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계정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
2 == 2 ok!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높은뜻덕소교회>를 담임하시는 오대식 목사님의 『골리앗 세상에서 다윗으로 살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골리앗 같은 세상에서 세상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을 좇을 것인가를 고민한 책입니다. 이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달동네 골목을 다니며 교인 집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근처 부동산에 가서 주소를 내밀며 길을 물었습니다. 부동산 할아버지는 목사님에게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곳을 나오다가 문득 할아버지를 전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다시 부동산으로 들어가 할아버지에게 말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천국가고 싶으세요?” 할아버지는 가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신이 나서 말을 계속했습니다. “제가 천국 가는 길을 아는데 알려드릴까요?” 그러자 갑자기 할아버지 안색이 바뀌었습니다. 기분이 나빴어요. 어떻게 보면 빨리 죽으라는 말이잖아요. 화가 난 할아버지가 대뜸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들고 있는 주소의 집도 제대로 못 찾아가는 양반이 천국 가는 길을 어떻게 알아?”> 오대식 목사님은 이야기 끝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날 사회인들이 보는 목회자에 대한 인식이 아닌가 싶어서 그렀습니다. “자기들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누구를 인도하려고 해!”라는 소리로 들려 몹시 부끄럽습니다. 어디 목회자뿐이겠습니까? 교회 밖에서 보는 교회의 모습, 일반인들이 보는 기독교인들의 모습 모두 비슷한 생각과 평가들을 하고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우리의 앞가림은 하며 사는 목사와 성도, 교회가 됩시다.
여러분! 학교 다니셨죠? 그러면 인생길을 제대로 가고 계십니까? 교회 다니시죠? 손에는 성경이 있으시죠? 그러면 신앙의 길을 제대로 가고 계십니까? 우리 손에 뭔가가 들려져 있습니다. 배웠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배운 대로, 생각대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요. 그래서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직장, 우리 사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이 경영하는데 잘 안돼요. 그래서 답답해요.
이스라엘의 현실을 보며 아주 답답해했던 선지자가 있습니다.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은 “껴안은 자”, “매달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또 “씨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뜻이 무언인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씨름을 하던 선지자였습니다. 하박국은 현실이 얼마나 답답했는지 선지자가 파수하는 곳(성루, 파수대)으로 올라갔습니다.
1. 성루에 서리라
<1절>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파수하는 곳>은 군인이 경계를 서는 곳입니다. 성 외부의 동태를 살피는 곳이 파수대입니다. 파수대 책자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이단입니다. 파수꾼은 파수대에 서서 적군의 침입 여부를 살폈습니다. 망을 본다고 하죠. 그래서 파수대는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있습니다. 성 밖에서 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하는 사람이 파수꾼입니다. 선지자가 파수하는 곳에 선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파수대에 선다는 말도 되지만 선지자로서 하나님 앞에 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서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마드’입니다. 아마드는 ‘선 자세를 취하다, 일어서다, 가만히 서 있다, 곧추서다’는 뜻입니다. 서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종입니다. 아래 사람이 서 있습니다. 고대에 주인은 앉아 있습니다. 반면에 종들은 서 있습니다. 주인 앞에서 종은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항상 서 있어야 합니다. 종은 서서 뭔가를 늘 해야 합니다. 이것이 종입니다. 그래서 고대 히브리어에서는 서 있다는 말이 섬긴다는 뜻으로도 쓰였습니다.
<열왕기상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여기 '섬기다'란 단어가 히브리어로 '아마드'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서리라’는 단어와 똑같은 말입니다. 아마드는 종이 주인 앞에서 부복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왕 앞에서 신하는 부복하는 자세로 서 있습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엘리야가 종으로서 왕되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주인에 대한 종의 충성과 복종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위기의 순간입니다. 이 위기의 순간에 하박국은 자신의 파수하는 곳에 서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리라’ ‘나의 파수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은 종종 선지자를 파수꾼에 비유했습니다(겔3:17, 겔33:2, 겔33:6). 선지자의 자리가 파수꾼의 자리라는 거예요. 망을 보는 자리라는 거예요. 선지자는 거기서 자기 일을 하는 거예요. 영적으로 망을 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뭔가를 막고 서서 있겠다는 거예요. 재앙을 막고 서 있다는 거예요. 구약 시대에 선지자 속에 계시던 하나님의 영이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 속에도 계십니다. 우리는 영적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지키는 파수꾼, 가정을 지키는 파수꾼, 자녀를 지키는 기도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영적 파수꾼이 됩시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위기입니다. 한국교회도 위기입니다. 영적으로 위기입니다. 얼마 전에 안창호 인권위원장 청문회 때 김성회 의원이 기독교 탈레반이라는 말을 했어요. 국회의원이 기독교인을 서슴지 않고 탈레반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김성회 의원은 미국장로교회(PCUSA) 소속 샌프란시스코신학교에서 전액장학금을 받으며 목회학석사과정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전도사였습니다. 전도사였던 사람이 창조론이 틀리고 진화론이 맞다고 하더라고요. 전도사였던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대놓고 폄하하고 조롱을 하더라고요. 지금이 이런 시대입니다. 저는 그 청문회를 보면서 앞으로 우리 미래 사회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기독교 신앙이 더 조롱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 자체가 위기입니다. 이 위기의 순간에 나만 괜찮을 수 없습니다. 이 위기의 순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디입니까? 가정, 직장, 사회에서 엄마로, 아빠로, 자녀로,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내가 버티고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입니까? 내가 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막고 있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목사는 목사로서 설 자리가 있습니다. 성도는 성도로서 설 자리가 있습니다. 각자 서야 할 자리가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동일하게 서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동일하게 서야 할 곳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교회입니다. 교회에 서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입니다. 파수하는 곳은 세상과 단절된 곳입니다.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1절 하반절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기다리고 바라보며’라고 했어요. 여기서 ‘기다리고’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차파(경계하다, 감시하다, 지켜보다, 망보다, 먼 곳을 응시하다, 자세히 바라보다)입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나 적에게 기습을 당치 않기 위해 주변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다리다’는 말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하박국 선지자의 믿음의 자세를 나타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렸습니다. 파수꾼이 전방을 주시하고 서 있듯이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뭐라 말씀하시는지 주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주시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텔레비전을 유심히 보는 것 보다 더 하나님을 더 주시해봅시다.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라고 했습니다. ‘대답하실는지’라는 말이 ‘돌아오다’라는 뜻입니다. 하박국은 기도하면 반드시 기도가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이 우리에게로 돌아옵니다. 응답이 올 때까지 우리는 우리 자리에 버티고 있는 거예요.
2.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선지자가 파수대에 서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서 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하나님이 내게 대답하여’라고 했습니다. 대답하다는 말이 응답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묵시는 ‘환상’, ‘이상’이라는 뜻입니다. 환상은 눈을 뜨고 현실 세계에서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를 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보여주신 계시를 말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귀에 들려주시고 눈에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것도 확실하게 응답하십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한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46살 때 이루어졌습니다. 27년 만에 하나님이 응답하신 거예요. 저는 잊어버렸어요. 기억도 안했어요. 너무 오래 돼서 기도한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어요. 그 일이 이루어졌지만 저는 그것이 기도 응답이라는 사실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보다가 그 때 그 기도 응답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응답되고, 몇 년이 지난 다음에 알았어요. 저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나는 잊어버렸었는데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반드시 있습니다. 사람은 포기합니다. 사람은 기도하고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도한 사람은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기도한 사람의 기도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기도는 반드시 기도한 사람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계시를 판에 새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판은 돌 판이나 나무판 또는 금속판이나 진흙 판을 가리킵니다. 달려가면서 읽을 수 있게 하라는 말씀이 히브리어 문법에서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우리말 성경에 있는 대로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읽으면서 달려가게 하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읽으면서도 달려가야 하고, 달려가면서도 읽어야 합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해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해요. 사람에게 예배 보다 더 바쁜 것은 없어요. 묵시가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님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크게 새기라고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11에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했습니다. 왜 이 말씀을 읽으라고 하실까요? 그것은 여러분을 살리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나를 살리는 말씀입니다.
3.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3절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고 했습니다. ‘정한 때’(모에드)가 있다고 했습니다. 묵시는 반드시 성취되는 시점이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때 그냥 주신 것이 아닙니다. 때를 정해놓고 주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때를 모릅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두렵습니다. 안달복달합니다. 그래도 기다려야 해요. 기다리는 일이 참 힘든 일입니다. 그래도 기다려야 합니다.
고 김영삼 대통령께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정한 때라는 말에는 ‘날’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내일, 새벽은 옵니다. 군대 가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메달아도 돌아간다.’ 시계를 거꾸로 메달아 보세요. 시간이 뒤로 가나요. 시간이 과거로 돌아가나요? 아닙니다. 시계를 거꾸로 메달아도 시간은 원래대로 갑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전역하는 날이, 끝나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하나님의 때는 옵니다.’ ‘시계를 거꾸로 메달아도 하나님의 때는 옵니다.’ 때로 사탄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라는 닭의 모가지를 비틉니다. 그래서 낙심합니다.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마귀가 우리의 소망이라는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때가 옵니다. 마귀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시계를 거꾸로 매답니다. 답답해요. 시간이 안 가는 거 같아요. 소망을 잃고, 낙심해요. 신앙을 잃어버려요. 하지만 시간은 계속 가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하신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묵시를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반드시 이루어지니까 기다리라는 거예요. 이 말씀을 히브리서 기자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리시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10:37)고 했습니다. 오시기로 작정한 분이 있습니다. 그 오시기로 작정한 분이 오셔야 된다는 거예요. 오실 이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어차피 예수님이 오셔야 우리 문제는 끝이 납니다. 내가 발버둥치고 원망하고 몸부림쳐도 안 됩니다. 안달복달해도 안 됩니다. 예수님이 오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됩니다. 우리는 그때를 기다리는 거예요. 전도서 9:12에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기다리지 못하면 그물에 걸려 버둥거리는 물고기와 새처럼 됩니다.
4. 의인은 버티기로 산다
4절에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교만과 거짓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여기 그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악인입니다. 악인은 교만과 거짓으로 삽니다. 반면에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여기서 믿음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에무나입니다. 에무나는 버팀, 확고함, 불변함, 충실, 충성, 신실함, 진실, 성실, 정직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정직하게 신실하게 충성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변덕부리지 않는 삶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걸어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버티는 것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버티기 있습니다.
성경에서 에무나가 맨 처음에 사용된 곳이 출애굽기 17장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싸울 때 여호수아는 산 밑에서 싸우고, 모세는 산 위에서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손을 들면 여호수아가 이기고, 손을 내리면 여호수아가 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아론과 훌이 옆에서 모세의 손을 붙잡아 올리고 버텼더니 여호수아가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했습니다. 1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기서 ‘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하니라’고 했는데 ‘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끝까지 견디니라’ 또는 ‘그의 손이 끝까지 버티니라’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모세와 아론과 훌은 믿음으로, 믿음 하나로 끝까지 버티고 견뎌냈습니다. 그랬더니 여호수아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17: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모세의 손이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오직 믿음으로) 견디고 버텨내고 이겨내니라!”
믿음은 갈등도 고통도 힘든 순간도 팔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순간도 견뎌내는 힘입니다. 믿음은 버티기입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의인은 버팀으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의인은 무엇을 믿고 버티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75세 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도 아들을 주지 않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종을 양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창세기 15:2-3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5: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이것을 아브라함이 믿자 하나님께서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은 버티기로 승리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버티기로 믿음의 조상이 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끝까지 버텨낸 사람입니다.
의인은 버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 약속의 말씀이 더디 성취되고 지체된다 하더라도 그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버팀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뭡니까? 우리를 세우시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이 있는데 그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약속과 성취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의인은 이 기간에 의인은 버팀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고 묵묵히 버티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입으로 하나님이 안하시려가 보다 뱉고 싶을 때가 있지만 악다구니를 써서라도 참고 끝까지 버텨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버팀으로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비행기 조종사가 낙하산 생각하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행기에 문제가 발생하면 조종사는 낙하산을 사용하여 비상 탈출해야 합니다. 그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비행기 조종사는 위기의 순간에 낙하산이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또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한 번도 그 낙하산을 사용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한 말이 떠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상생활에서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아니 죽을 때까지 신앙의 방법으로는 삶의 문제를 풀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의 개입을 거부하며 세상의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믿음 따로, 삶 따로가 아니라 믿음과 삶은 하나이어야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전글 | 수레에 하나님의 이름을 싣고 |
---|---|
다음글 | 양은 그 음성을 듣나니 |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