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스승과 제자가 함께 걸어갔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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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열왕기하 2:1~14
주일오전예배 | 2024-06-30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엘리야가 기도하면 하늘이 닫혀 3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면 하늘이 열려 비가 내렸습니다. 그가 명령하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고, 그가 기도하면 죽은 사람이 살아났으며, 그가 선언하면 밀가루 통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마차를 타고 달리는 아합 왕 앞에서 갈멜산에서 이스르엘까지 약 30km를 달려갔습니다. 열왕기상 18:46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축지법을 쓰는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순간 이동도 했던 것 같습니다. 열왕기상 18:12에서 오바다가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엘리야는 신출귀몰한 선지자였습니다. 이 신출귀몰했던 선지자가 이 땅에서의 모든 사명을 끝내고 하늘로 승천하려고 합니다. 1여호와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하나님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사명을 마치며 수제자인 엘리사와 마지막으로 수학여행을 떠납니다.

 

엘리사는 수학여행 중에 갑절의 영감을 구합니다. 9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갑절이라는 말은 두 몫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율법에서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때 큰 아들에게는 두 몫을 주었습니다(21:17). 두 몫을 준다는 말은 후계자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사에게 역사하는 성령의 두 배의 역사를 구한 것은 모든 선지 생도들이 인정할 수 있도록 그에 따른 능력을 구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4:22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을 상속자라고 합니다. 로마서 8: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상속자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장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2:23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모임과 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 엘리야가 승천하기 직전 돌아본 지역이 갖는 영적 의미를 살펴보면서 엘리사처럼 갑절의 은혜를 받아 이 시대 영적 장자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1. 길갈

 

엘리야는 엘리사와의 수학여행을 길갈에서 시작합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라고 했습니다. 왜 길갈에서 시작했을까요?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 40년을 끝낸 다음에 요단강을 건넌 후 가나안 땅에 첫 번째로 발을 내디딘 땅입니다. 광야 생활 40년을 결산한 곳입니다. 가나안 생활의 시작이 길갈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에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명령하십니다.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같은 의미입니다. 할례는 새 생활을 의미합니다. 이방인이 유대인이 될 때 할례를 했습니다.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구원을 의미합니다. 길갈은 굴러가다는 뜻입니다. 길갈은 애굽의 수치를 하나님께서 굴려버리신 곳입니다. 길갈이라는 말에는 “~에서부터라는 뜻이 있습니다. 길갈은 옛 생활, 부끄러운 과거, 육적 삶을 굴려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곳입니다. 길갈은 새 삶의 시작입니다.

 

남자들은 할례를 하면 고통으로 일주일 동안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앞에 여리고 성이 있습니다. 바로 앞에 원수들이 있습니다. 할례를 하려면 요단강을 건너기 전 요단 동편에 있을 때 있을 때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너기 전이 아니라 건넌 후에 할례를 명령하셨습니다. 적진 앞에서 할례를 하라는 것은 죽으라는 의미입니다. 할례를 한 것을 가나안 원주민들이 알고 공격해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꼼짝 없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기서 죽으라면 죽겠습니다.”라는 결의입니다. 길갈은 육적인 삶의 청산입니다. 길갈은 육적의 삶의 죽음입니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길갈은 하나님이 죽으라면 우리 모두 여기서 죽겠습니다.”라는 감격과 결단이 있던 곳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길갈에 머물라고 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머물지 않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길갈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바울은 신앙인을 달리기 선수에 비유합니다. 달리기 선수는 출발선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결승선까지 달려야 합니다.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교회 옥상 화단에서 농사를 짓는 여사님이 농사에 쓰려고 비가 오면 물을 큰 통에 받아놓습니다. 처음에는 물이 맑고 깨끗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탁해집니다. 받아놓은 물에 날벌레들이 알을 낳아 애벌레 수만 마리가 헤엄을 칩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물이 애벌레로 새까맣게 됩니다. 고인 물은 썩습니다. 모기 새끼 부화장소가 됩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은혜를 체험한 후 얼마나 좋았는지 주님께 초막을 짓고 이 산에서 살자고 합니다. 그때 하늘에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음성이 들립니다. 산에서 내려가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여기서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마지막 여행 여정이 갖는 의미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경험과 일치합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엘리사의 여행이 길갈에서 시작되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길갈이 의미하는 바를 익히지 않는 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없습니다. 육에 대한 단호한 결단과 세상과의 분리, 하나님께의 헌신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 여행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육적인 삶을 분리시키십시오. 그래야 주님과의 수학여행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육적 삶을 분리시키지 못하면 계속 제자리입니다. 우리에게는 길갈의 결의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과거를 청산하시고 길갈에서 나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벧엘

 

엘리야가 길갈에서 떠나 도착한 곳이 벧엘입니다. 벧엘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의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첫 번째로 머문 곳이 세겜입니다. 아브라함은 세겜에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세겜에서 잠시 머물다가 벧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벧엘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창세기 12:7-8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했습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가족들, 가솔들과 함께 여호와께 공식적인 예배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사람들이 정규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세겜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세겜에 제단을 쌓았지만 거기서는 공적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벧엘은 아브라함이 정규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던 곳입니다.

 

아브라함 때에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듭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애굽에는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고, 하나님께 헌신하려는 마음도 잃어버립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갔을 때 비겁한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벧엘이 하나님과의 교통을 의미한다면 애굽은 하나님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와서 벧엘로 가서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창세기 13:3-4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아브라함이 벧엘에 돌아왔을 때 예배가 다시 회복되었고, 하나님과 다시 교통하게 됩니다. 벧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부르던 곳입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형의 장자권을 탈취합니다. 형 에서가 화가 나서 야곱으로 죽이려하자 이삭과 리브가가 야곱을 하란으로 보냅니다. 야곱은 하란으로 가는 중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창세기 28:10~13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라고 했습니다. 벧엘은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던 곳입니다. 야곱은 하란으로 갔다가 다시 벧엘에 돌아와 거기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창세기 35:14-15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고 했습니다. 기둥을 세우고 전제물을 부었다는 말은 정규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벧엘은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과 교통하던 곳입니다.

 

벧엘은 더할 나위 없는 복된 장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복된 장소가 죄로 오염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누어지면서 여로보암 왕이 북 사람들이 남유다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백성들에게 이것을 섬기게 합니다. 하나님의 집이 우상의 집이 된 것입니다. 호세아 4:15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벧아웬은 속이는 집, 우상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벧아웬은 벧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우상의 집이 됐습니다. 여로보암 왕은 돈을 받고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을 세웁니다. 가짜 하나님에 가짜 제사장을 만들었습니다. 엘리야는 왜 벧엘에 선지학교를 세웠을까요? 가짜 제단을 허물고, 가짜 예배를 폐하고, 무너진 예배를 회복하며, 오염된 여호와의 종교를 정화하기 위해서입니다. 항상 역사는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집, 교회가 더럽혀지고 있습니다. 교회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영적 교제입니다. 예배는 인간 중심, 자기중심의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 방식으로 방향 전환하는데 필수적인 예식입니다.

 

40대 중년의 아들이 60대 노모에게 교회에 가기 싫은 세 가지 이유를 말했습니다. 첫째, 저도 주일 아침에 늦잠을 자고 싶을 때가 있어요. 둘째, 성가대원들이 자주 음을 틀려요. 셋째, 예배 시간에 장로님의 기도가 너무 길어요. 그러자 노모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교회에 꼭 가야 하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둘째, 예배는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다. 셋째, 결정적으로 네가 담임목사이잖니!” 예배가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드리는 것이라면 인간의 감정과 상황에 좌우돼서는 안 됩니다. 오늘 예배가 무너졌습니다. 드리고 싶으면 드리고, 드리고 싫으면 안 드립니다. 상황이 되면 드리고 상황이 되지 않으면 안 드립니다. 상황이 되든 안 되든 드려야 하는 것이 예배가 아닌가요? 가나안 교인이 200만 명이라고 합니다. 가나안 교인이라는 말이 백과사전에 등재될 정도이니까 이 말을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배는 내가 싫어서 안 드리고 좋아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중심 신앙생활을 의미합니다. 예배를 꼭 드리십시오.

 

 

3. 여리고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시가 어디일까요? 페루의 마추픽추일까요?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일까요?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는 여리고입니다.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여리고에는 주전 9,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11,000년 이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 여리고입니다. 여리고는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도시입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에 의해 통치되던 곳입니다. 여러 강대국에 짓밟혔지만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역사와 문화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수많은 방문객을 사로잡는 곳이기도 합니다. 여리고는 성경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장소입니다. 여리고는 유다 광야에 있는 아름다운 오아시스입니다.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지만 물이 풍부해 종려나무가 많아 종려의 성읍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유서 깊고 아름다운 성읍 여리고가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앞을 가로막는 인생의 장애물을 상징합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이 극복해야 할 세상과 마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길갈에 진을 쳤습니다. 가나안으로 진격하려고 하는데 여리고가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방법이 참 특이합니다. 그냥 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도는 것입니다. 엿새 동안 하루에 한 바퀴씩 돌다가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돈 후에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면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을 돌 때 맨 앞에 있어야 하는 것이 법궤입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백성들 앞에 나팔을 불면서 가다가 마지막에 나팔을 길게 부는 것입니다. 법궤가 상징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제사장이 부는 나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데 필요한 것은 말씀 순종입니다.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함락은 하나님의 방법이 기괴하고 이상해보이며 전혀 상식적이지 않아도 말씀에 순종하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리고 성이 오늘까지 역사 가운데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의 방식은 멸망하고, 하나님의 뜻이 승리한다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수아 6:1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문을 굳게 닫고 있습니다. 마귀는 세상의 문을 닫아놓고 자기 앞에 그리스도인들을 무릎 꿇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이 닫아버린 그 문을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열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입니다. 난공불락의 요새 여리고 성벽은 오직 순종으로 무너졌다는 것이 여리고가 우리에게 남겨주는 메시지입니다. 엘리사는 다른 곳이 아니라 여리고에 선지학교를 세웠을까요? 순종만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것임을 교훈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믿음으로 우리 앞을 막는 여리고를 정복합시다.

 

 

4. 요단

 

수학여행 마지막 코스는 요단강입니다.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 가면 엘리야가 승천했다고 알려진 <엘리야 승천 언덕>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요단강을 건너간 후에 들림을 받았습니다. 그냥 여리고에서 나와 유대광야에서 들림받을 수도 있는데 왜 요단강을 건너가서 들림을 받았을까요? 하나님은 여리고에서 엘리야를 데리고 가셔도 되는데 왜 굳이 요단강을 건너편에서 엘리야를 데리고 가셨을까요? 이것은 비유입니다. 여기에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요단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40년을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입니다. 요단강은 성도가 마지막으로 건너야 할 강으로 죽음이나 마지막 때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606)“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우리는 죽을 때까지, 주님 오실 때까지, 끝까지,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중간에 포기하면 안 됩니다. 요단강의 의미는 죽을 때가지 믿음을 지켜라. 죽을 때까지 충성하라.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요단강은 죽음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엘리야가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가는 것은 죽음을 이긴다는 의미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가야 들림받는 것입니다. 사탄의 가장 큰 무기는 사망입니다. 성도들이 마지막에 이겨야 할 것이 사망입니다. 우리 삶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낙심은 생각의 죽음입니다. 절망은 마음의 죽음입니다. 포기는 생활의 죽음입니다. 체념도 죽음의 일종이고, 불안도 죽음의 일종이며, 두려움, 우울함, 답답함, 불신앙 모두 죽음의 일종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죽음을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죽음은 사탄의 최고 무기입니다. 육적인 죽음이든, 생각의 죽음이든, 소망의 죽음이든, 영적인 면에서 죽음이든 우리는 모두 종류의 죽음을 무조건 다 이겨야 합니다. 죽음을 예수 부활로 이깁시다. 죽음을 십자가로 이깁시다. 우리는 삶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종류의 죽음과 맞서야 합니다. 어떤 종류의 죽음 앞에서 물러서지 마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건너야 할 영적 요단강입니다. 이 요단강을 건너가야 우리는 들림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죽음을 이김으로 저 높은 곳으로 들림 받읍시다. 저 밑에 웅크리고 우울하게 앉아 있지 맙시다. 주님이 이기셨습니다. 주님의 승리가 내 승리입니다.

 

엘리야가 끈질기게 따라붙는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엘리사가 대답합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왜 엘리사는 갑절의 영감을 구했을까요? 세대가 너무 악했습니다. 또 종교적으로 우상이 너무 만연했습니다. 또한 선지학교에 쓸 만한 선지생도들이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한 것을 눈으로 보고도 선지 생도 50명이 엘리야를 찾겠다고 사흘 동안 유대 산지를 돌아다녔습니다. 7-8년 전 여름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교회를 방문하더니 편지를 하나 주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땀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학교 신학과 학생들을 보면 한국 교회가 암담하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우리학교 신학과 학생들을 기도해주십시오.” 윤리도 땅에 떨어진 시대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를 보고 대머리라고 놀렸습니다. 초등학생이 선생님을 때리고 성추행을 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힌 시대입니다. 스승님 보다 갑절의 영감이 있지 않고는 도저히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갑절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함께 길을 가며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길갈에서 벧엘까지 12킬로입니다. 빨리 걸으면 세 시간 거리입니다. 천천히 걸으면 네 시간 거리입니다. 벧엘에서 여리고까지는 20km입니다. 그리고 여리고에서 요단까지는 8km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틀을 같이 걸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같이 걸으면서 대화를 했습니다. 11절에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NIV 성경은 “As they were walking along and talking together”(그들이 걸으면서 함께 이야기를 하는 중에)라고 번역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인생길을 함께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모릅니다. 그런데 대화라는 것은 서로의 삶을 공유하게 합니다. walking and talking 함께 걷고, 함께 이야기 하는 것, 이것이 스승과 제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7절에 선지자의 제자 오십 명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서 있더니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엘리야가 승천할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승천 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엘리야가 가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50명의 선지 생도들이 스승이 떠나는데 그냥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스승님 떠나시면 우리는 어떻게 하냐고 매달려야 하지 않을까요? 스승과 제자라는 것은 함께 걷고, 함께 이야기하는 관계입니다. 주님과 함께 걸으십시오. 그리고 주님과 대화하십시오. 주님 제가 지금 이런 건강의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주님 제가 직장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것 아시죠?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인도해주세요. 그러면 주님이 내 삶을 공유하십니다. 주님과 삶을 공유하세요. 구경꾼이 되지 마세요. 주님을 끝까지 바라보세요.

 

스승이 제자에게 말합니다.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어려운 일은 문자적으로 곤란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께 곤란한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그거 곤란한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엘리야를 데려가시는 것을 보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면 곤란한 일도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곤란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비상식적인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도라는 것은 곤란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서 눈을 떼지 마십시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지 마십시오.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곤란해 하는 일도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난처해하시는 것도 이루어집니다. 믿음은 끝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끝까지 스승을 바라보았습니다.

 

대화를 하는 중에 불말과 불수레가 엘리야를 태워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사가 소리를 지릅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 병거와 마병이여!” 그때 하늘에서 엘리야의 겉옷이 떨어집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겉옷을 찢고 엘리야의 겉옷을 집어듭니다. 겉옷이 히브리어로 아데라트입니다. 아데라트는 털옷, 겉옷, 망토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영광, 존귀, 광휘라는 뜻도 있습니다. 엘리야의 겉옷이 엘리사에게 떨어졌다는 것은 엘리야의 존귀와 영광과 권위가 엘리사에게 위임됐다는 의미입니다. 입었다는 말은 없지만 엘리사는 이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엘리사에게 역사하는 성령의 권능을 입었다는 의미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사사들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는 장명이 나옵니다. 사사기 6:34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고 했습니다. 임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라바쉬입니다. 라바쉬는 ‘(옷을) 입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셨다는 말은 여호와의 영을 기드온이 입었다또는 여호와의 권능을 입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엘리야의 겉옷은 엘리야의 인격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배어 있는 옷이었습니다. 엘리야의 겉옷은 하나님의 영이 그를 감싸시는 것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자기 겉옷을 찢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이제 자기 옷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동안 내가 사용하던 것, 내가 의지하던 것, 내가 바라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 하나님의 은혜로 무장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전에 입었던 옷을 벗고, 하나님의 은혜로 옷을 입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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