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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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스겔 2:1~7
주일오전예배 | 2024-08-04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선형계획법을 정리한 조지 댄지그는 미국 대공항 당시 스탠퍼드 대학 4학년생이었습니다. 대공항으로 졸업생들 십중팔구는 졸업과 함께 실업자 신세가 될 것입니다. 댄지그는 졸업 시험에서 만점을 받으면 취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밤새 시험 준비하다가 시험장에 늦게 도착합니다. 다른 학생들은 이미 문제를 풀고 있었습니다. 댄지그는 조용히 시험지를 받아 들고 자기 자리로 갔습니다. 그런데 시험지의 여덟 문제 외에도 칠판 위에 두 문제가 더 있었습니다. 댄지그는 시험지의 여덟 문제를 푼 뒤 칠판 위의 두 문제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답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두 문제를 풀지 못하면 만점은 물 건너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시험 시간이 끝났습니다. 포기할 수 없었던 댄지그는 교수님에게 두 문제를 풀 시간을 더 줄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수님은 무려 이틀이나 더 시간을 더 주는 것이었습니다. 댄지그는 집으로 달려가 두 방정식을 놓고 혈투를 벌였습니다. 몇 시간을 씨름한 끝에 한 방정식을 풀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문제는 이틀이 되도록 풀지 못했고, 댄지그는 아쉬운 대로 교수님에게 답안지를 제출했습니다. 취직은 글렀다는 생각에 마음이 우울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댄지그는 사정없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수학교수님이 흥분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조지! 조지! 자네가 수학의 역사를 다시 썼다네!” 알고 보니 칠판에 있던 두 개의 수학문제는 아인슈타인도 풀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일찍 온 학생들은 교수의 말을 듣고 시험지만 풀고 칠판에 있는 문제는 아예 풀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댄지그는 늦게 와서 교수님의 말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백점을 맞을 생각으로 칠판의 문제를 풀려고 안간힘을 쓴 것입니다. 만약 댄지그가 아인슈타인도 풀지 못한 문제라는 말을 들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덕분에 그는 대공항이 한창일 때 스탠퍼드 대학 조교수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종종 사람들의 말이 우리의 앞길을 막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과 반응에 너무 흔들리지 마십시오.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눈치 보지 마십시오. 때로 우리는 사람들의 말과 반응을 무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은혜로, 오직 하나님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1.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에스겔은 25살의 나이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운하 공사를 하며 고달픈 삶을 삽니다. 에스겔이 서른 살이 되는 해의 넷째 달 5일 밤에 하늘이 열리는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 네 생물이 있는데 날개가 네 개이고, 얼굴의 앞모습은 사람이고, 오른쪽은 사자, 왼쪽은 소, 그리고 뒤쪽은 독수리이었습니다. 아주 신비로운 환상이에요. 네 생물의 모습은 불꽃같았습니다. 그들의 곁에는 무서울 정도로 큰 바퀴가 있었습니다. 큰 바퀴는 네 천사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네 천사는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바퀴는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상징합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의 어떤 힘 있는 권력자가 아니라 천사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 역사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에스겔에게는 고통 중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이 있습니다. 받은 말씀이나 받은 영적 체험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하늘이 열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환상을 중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름으로 부르시지 않고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인자는 히브리어로 뻰 아담입니다. “아담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이름이기도 하지만 사람이란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아들아!”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아담이라는 말은 흙(티끌)으로 만든 아주 연약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넘어지기 쉽고, 깨지기 쉬우며, 낙심하기 쉬운 연약한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우울하고, 쉽게 울고, 쉽게 쓰러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아담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을 인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인자라는 말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에스겔서의 인자는 아주 나약한 인간을 의미합니다.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하늘의 영적 존재들에 비해 에스겔은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은 하늘의 존재가 아니라 땅의 존재입니다.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마징가, 태권브이를 봤습니다. 마징가, 태권브이처럼 하늘을 나는 상상을 했어요. 미래 소년 코난이라는 만화 영화에 보면 코난이 발가락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 매달립니다. 발가락으로 낚시를 하고, 발가락으로 날아오는 작살을 잡아채고, 사람을 안고 높은 빌딩 끝에서 발가락 힘으로 떨어지지 않고 버팁니다. 어렸을 때 공상 만화 영화를 보면서 나도 그렇게 강하게 될 수 있다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공상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문제 앞에서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능력 있게 해결하는 존재가 아니라 고통 앞에서 쉽게 흔들리고, 쉽게 울고, 쉽게 넘어지는 그냥 평범한 아담의 아들에 불과합니다. 아담이 뱀의 유혹에 여지없이 넘어간 것처럼 우리는 뱀의 유혹에 여지없이 넘어지는 아담의 후예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아들, 인자입니다. 슈퍼맨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인자라는 호칭에는 하나님의 깊은 애정이 있습니다. 저희 집 아이들이 어렸을 때 무슨 일이 생겨 울면 품에 꼭 안고 우리 애기.” “우리 애기.”라고 하며 토닥이고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아빠의 품에서 위로받고, 안정을 찾고,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시 뛰어 놉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품에서 위로와 힘을 얻어야 할 인자, 아담의 아들입니다. 마음이 약해질 때, 곤고할 때, 허전할 때 하나님의 품으로 오십시오. 에스겔서에 인자라는 말이 93번 나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를 계속 인자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본문 1절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라고 했고, 3절에도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라고 했으며, 7절에도 인자야 너는 비록이라고 했습니다. “인자야!” “아담의 아들아!”

 

 

 

하나님이 에스겔을 인자라고 부르시며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네 발로 일어서라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에스겔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에스겔에게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2절에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로만 일어서라고 하지 않으시고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여기 임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들어가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에스겔 안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에스겔이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은혜가 있을 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감동을 입으십시오. 은혜를 힘입으십시오. 사람은 은혜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유대인 포로들이 그발강가에서 노역으로 지쳐 힘없이 쭈그리고 주저앉아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 에스겔에게 성령께서 임재하신 것입니다. “인자야! 너의 연약함을 안다. 하지만 너는 다른 사람들처럼 바닥에 주저 앉아있을 사람이 아니다. 너는 소중한 사람이다. 인자야! 일어나라. 네 발로 일어나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일어나다는 말이 700여 번 나옵니다. 기독교는 일어남의 종교입니다. 절에 가면 앉아있는 불상이 있습니다.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코르코바도 언덕에 가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예수님 상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일어남의 종교입니다.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싸웠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지게 됐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유일한 혈육으로, 아들이 없던 아브라함에게는 아들과 같은 존재였고, 장사에 많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롯과 헤어지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주 허전하고 우울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13:17)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정복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 군사 3000명이 아이성을 정복하러 올라갔다가 36명이 죽고 도망쳤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상태를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7:5) 마음이 물처럼 녹아서 땅 바닥에 쏟아져 버렸습니다. 수습 불가일 정도로 낙심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여기 일어나라는 말은 단순히 몸을 일으켜 세우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을 일으켜 세우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신 사역이 죄인들, 병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집에 계실 때 네 사람이 중풍병자의 침상을 매고 와서 지붕을 뚫고 침상을 예수님 앞으로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의 방으로 들어가셔서 달리다굼이라고 하셨습니다. 달리다굼은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 관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죽어 누워있는 청년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7:14) 예수님의 사역은 죄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사도 베드로의 사역이 나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사역을 읽다보면 계속해서 일어나다는 말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제 9시 기도 시간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다가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며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중풍병으로 8년 동안 침상에 누워있는 애니아에게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했습니다. 죽어서 누워있는 다비다(도르가)에게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임하시자 밖으로 나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기독교는 일어남의 종교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책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을 힘입어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이 없는 사람처럼 힘없이 앉아있지 마십시오.

 

 

 

2. 가라

 

하나님은 에스겔을 왜 부르셨을까요? 에스겔과 맛있는 거 먹으려고요. 아닙니다. 에스겔을 세상으로 다시 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3절 중간에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고 했습니다. 패역과 배반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과 무관하게 사는 삶을 말합니다. 4절에는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라고 했습니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다는 말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이 무정하고, 죄를 짓고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에스겔 시대 성도들은 죄를 짓고도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맹자는 인간에게 네 가지 근본 도덕적 뿌리가 있다고 했는데 그 중에 두 번째가 수오지심’(羞惡之心)입니다. 수오지심은 나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과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또 맹자는 사람에게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대의(恥之於人大矣)”라고 했습니다. 부끄러움은 인간의 삶에서 지닌 의미가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주자는 부끄러운 마음이 있다면 성현의 지위에 나아갈 수 있으나 부끄러운 마음을 잃어버리면 짐승의 세계로 돌아가 버리니 매우 중대한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짐승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6절에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보내신 세상은 꽃밭이 아니라 가시와 찔레 밭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 안 힘든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꽃길만 걷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꽃길만 걷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꽃길만 걸어요.”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꽃길만 걷는 사람은 없어요. 꽃길만 걸으면 갑질 하는 삶이 됩니다. 왜요? 다른 사람의 아픔, 고통, 애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파야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같이 울어줄 수 있습니다. 

교회를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에클레시아는 에크(~부터)와 칼레오(부르다)의 합성어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애굽과 같은 세상에서 부르셨습니다. 부르신 이후에 다시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교회는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모이기만 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예배 후에 우리는 전갈의 독이 있고, 가시의 아픔이 있는 세상으로 다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다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소명의식, 사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세계관은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우연입니다. 우연히 단백질이 생명체가 되고, 우연히 원숭이가 사람이 됐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은 필연입니다. 우연히 어쩌다가 거기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전에 우리는 세상에 살았고, 세상에 속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먹이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먹이실까요? 농부를 통해 먹이십니다. 소젖을 짜는 평범한 소녀를 통해 먹이십니다. 또 트럭 운전사를 통해 먹이십니다. 우유를 가공소와 판매처로 배달하는 운전사를 통해서요. 말하자면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가 루터가 한 말이에요. “하나님의 숨은 얼굴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러분에게 어떤 일을 하시는데 어떻게 하실까요? 그 방법이 사람들의 직업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것이 창조 세계를 돌보시는 그분의 방법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일을 하는데 그 일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서 하는 것입니다. 나의 직업은 바로 하나님의 손가락이고, 하나님의 숨은 얼굴입니다. 여러분이 하시는 그 일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 마치고 세상으로 나갈 때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가는 것입니다. 마귀의 손가락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맥킨토시(H.R Mackintosh)목사님이 스코틀랜드에서 목회할 때 학자인 친구가 방문했습니다. 그날 예배 때 한 장로님이 기도를 했는데 이 저명한 학자가 큰 감동을 받아 맥킨토시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기도한 장로님은 어떤 배경을 가졌나?” “그 장로님의 직업은 구두 수선공이라네. 그 장로님은 날마다 냄새나는 남의 구두를 수선할 때 예수님의 신발이라고 생각하며 일한다고 하네.” 이 말을 듣고 친구는 왜 그 장로님의 기도가 남에게 큰 감동을 주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 장로님은 구두를 수선하는 것이 평생의 일이었으나 구두 한 켤레 한 켤레를 대할 때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부르심으로 알고 성심껏 기쁨으로 일했던 것입니다. 신앙이 없다면 직업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고 따분한 것입니다. 신앙은 내 직업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지를 알게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세상에 보내십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삽시다.

 

 

 

3. 전하라

 

에스겔이 다시 세상으로 가서 해야 할 일은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사람들이 말씀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하십니다. 5절에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고 했고, 7절에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의 설교를 듣는 청중 중에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잘 듣는 사람, 안 듣는 사람, 자는 사람, 핸드폰 하는 사람, 딴 생각하는 사람 여러 반응이 있습니다. 제가 서울 ○○교회에 부목사로 있을 때입니다. 담임목사님이 아는 분이 설교를 하고 강대상에서 내려오면 중직에 있는 성도 한 분이 와서 얼굴에는 미소를 지으면서 ! ×. 그것도 설교라고 하냐?”라고 한 답니다. 그러면 이 목사님이 웃으면서 악수하고 고맙다고 인사를 한답니다. 멀리서 보면 두 분이 다정히 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한참 지나서 어느 날 이 분에 그러더랍니다. “! × 베이비야! 내가 너같이 지독한 ××는 처음 본다.” 그 중직도 대단하지만, 그 목사님도 참 대단하죠. 저 같았으면 못 참았을 것 같아요.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는 말씀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의 반응에 흔들리거나 좌우되지 말고 말씀의 능력을 믿고 신실하게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에스겔의 사명은 저들에게 선지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버리시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는 믿는 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선지자는 성경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없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세상 끝까지 교회가 존립한다면 복이지만 그 전에 교회에 환란의 바람이 불어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직 교회가 있고, 성경이 있고, 강단에서 말씀이 선포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은혜를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든지 흔들리지 말고 계속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2011년 어떤 조간신문에 난 기사 내용입니다. 1994년 미국에서 괴상한 모양의 사무용 의자가 출시됐습니다. 시트와 등받이가 그물망으로 돼 있어 의자의 뼈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의자입니다. 과거 기업 사장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죽 쿠션과 사치스러운 커버를 씌운 의자와는 180도 다른 것입니다. 이 의자가 처음 나왔을 때 패션잡지 에스콰이어(Esquire)’의자라기보다는 의자를 찍은 엑스레이 같다고 했습니다. 소비자들은 이게 의자 맞느냐”, “해골 같다.”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첨단과학이 결집된 이 의자의 편리함에 점점 익숙해졌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너무 이상하고 싫다.”에서 아름다운 여성 같다.”로 바뀌어 갔습니다. ‘에어론(Aeron)’이란 이름의 이 의자는 1994년 출시돼서 2010년까지 전 세계에서 600만개가 팔렸습니다. 의자 하나에 15만원이라면 16년 동안 9000억의 매출을 올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자 하나에 150만원, 250만원이 넘는 것도 있습니다. 150만원이면 9조입니다. 의자 하나 팔아서 9조의 매출을 올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에어론 의자를 처음 출시할 때 마케팅 부서의 반발이 심했습니다. “디자인을 고치라.”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이 회사의 창업자인 고()D.J. 디프리(De Pree)는 디자인 담당 수석부사장에게 마케팅팀의 반응이 어떠냐?”라고 물었습니다. 부사장은 태연히 그건 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디프리는 맞아요. 마케팅 담당자에게 디자인에 대해 질문하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되죠.”라고 맞장구쳤습니다. 허먼 밀러는 이 디자인을 고수했을 뿐 아니라 전략 상품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 의자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중요시 하지 않았습니다. 시장조사에 부응한다면 그냥 평범함을 유지하는 정도에서 그친다는 것입니다. 주도적으로 뭔가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허먼 밀러가 사람들의 말을 듣고, 디자인을 고쳤다면 지금과 같은 매출을 올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말에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반응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웃는 얼굴을 너무 좋아할 것도 없고, 화난 얼굴에 너무 힘들어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좌지우지 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성경을 보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반응에 반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오직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며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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