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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신혼 초에 아내와 둘이 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다른 부부들이 카트에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언제쯤 카트에 아이를 태우고 다닐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그냥 좋아 보이고 부럽기도 했어요. 첫째가 태어나서 첫째를 태우고 다니는데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어요. 또 둘째가 태어나서 카트에 둘을 태우고 다니니까 기쁨이 배였어요. 카트에서 둘이 자리 잡고 노는데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러다가 하나가 더 태어났어요. 셋째는 일산에서 태어났어요. 일산 사람들은 아이를 많이 낳지를 않았어요. 하나나 둘을 낳았는데 우리는 셋을 난 거예요. 다른 집 보다 배를 더 낳은 거예요. 셋을 카트에 태우고 다니니까 다른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쳐다보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쳐다보면서 웃기도 해요. 저는 아이들을 카트에 태우고 다니는 일이 참 행복했어요. 교회는 하나님의 카트입니다. 하나님이 운전수이시고, 우리는 승객입니다. 영적 카트의 운전수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카트에 타신 것을 환영하시고 기뻐하시며 행복해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운전하시는 카트에 타고 천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등대교회, 하나님의 카트에 오신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카트에 타신 여러분들을 매우 환영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기쁨으로 나아갑시다.
십계명의 최초 형태는 돌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판에 십계명을 직접 새겨주셨습니다. 다른 성경 말씀은 선지자들이 기록했지만 십계명은 하나님이 직접 기록하셔서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이면 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하셨을까요? 이 십계명을 얼마나 아십니까? 십계명을 읽고, 암송해봅시다. 이 귀한 돌판을 아무 곳에나 보관할 수 없어서 순금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법궤, 증거궤, 언약궤 또는 여호와의 궤’라고 불렀습니다. 순금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순금궤’라고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법궤를 지성소에 보관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막과 법궤를 제작한 때가 BC 1446년입니다. 이때부터 법궤는 지성소에 보관했습니다. 지성소는 성막에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깊은 곳입니다. 여러분! 십계명과 말씀을 우리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새기고 간직합시다. 영혼 깊은 곳에는 하나님의 계셔야 합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다른 것을 넣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을 위해 비워두십시오.
이스라엘은 이 법궤를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에게 빼앗깁니다. 이때가 BC 1075년입니다. 거룩한 전통이 370년 만에 깨진 것입니다(1446년 - 1075년). 370년 동안 지켜온 성경의 전통을 엘리 제사장이 깬 것입니다. 지금은 성경의 거룩한 전통이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파괴되는 시대입니다. 성경의 신앙 전통에 마음을 기울여봅시다. 그것을 지키려고 애씁시다. 요즘 누가 그런 걸 지키느냐고 말하지 맙시다. 그런데 법궤를 빼앗아간 블레셋 사람들에게 기가 막힌 해프닝이 생깁니다. 법궤를 블레셋 신전에 두었더니 우상의 목이 부러지고, 손목이 잘라지고, 몸뚱이는 땅바닥에 나뒹구는 것이었습니다. 법궤가 가는 성읍에는 나병 같은 독한 종기가 퍼져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전염병이 얼마나 컸는지 성읍이 망할 정도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서로 자기 성읍에 두지 않으려고 다투었습니다. 법궤가 오벧에돔에 있을 때는 법궤 때문에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법궤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저주가 되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복이 됐습니다. 고린도후서 2:15-16에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는 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법궤를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을 합니다. 법궤를 돌려보내는 절차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수레에 하나님의 이름을 싣고
먼저 블레셋 사람들은 속건제를 준비합니다. 속건 제사는 손해를 입힌 상대방에 대한 배상과 그에 대한 속죄 제사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속건제로 금독종(golden tumor) 다섯 마리를 만들었습니다. 몸에 난 악성 종기 모양을 금으로 만든 것입니다. 또 금쥐 다섯 마리를 만들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전염병을 쥐들이 옮겼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을 형상으로 만들어 신에게 바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병이 난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속건 제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런 다음 법궤를 싣고 갈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화려한 꽃가마나 왕들이 타는 웅장하고 위엄 있는 가마가 아닙니다. 동화 속에 나오는 멋진 황금 마차가 아닙니다. 그냥 소가 끄는 수레입니다. 농촌에서는 마차라고 불렀습니다. 수레는 농촌에서 농부들이 짐을 나를 때 사용하는 농기구입니다. 나무로 된 직사각형의 평상에 바퀴만 양쪽에 달랑 두 개 달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끄는 손수레는 울타리가 있습니다. 뒷부분에 마개도 달렸습니다. 이것 때문에 물건을 실어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가 끄는 수레는 가장자리에 울타리가 없습니다. 그냥 평상입니다. 그래서 수레에는 귀중품을 싣지 않습니다. 볏단이나 소에게 먹일 풀을 싣고 다니는 것이 수레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아주 허접한 수레에 실었습니다. 금독종과 금쥐도 실었습니다. 법궤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주 허접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이 아니라 좋은 대우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허접하게 생각합니다.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존귀하게 생각하고 그 분을 경외합시다.
8절,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하고” 아주 초라한 수레에 황금으로 만든 물건을 실었습니다.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 같이 귀한 물건입니다. 소가 끄는 수레는 좌우로 흔들흔들하며 갑니다. 소가 크게 움직이면 수레에 실린 물건이 떨어집니다. 덜컹 하면 금쥐나 금독종이 땅바닥에 나뒹굴 수도 있습니다. 아주 위태합니다. 그런데 이 수레에 하나님의 이름이 실려 있습니다. 이 초라한 수레에 하나님의 명예가 달려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장난질을 한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 어떻게 하는지 시험을 합니다. 믿음을 시험합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성도들을 시험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9절,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 ‘그 본 지역’이라는 말은 법궤가 원래 있던 곳입니다. 법궤가 원래 있던 지역으로 가면 블레셋에 내린 전염병이 하나님이 내린 재앙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재앙은 우연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수레를 끄는 사람이 없습니다. 단지 암소 두 마리가 끌 뿐입니다. 길도 좋지 않습니다. 요즘 같은 아스팔트가 아닙니다. 아주 위태한 상황입니다. 수레에서 물건이 떨어지거나 수레가 다른 곳으로 가면 하나님의 이름도 바닥에 나뒹구는 상황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들의 성읍에 내린 재앙이 하나님 때문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를 확인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재앙이 하나님이 내린 것이 아니기를 바란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지 확인한 적이 있습니까? 이방인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확인하려고 했다면 우리는 더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무심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 버립니다. 내가 어려운 일들이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시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요?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가 어떻게 되는지 보고 있습니다. 9절, “보고 있다가 …”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려고 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보고 있습니다. 12절에도 보세요.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경계선까지 따라왔습니다. 법궤가 어떻게 되나 보려고 끝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끝까지 기도해보신 적 있으세요.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신 적 있으세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끝까지 하나님을 확인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만약 법궤가 제대로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떨어뜨리지 않고 벧세메스까지 똑바로 가야 합니다. 똑바로 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수레에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이 실려 있습니다. 매우 아슬아슬한 상황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실은 수레입니다. 수레처럼 완전히 평상입니다. 보호 장치가 없습니다. 어떤 울타리가 있지 않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없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몰랐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수레에 하나님의 이름이 실려 있습니다. 우리 등대교회가 수레와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작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실려 있습니다. 작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명예가 실려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등대교회에 하나님의 궤를 실었습니다. 등대교회에 하나님의 크신 이름을 실었습니다. 사람들이 등대교회가 어떻게 되나 블레셋 사람들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두려워해야 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잘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나 자신이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등대교회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실은 수레입니다. 여기에 외모가 괜찮은 분들이 있을 수 있고, 가진 것이 많거나 재능이 있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속사람은 다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수레로 삼아 블레셋 같은 세상을 지나 벧세메스로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수레 삼고 이 세상길을 여행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어렸을 때 시골길을 걷다보면 마차가 지나가요. 그러면 친구들이랑 한번 타보고 싶어 마차를 쫓아가면서 매달려요. 저희들은 마차에 타고 싶어 했었어요. 하지만 아저씨들이 마차에 안 태워줘요. 어느 해에 아버님께서 마차를 빌리러 멀리 가셨다가 밤이 됐는데도 안 오시는 거예요. 어머님과 함께 마중을 나갔어요. 한참을 가는데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어머님이 아버지라고 하시는 거예요. 가만히 보니 저 멀리 캄캄한 어둠 속에서 소 콧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오고 있어요. 어머니와 저는 그 어둠 속을 그 마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왔어요. 그렇게 타보고 싶은 마차를 실컷 탔어요.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어요. 하나님은 등대교회를 타고 세상길을 가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연약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실은 수레가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싣고 잘 갑시다. 똑바로 가서 하나님의 존재를 삶으로 증명합시다.
벧세메스를 향하여 똑바로 나아가라
수레를 끄는 암소를 생각해봅시다. 성경은 소가 어떤 상태였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7절,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① 7절 a -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소입니다. 소는 일을 할 때 멍에를 맵니다. 멍에를 매지 보지 않은 소라는 말은 한 번도 일을 해 본적이 없는 소라는 뜻입니다.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시키면 몸부림치며 거부합니다.
② 7절 b - 젖 나는 소입니다. 한창 새끼에게 젖을 먹일 때입니다. 새끼에 대한 모성애가 가장 클 때입니다.
③ 7절 c - 송아지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암소는 일반적으로 순합니다. 하지만 새끼를 건들이면 뒷발질하고 머리와 뿔로 들이받으며 난동을 부릴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슬픔과 포악함이 내재되어 있는 소를 골랐습니다.
④ 10절 -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었습니다. 따라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어미 소가 벧세메스로 가는 것을 거부하도록 한 것입니다. 벧세메스가 아닌 집으로 가도록 한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벧세메스로 똑바로 가는 것, 믿음의 길을 방해합니다.
⑤ 12절 - 어미 소가 울었습니다.
동남아의 어떤 국가의 숲속 길을 송아지는 앞에서 가고, 어미 소는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서 송아지를 물려고 하자 어미 소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호랑이에게 달려들어 새끼 대신 먹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송아지는 몸을 피했습니다. 소는 동물 중에 가장 모성애가 강한 동물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소와 새끼를 강제로 떼어놨습니다. 지금 암소는 새끼 때문에 아주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이 암소는 겪을 수 있는 최고의 아픔은 최고로 겪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일부러 이런 소를 고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고백하십시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암소가 이 아픔을 겪으면서도 벧세메스로 똑바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12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암소는 새끼에게 매우 강하게 끌렸습니다. 그래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갔습니다. 육을 가진 존재에게 자식 보다 더 큰 힘은 없습니다. 그런데 암소는 더 강력한 힘에 이끌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입니다. 암소는 본능적으로 새끼에게 끌렸지만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벧세메스로 똑바로 갔습니다. 암소가 간 길이 우리말 성경에는 ‘대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의 성경 문자적인 뜻은 ‘오직 하나의 큰 길’입니다. 소는 오직 하나의 큰 길로 행했습니다. 소가 법궤를 매고 오직 한길, 외길을 갔습니다. 암소는 애정 때문에 새끼에게 끌렸지만 오직 하나의 큰 길로 갔습니다. 음매음매 울었습니다. 커다란 눈에서 구슬만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안 가겠다고 발버둥 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갔습니다.
‘치우치다’는 말은 ‘빗나가다, 기울다, 떠나가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아주 철저한 순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암소는 괴로웠지만 하나님의 손에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서 ‘이 암소 보다 나은 피조물인가!’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소는 똑바로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벧세메스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암소 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을까요? 똑바로 가지 못하고, 여기 쏠리고 저기 쏠리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요? 삶에 아픔이 있어도, 상처가 생겨도 똑바로 걸어갑시다.
블레셋 사람들은 암소를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그 재앙이 하나님의 손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자리에 누가 있었습니까? 암소 외에는 없었습니다. 암소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한낱 미물이 하나님의 하신 일을 사람들에게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나타냈습니까? 괴로움 가운데 나타냈습니다. 아픔과 눈물로 나타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는 신앙의 길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 몸에 하나님의 이름이 실려 있습니다. 우리 몸에 하나님의 명예가 실려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이름을 싣고 가는 길이 아픔의 길일 수 있다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픈 길인지 핏줄과 생이별하는 아픔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건강의 문제일 수 있고, 사람의 문제일 수 있고, 물질의 문제일 수 있으며, 직장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똑바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픔 중에도 주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연약해서 곁길로 가더라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돌아와서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향해 나아갑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이끌고 계십니다. 블레셋 세상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도 암소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냅시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삶으로 증거합시다.
거기서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가 되라
암소가 벧세메스에 도착했습니다. 암소가 하나님의 높으신 이름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나타냈습니다. 암소는 피조물로서 최고의 영광된 일에 쓰였습니다. 그러면 그에 대한 대가는 무엇일까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소들이 들에서 일하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소가 주인을 위해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밭을 갈고, 논을 갈며, 일을 하다가. 저녁이 되면 우리로 돌아옵니다. 소가 없으면 일이 안 되던 때이었습니다. 그때 소는 정말 큰 노동력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수고한 소에게 주인은 여물을 한 통 줍니다. 곱게 갈은 왕겨를 여물 위에 뿌려줍니다. 소가 좋아하며 코를 박고 정신없이 먹습니다. 주인은 고마워하며 소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털도 빗어줍니다. 소는 잘 먹고 앉아서 쉽니다. 일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러면 이 젖 나는 암소가 받은 보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14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암소들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번제가 되어 드려졌습니다. 자식을 떼어 놓고 왔습니다. 울면서 왔습니다. 가슴에 큰 고통과 아픔을 안고 큰 일을 감당했습니다. 피조물로서 이 보다 더 큰 일, 더 큰 영광은 없습니다. 그에 대한 대가가 하나님께 번제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벧세메스 사람들은 암소를 왜 번제로 드렸을까요? 또 ‘수레의 나무를 패고’라고 했습니다. 번제를 드릴 때 수레를 땔감으로 사용했습니다. 법궤를 운반할 때 쓰였던 물건들을 모두 함께 태워버렸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구별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된 것이 다른 세속적인 것을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암소는 수레와 함께 하나님 앞에 번제가 되었습니다. 소는 번제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졌습니다. 암소는 자체가 예배가 되었습니다. 몸이 예배가 됐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구별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내 자신이 예배가 됩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예배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디모데후서 4: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전제(drink offering, NIV)는 붓는 제사입니다. 제물을 불로 태우기 전에 제사의 마지막 단계로 포도주, 독주, 기름, 피를 제물 위에 부었습니다. 붓는 행위는 완전한 자기희생을 의미합니다. 바울 자신이 전제가 되었다는 말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완전히 쏟아 부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선교사가 되자는 말이 아닙니다. 암소처럼 자신을 불에 태우자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전제로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삶의 예배자이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삶의 예배자가 됩시다.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도록 합시다. 이것이 온전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주님! 내 삶이 예배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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