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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눈물 뒤에 오는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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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107:17~22
주일오전예배 | 2024-07-07
설교자 : 서요한 목사

2024년 하반기가 시작됐습니다. 시간이 참 빠릅니다. 시간이 KTX 같습니다. 욥기 7:6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90:9)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금방 지나갈 것입니다. 한 해의 반을 은혜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립니다. 우리 함께 큰 소리로 해봅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병원의 정신과 의사인 에릭 린더만 박사가 슬픔과 눈물에 대해 연구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한 젊은 여자 간호사가 아버지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슬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심장병으로 고생하고 있어서, 아버지의 친구가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가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면 심장이 약한 네 어머니가 너를 보고 충격을 받아 어머니도 세상을 떠날 수 있다.”라고 충고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나날이 수척해져 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도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고 감정을 억제하고 흐르는 눈물을 꾹꾹 참았습니다. 그러다가 대장염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 대장염은 급성이어서 대장암으로 발전했고 결국 젊은 딸이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눈물을 억제하면 더 심각한 불행이 닥칠 수 있습니다. 눈물은 매우 유익합니다. 첫째, 눈물은 정신적인 충격을 완화시켜줍니다. 둘째, 강력한 스트레스로 인해 체내에 축적된 모든 화학물질과 불순물을 밖으로 배출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그것이 몸 안에 쌓여 심장병이나 다른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슬플 때 흘리는 눈물은 심혈관에 부담을 주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시원하게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 우세요. 사람은 울어야 삽니다.  

전도서 7:3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고 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 고통 앞에서 숙연해지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네 가지 인생 역경을 만났습니다. 첫째, 사막 횡단입니다. 4,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둘째, 감금입니다. 10절 끝에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질병입니다. 18,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시인은 먹지 못할 정도로 아픕니다. 넷째, 바다 여행입니다. 23절에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고난은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고, 대양을 횡단하는 것과 같으며, 쇠사슬에 매인 것 같이 힘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네 가지 고통에서 시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시간 네 가지 고통 중에서 세 번째 고통인 질병에서 건짐을 받은 시인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시인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병으로 왔습니다. 17-18절에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고 했습니다. 시인은 한두 가지가 아닌 모든 음식물을 싫어할 정도로 중병에 걸렸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하나는 오이를 먹지 못합니다.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식증 환자들은 살찌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먹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때로는 음식을 먹습니다. <푸드 네오 포비아>라는 것이 있습니다. 새로운 식품을 혐오하는 증상입니다. 사람들이 한두 가지 음식을 싫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몇 가지 음식이 아니라 모든 음식을 싫어할 정도로 중병에 걸렸습니다. 싫어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타아브입니다. 타아브는 혐오하다, 증오하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모든 음식이 지긋지긋하게 싫을 정도로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병에 걸린 이유를 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시인은 죄 때문에 자기에게 고난이 왔고, 죄 때문에 자신이 병에 걸렸다고 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무기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불에 손을 넣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불나방은 불을 보면 죽을 줄도 모르고 불을 향해 무작정 뛰어듭니다. 그래서 이름이 불나방입니다. 오래 전에 아는 분의 차를 타고 밤에 시골 길을 가는데 도로 한 가운데 있던 고양이가 불빛을 보더니 야옹하면서 자동차에 달려드는 것이었습니다. 도로가 굽어져 갑자기 나타난 고양이를 보고 설 사이도 없었습니다. 정말 깜짝 놀라서 급정거 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불나방과 고양이가 불을 보고 뛰어드는 것과 같은 행동입니다. 

예레미야 29: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평강과 소망을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습니다. 레위기 27:34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횡단보도와 같습니다. 보행자는 횡단보도로 가야 안전합니다. 성경은 신호등과 같습니다. 차량은 신호에 따라야 움직여야 안전합니다. 성경은 도로에 <위험>이라고 세워진 경고판과 같습니다. 경고 신호를 무시하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위험에 빠뜨립니다. 죄는 경고판과 신호등을 무시하고 운전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죄는 차가 역주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성경을 주시고,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만을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이 죄를 지은 이유가 미련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미련하기 때문에 병이 왔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그 병은 미련병입니다. 미련해서 걸린 병입니다. 예수님이 운영하는 병원의 병실에 시인이 누워있습니다. 침대 머리에 있는 명찰에 이름, 성별, 나이, 병명이 적혀 있습니다. 병명을 적는 난에 미련병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것이 시인의 고백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미련한 자들은 바보 혹은 어리석은 자들로도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시인은 미련병, 바보병, 어리석음병에 걸렸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가 미련병에 걸려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는 인류에게 미련하다고 말을 하면 매우 불쾌한 일입니다. 하지만 미련하다는 것을 모른다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인류가 아픈 이유가 무엇일까요? 죄송한 표현이지만 미련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매우 불쾌하겠지만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람은 미련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정말 어리석은 일은 인류가 미련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련 중에 미련입니다. 바보 중에 바보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하면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미련했는지 알게 됩니다. 자신이 미련한 자임을 알 때 하나님의 치료가 시작됩니다. 사람은 무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어리석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무능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환자에게 의사가 언제 왔을까요? 환자가 울부짖었을 때 왔습니다. 19,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부르짖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자아크입니다. 자아크는 부르짖다, 소리치다는 뜻입니다. 자아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울부짖음입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으매라고 했습니다. 환자가 아프다고 죽겠다고 울부짖었을 때 의사가 오셨습니다. 

시인은 울부짖었습니다. 어렸을 때 살던 집에 봄이 되면 제비가 날아와서 처마 밑에 둥지를 지고 새끼를 낳았습니다. 어미가 밖에 나가서 먹이를 입에 물고 와서 둥지에 앉으면 6-7마리의 새끼 제비들이 일제히 목을 뺄 수 있는 만큼 길게 빼고, 입을 벌릴 수 있는 만큼 크게 벌리고, 있는 힘을 다해 울부짖습니다. 제비는 목이 빠질 만큼 목을 뺐고, 입이 찢어질 만큼 입을 벌렸습니다. 어미 제비는 입에 벌레를 물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그 중에 한 새끼의 입에 벌레를 물려주고 다시 들로 날아갑니다. 어미 제비가 새끼 제비에게 우는 법을 가르쳐주었을까요? 아닙니다. 새끼 제비는 스스로 울었습니다. 우는 법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 집에서 돼지를 키웠습니다. 13-14마리의 새끼 돼지가 어미 돼지를 따라다니며 하루종일 꿀꿀 거립니다. 어미돼지는 새끼 돼지에게 우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새끼 돼지는 본능적으로 웁니다. 저는 3남매를 낳았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한 번도 저희 아이들에게 우는 법을 가르쳐준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수 없이 울어댔습니다. 우는 것은 본능입니다. 우는 것이 DNA에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울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울지 않습니다. 눈물이 말라버립니다. 여러분! 우십시요. 울어야 삽니다. 

우는 것이 최고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주님 앞에서 내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탈무드에 천국의 문은 기도에 대해선 닫혀있더라도, 눈물에 대해선 열려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편 56:8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눈물을 담는 병을 가지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천국에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눈물은 하나님께서 천국에 보관하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첫 번째 천사는 다이아몬드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두 번째 천사가 아름다운 여성의 미를 가져 왔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천사는 죄인의 눈물이라며, 눈물을 작은 병에 담긴 눈물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매우 흡족해하시며, “네가 가장 귀한 것을 가져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려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내가 네 눈물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열왕기하 20:5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라고 했습니다. 아멘, 할렐루야는 만국공용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모르지만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멘, 할렐루야처럼 눈물은 만국공용어입니다. 통역이 필요 없습니다. 누구나 알아듣습니다. 독일의 시인 괴테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 본 경험이 없고 또 자기 침대에 앉아서 울면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가져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하늘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이다.” 눈물을 흘려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암 대체의학 치료 전문 대암클리닉 이병욱 박사의 울어야 산다는 책이 있습니다. 이병욱 박사는 눈물이 약이라고 합니다. 몸도 마음도 아픈 사람에게 가장 좋은 처방은 <울어야 한다>라는 처방이라고 합니다. 이병욱 박사는 메스를 내려놓고 환자들에게 눈물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흘리는 눈물에는 카테콜아민이라는 스트레스호르몬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몸은 스트레스를 받아 생긴 카테콜아민을 눈물에 실어 밖으로 내보냅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스트레스호르몬이 그대로 쌓입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몸 곳곳에 발생합니다. 심장을 압박해 심장질환이나 고혈압이 생깁니다. 실제로 울고 나면 심장병 발병율이 1/2로 준다고 합니다. 1997년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죽었습니다. 영국 사람들이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이때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이 1/2로 줄었다고 합니다. 울어서 마음이 안정된 것입니다. 이것을 다이애나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이병욱 박사는 마음이 느끼는 대로 울어주면 질병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울지 않으면 장기가 대신 운다.”울어야 산다.”고 눈물을 강조합니다. 안 울면 속병이 생깁니다. 울지 않으면 속이 썩어 문드러집니다. 우세요. 울어야 삽니다. 일본에는 울음 치료과가 있는 병원이 있습니다. 환자에게 슬픈 영화를 보여주고 눈물을 흘리게 유도합니다. 실컷 울고 난 환자들은 혈액순환이 잘돼 몸이 나른하고 개운하다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동안엔 심장 박동이나 자율신경계가 안정 상태를 보인다고 합니다. 일본 토호대 아리타 히데오 교수는 목 놓아 우는 것은 뇌를 리셋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습니다. 울면 우리 몸이 리셋 되는 것입니다. 남자는 태어나면 세 번 운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 어머니가 죽었을 때, 그리고 나라를 빼앗겼을 때라고 합니다. 이거 없어져야 할 말입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평균수명이 짧은 것은 여성보다 잘 울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남성분들, 부인 보다 오래 살려면 우십시오. 없어져야 할 노래가 있습니다. “울면 안돼 울면 안돼이거 잘못된 노래입니다. “울어도 돼. 울어도 돼로 바꾸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울어야 잘 큽니다. 사람은 울어야 삽니다. 제가 학생일 때 교회에 가면 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에 우는 사람이 없습니다. 눈물이 메마른 시대에 하나님은 눈물을 보기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5: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함께 웁시다. 함께 애통합시다. 함께 눈물을 흘립시다. 교회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부모와 자녀를 위해서 웁시다. 울어야 삽니다.

 

의사는 무엇으로 환자를 치료했습니까? 말씀으로 치료했습니다. 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보내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솰라흐입니다. 솰라흐는 보내다, 내밀다, 쭉 뻗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병든 자에게 내미신 것은 말씀입니다. 병든 사람에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병든 자에게 보내신 것은 말씀입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것이 이 책이고, 계시이며, 말씀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은 말씀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약국에서 사왔습니다. 이 약은 종이에 싸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 종이를 찢고 약을 꺼내 물과 함께 먹었습니다. 성경은 약을 싼 종이와 같습니다. 종이를 벗기면 치료약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병에 걸렸다면 여러분의 상황에 합당한 약이 이 두 껍데기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곳에는 죄로 병든 모든 자들이 찾는 것이 들어있습니다. 

틀림없이 시인은 육신의 의사에게 갔을 것이고, 그 의사가 주는 약을 환부에 바르기도 하고, 먹기도 했을 것입니다. 시인은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만 본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몸을 의사에게 보이고 치료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병을 의사가 아니라 말씀이 고쳤다고 고백했습니다. 의사와 약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환부에 무화과를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시절에는 무화과를 약으로도 썼습니다. 의사와 약이 꼭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육신의 병은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의학과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면 아무리 유능한 의사라도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이 중에 근래에 병에서 회복되신 분이 있다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로 말미암아 찬송할 것을 권고합니다. 저는 그분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말씀이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한 백부장은 자기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몹시 괴로워한다며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시면서 백부장에게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때 백부장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 오시지 마시고 다만 말씀만으로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백부장은 예수님께 말씀만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말씀의 필요성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말씀의 필요성을 모릅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죽었는데 거지는 천국에 가고,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부자는 너무 고통스러워 아브라함에게 요청합니다. “나에게 형제가 다섯 명이 있는데 나사로를 세상에 다시 보내서 내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고 합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요청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할 것입니다그러자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모세와 선지자라는 말은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의 권함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가 효과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셔도 듣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나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선물을 가지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습니다.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종을 시켜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합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에게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보냈습니다. 먼 길을 온 사람에게 얼굴도 보이지 않는 선지자에게 나아만은 화가 많이 났습니다. 나아만은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함께 온 종들이 나아만에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이 말을 듣고 선지자의 말에 순종했을 때 나아만은 치료받았습니다. 

선지자, 사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말씀을 보내는 사람입니다. 목사는 말씀을 보내는 사람입니다. 저는 말씀을 보내는 사람입니다. 저는 매일은 아니지만 여러분에게 말씀을 보냅니다. 여러분 외에 또 많은 분들에게 동일하게 말씀을 보냅니다. 많은 분들이 그냥 말씀을 읽지도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안읽씹이라고 하나요. 제가 보낸 말씀을 대부분 귀찮아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보낸 문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 문자를 안읽씹합니다. 조금 성의가 있는 분들을 읽씹합니다. 읽기만 하고 권면은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문자를 귀찮아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말씀을 안읽씹하지 마십시오. 읽씹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보낸 문자를 상대방이 읽씹하면 기분 나쁘잖아요. 하나님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말씀의 권면을 받으십시오. 말씀에 치료법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살리려고 말씀을 보내신 것입니다.

 

위험한 지경에서 건짐을 받은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을 했습니다. 21-22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찬송하다는 말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다는 의미입니다(야다). 시인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감사를 몸으로 표현했습니다. 고마운 사람이 있으면 두 손을 꼭 잡고 정말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께 이렇게 표현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정말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감사를 격하게 몸으로 표현해봅시다. 시인은 감사제사도 드렸습니다. 감사제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토다입니다. 토다는 찬양, 고백이라는 뜻입니다. 시인은 입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감사제사는 제사가 끝난 다음에 고기를 제사장, 주변 사람들과 성전의 빈터에서 나누어먹는 제사입니다. 레위기 7:15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감사제물은 그 날 다 먹어야 합니다. 다음 날까지 남기면 안 됩니다. 최대한 기쁨을 사람들과 나누라는 의미입니다. 시인은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했습니다. 또 시인은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했습니다. 선포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자세히 기록하다’, ‘열거하다’, ‘전하다라는 뜻입니다. 선포는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자세하게 열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을 사람들 앞에서 열거하는 것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2024년 상반기 중에 제게 제일 감동적인 순간이 있다면 615일 우리 교회 집사님 딸 결혼식에서 신부 아버님이 축사를 하는 중에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크게 소리친 순간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순간이 최근 제 삶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 외에 최고의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결혼식이 예배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었고, 청중이 대부분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친 신부 아버님의 외침이 아직도 제 머리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신부 아버님이 그렇게 외치는 순간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이 세상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소리칠 수 있겠습니까? 이게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고, 감사하고, 고백하며, 선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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