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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지난 주간에 몸이 좀 안 좋아서 병원엘 갔습니다. 진료비를 결재하고 병원에서 나와 약국에 가서 약값을 결재하려고 하는데 카드가 없는 거예요. 병원에서 결재 후에 카드를 뒷주머니에 넣은 것 같은데 뒷주머니를 만져보니 카드가 없어요. 약국은 1층이고, 병원은 5층이에요. 바닥에 떨어뜨렸나 싶어 약국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원으로 올라가면서 바닥을 자세히 살폈어요. 하지만 카드가 보이지를 않아요. 저는 뭐를 잃어버리면 기도를 합니다. “주님! 찾게 해주세요.” 기도 후에 무심코 뒷주머니를 만졌는데 카드가 있어요. 카드가 주머니 안쪽까지 들어가지 않고 주머니 입구에 걸려있는 거예요. 저는 뒷주머니 아랫부분만을 만져보고 카드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여러 번을 만져봤거든요.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한 3-4센티 떨어졌을까요? 순간 제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새삼 느꼈습니다. 저는 제 삶의 순간순간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것을 느끼며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지를 마음에 새깁니다. 사람은 근원되신 하나님과 떨어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남성이 알코올 중독으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아내는 사는 게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알코올 중독자의 아내에게 성경을 한 권 줬습니다. 그는 성경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아 성경을 아주 귀한 보물처럼 여겼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믿음을 비웃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만취해 집에 들어오더니 아내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아 난로에 던져버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자, 네 성경이 뭐가 될지” 다음날 아침에 남편은 난로의 재를 치우다가 타다 남은 성경 몇 쪽을 보게 됐습니다. 그중 마태복음 24장 35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 구절을 읽는 순간 알코올 중독자는 정말 깜짝 놀랍니다. 가슴이 확 찔렸어요. 그 사람은 죄책감을 강하게 느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됐습니다. 왜 하필 이 말씀이었을까요?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언젠가 이 세상에서 먼지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내일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말씀 밖에 없습니다. 시편 125:1-2에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세 번째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첫 번째 부르셨을 때 사무엘은 그 자리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큰 소리로 대답하고 엘리에게 뛰어가서 다시 한 번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행동과 두 번째, 세 번째 행동이 다른 것을 보면 사무엘은 자기를 부르는 음성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여전히 그 음성을 사람의 음성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가까이 있는 사람처럼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교제가 막힌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문을 두드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벌어진 틈을 메꾸기 위해 사무엘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미켈란젤로가 1477년부터 1483년까지 6년 동안 그린 <천지창조>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중에 <아담의 창조>가 있는데 이 그림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손가락으로 생기를 불어넣으려고 하고 계십니다. 원래는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는데 동성애자로 오해가 생길까봐 손가락으로 표현을 했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하나님을 근육질의 남성으로 그렸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남성의 몸을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서 여자도, 하나님도, 모두 남성의 근육질의 몸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담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그냥 멍 하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하나님 옆에 있는 여성을 보고 있습니다. 또 손을 하나님께 뻗기는 했지만 몸은 태만하게 뒤로 젖히고 있습니다. 아담의 집게손가락도 아래로 축 쳐져 있습니다. 하나님께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어요. 반면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가가기 위해 몸을 아주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계십니다. 마치 하나님이 슈퍼맨 같습니다. 하나님은 몸을 틀어 인간 쪽으로 향하시고 인간을 바라보며 팔을 쭉 뻗고 집게손가락을 앞으로 적극적으로 내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몸의 모든 부분이 인간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아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뒤로 기대고 있는데 하나님은 앞으로 쑥 나와 계십니다. 하나님께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틈(간극)을 메우려는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릴 수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창조한 인간에게 다가가 함께 하려는 단호한 결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위해 안간힘을 쓰십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과의 간극을 메우시기 위해 끊임없이 선지자를 보내셨고,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고, 나중에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극을 메꿔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으시다면 십자가를 보십시오. 하나님을 보고 싶다면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십자가에 하나님의 애정과 땀과 간절함과 소망과 피와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사람과의 벌어진 틈을 메꾸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이 있습니다.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엘리는 마지막 사사입니다. 사사는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기 전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지도자입니다. 사사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사사기 21:25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마음대로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된 시대라는 뜻입니다. 사사기 19:1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레위 사람은 성직자입니다. 엘리 시대는 성직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첩을 맞이하는 시대였습니다. 영적으로 꽉 막힌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사람의 관심이 하나님께 없던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인간 세상에 문을 두드리신 것입니다. 한 번만 두드리신 것이 아니라 네 번을 두드리셨습니다. 만약 사무엘이 깨닫지 못했다면 하나님은 열 번, 스무 번, 깨달을 때까지 두드리셨을 것입니다.
인간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노크는 멈추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두드리니’가 현재형입니다. 주님이 지금 두드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영국의 화가 윌리엄 홀먼 헌트의 <세상의 빛>이라는 성화가 있습니다. 한 번쯤 이 그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한 번 보여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왼손에 등을 가지고 계시고, 오른손으로는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의 손잡이가 없습니다. 손잡이는 안에만 있습니다. 안에서만 열 수 있는 문입니다. 문 바로 앞까지 꽃과 잡초와 덤불로 뒤덮여 있습니다. 지붕도 나뭇가지로 덮여 있습니다. 집 밖을 오랫동안 정리하거나 청소를 하지 않은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문 밖 세상은 캄캄합니다. 집 안도 어두움으로 가득 찬 것처럼 답답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주변에는 빛이 있습니다. 주님은 등을 들고 계속 문을 두드리시면서 안에서 문을 열어줄 때를 기다리십시다. 주님은 우리를 깨우시기 위해서 문을 두드리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지금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 소리가 들리십니까? 마음의 문을 열면 여러분의 마음 속으로, 여러분의 인생 속으로 주님의 빛이 갑니다. 문을 여십시요. 시편 119:130에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사무엘이 왔을 때 엘리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 깨달았습니다. 8절에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깨닫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삔입니다. 삔은 ‘식별하다, 이해하다, 통찰하다’는 뜻입니다. 엘리는 사무엘이 세 번째 왔을 때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엘리는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없는 시대에 하나님이 인간 세상을 두드리고 계시다는 것을 인지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엘리는 엎드리지 않습니다. 그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냥 닫힌 그대로 있었습니다. 1장에서 한나가 간절하게 기도해서 기도 응답을 받고 사무엘을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나를 통해 엘리의 마음을 두드리신 것입니다. 2장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 엘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 다시 사무엘을 통해 엘리의 마음을 두드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엘리의 마음을 두드리신 거예요. 그런데 엘리는 사무엘에게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데 다시 누우라고 가르칩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라고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자기도 성전으로 가서 엎드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엘리는 하나님이 계속 두드리시는데 문을 열지도 않았고 일어나지 않고 다시 누웠습니다.
우리나라 대형 화물선 한 척이 태평양을 지나서 미국 서부의 항구에 들렀다가 파나마 운하를 통과해 멕시코 만 안으로 들어와 뉴욕 항까지 항해를 하던 중 생긴 일입니다. 배의 선장은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는데 10시간이 넘게 걸려 선장은 매우 피곤했습니다. 파나마 운하를 통과한 다음 멕시코 만에서는 해로를 따라서만 가면 됩니다.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단 쿠바 영해만 침공하지 않으면 안전한 항해입니다. 선장은 조타수에게 운항을 맡기고 선장실에 들어가 잠을 청하였습니다. 잠이 들려는 순간 누가 선장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선장은 “누구야? 들어와.”라고 했는데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나가서 문을 여니까 복도에는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합니다. 다시 들어가 잠을 청하려는데 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나가서 눈을 열어보니까 복도는 역시 적막합니다. 잠이 들만 하면 누가 문을 두드리고, 나가보면 아무도 없고 하자 선장은 화가 났습니다. 누군가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놈을 잡아 혼을 내려고 작정했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발소리를 죽여 살그머니 다가가 문을 열었습니다. 역시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선장은 선장실 바로 위 계단을 올라가 사령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조타수가 쓰려져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선장은 너무 놀라 서둘러서 항로를 확인해보니 배가 이미 쿠바 영해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언제 쿠바 군함에 나포될지 모르는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선장은 즉시 비상벨을 눌러서 선원들을 모두 깨우고 하나님께서 전심으로 기도를 올리며 항로를 바꾸고 쿠바 영해에서 탈출했습니다. 안전한 지대로 배가 들어간 다음에 선원을 다 불러서 선장실 문들 두드려 자기의 잠을 깨운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나를 깨우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섬뜩했습니다(김성완 목사님). 만약 노크 소리에 선장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쿠바 해군에 나포되든지 배가 제 멋대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을 받고 침몰했을 수도 있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노크 소리를 깨달았지만 다시 누웠습니다. 만약 그때 엘리가 마음 문을 열었다면 그의 두 아들도 죽지 않았고, 자신도 저주도 받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다시 누웠다가 하나님께서 또 부르시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9절,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대답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이 자세는 마음의 방향을 오직 하나님께로 향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시간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온전히 향하십시오. 예배는 세상을 향한 생각의 창을 모두 닫고, 하나님께로만 마음의 창을 열고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세상의 문을 모두 닫고 오직 하나님께로만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엘리의 가르침대로 마음을 오직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제가 기도하려고 하면 오지도 않던 메시지가 옵니다. 전화가 울려서 보면 광고 전화예요. 그래서 기도할 때는 무음으로 하기도 하고, 전원을 끄기도 합니다. 밤에 기도하러 교회에 올 때는 핸드폰을 집에 놓고 옵니다. 기도는 마음을 오직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세상을 향한 여러분의 마음의 창을 다 닫고, 오로지 하나님께로 향해보십시오.
‘말씀하옵소서’는 강조형으로 “제발 말씀해주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 순간이 성경의 역사가 바뀌는 기점입니다. 이 기점으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뀝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인생 역사가 바뀝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발 저에게 말씀해주시옵소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야 내 인생이 바뀝니다. 밭에 씨가 뿌려지듯, 말씀이 마음에 뿌려져야 합니다. 비가 들판에 뿌려지듯, 말씀이 인생의 들판에 뿌려져야 합니다. 빛이 세상에 뿌려지듯, 말씀의 빛이 내 영혼에 뿌려져야 합니다. 말씀이 뿌려져야 나 자신도 살고, 내 가정도 살고, 우리 교회도 삽니다. 말씀이 제 인생에, 여러분의 인생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충만하게 뿌려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사무엘처럼 기도합시다. “주님! 제발 저에게, 우리 가정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말씀해주시옵소서.”
“주님! 제발 저에게 말씀해주시옵소서.” 저는 이 기도를 이렇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인생 사는 법을 가르쳐주시옵소서.”
미국의 다이빙 선수였던 조니 에릭슨 타다는 승마, 수영 등의 스포츠를 즐기며 행복하게 살아가던 신체 건강한 여성이었습니다. 1967년 7월 30일, 당시 17살이던 조니는 체사피크만에서 다이빙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수심이 아주 얕은 곳이었습니다. 조니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른 체 힘차게 다이빙을 했습니다. 순간 머리가 바위에 부딪치면서 목뼈가 부러지고 맙니다. 이 사고로 어깨 뼈 이하의 신체를 전혀 쓸 수 없는 심각한 장애를 입게 되었습니다. 밥도 먹여 주어야 하고, 몸도 씻겨 주어야 하며, 대소변도 누군가가 치워 주어야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비참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이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한 좌절과 분노에 휩싸여 여러 번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문병 온 사람이 조니의 마음을 북돋아주기 위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풍성한 인생이라고? 나의 남은 인생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데 충만한 인생이라고?”라고 외치며 하나님께 반항했고, 하나님의 처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하나님에 대해서 냉소적이었습니다. 그렇게 극심한 좌절 속에서 수없이 죽고 싶었지만 스스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그녀가 마지막으로 드린 기도가 “하나님, 제가 죽을 수 없다면 ‘제발’ 사는 법을 가르쳐주세요.”였습니다. 그 기도를 드린 후부터 그녀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녀는 대중 연설가와 저술가, 구족화가가 됩니다. 그리고 ‘조니와 친구들’(Joni and Friends)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수많은 장애인에게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죽기만 바랄 때는 비참한 삶을 살았는데 기도가 달라지니까 삶도 달라졌습니다. 2010년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지만 회복됐습니다. 그 약한 몸으로 암을 이겨낸 것입니다. 기쁨도 잠시 3년 후에 유방암이 재발합니다. 두 번째 암도 주님의 은혜로 이겨냅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코로나에 감염되어 또 한 번 죽음의 고비를 겪기도 했습니다. 2023년 작년에는 이중 폐렴에 걸렸습니다. 고난이 쉬지 않아요. 인생이 이런 것 같습니다. 그녀는 수 없이 찾아오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며 다시금 일어나는 삶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조니는 계속해서 찾아오는 인생의 고통과 절망의 순간에서 어떻게 회복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그의 기도 속에 담겨 있다고 믿어집니다. “하나님, 제가 죽을 수 없다면 ‘제발’ 사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우리도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 제발 제게 사는 법을 말씀해주세요.” “주님! 제발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듣겠나이다’라는 말은 ‘저는 듣는 사람입니다’,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당신의 말씀에 복종 하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겸손한 마음입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는 우리를 낮추어야 합니다. <십계>라는 영화를 보면 모세가 떨기나무 사이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발에서 신발을 벗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습니다. 사무엘도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18세기 영국 화가 조수아 레이놀스(1723~1792)의 <어린 사무엘>라는 그림에 보면 어린 사무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신도들에게 교황권과 교회의 권위에 맹신을 요구했습니다. 중세가 무너지고 자유와 이성의 시대가 되면서 성경해석에 비평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성경 해석학에 좋은 영향을 준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비평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경은 듣는 것입니다. 말씀은 겸손이라는 밭에서 아주 잘 자랍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았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으로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하나님은 말씀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탄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지만 사탄은 먹어도 안 죽는다고 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그 대신 사탄의 말을 들었습니다. 에덴 이후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말을 듣느냐 하는 것이 늘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결국 다른 누가 말하든지 선택은 언제나 같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아니면 사탄의 말을 듣느냐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그들의 귀에 너무나 많은 다른 말들이 맴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주님! 제게 말씀해주옵소서. 제가 듣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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