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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무지개는 순수 우리말입니다. 무지개는 물과 지게의 합성어입니다. 지금은 쓰지 않지만 중세 국어에서 지게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무지개는 ‘물이 만든 문’, ‘물로 만들어진 문’이라는 뜻입니다. 무지개의 고대어는 물지게로 ‘물문’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우리 선조들은 하늘에서 선녀들이 무지개라는 문을 통해 이 땅에 목욕하러 내려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지개는 신비롭게 보여 고대 신화에 등장하기도 하고, 어린이 동화에도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무지개의 주인을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13절,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하나님께서 내 무지개라고 하셨습니다. 무지개는 하나님이 은혜의 표시(심벌)로 주신 것입니다. 무지개는 비온 뒤에 일어나는 자연현상입니다. 그런데 그 현상을 일으키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요즘은 환경이 많이 바뀌어서 무지개를 보기 쉽지 않지만 어디서든지 무지개를 보시면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무지개는 은혜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 뒤에 언덕이 있었습니다. 언덕에 올라가면 동쪽으로 들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들판을 가로질러 수 킬로미터를 가면 높은 산이 있었습니다. 아침 해가 그 산에서 떠올랐습니다. 때로 그 산 꼭대기를 구름이 덮으면 산이 신비롭게 보였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해 여름,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진 후 해가 아주 환하게 나와서 언덕에 올라갔더니 그 산 꼭대기에 아주 커다란 무지개가 걸려있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운지요. 제가 이제까지 본 무지개 중에 가장 크고 아름다운 무지개입니다. 한번은 제가 친구들과 자주 가는 한 샘이라는 물웅덩이에 아주 커다란 무지개가 걸려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무지개를 만져보고 싶어 그 한샘이라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무지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무지개가 없어진 줄 알고 돌아오는데 한샘에서 조금 떨어지자 무지개가 다시 보였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가까이 가면 무지개가 보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지 우리는 무지개 속에 있었고, 무지개를 손으로 만졌던 것입니다. 저는 무지개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의 무지개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의 무지개 속에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전후좌우를 하나님이 은혜로 호위하고 있습니다. 시편 5:12에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노아와 살아있는 생물들에게 무지개를 왜 주셨는지, 그리고 무지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언약을 세우리니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내가 이 땅의 모든 살아있는 생물과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9-10절에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언약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뻬리트입니다. 이 말은 ‘쪼개다, 자르다’는 뜻의 바라에서 온 단어입니다. 고대 시대에 중동에서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계약을 맺을 때는 짐승을 쪼개놓고 두 나라 왕이 손을 잡고 쪼개진 동물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계약을 깨는 자는 이 동물처럼 쪼개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너 잘 봐. 계약을 깨면 이 짐승처럼 되는 거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살아있는 피조물과 계약을 맺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계약은 일방적인 계약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계약을 맺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노아와 맺은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약속이라기보다는 맹세입니다. 이것은 내가 만약 언약을 어긴다면 내가 나를 쪼개겠다는 하나님의 굳은 맹세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맹세하셨습니다. 그 맹세의 내용은 내가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존을 약속하셨습니다. 성경 속에는 우리의 생명과 인생과 삶에 대한 보존의 약속이 있습니다. 여러분! 평안하십시오. 안심하십시오.
성경은 약속의 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성경을 맹세의 책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겠다고 맹세하신 맹세의 책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약(約)은 ‘묶다, 약속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묶여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인간의 약속은 깨지고 변하고 없어지지만 성경은 없어지지도 깨지지도 변하지도 않습니다. 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영원불변합니다. 세상이 없어져도 성경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구약은 오래된 약속이고, 신약은 새로운 약속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옛 약속이 있었고, 신약 시대에는 새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약속에 묶여 있습니다. 이 약속의 줄은 누구도 끊을 수 없습니다. 이 약속은 영원불변합니다. 우리는 영원불변한 약속으로 하나님과 묶여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맹세를 믿으십시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는 히브리어로 ‘아니마민’인데 이 말은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는 2차 대전 당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 있던 유대인들이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리란 걸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십니다.” 그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리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견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구원의 소식이 없자 언제부터인가 이 노래의 가사는 절망적인 내용으로 바뀌어 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고 절망 앞에 부딪칩니다.” 그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이라는 유대인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절대로 ‘아니마민’의 부정적인 노래 가사를 부르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예 ‘아니마민’의 노래 가사를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는 약속하신 대로 오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늦게 오신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너무 조급해 할 따름입니다.” 플랭클은 노래 가사를 긍정적인 내용으로 바꾼 것입니다.
또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견디기 힘든 중노동을 하면서도 깨진 유리조각을 날카롭게 갈아서 매일 깨끗하게 면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코 낙담하거나 절망적인 말을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그는 다른 유대인들보다 더 깨끗하고 건강하게 보여서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끝까지 살아남아서 아우슈비츠에서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제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프랭클이 교도소에서 몰래 기록한 일기장이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일기 내용 중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나는 깊이 깨달았다.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은 자신의 목숨마저도 쉽게 포기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절대 자살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은 가장 쉽고 가장 나태한 방법이다. 죽음은 그렇게 서두를 것이 못 된다. 죽음 앞에서 살아보려고 하는 부활의 의지, 그것이 바로 새로운 창조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결코 늦지 않으십니다. 약속을 끝까지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1:4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나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직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내가 세상에 있을 것을 아시고, 나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요한복음 15:16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택하다’는 말이 ‘고르다’는 뜻입니다.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눈여겨보셨고, 고르고 또 골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절대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고 구원에게 이르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뿐입니다.
1910년에 한일병합조약이 있었습니다. 이 조약은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일방적인 조약입니다. 이 조약으로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하게 됐고, 일본군은 아무데서나 조선인을 때리고, 칼로 베고, 총으로 쐈습니다. 일본군은 온갖 만행에 어떤 조선인도 억울함을 하소연할 데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힘에 의한 일방적인 계약은 폭력이고, 수치이며, 애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의한 일방적인 조약은 은혜이고, 사랑이며, 복입니다. 십자가는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을 박으셨고, 일방적으로 피를 흘리게 하셨으며, 일방적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일방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일방적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받은 만큼 자식에게 준다면 자녀를 결코 양육할 수 없습니다. 엉덩이에 붙은 똥을 부모님이 아니면 누가 닦아줄 수 있습니까? 한때 한미 은행장이 아들에게 쓴 편지가 세간에 주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약속 시간에 늦는 사람하고는 동업하지 말거라.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모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이 편지는 이렇게 끝납니다. “네 자녀를 키우면서 효도를 기대하지 말라. 나도 너를 키우며, 너 웃으며 자란 모습으로 벌써 다 받았다.” 부모는 자녀를 키우며 기쁨을 얻습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후에 자식의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잘 살아주면 그뿐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일방적인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일방적입니다.
세우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쿰입니다. 쿰은 일어나다는 뜻입니다. 우리와 이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동물과 하나님 사이에는 은혜언약이 일어나 있습니다. 약속의 책인 성경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일어나 있습니다. 이 언약은 결코 앉거나 눕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이 언약은 영원토록 서 있을 것입니다.
활을 구름 속에 걸어놓으시다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께서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히브리어로 무지개는 케쉐트입니다. 케쉐트는 활이라는 뜻입니다. 무지개는 활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불어로 무지개가 하늘의 활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도 무지개는 활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무지개가 레인보우(rainbow)인데 비와 활의 합성어로 비(rain) 활(bow)이라는 뜻입니다. 무지개는 하나님의 활입니다. 하나님은 왜 활을 구름 속에 걸어놓으셨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심판용 무기를 내려놓으셨다는 의미입니다. 활이 상징하는 것은 전쟁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손에는 전쟁 무기인 활이 없습니다. 물이 세상을 쓸어버렸습니다. 하늘에서 물 폭탄이 쏟아졌고, 땅에서 물이 솟아 세상을 쓸어버렸습니다. 노아에게 물 공포증, 물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노아는 하늘에 먹구름만 조금 끼어도 물에 대한 공포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 무지개를 보여주시며, 내가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자신의 활을 저 구름 사이에 걸어놓으셨습니다. 그때 노아는 안심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활을 십자가에 걸어놓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인간에 대한 죄의 저주가 걸려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는 더 이상 저주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믿을 때 십자가의 우리의 저주를 삭제합니다. 십자가가 인간의 죄를 치료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치료하는 무지개입니다.
여성 서퍼 중에가 가장 위대한 서퍼로 꼽히는 사람이 베다니 해밀턴입니다. 아주 진실한 크리스천입니다. 베다니는 2003년 13살 때 상어가 한쪽 팔을 물어뜯었습니다. 피의 60프로가 빠져나갔습니다. 피의 1/3이 나오면 사람은 죽습니다. 살아난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베다니에게 바다에 대한 공포,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지 않겠습니까? 엄마가 베다니에게 이 모든 게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베다니는 가족과 함께 해일로 피해를 입은 태국 푸켓으로 봉사활동을 갑니다. 거기서 3-4살 정도 되는 꼬마 여자 아이를 만납니다. 해일로 집, 친구, 가족을 잃어버렸습니다. 베다니는 그 아이에게 물놀이를 하자고 하지만 여자아이는 거부합니다. 그 아이 가슴 속에는 물에 대한 공포, 슬픔,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자 아이가 마음의 문을 열고 함께 물놀이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을 치료했습니다. 해밀턴은 고통을 극복하고 다시 서퍼가 됩니다. 후에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어떠한 일도 바꾸고 싶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극한 은총의 표현입니다. 활이 겨누고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활이 하늘의 중앙을 향해 겨누어져 있습니다. 이 활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무지개>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활로 당신을 조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부터 내가 인간 대신 화살에 맞겠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다시 하나님께 죄를 짓고, 배반한다면 하나님이 그 책임을 지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극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무지개는 하나님의 자기저주를 가리키는 극한 은총의 표현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자기를 저주하신 사건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대신 죄의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고대 그리스도 사람들은 교훈적인 이야기를 신화로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 그리스 신화에 큐피드라는 사랑의 신이 있습니다. 이 사랑의 신은 황금 화살과 철 화살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 화살에 맞으면 혐오의 감정에 빠지고, 황금화살에 맞으면 사랑에 빠집니다. 사랑의 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달콤한 초콜릿이 아니라 왜 화살일까요? 사랑하는 것은 아픈 것입니다. 사랑은 아픈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군대에서 손가락이 부러졌다는 말을 듣자 바늘이 아랫배를 찌르는 것이 아프더래요. 중국 진나라의 장수 환온이 촉나라를 침공하기 위해 양쯔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병사 가운데 하나가 강변에서 놀고 있던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어미 원숭이는 새끼 원숭이와 군사를 태운 함선을 따라 100여 리 (40km)를 쫓아왔습니다. 함선이 강폭이 좁아지는 협곡에 이르자 어미 원숭이는 새끼를 태운 배를 향해 몸을 날렸는데 배에 이르기도 전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한 병사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았더니 어미의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습니다. 자식의 눈에서 눈물이 나면, 부모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나고, 자식의 피부가 찢어지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부모의 사랑은 아픔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아픔을 극복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픔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아픔을 극복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무지개는 햇빛이 대기 중에 떠다니는 작은 물방울을 만나 만들어지는 자연현상입니다. 비가 그친 후에는 공기 중에 많은 물방울이 떠다니게 되는데 햇빛이 이 물방울을 만나면 물방울 안에서 빛이 반사되어 42도 각도로 굴절되는데 이로 인해 무지개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햇빛에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색깔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그 색이 보이지 않다가 공기 중에 있는 물을 만나면 빛이 굴절되면서 그 아름다운 색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무지개는 빛이 굴절될 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햇빛이 아무런 장애 없이 똑바로 비추면 무지개가 생기지 않습니다. 장애가 무지개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물방울이 프리즘 역할을 해 보이지 않는 햇빛 속에 있는 일곱 가지 아름다운 색을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전기는 계속 흐르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등이 이 공간을 밝힘으로 전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물이 의미하는 것은 여러 가지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의미하기도 하고,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성령의 역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편 46:3에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고 했고, 이사야 43:2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물은 시련을 상징합니다. 은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시련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우리 눈에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일이 없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물의 세력이 나를 엄습해 올 때 그 물의 세력에 반사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햇빛이 아무런 장애물이 없이 계속 직진하면 아무런 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빛이 직진을 하다가 물방울을 만나 42도 각도로 굴절이 되면 감추어졌던 아름다운 색이 보이는 것입니다. 장애물이 빛을 아름답게 합니다. 시련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분명하게 경험하게 하는 영적 프리즘인 것입니다. 시련은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로움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영적 프리즘입니다. 시련이 은혜를 더욱 아름답게 합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은혜의 아름다움을 보게 합니다. 시편 27:4에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시련이 올 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 시련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두셨습니다. 13절,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구름으로 덮으실 때가 있습니다. 14절,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하나님은 구름이 땅을 덮을 때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하나님께서 내가 내 언약을 기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6절,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이 말씀은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을 해도 내가 구름 속에 무지개를 보고 다시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인간을 보시지 않고 무지개만을 보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면 우리는 지옥 형벌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씻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보십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죄를 지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씻었으니 이제 마음대로 살자는 사람들이 구원파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씻어버림에도 우리가 죄를 다시 지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먹구름이 덮일 때가 있습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고 캄캄할 때가 있습니다. 항상 맑은 날, 좋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직진이 아닙니다. 굴곡진 길을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 고난의 먹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무지개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기를 바랍니다. 먹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두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할 수 있는 영적 기억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여기서 기억하다는 말은 은혜를 베풀겠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의 구름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 무지개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보존시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증표로 주신 무지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폭풍 구름이 몰려와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나에게 변치 않고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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