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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요즘 참 덥죠? 저는 이렇게 더운 여름이면 어린 시절 냇가에서 물놀이 하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제가 사는 마을에서 1.5km 정도를 걸어가면 냇가가 있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이 냇가에 제가 수영할 정도로 물이 흘렀습니다. 장마철에는 위험할 정도로 많이 흘렀습니다. 장마철에는 급류에 휘말려 죽을 뻔도 여러 번 했습니다. 안 죽은 게 기적입니다. 이 개천에 갈대가 많이 자랐는데 갈대 사이에 새둥지가 많았습니다. 새 둥지에 알이 참 많았습니다. 뜸부기 알이 있었고, 이름은 잘 모르지만 여러 가지 종류의 알들이 있었습니다. 알을 주을 때 정말 신이 났습니다. 냇가는 우리에게 정말 좋은 놀이터였습니다. 어느 해 여름 장마철이었습니다. 다른 때보다 비가 훨씬 많이 왔습니다. 비가 그치고 아이들과 냇가에 갔더니 물이 둑까지 차올랐습니다. 이쪽 둑에서 저쪽 둑까지 100m가 넘었고, 둑 높이는 20m나 됐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붉은 흙탕물이 세차게 내려가는데 빠지면 그냥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후에 물이 줄어들었습니다. 냇가에 갔더니 갈대, 새둥지, 잡초, 둑의 비탈에 자라던 들꽃, 남은 게 없었습니다. 물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요즘 기후 변화가 심각합니다. 평안하시기를 축복합니다.
1. 노아의 예배
홍수가 끝나고 땅에 물이 마르자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몇 년 전 장마 때 교회 앞 도로가 물에 잠겼습니다. 봉서산에서 흘러내려온 흙탕물이 도로를 완전히 덮었습니다. 붉은 흙탕물이 이 아파트 정문에서 막 쏟아져 나와 용암초등학교 도로까지 물에 잠겼습니다. 물살이 세서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넘어질 것 같았습니다. 장마가 끝났습니다. 가만히 보니 아스팔트에 파인 곳이 있었습니다. 장마에 조그만 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딱딱한 아스팔트를 파버렸다면 노아 홍수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지구 전체가 물로 덮였습니다. 하늘에서 물이 쏟아졌습니다(창7:11). 창조과학회에 의하면 노아 홍수 때 단순히 비만 온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7장 11절에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을 표준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바로 그 날에, 땅 속 깊은 곳에서 큰 샘들이 모두 터지고, 하늘에서는 홍수 문들이 열려서’ 땅 깊은 곳에서 물이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땅이 가만히 있는데 물이 솟아올랐을까요? 화산이 폭발하고 지축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큰 지진과 해일, 쓰나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 지구에는 엄청난 지각변동이 있었습니다.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에 강도 9.1 지진이 있었습니다. 이 지진으로 54만 명이 죽었습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인도 등 인도양 일대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지진으로 쓰나미가 아프리카 동부까지 덮쳤습니다. 인도에서 아프리까 동부 해안까지의 거리가 약 3000km입니다. 이 지진의 여파로 3000km 떨어져 있는 아프리카에서 1,000명이 죽었습니다. 역사상 2번째로 큰 지진입니다.
2010년 1월 12일 정오, 관측사상 최고 강도(리히터 규모 7.0)의 지진이 아이티를 덮쳤습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가 완전히 초토화되었습니다. 31만 6000명이 죽고, 100여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습니다. 정부 청사, 공공건물, 병원 등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회기반시설도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교도소의 담이 무너져 수천 명의 죄수들이 뛰쳐나와 무자비한 약탈 행위가 있었습니다. 사망자 발생으로 고아가 된 어린이들을 비롯해 지진 발생 이전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까지 학대와 인신매매의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고 합니다. 현재 아이티 인구의 거의 절반인 470여만 명이 기아에 직면해 있습니다, 아이티에서 더 이상 살기 어려워 ‘대탈출’이 시작될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14년이 지났지만 아이티는 아직도 복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에 일본 동북부에서 9.0의 지진이 있었습니다. 이 때 일어난 쓰나미로 3천억 달러(400조)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복구하는데 40년이 걸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지진은 아무리 커도 죄송한 표현이지만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일어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노아 홍수 때 일어난 지진의 강도는 얼마나 될까요? 지구 전체에 엄청난 지각 변동이 있었습니다. 창조과학회에 의하면 이때 지구에 빙하기가 왔다는 거예요. 지구가 완전히 물에 잠겨 버렸습니다. 150일 동안 물이 창일했습니다. 거의 11개월 동안 지구의 대부분이 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1년 만에 지구에 물이 말랐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것은 1년만이었습니다. 지진이 있었고, 화산이 폭발했고, 지각변동이 있었으며, 쓰나미가 세상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수마가 온 세상을 할퀴고 지나갔습니다. 노아가 홍수 이후에 처음 본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홍수 이전과는 완전히 딴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살던 세상은 정말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입니다. 물론 타락하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따뜻하고 아름답고 새들이 노래하고 숲이 우거졌을 것입니다. 손만 뻗으면 먹을 것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창조과학회의 의하면 노아 홍수 이전에는 지구에 겨울이 없었다고 합니다. 물로 둘러싸여 지구 전체가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게 온도가 조절되었습니다. 실제로 성경에 노아 홍수 전에 겨울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지구의 환경이 얼마나 좋았는지 인간의 수명은 1,000년이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홍수 후에는 인간의 수명이 200세 아래로 급격히 줄어듭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홍수 이후에 지구 환경이 얼마나 급격히 변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홍수로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방주는 배하고 다릅니다. 방주는 그냥 네모난 상자입니다. 햇볕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동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편의시설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배처럼 갑판 위를 걷거나 바람을 쐴만한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 답답한 곳입니다. 노아는 1년 동안 그 답답한 방주 안에 있었습니다. 그 답답하고 어두컴컴한 방주에서 노아는 얼마나 밖으로 나오고 싶었을까요? 1년 만에 방주 밖으로 나왔을 때 노아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방주에서 나와서 보니 기쁨보다 눈앞에 펼쳐진 세상에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홍수가 세상을 덮쳤습니다. 지진이 있었습니다. 쓰나미가 세상을 밀고 지나갔습니다. 사람이라고는 가족 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지구는 무인도이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막막하지 않았을까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 기가 막힌 현실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노아는 그 막막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기 보다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온전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20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이 말씀을 가만히 살펴보면 노아가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라고 했습니다. 20절에 ‘제단’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노아가 제단을 쌓고 예배드린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제단이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구절이 여기입니다. 물론 노아 이전에 사람들, 아담, 아벨, 에노스, 에녹 같은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법에서 말하는 ‘제단’이라는 말이 홍수 이후에 노아에게서 처음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노아가 얼마나 온전한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쌓은 제단은 아무 곳에서나 돌 몇 개로 대충 쌓은 것이 아닙니다. 제단이라는 말은 높은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제단은 언덕의 맨 윗부분이나 높은 위치에 깨끗한 돌들을 쌓아 올림으로써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제사가 이 지상에서 수행되는 것이면서도 제사의 대상과 목적이 위에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만나는 신성한 행위임을 드러내기 위한 자연스러운 행위였습니다. 노아는 먼저 제단을 쌓을 장소를 구별했습니다. 그리고 제단을 쌓을 돌을 구별했습니다. 노아는 살아갈 일이 막막한 상황에서 예배를 위한 제단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노아는 제단뿐만 아니라 제물도 온전히 구별합니다. 20절 중간에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라고 했습니다. 제물로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로 구별한 사람은 성경에서 노아가 처음입니다. 정결한 짐승은 소나 양, 염소 같은 가축을 말합니다. 이런 것은 앞으로 노아가 살아나갈 세상에서 정말 필요한 양식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이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또 ‘번제’라는 말이 나옵니다. ‘번제’라는 것은 제물을 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제물을 흔적도 없이 완전히 불에 태워버리는 제사가 번제입니다. 그래서 번제는 드리는 자의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번제는 모세가 제정한 5대 제사 중에 첫 번째입니다. 성경에서 ‘번제’라는 말도 여기서 처음 등장합니다. 물론 노아 이전에 사람들도 불에 태워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단, 정결한 짐승, 번제라는 이 말에서 노아의 예배가 얼마나 온전한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8장 21절 앞부분입니다.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8장 21절 뒷부분입니다.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이 다시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두 번이나 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다짐 앞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8장 21절 앞부분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향기를 받으시고’라는 말은 ‘기뻐하시고’라는 의미입니다. 향기로운 제사라는 말이 성경에서 여기에 처음 나옵니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예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제사를 얼마나 기쁘게 받으셨는지 다시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노아 이후 4,000년 이상이 지났습니다. 세상은 어쩌면 노아 때 보다 더 죄악이 관영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심판받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노아의 예배 때문입니다. 노아의 예배가 제2의 홍수를 막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배의 능력입니다.
2015년 12월 31일 미국에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페이옛빌 시 ‘힐 더 랜드 아웃리치 미니스트리스’ 교회에 총을 든 남성이 난입했습니다. 래리 라이트(57) 목사님과 신도 60명과 함께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중이었습니다. 60여 명의 성도들은 겁에 질렸습니다. 하지만 라이트 목사님은 침착하게 남성에게 다가가 “내가 도와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성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라이트 목사님은 하나님께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강도는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기도 후 목사님은 그 괴한을 안아주었습니다. 성도 세 명이 다시 그를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괴한을 가장 앞좌석에 앉혔습니다. 설교 후 목사님은 괴한에게 결신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그 괴한은 일어나서 결신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날 예배는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괴한은 교인들에게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고 교회에 와 앉았는데 주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경찰조사 결과 괴한은 전역 군인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부인이 병에 걸린 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남성은 정신과 치료를 마치고 다시 래리 목사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고 싶다고 청했습니다. 이 교회의 집사인 실베스터 러빙(Sylvester Loving·67)은 “내가 생각하기에 분명히 그 날 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곳에 계셨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는 강도도 회개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 있습니다. 서요한 목사 앞에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개 성도님 옆에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과 생각을 온전히 우리 하나님 앞에 집중합시다. 설교 말씀에, 기도에, 찬송 가사 하나하나에 집중합시다. 기도할 때 딴 생각하지 맙시다. 입으로는 찬송을 하는데 생각은 다른 곳에 있게 하지 맙시다. 예배하는 이 순간 이 예배 가운데 함께 하시는 우리 하나님께만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집중합시다. 그래서 우리 예배가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막는 노아의 번제가 되게 합시다. 사무엘하 24장에 다윗이 인구조사를 합니다. 이론 인해 이스라엘에 전염병이 퍼져 7만 명이 죽습니다. 이때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사서 화목제와 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예배를 받으시고, 전염병을 멈추셨습니다. 아합 왕 시대에 이스라엘이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도랑을 파고, 제단을 쌓고, 나무를 쌓은 후 송아지를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물을 부었습니다. 제단이 적셔지고, 도랑에 물이 찰 때까지 물을 부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먹을 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제단을 적시고, 도랑이 가득 찰 때까지 부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제사와 기도를 받으시고 비를 주셨습니다. 예배가 이 세상의 재앙을 막습니다. 최선을 다해 예배를 올립시다.
2. 하나님이 겨울을 주신 이유
하나님은 다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22절에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이라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땅이 계속하는 한’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쉬지 않을 것입니다. 낮만 있지 않습니다. 밤도 있습니다. 여름만 있지 않습니다. 겨울도 있습니다. 봄과 가을도 있습니다. 여기 ‘쉬지 않는다’는 말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그치지 않는다’라고 했고, NIV 성경은 ‘결코 중단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낮과 밤 그리고 여름과 겨울은 땅이 있는 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장마도, 폭풍도, 태풍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맑은 날도, 시원한 날도 올 것입니다.
교회에 사람이 참 많습니다. 성격 좋은 사람, 성격 나쁜 사람, 까칠한 사람, 온유한 사람, 겸손한 사람, 교만한 사람, 바른 사람, 이상한 사람 등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사람이 있습니다. 다 달라요. 그런데 똑같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낮과 밤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낮만 있지 않습니다. 밤도 있습니다. 밤만 있지 않습니다. 낮도 있습니다. 여름만 있지 않습니다. 겨울도 있습니다. 겨울만 있지 않습니다. 여름도 있습니다. 어느 집에는 낮만 있고 어느 집에는 밤만 있지 않습니다. 어느 집이건 상관없이 낮과 밤, 여름과 겨울, 더위와 추위가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 많이 더우시죠? 더위가 계속되지 않습니다. 이 더위가 반드시 가고, 시원한 가을이 오고, 추운 겨울도 올 것입니다.
겨울을 좋아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겨울이 싫습니다. 요즘 참 덥지만 그래도 저는 여름이 좋습니다. 추운 게 싫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겨울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밤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1절 중간에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계획을 어떤 성경은 생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악합니다. 그대로 두면 사람은 다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낮과 밤입니다. 여름과 겨울입니다. 밝은 날, 흐린 날, 바람 부는 날, 화창한 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겨울을 주신 이유는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밤을 주신 이유는 근신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픔이 왜 생길까요? 예기치 않는 고통이 왜 올까요? 우리가 멸망당하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안전장치입니다. 전도사 7:14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고 했습니다. 일이 잘 되면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런데 일이 잘 안 되면 하나님 앞에 조용히 엎드리십시오.
<행복과 고난은 쌍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고통은 축복과 쌍둥이>라고 했습니다. 전에 저는 C S 루이스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참으면 축복이 온다.’, ‘고난은 축복의 통로’, ‘고진감래’ 이런 정도의 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통과 축복이 쌍둥이라는 말은 도대체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쌍둥이라는 말은 똑같다는 말이잖아요. ‘어떻게 축복과 고통이 똑같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심음과 거둠은 쌍둥이입니다. 추위와 더위도 쌍둥이입니다. 여름과 겨울도 쌍둥이입니다. 낮과 밤도 쌍둥이입니다. 그리고 고통과 축복은 쌍둥이입니다. 하지만 이란성 쌍둥이입니다. 인생에 늘 좋은 것만 있으면 삶이 무료해질 것입니다. 기쁨도, 보람도 모를 것입니다. 땅에 겨울이 있고 밤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깨어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3-4년 전에 고등학생 여러 명이 건물 옥상에 올라가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같습니다. 옥상에 소화기를 여기 저기 뿌리고 장난을 치고 갔어요. 그 아이들인지 모르겠지만 여러 번 와서 이 건물에 장난을 많이 했어요. 참다못해 소장님이 신고를 해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CCTV를 추적해 아이들을 검거했습니다. 그 이후로 아이들이 장난을 안 쳐요. 얼마 전에 3층 베란다에 있는 에어컨 실외기에 불이 붙었어요. 얼마나 소름이 돋는지. 뛰어 내려가 소화기로 불을 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중학생 남자 아이들 세 명이 담배 피우고 불장난 한 거예요. 뭐가 좋다고 아이들이 숨어서 그걸 피우는지 모르겠어요. 다 어른들 잘못이에요. 장난삼아 불을 놓아 봤대요. 시키는 대로 할 테니 경찰에 신고만 하지 말아달라고 사정을 해요. 소장님이 다시는 그러지 말라며 청소를 시키고 돌려보냈어요. 아이들이 왜 그럴까요? 아이들이 할 일이 없으니까 엉뚱한 일을 자꾸 하는 거예요.
금붕어는 어항 안에서는 3천개 정도의 알을 낳지만 자연 상태에서는 1만개 정도 알을 낳습니다. 열대어는 어항 속에서 자기들끼리 두면 힘이 없어 비실비실 죽어버립니다. 하지만 천적과 같이 두면 힘차게 잘 살아갑니다. 보리는 가을에 뿌립니다. 보리를 봄에 뿌리면 가을에 뿌린 보리 보다 훨씬 더 잘 자랍니다. 그런데 가을에 뿌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봄에 뿌린 보리는 잎사귀만 무성할 뿐 알곡이 들어차지 않습니다. 하지만 겨울을 지난 보리는 알맹이가 꽉 들어찹니다. 보리는 겨울을 지나야 합니다. 호두는 자랄 때 바람에 흔들리며 서로 부딪쳐야 실한 열매가 열립니다. 참 신기하죠? 여러분! 밤을 아시죠? 밤은 아주 가는 가지에 여러 개가 달린 것이 열매가 실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가지가 가늘면 계속 바람에 흔들립니다. 바람에 흔들릴 때 밤송이가 서로 부딪치는 거예요.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여름 내내 이리저리 흔들리며 서로 부딪치고 찔린 밤알이 실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 가시에 찔렸습니다. 이 가시가 얼마나 아팠으면 사탄의 가시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 사탄의 가시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있었다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12:7-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울에게 머물게 하기 위해서 바울의 육체에 사탄의 가시를 두셨다는 거예요. 이거 얼마나 큰 역설이에요. 바울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세 번이나 기도했겠어요.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사탄의 가시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쉬지 않고 올 것입니다. 남과 밤은 쌍둥이입니다. 겨울과 여름은 쌍둥입니다. 그리고 <고난과 영광은 쌍둥이>입니다. 고통은 기쁨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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