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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노아, 땅의 사람이 되다

조회수 : 65회

본문 : 창세기 9:18~29
주일오전예배 | 2024-09-15
설교자 : 서요한 목사

그리스 로마 신화에 켄타우로스라는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말인 수인(비스트맨)이 나옵니다. 하반신은 태양에 속하는 남성적인 힘을 상징하는데 이 힘을 다스리는 것은 상반신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켄타우로스가 자신의 강력한 힘을 제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술을 마셨을 때입니다. 켄타우로스는 술을 너무 좋아해 종종 술에 취해 추태를 부렸습니다. 술을 마시면 폭군이 됐습니다. 켄타우로스가 테살리아 왕의 결혼식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한창 잔치가 무르익어갈 무렵 몇몇 켄타우로스가 술에 만취해 신부에게 모욕을 주고 행패를 부립니다. 이것 때문에 인간과 켄타우로스 간에 혈투가 벌어지고, 결국 싸움에서 진 켄타우로스들은 테살리아 땅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남아있던 자들은 훗날 헤라클레스에 의해 대부분 죽임을 당합니다. 켄타우로스는 술 때문에 동물적인 본성과 넘치는 힘을 다스리지 못해 망했습니다. 켄타우로스는 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반인반마로 고귀한 본성과 동물적인 본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육적인 땅의 본성과 고귀한 하늘의 본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니 당신은 하나님께로 오신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듭나다는 말을 영어 성경은 다시 태어나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성경적 의미는 위로부터 난다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육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하늘의 본성이 깨어난 사람들입니다. 육적 본성과 하늘의 본성이 잘 조화될 때 인간은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땅의 본성과 하늘의 본성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홍수 후에 노아는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20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라는 말씀을 히브리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그리고 노아가 땅의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입니다. ‘땅의 사람은 손으로 땅을 갈고, 경작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 흙 위에서 살다가, 다시 흙으로 나아갑니다. 사람은 땅에 속해 땅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땅의 본성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창세기 2: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의 코에 자신의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갔을 때 비로소 사람이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땅의 본성이 있지만 하늘의 본성도 있습니다.

 

창세기 6: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육의 본성대로 살 때 노아는 혼자 하늘의 본성을 따라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노아는 홍수 전에 모든 사람이 땅의 본성을 따라 살 때 하늘의 본성을 따라 살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홍수 후에는 땅의 본성을 따라 살았습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땅의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노아는 의를 전하는 사람이었고, 하늘에서 은혜를 크게 입은 사람이었으며,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을 때 혼자 구원을 받은 하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홍수 후에 땅의 사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땅에 삽니다.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땅에서 나는 것을 입고, 땅에서 나는 것을 쓰며, 땅에서 삽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열심히 즐겁게 사십시오. 그런데 땅에 갇히지는 맙시다. 땅의 문제에 갇히지 맙시다. 육적 본성에 너무 매이지는 맙시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본성도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천사는 아닙니다. 사람은 흙에서 왔습니다. 동물도 흙에서 왔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동물은 아닙니다. 땅의 사람이 되면 짐승과 다름이 없어지지만 하늘의 사람이 되면 존귀하게 됩니다. 시편 49:20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존귀한 존재이지만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같습니다. 땅의 사람이 되지 맙시다. 하늘의 사람이 됩시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의 북방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에 그는 북방 연합군이 군사를 재정비하고 자신을 공격해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으로 어두컴컴한 천막 안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아브람 시대에 사람들은 천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천막 밖으로 이끌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늘을 우러러라는 말이 문자적으로 하늘을 향하여입니다. 아브람이 하늘을 향해 믿음을 가졌을 때 하나님은 이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15: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항상 하늘을 향하여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천막 안에 있는 것은 먼지와 티끌과 가재도구 밖에 없습니다. 현실은 답답합니다. 그래서 아브람을 어두컴컴한 천막에서 끌어내셔서 하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땅의 문제에 매이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처럼 하늘을 향하여 사십시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라. 당신은 죄수가 아니다. 당신은 하늘에서 꿈을 찾아서 날고 있는 새인 것이다.” 하늘을 향해 항상 마음의 문을 열어놓으십시오. 프랑스의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늘을 보며 살아간다면 당신에게는 반드시 날개가 생길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두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하늘을 보며 살았습니다.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의 C. S. 루이스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을 겨냥하라. 그러면 땅을 덤으로 얻게 될 것이다. 땅을 겨냥하라. 그러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땅은 덤입니다. 하늘이 본체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돈 얼마를 주었습니다. 땅만 보면서 다니면 부자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은 그때부터 땅만을 쳐다보며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을 때까지 얻은 것은 동전 몇 개, 지폐 몇 개, 나사 등 쇠 붙이 몇 개입니다. 그리고 그는 목 디스크라는 병을 얻었습니다. 마음이 항상 땅을 향해 있으면 마음에 목 디스크가 옵니다. 하늘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18)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리면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땅의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땅에 매이지 마십시오. 그러면 하늘도 매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사십시오. 노아는 홍수 후에 땅의 사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의 사람이 홍수 후에 땅의 사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 아닌 것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로 시작했다면 계속해서 은혜로 나아가십시오. 땅에 살지만 땅의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하늘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노아는 왜 땅의 사람이 됐을까요? 술 때문입니다. 본문은 성경에서 포도주, 술에 관한 첫 번째 언급입니다. 20-21절에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어 성경을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리고 노아가 그 땅의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그가 그 포도주를 마셨다. 그리고 그가 취했다. 그리고 그가 그의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 20, 21절에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5번 나옵니다. ‘그리고라는 말은 노아가 한 일들의 연속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인과관계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포도주라고 했습니다. 포도주라는 말에 정관사가 있습니다. 그냥 포도주가 아니라 그 포도주입니다. 노아가 심은 포도나무에서 나온 포도로 만든 바로 그 포도주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술을 먹기 위해 심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그가 그 포도주를 마셨다. 그리고 취했다. 그리고 벌거벗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은 이유는 술을 마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노아가 땅의 사람이 돼서 열심히 일을 한 이유가 술을 마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포도농사를 짓는 이유가 포도주를 마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포도주라는 말은 노아가 늘 마시던 바로 그 포도주라는 의미입니다. 어제도 마시고, 한 달 전에도 마시고, 1년 전에도 마셨던 바로 그 포도주라는 의미입니다. 그 술을 또 마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 바로 그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언제부터 노아가 일을 하는 이유가 쾌락을 위해서였습니다. 일본의 어떤 재벌이 자신이 돈을 버는 이유를 여자와의 관계를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술이든, 돈이든, 게임이든, 핸드폰이든 땅의 사람이 되게 하는 그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끊어야 합니다. 나의 중독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취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샤카르인데 과도하게 마시다, 만취하다라는 뜻입니다. 노아는 아주 만취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취하다는 말이 여기서 시제가 와우 접속법 칼 미완료입니다. 노아가 포도주를 어쩌다가 한 번 마셨는데 취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계속 만취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벌거벗다는 말이 일부러 벗었다는 의미입니다. 술 취해서 자기도 모르고 벗은 것이 아니라 계속 술을 마시다 보니 벗는 게 자연스럽게 된 것입니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고 벌거벗는 일이 일상이 됐고, 그렇게 사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술에만 취하면 막 벗어 젖혔습니다. 안 벗으면 이상해요. 여기 벗다는 말에는 포로가 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노아는 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노아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노아를 마셔버렸습니다.

 

유대 전승에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으려 하는데(9:20-27) 사탄이 찾아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사탄이 몰라서 물었을까요?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사탄은 음흉하게 포도란 어떤 나무지요?”라고 물었습니다. 노아는 포도는 과일인데 아주 달고 또 적당한 신맛을 가지고 있소. 그리고 이것을 발효시키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이라는 것이 된다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그렇게도 좋은 것이라면 나도 거들기로 하지요.”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사탄을 고맙게 여겼습니다. 사탄은 양, 사자, 돼지, 원숭이를 끌고 와서 죽이고 그 피를 밭에 뿌려서 비료로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자란 그 포도 열매로 술을 담갔습니다. 노아가 그 술을 조금 마셨더니 양처럼 순해졌습니다. 술을 조금 마시면 친절하고 온순한 사람이 됩니다. 조금 더 마시자 사자처럼 용감해졌습니다. 무서운 게 없어집니다. 조금 더 마시니 돼지처럼 아무데서나 뒹굴며 몸을 더럽혔습니다. 더러운 게 없어집니다. 그리고 좀 더 마시자 원숭이처럼 쉬지 않고 떠들어 대고, 돌아다니며, 재주를 피우고, 노래를 합니다. 광대가 됐습니다. 하지만 부끄러운지를 모릅니다.

 

에베소서 5: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방탕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아소티아입니다. 아소티아는 방탕함, 허랑방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소티아의 아는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어이고, 소티아는 구원받는, 보호받는이라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방탕하다는 말은 술에 취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보호받지 못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버려진다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노아의 사적이 이 술 취한 사건으로 끝이 납니다. 창세기 6장부터 9장까지 노아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스토리가 술 취하고 둘째 아들을 저주한 것으로 끝이 납니다. 노아는 이후로 350년을 더 삽니다. 그런데 성경에 350년 동안 노아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습니다. 350년 동안 술을 끊지 못하고 산 것은 아닐까요? 350년 동안 술에 취해서 산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노아가 하나님께 버려진 신앙인이 된 것은 아닐까요?

 

어떤 목사님이 40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변화되는 사람은 많이 봤는데 알코올 의존증에서 빠져나온 사람을 한 명도 못 봤다고 했습니다. 서울의 이름 있는 대형 교회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수만 명 모이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알코올 의존증은 신앙으로도 안 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신앙이 있는데 왜 술을 못 끊을까요? 제가 술을 드시는 분들과 이야기를 해보니까 술을 마시는 게 좋고, 술에 취하는 게 좋으니까 술을 끊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술을 못 끊는 것이 아니라 술이 좋아서 술을 안 끊는 것입니다. 술이 너무 좋은 거예요. 취하는 게 좋은 거예요. 노아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술이 그렇게 좋을까요? 술의 마력이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술의 마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경건했던 노아의 위대한 신앙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노아는 홍수로 모든 사람이 멸망당할 때 유일하게 구원받은 최후의 1인입니다.

 

홍수가 났을 때 물이 세상을 완전히 쓸어버렸습니다. 노아는 방주에 난 창으로 한 번씩 밖을 내다보았을 것입니다. 아득하고 막막하고 엄청난 물을 경험했습니다. 홍수가 끝나고 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홍수 후의 세상은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노아는 물 공포증이 생길 정도로 엄청난 홍수를 경험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물이 휩쓸고 간 세상을 보면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 받은 세상을 보며 죄를 짓지 말자고 굳게 다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예배를 드렸습니다. 노아는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도 죄를 짓지 않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무서움과 죄를 짓지 말자는 다짐과 홍수 이전에 경건했던 신앙을 모두 무너뜨린 것이 술입니다. 아담을 무너뜨린 것이 선악과라면, 노아를 무너뜨린 것은 술입니다. 시편 75:8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술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해 하나님이 쏟아 버리신다고 했고 그 찌꺼기를 악인들이 마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버리신 찌꺼기를 먹지 마십시오. 찌꺼기라는 말은 멸망이라는 의미입니다. 밤에 술을 먹고 거리에서 소리를 지른다는 말을 사자성어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고성방가! 아닙니다. 네 자로 아빠인가입니다. 아재개그에 나오는 문제입니다. 웃픈 이야기입니다. 아픔 주시지 마시고 끊으세요.

 

 

 

노아가 벌거벗고 추태를 부리는 모습을 둘째 아들 함이 보고 형과 동생에게 알렸습니다.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봤다고 했습니다. 그냥 대충 본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본 것입니다. 보다는 말에 즐기다, 경험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실수를 즐겼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본다는 말을 성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알리매라는 말이 히브리어 문법에서 시제가 와우 접속법 사역 능동 미완료 3인칭 남성 단수입니다. 함이 동생과 형에게 그냥 말한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를 조롱하는 태도로 여러 번 반복해서 능동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왜 함이 아버지의 흉을 그렇게 봤는지 알 수 없습니다. 평상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안 좋았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노아는 술에 취해 추태를 부렸고, 둘째 아들 함은 아버지의 흉을 봤고, 그것을 즐겼습니다. 여러분! 우리 등대교회 교우들의 가정에서 술이나 다른 어떤 이유로도 이런 슬픈 일이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첫째 아들 셈과 셋째 아들 야벳은 함의 이야기를 듣고 함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조금이라도 보지 않기 위해 옷을 어깨에 멨고 뒷걸음쳐서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아주 조심스럽게 덮었습니다. 옷을 어깨에 멨다는 말은 아버지의 하체가 옷 아래나 사이로 보이지 않도록 한 아주 조심스러운 행동입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조금도 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었습니다. 아버지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불쌍히 여깁시다. 그리고 부모를 불쌍히 여깁시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가려주고, 덮어줍시다.

 

덮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카사입니다. 카사는 덮다, 가리다는 뜻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폭로하고 들춰내고 즐겼지만,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안타까워했고, 가려줬으며, 덮어줬습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덮어줌에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8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가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셨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숨기고 감추는 역사입니다. 아담은 무화과 잎이 말라 쪼그라질 때마다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는 숨김이 아니라 덮어주고 가려줌의 역사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가면 법궤가 있습니다. 법궤 뚜껑 윗부분을 두 천사가 날개를 활짝 펴서 덮고 있습니다. 그 덮여져 있는 뚜껑을 시은좌라고 합니다. 은혜의 자리(보좌)라는 뜻입니다. 뚜껑이라고 부르지 않고 은혜의 자리라고 부릅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덮여 있습니다. 법궤를 히브리어로 아크라고 합니다. 구약 성경에 아크라고 불리는 것이 세 개입니다. 첫째는 방주이고, 둘째는 갈대상자이고, 셋째는 법궤입니다. 세 개의 기능은 모두 덮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노아 가족을 홍수로부터 덮어주었습니다. 모세 엄마는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고 뚜껑으로 덮었습니다. 법궤는 십계명 돌판을 넣고 시은좌로 덮었습니다. 교회는 신약의 방주입니다. 교회가 신약의 아크입니다. 방주의 정신은 덮어줌입니다. 교회의 정신은 덮어줌입니다.

 

시내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를 한 후에 충격을 받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당신의 얼굴은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는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죄 때문에 모두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위 위에 서 있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 앞을 지나실 때 모세를 바위 사이에 숨기시고 당신이 다 지나갈 때까지 당신의 손으로 모세를 덮으십니다. 출애굽기 33:21~23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당신의 손으로 덮으셨다(, 사카크)고 했습니다. 시편 32:1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잠에서 깬 후에 있었던 일을 알고 함을 저주하고, 셈과 야벳은 축복합니다. 24-25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함의 후손들이 종들 중에 종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종들의 종이 되기를라는 말씀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가장 천한 종이 되어서라고 번역했습니다. 술이 깬 후에 노아는 자기 둘째 아들을 가장 비천한 종이 되라고 저주했습니다. 노아의 저주대로 함의 후손들은 실제로 가장 비천한 종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못난 아들이라도 축복해주고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그런데 노아는 술 때문에 자식을 저주했습니다. 두 아들은 축복을 했지만 한 아들은 저주했습니다. 가정에 죄가 들어오니 그 죄가 저주를 낳고, 고통을 낳았습니다. 하늘의 사람이 땅의 사람이 되니 가정에 고통이 들어왔습니다. 땅이 사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하늘의 사람으로 살도록 기도합시다.

 

노아는 홍수 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노아는 아버지인 동시에 제사장이며, 선지자였습니다. 노아의 가정이 곧 교회이었습니다. 가정이 사랑하고, 섬기며, 축복하는 곳인 것처럼 교회도 사랑하고, 섬기며 축복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가정입니다. 교회는 다투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험담하고 저주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덮어주고, 가려주기며, 서로를 축복하는 영적인 가정입니다. 우리 가정에 죄가 들어오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우리 교회에 죄와 저주와 고통이 들어오지 않도록 깨어 있읍시다. 우리 교회가 늘 서로를 축복해주는 공동체가 되도록 애를 씁시다. 세상에 있고, 세상에 있어야 하고, 세상으로 열린 교회이지만 하늘을 향해 서 있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이 세상에 좋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하늘의 사람으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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