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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시각 장애인 마라톤 선수가 있습니다. 시각장애인 마라톤 선수는 어떻게 달릴까요? 가이드 러너의 손목과 시각장애인 선수의 손목을 50cm 길이의 끈으로 묶고 함께 달랍니다. 가이드 러너는 시각 장애인 선수에게 뛰면서 코스를 설명해주고, 중간 중간 어느 정도를 뛰었는지 알려주어 달리는 페이스를 조절해줍니다. 장애물이나 커브 길을 알려주는 일도 합니다. 급수 시설을 알려주고 물을 마실지 마시지 않을지도 체크를 합니다. 처음에 같이 뛰면 부딪치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끊을 묶고 한참을 같이 뛰다보면 두 사람이 한 몸처럼 느껴진다고 합니다. 두 사람을 연결해주는 끈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이 끈을 <트러스트 링>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의 고리. 두 사람은 믿음이라는 고리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 선수가 가이드를 믿지 못하면 두 사람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믿음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믿음이라는 끈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버스를 타면 내가 가려는 목적지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버스를 탈 수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가르치는 지식이 가짜라고 생각한다면 학교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1+1=2. 이것이 산수라고 생각하는데 산수 이전에 믿음입니다. 믿지 못하면 지식은 전달되지 않습니다. 내가 먹는 음식이 먹을 만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식당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과 나도 믿음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과 나와의 믿음의 끈은 어떻게 생겨날까요? 들음에서 생겨납니다. 로마서 10:17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 그런데 이 들음은 육적 들음이 아니라 영적 들음입니다. 주님은 공생애 사역 중에 종종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외치셨습니다. 마태복음 13:43에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고, 누가복음 8:8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귀가 열려지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때로 제 마음 속에서 주님의 음성이 울려 퍼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과 저는 주님의 음성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성도는 소리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양의 우리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수님 시대 예루살렘 주변과 갈릴리 일부 지역은 양의 목초지로 유명했습니다. 목자들은 이곳에서 양을 먹이다가 땅거미가 질 때면 양을 공동우리로 이끌고 갑니다. 양 우리는 돌이나 진흙 벽돌로 3-4m 높이로 담을 쌓아 4각형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담 위에는 짐승이나 도둑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가시나무나 날카롭게 깎은 나무를 꽂아두었습니다. 우리 한쪽을 동굴과 연결시키거나 아니면 한편에 지붕을 만들어 비가 오거나 밤이 되면 그곳에서 양들을 쉬게 했습니다. 문은 한 곳뿐입니다. 문은 양 한두 마리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게 만들었습니다. 좁은 문입니다. 목자들이 양을 우리에 넣으면 문지기는 문 앞에서 잠을 자며 양을 지킵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들은 문지기의 허락을 받고, 우리 안에 들어가서 자기의 양을 부릅니다. 수백 마리의 양이 섞여있기 때문에 눈으로 자기 양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양이 몇 마리 안 될 때에 목자는 양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기도 하지만 많을 때는 자기 양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양들이 우르르 몰려나옵니다. 참 신기한 광경입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무엇이고, 문지기는 무엇을 상징하는지 성경학자들 간에 논쟁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우리를 유대교라고 주장합니다. 이유는 목자가 양들을 우리 밖으로 불러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교 안에서 자기의 양들을 밖으로 불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 우리를 교회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양 우리가 교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목자와 양 이외의 다른 것 – 문지기, 담 - 의 설명은 필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지상의 교회는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의 양 우리의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 교회는 세상에 흩어져 사는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울타리(우리)입니다. 이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예배하고, 떡을 떼며 연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하나님의 초청을 받은 양들의 좋은 우리입니다.
목자는 문으로 들어갑니다. 목자는 담을 넘거나 담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문으로 오신 합법적이며 합당한 목자이십니다. 하지만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오는 절도와 강도가 있습니다. 절도라는 것은 남의 물건을 몰래 훔쳐가는 행위입니다. 교회 안에 절도범이 있습니다. 교회 물건을 몰래 훔쳐가는 절도범이 아니라 영혼을 훔쳐가는 영적 절도범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뒤에서 몰래 무엇을 꾸밉니다. 어떤 목사님이 성도님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간혹 머뭇머뭇하면서 “목사님께 말씀을 드리지 않으려다가 드리는 건데 목사님만 아세요.”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답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막 손사래를 치면서 “아니에요. 집사님 말하지 마세요.”라고 한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은밀하게 뭔가를 하지 마세요. 당당하게 말하시고 떳떳하지 않으면 말하지 마세요.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마세요. 영혼을 훔치는 것입니다. 마음을 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뒤에서 은밀하게 뭔가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강도는 협박이나 폭행으로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혼을 강탈해가는 영적 강도가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 헌신, 진리, 정의, 말씀 등등을 빙자해 다른 사람을 가스라이팅하거나 그루밍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거 영적 폭력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절도나 강도의 목적은 영혼을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외형적인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절도범과 강도들에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진실한 양이 있는가 하면 영혼을 움치려는 절도범이 있고, 영혼을 해치는 강도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고별설교를 하는데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들이 들어와서 양떼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0:29-30에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있습니다. 사나운 이리가 있습니다. 또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마귀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14에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지상의 교회는 가짜 신앙을 가진 가짜 신앙인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 때문에 위로를 받을 수도 있지만, 사람 때문에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혹 절도나 강도의 행위 때문에 상처를 입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늑대 때문에 움츠려들지 마시고 담대하십시오. 예수님은 교회 안에 절도와 강도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양은 목자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양과 목자를 연결시키는 고리가 있는데 그것은 목자의 음성입니다. 3절,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고, 양은 그 음성을 듣습니다.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양들의 특징과 양들의 생애를 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살아온 인생을 아십니다. “♬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출애굽기 33:12에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라고 했습니다. 이름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이 한 일이 생각이 납니다. 내 이름으로 나를 아신다는 말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4절,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양은 목자를 보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양은 목자를 만져보거나 냄새를 맡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듣고 따라갑니다. 목자와 양을 이어주는 끈은 목자의 음성입니다. 목자와 양은 시각이나 촉각이 아니라 청각, 소리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양에게 듣는 것은, 귀는 생명입니다.
양의 시력은 마이너스 10(디옵터) 정도라고 합니다. 제 시력이 마이너스 3.25(디옵터)입니다. 안경을 벗으면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조금 거리가 있으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분간이 안 됩니다. 양은 저 보다 세 배 정도 시력이 더 안 좋은 것입니다. 양은 1-2m 이내에 있는 사물도 잘 분간하지 못합니다. 양은 아주 심한 약시입니다. 반면에 귀는 매우 발달했습니다. 사람이 듣지 못하는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디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살짝만 나도 깜짝 놀라 귀를 쫑긋 세우고 도망칠 준비를 합니다. 양들이 무리지어 이동할 때 계속해서 “메~에”하고 소리를 내는데 이는 동료 양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잘 보이지 않으니까 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양이 5-60마리가 가면 뒤쪽에 있는 양들은 목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양은 보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본문에서 양은 믿는 자들의 표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들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들음은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 들음은 영적인 들음입니다. 성경은 광야에서 설교한 세례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왜 그림이라고 하지 않고 소리라고 했을까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예수님은 사도 요한에게 마지막 때에 될 일을 보여주시면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라고 하셨는데 편지의 마무리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으로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안목의 정욕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고린도후서 5:7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보는 것을 행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인 속에는 비진리와 진리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감각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고, 요한일서 2:20에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거짓과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감각이 있습니다.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꺼져가는 등불처럼 미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참된 신앙인이라면 영적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 “오! 참으로 옳은 진리의 말씀입니다.”라고 응답하는 무엇이 영혼 속에 있습니다. 반대로 건전하지 않은 설교를 들으면 “어! 이것은 이상한데.”라고 느낄 수 있는 영적 감각이 있습니다. 그 속에 진리의 영이 없는 사람은 참 목자와 거짓 목자, 참 설교와 거짓 설교를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거짓 목자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여기에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신천지 이만희가 와서 설교를 하고, 또 제가 설교를 했다고 생각해봅시다. 영적 본능이 있는 사람들은 이만희의 설교가 잘못됐다는 것을 즉시로 알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게 그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곳에서 제가 설교를 하고, 스님이 와서 설법을 했다고 생각해봅시다. 믿는 사람은 강한 거부감을 느낄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고 하시자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누가복음 19:6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라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서 예수님을 즐겁게 영접했습니다. 삭개오는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들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됐습니다. 무덤에 묻혔고, 썩어서 냄새가 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시자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이미 죽은 지 오래였고, 수족이 묶여 있는데 어떻게 나왔을까요? 양은 본능적으로 목자의 음성에 끌립니다. 12살 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달리다굼이라고 외치시자 소녀가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를 보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즉시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모두 목자의 음성을 듣고 알았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이 들렸다고 했고,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깎아 내리기에 힘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에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적 본능이 죽어 있었습니다.
딸을 부르는 엄마의 음성에는 사랑이라는 무늬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 무늬는 딸만 느낄 수 있는 무늬입니다. 다른 집 딸은 느낄 수 없습니다. 성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리 성(聲)자에 무늬 문(紋)자를 써서 소리의 무늬라는 뜻입니다. 모든 소리에는 무늬가 있습니다. 저는 집에 들어갈 때 번호를 누르지 않고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내가 “당신이에요?”라고 묻습니다. 저라는 것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저라는 것을 알고 묻는 것입니다. 누가 눌러도 초인종 소리는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누르는 길이 강도를 아내가 느낌으로 아는 것입니다. 제가 집에 들어갈 때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문을 두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아내는 “당신이에요?”하면서 문을 열어줍니다. 대답을 안했는데 문을 열어줍니다. 두드리는 느낌으로 저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에 있을 때 제 아내가 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소리로 아내라는 것을 압니다. 개를 키우시는 분들이 있죠. 개는 문이 열리기 전에 소리만 듣고도 남자 주인인지 여자 주인인지 압니다. 소리에는 그 소리를 내는 사람의 무늬가 있습니다.
양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에는 양에 대한 목자의 애정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그것은 그 목자의 양만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양들은 소리에 새겨진 무늬를 압니다. 성경은 소리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이 성경의 소리에는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이 성경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성경에 수놓아져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 없이 외치셨지만 그들은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정죄했고, 모함했으며, 반역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때로 우리는 시련과 아픔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분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두 제자가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처를 입었고, 두려웠고, 슬펐으며, 낙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말씀을 들려주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은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계속해서 음성을 들려주셨고, 듣는 중에 들의 영혼은 치료됐고, 결국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본능이 세상의 안목의 정욕이나 시련, 아픔, 고통 때문에 둔해지거나 병들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양들의 뛰어난 능력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도록 하늘의 본능이 살아있기를 소망합시다.
이 세상에는 온갖 가짜 소리가 난무합니다. 2013년에 발행된 어떤 책에 보니 우리나라 명품 시장이 5조인데 짝퉁 시장은 14조라고 했습니다. 짝퉁 시장이 명품 시장의 세 배입니다. 거짓의 소리가 많다는 증거입니다. 언론인을 사회의 목탁이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를 향한 깨우침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언론인을 무관의 제왕이라고 합니다. 언론은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모든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기 때문에 왕관이 없는 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9시의 거짓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뉴스에 거짓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뉴스, 신문, 인터넷, 유튜브 등 각종 매체를 통해 거짓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온갖 거짓 소리들이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소리에 끌리십니까? 어떤 소리가 크게 들리십니까? 진실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감각이 있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감리교 창시자이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설교 중에 “거의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거의 그리스도인입니다. 목사이어야 하는데 거의 목사입니다. 90%가 같습니다. 그런데 10%가 다릅니다. 사이비의 특징은 처음은 같은데 끝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의 비유를 설교하시면서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의 말씀은 90%는 진짜이고, 10%는 가짜가 아닙니다. 100% 진실,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확언을 하시고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90프로만 믿지 마시고, 100프로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에 90프로만 설복당하지 마시고 100프로 설복당하십니다. “진실로”라는 말이 헬라어로 “아멘”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멘을 한 번이 아니라 아멘을 두 번 해도 되는 참 진리입니다. “아멘! 아멘!” 아니 아멘을 열 번, 백 번 해도 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 아멘!” 합시다.
사람은 속고 속이며 살아갑니다. 속이고 속으며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에 속고, 귀로 듣는 것에 속고, 코로 맡는 향기에 속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 사실이 아니며 코로 맡는 후각 역시 전부 사실은 아닙니다. 사람은 언제나 눈과 귀 코 입 때문에 속고 속이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눈으로 보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귀에 들리는 것에도 매이지 말고, 우리 영혼 속에 울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아멘으로 살아갑시다. 5절에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타인은 절도와 강도를 가리킵니다. 절도와 강도의 음성을 가만히 듣고 있지 마십시오. 주님의 음성이 아닌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가짜를 진짜라고 믿고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땅을 치며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참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십시오.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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