의 시가 있습니다. 그 중에 <다윗의 믹담>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가 모두 6개입니다. 16편, 56편, 57편, 58편, 59편, 60편입니다. 그런데 믹담(Michtam)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믹담이라는 말에 대한 해석이 많은데 주요 견해는 셋입니다. 첫째, 믹담이 ‘조각하다’ 또는 ‘새기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카타브’에서 유래한 명사라는 것입니다. 뜻은 ‘조각’ 또는 ‘새겨 넣은 것’입니다. 즉 믹탐을 돌판에 철필로 글자를 하나씩 새겨 넣은 시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돌 판에 새길 정도라면 그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말씀을 철필로 돌에 새기듯 말씀을 마음(심비)에 새겨봅시다. 둘째, 믹담을 ‘금’이란 뜻의 히브리어 ‘케템’에서 온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시편 16편을 많은 성경학자들이 다윗의 황금시(또는 순금시)라고 부릅니다. 에인즈워스는 이 시를 “다윗의 보석”이라고 불렀습니다. 순금처럼 보배롭고 아름다운 영적 교훈을 담은 시이기 때문에 다윗은 이 시를 순금이라고 불렀다는 견해입니다. 순금시라는 말은 다윗의 신앙의 결정체라는 의미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에게 이 말씀이 황금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믹담을 ‘덮다’ 또는 ‘대속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카타무에서 온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시편 16편을 속죄의 시로 보기도 합니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은 이 시를 그리스도의 시로 봅니다(행2:25).
셋 중에 첫 번째가 학자들의 가장 많은 지지를 받습니다. 돌판에 철필로 기록한 시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견해는 모두가 하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돌에 철필로 새길 정도로 귀한 시라면 황금시가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속죄의 노래라면 황금시가 아닐까요? 시편16편은 황금시입니다. 다윗이 신앙생활 중에 최고의 고백을 모은 것입니다. 150개의 시편 중에서 다윗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시가 73편입니다. 또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시가 50개입니다. 이 중에서 다윗의 시가 꽤 됩니다. 150개 시 중에서 다윗의 시가 절반이 넘습니다. 그 많은 시 중에서 다윗은 이 시에 황금시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보배로운 시이면 황금시라고 했을까요? 믹담에는 비밀, 신비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시에는 깊은 영적 비밀이 있습니다. 이 시간 다윗의 황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나의 완전한 해결자
황금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1절,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라는 말씀을 NIV 성경은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소서. 오! 하나님”이라고 번역했습니다. KJV 성경도 “나를 보호해주십시오. 오! 하나님”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도 “나를 지켜주소서!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기도를 나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기도는 원래 하나님으로 시작합니다. 기도하는 방법이라고 하며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둘째 감사, 셋째 회개, 넷째 소원, 다섯째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기도할 때 나는 세 번째 아니면 네 번째 나옵니다. 그런데 다윗은 기도할 때 이런 격식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다짜고짜 ‘나’로 시작합니다. 2절도 나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나, 나, 하나님, 나, 나, 하나님” 다윗이 얼마나 위급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다윗이 얼마나 솔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어린 아이 같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면 어린 아이 같이 솔직합시다. 이게 기도입니다. 다윗의 시에는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함과 솔직함이 있습니다.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지금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주 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피할 곳을 발견합니다. 그 피할 곳이 하나님입니다.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이 말의 문자적인 뜻은 ‘내가 당신 안으로 피하였습니다.’ 또는 ‘내가 당신 안에서 피할 곳을 찾았습니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안으로 피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피할 곳을 찾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하나님 안으로 피하십시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피할 곳을 찾았다는 말은 성경 말씀에서 피할 곳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길이라는 말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성경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길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라는 이 짧은 글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다윗은 <순금시> 맨 앞에 두었을까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다윗은 하나님에게서 가장 완전한 해결책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성도에게 가장 완전한 완벽한 해결책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저희 아이 중에 하나가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에게 아주 심하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새벽기도가 끝나고 집에 늦게 갔습니다. 아이들은 다 학교에 가고 없었습니다. 아침을 먹는데 아내가 남자 아이 세 명이 우리 아이를 괴롭힌 이야기를 해요. 심한 말도 하고, 돌을 던지려고 하고, 가방을 바닥에 쏟아버리기도 했다는 거예요. 그 외에 여러 가지로 괴롭혔어요. 고민을 하다가 학교에 갔습니다. 선생님을 만나면 사건이 커질까봐 아이들을 만나 우리 아이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친하게 지내달라고 정중하게 이야기하고 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찌어찌 하다보니까 사건이 확 터져버렸습니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되면 곤란한데... 어떻게 하지.’ 저는 당황했습니다. 사건이 터져서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선생님이 우리 아이를 괴롭힌 아이들을 불러 조사를 해보니 또 여자 아이들도 연류 되어 있는 거예요. 선생님이 심각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반 전체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동안 우리 아이를 괴롭힌 아이들을 더 나왔습니다. 한 둘이 아닌 거예요. 우리 아이가 그동안 계속 참아왔던 거예요. 세 명이 너무 지나치게 하니까 참다못해 엄마에게 말한 거예요. 자초지종을 듣는데 우리 아이가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참았는지 제 아내는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 속상해해요. 세 명 때문에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이 말끔히 해결되었습니다. 다시는 저희 아이를 괴롭히는 일이 없어졌어요. 만약 제 생각대로 남자 아이 세 명만 조용히 해결하고 왔다면 또 다른 문제가 터질 가능성이 있었던 거예요. 다른 아이들은 우리 아이를 계속 괴롭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건을 터져 수개월 동안 있었던 일들이 한꺼번에 처리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아닌데 하며 많이 당황했지만 나중에 보니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이었습니다. 저는 일이 해결된 후에 ‘하나님이 간섭하셨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방법 보다 하나님의 방법이 훨씬 더 좋습니다. 우리 삶에 문제가 생길 때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 되기를 바랍니다.
어렸을 때 개울에서 미꾸라지를 잡으며 놀았습니다. 미꾸라지는 잡으면 미끄러집니다. 손을 닦으려고 비누를 집으면 가끔 미끄러집니다. 비누는 꽉 잡을수록 미끄러집니다. 저는 이 세상의 인간적인 방법들이 비누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 같아서 잡으면 미끄러집니다. 세상 방법은 미꾸라지처럼 미끄럽습니다. 잡은 것 같은데 잘 안 됩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참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것들이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습니다. 잡으면 미끄러졌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좋은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잡으면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안으로 피하십시오.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께 우리의 가장 완벽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사람을 만나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힘과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모든 문제를 가장 완벽하게 아시고 가장 완벽한 해결 방법을 아시는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가장 완벽한 피난처입니다.
둘째, 다윗은 하나님께 피했을 때 순금과 같은 아름다움을 발견했습니다. 양은 목동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평화롭습니다. 새끼 새는 어미 새의 품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갓난아기는 엄마 품에 있을 때 가장 평안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가장 완전한 피난처이었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가장 아름다운 피난처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가장 완전하고 가장 아름다운 피할 곳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가 마음이 곤고하면 하나님께 피하세요. 하나님 안에 쉼과 안식이 있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이 황금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황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주는 나의 복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다윗은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당신을 떠나서는 나에게 좋은 것이 없다 하였나이다.’입니다. 정말 다윗은 하나님 외에는 좋은 것이 없었을까요? 다윗은 목동이었습니다. 양을 치러 나가면 3개월 6개월을 들판에서 생활합니다. 다윗은 들에서 먹고, 자면서 들짐승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러다가 왕이 되었습니다. 좋은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부인이 17명이었습니다. 부인들이 아름답고 지혜로웠습니다. 자녀들도 많았는데 자녀들도 아주 잘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은 얼마나 잘 생겼는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삼하 14:25) 또 아도니야(학깃의 아들)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도니야는 얼마나 잘생기고 지혜로왔는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왕상1:6)
신하들은 어떻습니까? 모두 충성스럽고 용맹했습니다. 요셉밧세벳은 혼자 800명을 단숨에 죽일 정도의 괴력을 지닌 장수이었습니다(삼하23:8). 맨손으로 사자를 때려잡은 용사도 있습니다. 좌우 손을 놀려 물매도 던지고 화살도 쏘는 용사도 있었습니다(대상12:2).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나 장비 같은 장수들이 다윗의 수하에 즐비했습니다. 용맹한 장수들이 다윗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했습니다. 나라는 날로 강성해져가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다윗을 대적하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목동이었던 사람이 큰 왕이 됐습니다.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큰 환난을 만나니까 그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외에 좋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서세원 씨가 서정희 씨와 수년 전에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 소송 중에 그 동안 서세원의 가정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이 회자되었습니다. 그 중에 서세원 씨가 자녀들에게 한 말이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돈을 얼마나 들여서 가르친 줄 아느냐?’는 말입니다. 남매가 모두 미국에서 생활했습니다. 남들 보다 더 잘 먹여주고 더 잘 입혀주었습니다. 미국까지 보내 공부시켜주었습니다. 서세원 씨의 말처럼 정말 많은 돈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남매가 어렸을 때 서세원 씨의 지인 부부와 서 씨 가족이 자장면을 먹다가 아이들이 어떻게 했는지 자장면을 그 자리에서 엎어버렸다고 합니다. 자녀들에게 아버지인 서세원 씨 보다 돈이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비극입니다. 자녀에게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주어도 부모가 가장 좋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극입니다.
어떤 학교 선생님과 대화를 하던 중에 청소년 시기에 집안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환경은 엄마 아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들은 돈으로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다고 착각한답니다. 집, 좋은 옷, 좋은 신발, 좋은 가방. 이런 것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부모님이랍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많은 것을 줍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아무리 좋아도 아이에게 부모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것이 참 많습니다. 예쁜 옷을 사주고, 좋은 신발도 사주고, 시시때때로 맛있는 것을 만들어 줍니다. 먹이고 입히고 공급해 줍니다. 그런데 자녀는 이 모든 것들보다 부모가 더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자식에게 최고의 복은 부모입니다.
하나님이 복이십니다. 사람에게 최고의 복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 보다 더 좋은, 더 큰 복음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 없이 많은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십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그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비극은 이것이 깨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을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 대신 에덴동산의 물건을 탐한 것입니다. 사탄은 아담의 시선을 하나님에게서 물건으로 돌려버렸습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의 파국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십자가만이 인간의 참된 길입니다. ‘당신을 떠나서는 나에게 좋은 것이 없다 하였나이다.’ ‘주 밖에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예수님이 복입니다. 십자가가 복입니다.
3. 나의 모든 즐거움
갑자기 시의 초점이 하나님에게서 땅에 있는 성도들로 옮겨집니다. 3절,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땅에 있는 성도’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땅이라는 말이 종종 하늘과 대비되는 말로 쓰였습니다. 성도가 땅에 있다는 말은 육적인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땅에 있는’이라는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내 곁에 있는, 나와 함께 있는, 내 가까이에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먼지가 묻은, 약점과 허물이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셋째, ‘도움을 필요로 하는’이라는 뜻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라는 말은 ‘나와 함께 하는 성도’, ‘내 가까이에 있는 성도’, ‘나와 같은 성도’라는 뜻입니다. 그 성도의 모양이 어떻습니까? ‘먼지가 묻고 약점과 허물’이 있습니다. 완전하지 않아요. 부족해요. 그래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해와 섬김이 필요합니다. 정죄하고 수군거리면 안 됩니다.
그런데 먼지가 묻고 약점과 허물이 많은 사람을 다윗은 ‘존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여기 ‘존귀한 자들’이라는 말을 NRSV는 ‘귀인들(the noble)’이라고 번역했습니다. noble이라는 말은 태생적으로 고귀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귀족이라는 말입니다. 성도는 태생적으로 고귀한 자입니다. NASB는 ‘장엄한 자들 (the majestic ones)’고 했습니다. NIV는 ‘영광스러운 자들’(the glorious ones)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허물이 많은 땅에 있는 성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눈에 영광스러운 백성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하셨는지 성도와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20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마태복음 25:40에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했고, 사도행전 9:4에도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성도를 가리켜 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 성도를 바라보시는 눈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귀하게 여깁시다. 영광스럽게 대합시다. 다윗은 땅에 있는 성도를 존귀하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모든 즐거움이 땅에 있는 성도에게 있다.’ 이 말을 거꾸로 말한다면 땅에 있는 성도들의 모든 기쁨은 다윗에게 있다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는 서로가 서로에게 즐거움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도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전에 얼굴도 이름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와서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 서로가 원수가 되지 맙시다. 오해가 있으면 풀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섬기세요. 그것이 성도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땅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먼지가 묻고, 약점과 허물이 있는 땅의 존재들입니다. 정죄를 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이해하고 섬기며 사랑합시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움이 아니라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됩시다.
오츠 슈이치의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가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츠 슈이치는 호스피스 전문의입니다. 암으로 죽음을 앞에 둔 1000명이 남기는 마지막 후회를 모았습니다. 그것이 25가지입니다. 첫 번째 후회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입니다. 살다 보면 은혜를 입고도 기회를 놓쳐 고맙다는 말을 잊고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저도 이 고맙다는 말을 놓친 적이 정말 많습니다. 지금도 고맙다고 못해서 후회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서로에게 고마운 사람이 됩시다. 그리고 서로에게 고마워하며 말로도 고맙다고 표현합시다. 네 번째 후회가 ‘친절을 베풀었더라면’입니다. 저는 이 말에 정말 공감합니다. 저는 원래 친절한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난 일을 많이 후회를 합니다. 그때 좀 친절했을 걸. 여러분 옆에 있는 성도에게 친절한 사람이 됩시다.
사람이 죽을 때 보편적으로 후회하는 것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 첫째가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둘째는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셋째, 좀 더 즐기며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주일 모여서 함께 예배합니다. 함께 식사를 합니다. 함께 다과를 나눕니다. 악수를 합니다. 얼마나 큰 인연입니까? 얼마나 큰 은혜입니다. 원수가 되지 맙시다. 서로에게 베풉시다. 서로에게 친절합시다. 그래서 오늘 다윗의 말처럼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이 되는 성도가 됩시다. 저희 집 주방 한쪽 벽에 시계가 하나 걸려 있습니다. 제가 아주 사랑했던 집사님이 제가 천안에 왔을 때 사준 시계입니다. 그 시계가 한 달 전에 멈췄어요. 11년 동안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 멈춘 날이 그 집사님이 장례식을 하는 날이었어요. 시계란 게 건전지가 약해지면 느려지잖아요. 그런데 그냥 시계가 멈춰버렸어요. 건전지를 새 것으로 바꿨어요. 그런데 시계가 안 가요. 시계가 고장이 났어요. “아내랑 저랑 참 이상하지 어떻게 집사님 장례식 날 집사님이 사준 시계가 멈췄을까?” 이런 말을 했어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집사님의 이 세상 시간이 멈추고, 이제 천국 시간이 돌아가나 보다.’ 여러분! 우리의 이 세상 시계가 멈추는 날이 있습니다. 후회가 없는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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