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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해마다 화장실 쪽 베란다에서 잡초가 한 포기 자랐습니다. 잡초가 타일 사이에 아주 조금 쌓인 먼지에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물기가 없습니다. 비가 올 때 바람이 불어 비가 조금 들이칠 뿐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틈바구니에 뿌리를 내렸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명은 참 강하고 신비로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년 전입니다. 이 아래 편의점 앞 횡단보도를 건너가는데 약국 건너편 도로 바닥에서 잡초가 두 포기 자라고 있었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흙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육안으로는 흙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스팔트를 새로 깔아 도로가 새카만 상태였습니다. 차들이 많이 다니는 곳입니다. 생명이 자라기에 거의 불가능한 조건에서 풀이 자란 것입니다. 너무 신기해서 일부러 그쪽으로 다니면서 풀이 자라는 것을 계속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막막한 상황에서도 소망은 있습니다.
창세기 6:8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었다는 말씀이 문자적으로 은혜를 발견했다(획득했다)는 뜻입니다. 노아는 죄악이 홍수처럼 범람해 소망이 거의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고, 그 은혜를 획득했습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이스라엘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삼상3:1). 은혜가 희귀한 시대였지만 사무엘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스팔트 바닥처럼 세상이 척박하지만 은혜를 발견하시고 그 은혜를 획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바로 이전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선지자도 없고, 계시도 없었습니다. 은혜가 희귀한 시대였습니다. 은혜가 희귀하던 그 시대 예루살렘 한 모퉁이에서는 계속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그 기적을 배경으로하고 있습니다.
자비의 집
예루살렘 성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서울에는 4대문 -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숙정문(북대문) - 이 있습니다. 사소문 중에는 시구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옛날에 사람의 시신이 나가는 문이라고 해서 시구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12대문이 있었습니다. 남쪽에 분문이 있었습니다. 쓰레기와 똥이 나가는 문입니다. 북쪽에는 양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소, 양, 염소가 들어오는 문입니다. 제물 중에 양이 제일 많았기 때문에 양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끔 천사가 내려와 연못의 물을 휘저어놓는데 그때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절 끝부분부터 4절까지 [ ] - 꺾쇠괄호(대괄호) -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사본이 있습니다. 그런데 [ ] 표시는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 ] 부분에 있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 ]에 있는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현대의 설교자들은 천사가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부글부글 끓는 온천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데스다에 천사의 출현은 그냥 전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데스다는 천연 연못이 아니라 비가 오면 빗물을 모아놓으려고 만든 인공 연못입니다. 그렇다면 온천과는 거리가 멀지 않을까요? 반면에 고대의 주석가들은 실제로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하게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표적을 주셔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말라기에서 마태복음까지는 약 430년입니다. 이 시기에 유대인들은 큰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선지자도 없었고, 하나님의 계시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버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기적을 일으키심으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희귀했지만 여전히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척박한 시대에 예루살렘 한 모퉁이에서는 여전히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기적 때문에 그 연못가에는 수많은 환자들이 모여 천사가 물이 움직이게 하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을 움직이다’는 말이 헬라어로 타랏소인데, 이 말은 (물을) ‘휘젓다’, ‘뒤흔들다’, ‘뒤끓게 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물을 뒤흔들어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바람을 일으키시고, 파도를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파도타기 선수들은 파도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아마추어는 파도가 크면 두려워 나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프로 선수는 큰 파도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큰 파도일수록 더 신나게 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뛰어난 서퍼도 파도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파도를 일으시키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물을 움직여주셔야 합니다. 이사야 51:15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휘저어서 그 물결을 뒤흔들게 하는 자이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물을 동하게 할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 파도를 타고 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파도를 일으킬 때 그 파도를 탈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자비의 집”, “은혜의 집”, “심정을 토로하는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베데스다는 아주 척박한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비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은혜의 집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나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한탄을 했습니다. 연못에 파도가 일어날 때 서로 들어가려고 경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1등에게만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가벼운 병에 걸린 사람일 것입니다. 달리기를 제일 잘하는 사람입니다. 큰 병에 걸린 사람일수록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못가에는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은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꼭 들어가야 할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베데스다 연못가의 딜레마였습니다.
교회가 베데스다입니다. 교회가 자비의 집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자비의 집입니다. 초등학교 들어갔더니 운동회 때 5명이 달리기를 했습니다. 3등까지 도장을 찍어주고, 나중에 공책을 선물로 줬습니다. 중학교도 달리기, 고등학교도 달리기를 했습니다. 군대를 갔더니 수시로 선착순을 시켰습니다. 조교들이 “축구 골대 돌아서 선착순 3명.”이라고 소리치면 3등 안에 들려고 죽어라 뛰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피라미드 구조입니다. 다른 사람을 밀치고, 당기고, 밟고 달려야 합니다. 내가 성공하려면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 합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피라미드 구조, 선착순 구조에서 상처입고 지친 영혼들에게 위로와 쉼이 있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경쟁의 아픔이 아니라 천사의 긍휼이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한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다섯 명이 뛰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아이는 지난 5년 동안 꼴지를 도맡아 해왔습니다. 출발 신호가 나자 네 명이 뛰다가 30m 지점에서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섯 명이 손을 잡고 결승을 통과했습니다. 모두가 일등이었습니다. 꼴찌로 트랙을 달리던 학생은 친구들의 손길에 결국 눈물을 터트렸습니다. 네 학생이 한 학생을 위해 계획한 일이었습니다. 아이의 큰 누나가 “제 동생은 연골무형성증이라는 지체장애 6급”이라며 “쉽게 말하면 키가 작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동생에게) 매년 상처가 되는 날이 생긴다.”며 “바로 가을운동회, 특히 달리기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점점 더 벌어지는 친구들과의 격차. 한번은 운동회 당일 아침에 가기 싫다고 하는데 그게 왜 이리 마음이 아프던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올해 6학년 운동회 때는 같은 조 친구들이 뒤에 있는 동생에게 모두 달려와 손을 잡고 일렬로 다같이 결승선을 넘었다.”며 “동생, 저희 가족, 선생님들, 학부모들 모두가 놀랐고 동생과 저희 가족은 엉엉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초등학교에서가 아니라 교회에서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베데스다, 자비의 집에서는 파도가 일어날 때마다 서로 들어가려는 아귀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내가 살려면 앞에 뛰는 사람을 잡아당겨 넘어뜨려야 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다 경쟁 상대였습니다. ‘누가 나보다 더 잘 뛸까?’ 서로를 경계했고, 주시했고, 시기했습니다. 은혜의 집이 아주 살벌한 곳, 경쟁의 집, 시기의 집이 됐습니다. 이름만 자비와 연민의 집이었습니다. 베데스다는 가짜 자비의 집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38년 된 병자는 아무에게도 경쟁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그를 경쟁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조금도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38년 동안 꼴지를 했습니다. 천사의 기적이 상처가 됐습니다. 천사의 긍휼이 오히려 낙심이 됐습니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꼴찌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보셨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그 사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비로운 눈으로, 측은한 눈으로 38년된 병자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셨습니다. 그의 마음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동안의 서러움을 알아주셨습니다. 거기서 타는 듯한 더위를 38번 지났습니다. 살이 에는 듯한 겨울바람을 38년 견뎠습니다. 온갖 벌레들이 날아왔지만 피할 수도 쫓을 수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의 아픔을 아셨습니다. 가짜 베데스다가 진정한 베데스다로 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거짓 자비의 집이 참 자비의 집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자비의 집입니다. 교회는 연민의 집입니다. 경쟁 사회, 1등만 알아주는 세상 속에서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의 선착순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등대교회가 이름만 교회이고 슈퍼가 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가짜 은혜의 집이 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진짜 은혜의 목사가 되고, 여러분은 진짜 은혜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짓 목사 거짓 성도가 되면 안 됩니다. 우리 등대교회가 진정한 베데스다가 되기를 바랍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여러분! 예수님의 질문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낫고자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필요가 없는 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병자는 38년을 누워있었습니다. 20살에 병이 생겼다면 지금 58세이고, 30살에 병이 생겼다면 68살입니다. 2000년 전 평균 수명이 25세도 안 되는 때입니다. 20살 이전에 죽는 사람이 정말 많았습니다. 병으로 정말 오래 누워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보다 더 많은 시간을 누워있었습니다. 처음에 병이 생겼을 때 이 사람은 정말 병이 낫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누워있어 몸도 굳고, 생각도 굳고, 마음도 굳어버려 낫고자 하는 마음도 사라진 것 같습니다. 38년이라면 부모님은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 형제들이 있었다면 거의 죽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찾아와 돌아봐주었지만 이제는 찾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병이 나아도 마땅히 살아갈 방법이 없고, 돌아갈 곳도 없고, 반겨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제 그는 낫거나 말거나 거의 관심을 갖지 않을 정도가 됐습니다. 병 들었고, 늙어 이제는 병이 나아도 그만, 안 나아도 그만이 되어버렸습니다. 오히려 병이 낫는다면 구걸할 수도 없어 낫지 않기를 바란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말씀을 직역하면 “네가 원하고 있느냐! 건강한 사람이 되기를”입니다. 네가 건강하게 되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에게 이렇게 물으심으로 오랜 세월 누워 있어서 잃어버리고 굳고 마비되고 낙심한 마음을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마음을 깨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다시 일어나 걷고자 하는 욕망을 불태우셨습니다.
병은 꼭 약으로만 낫는 것이 아닙니다. 1957년, W씨는 신체 곳곳에 암이 퍼져 의사들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환자였습니다. 어느 날, 희망을 갈구하는 W씨에게 신약 광고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크레비오젠을 통해 인류는 암을 극복할 것이다.” W씨는 그 약을 처방 받았습니다. W씨의 상태를 아는 의사들은 회의적이었지만, 뜻밖에도 신약을 먹으면서 W씨의 상태는 급격히 호전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크레비오젠이 기대만큼의 효과가 없음이 드러났습니다. 그 소식을 접한 W씨는 크게 실망했고, 그의 몸은 다시 암세포에게 점령되어 갔습니다. 아무리 크레비오젠을 투약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의사들은 W씨에게 조용히 한 가지 소식을 전했습니다. “언론에도 알려지지 않은 신약이 있습니다. 크레비오젠보다 더 강력한 약인데, 당신이 원한다면 처방해드리죠.” W씨는 이를 승락했고, 곧 신약이 주사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의 상태는 빠르게 호전되었습니다. 의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투약한 것은 약이 아니라 식염수였던 것입니다. 식염수는 그냥 깨끗한 소금물입니다. 소금물을 투약했는데 암이 치료된 입니다. 이것을 플라시보 효과, 가짜 약 효과라고 합니다.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는 비활성 약품을 약으로 위장하여 환자에게 투여했을 때, 환자의 약에 대한 긍정적 믿음으로 인해 실제로 효과가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반대로 노시보 효과가 있습니다. 진짜 약을 줘도 환자가 효과가 없다고 믿으면 약효가 나타나지 않는 현상을 노시보 효과라고 합니다. 병은 약으로만 낫는 것이 아닙니다. 낫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환자에게는 의사도 중요하고, 약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낫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서울의 한 교회 목사님이 서울역의 노숙자들을 계몽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숙자처럼 입고 서울역으로 갔습니다. 노숙자들과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생활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들을 노숙자의 삶에서 벗어나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돌연히 이 일을 포기했습니다. 포기한 이유는 노숙자들이 자신의 현재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노숙자들은 그냥 그런 삶이 좋았던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데서나 자고, 밥을 얻어먹으며 사는 삶이 세상 편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갈 곳이 없어서 노숙자가 됐습니다. 처음에는 노숙자 신세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동안 노숙자가 되어 그런 삶을 살다보니 그 삶이 익숙해져서 이젠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이 귀찮았던 것입니다. 새로운 삶이 싫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노숙자들을 계몽하는 사역을 포기했습니다.
요즘 마약 중독이 사회 큰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이 마약 중독을 치료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본인의 의지입니다. 중독을 고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독을 치료할 때 스스로 중독을 고치고 싶은 의지가 있는지를 가장 먼저 물어본다고 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중독 치료를 주변의 압박이나, 가족의 권유로 시작하는 경우에는 아무리 좋은 치료를 받아도 금방 다시 마약에 손을 댄다고 합니다. 그래서 타인으로 인해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진심으로 이 중독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해결하고 싶은지의 자발적인 동기가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치료를 해도, 본인의 의지가 없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것입니다. 결국 중독을 성공적으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중독을 고치고 싶어지도록 돕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 인생이 고침받기를 원하느냐” “네 영혼이 치료받기를 원하느냐?” “네 인생이 고침받기를 원하느냐?” 여러분은 낫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낫기를 포기하셨습니까? 노력을 해도, 애를 써도 안 되기 때문에, 포기한 것이 아닙니까? 아무리 해도 안 되기 때문에 체념 상태로 사는 것은 아닙니까? 나아도 그만 낫지 않아도 그만입니까? 그래서 이대로 사는 것이 좋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매순간마다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해야 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을 피하지 마십시오. 이 질문과 대결하십시오. 이 질문과 싸우십시오. 새로움을 갈구하십시오. 영혼의 계몽을 갈구하십시오. 어느 순간에도 낫고자 하는 마음을 잃지 마십시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병자는 대답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말은 “주님 낫고 싶습니다. 그런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도와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매우 이기적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을 때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선언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다보면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아니 마음이 일어나집니다. 여러분! 말씀을 붙잡고 일어나십시오. 그 자리에 그대로 계시지 마십시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보면 모건 프리먼이 가석방 적격 부적격 심사를 할 때 젊었을 때는 나가고 싶어 심사위원들에게 대답을 잘 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먹은 다음에는 나가거나 말거나가 됐습니다. 나가지 않으려고 일부러 나쁘게 대답합니다. 30년, 40년을 교도소에 있다 보니 나가는 것이 불안합니다. 40년 만에 나간 죄수들이 사회에 적응을 못해 삶을 포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옛날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가 좋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 사람을 벗어버리십시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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