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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하나님의 궤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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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무엘상 3:4~8
주일오전예배 | 2024-06-16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몇 주 전 아침에 어디를 가려고 차에 탔는데 벤츠 한 대가 제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 앞에 서더니 70정도 되어 보이는 부부가 내렸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친구처럼 보이는 부부가 짐을 가지고 와서 그 차에 실었습니다. 함께 어디를 놀러가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 차가 섰을 때 우리 라인의 5층에 사는 3남매가 엄마와 함께 차에 탔습니다. 엄마가 아이들을 학교 태워다주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 차는 제 차 건너편에 주차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벤츠가 제 차도 막고, 그 차도 막고 있는 거예요. 아이들 엄마가 차를 빼달라고 경적을 울렸어요. 하지만 네 사람은 별로 신경쓰지 않고 짐을 실었습니다. 아이들 엄마가 한 번 더 빵 했습니다. 그러자 벤츠 운전자가 혼잣말로 욕을 하는 거예요. 옆에서는 부인이 이 아파트는 왜 이렇게 빵빵 대냐며 짜증을 내요. 그 차가 주차장 입구에 서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욕을 하며 화를 내는 거예요. 그 시간은 사람들이 출근하고, 학교 가는 분주한 시간이에요. 그런데 앞을 막고 있는데 미안한지도 몰라요. 기다리다가 저도 빵 했습니다. 역시 들은 척을 안 해요. 한 번 더 빵 했더니 혼잣말로 또 욕을 해요. 안하무인이에요. 여러분! 이런 어른은 되지 맙시다. 얼마 전에 식당에 밥 먹으러 갔는데 제가 앉은 테이블 건너편에 부부처럼 보이는 어른들이 앉아계세요. 여자 분이 제 쪽을 향해 앉아 있었는데 70정도 돼 보여요. 얼굴이 환하고 깨끗해요. 그 분이 서빙하는 사람이 오니까 지갑을 열더니 10,000원짜리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살짝 올려놓더니 아줌마 쪽으로 조심스럽게 밀어요. 받는 사람이 무안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주는 거예요. 그 분이 얼마나 멋있어 보이는지. 제가 저와 같이 밥을 먹는 사람에게 그 사람 이야기를 하며 저 나이에도 사람이 저렇게 멋이 있을 수가 있냐?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이왕이면 이런 어른이 됩시다. <어쩌다 어른>이라는 TV 프로가 있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토크쇼입니다. 저는 어쩌다가 어른이 됐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어른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잘 늙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여러분! 우리 훌륭한 노인이 됩시다. 술은 꼭 끊으세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술을 먹으면 사람이 진상이 돼요. 믿는 사람은 내가 진상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항상 조심해야 해요.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엘리의 나이가 70 정도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남자는 18세 전에 50% 이상이 죽었다고 합니다. 엘리는 예수님 보다 약 1100년 전 사람입니다. 엘리는 98세에 죽었습니다. 정말 오래 살았습니다. 정말 그 시대에 큰 어른이었습니다. 그러면 엘리는 어떤 어른이었을까요? 사무엘이 한참 자고 있을 깊은 밤에 세 번이나 와서 잠을 깨웠는데도 엘리는 짜증을 내거나 꾸중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무엘을 내 아들아!”(6)라고 부르며 부드럽게 말을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엘리는 성품이 온유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었던 같습니다. 엘리는 좋은 어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영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엘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제사장이었다면 그 시대에 말씀이 희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소년 사무엘을 선지자로 부르시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궤가 있는 곳에서 자고 있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3-4절에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있는 곳은 지성소입니다. 성경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지성소에 있는 법궤 위의 시은좌(은혜를 베푸신 자리, 속죄소)에서 부르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차례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사무엘은 지성소가 아니라 성소 안의 법궤와 가까운 곳에서 잠을 잤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성소에 있는 분향단을 지성소에 있는 것처럼 묘사했습니다(9:3-4). 분향단이 지성소에 가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무엘은 성소 중에서 지성소의 법궤와 가까운 위치에서 잤을 것입니다. 때로는 사무엘은 늙은 엘리를 수종들기 위해 성막 주변에 있는 레위인 숙소에서 자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사무엘은 나이 많은 대제사장을 수종들뿐만 아니라 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그의 모든 관심을 기울이며, 때로는 성소 안의 법궤 옆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이런 책임감이 사무엘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사무엘에게 들린 때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궤 옆에서 자고 있을 때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한번 들어보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한 번 보고 싶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고 세상 다른 일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까요? 그런 사람에게 주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실까요? 마귀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면 사무엘처럼 해야 합니다.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께 온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세상의 다른 일에 집중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겠습니까? 엘리는 제사장이었고, 하나님의 전과 가까운 곳에서 자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하나님의 일이 뒷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서 있는 위치와 자리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내 신앙의 자리, 합당한 믿음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면 사무엘의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보고 싶다면 여호와의 궤 옆에서 불편한 잠을 잤던 사무엘처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시간이 아주 깊은 밤이나 새벽이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아주 깊은 밤에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그 자리에서 즉시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큰 소리로 대답하고,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한 번 더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마치 군대에서 사병이 부대장이 호출했을 때 그 자리에서 복창하며 달려가듯이 사무엘은 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외치고 달려갔습니다. 꼭 군대 사병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무엘은 책임감이 아주 강하고 매우 열정적이며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에 대해 좀 더 책임감 있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좀 더 주님의 일에 열정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 됐습니다. 먹고 놀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라면 열정적인데 하나님을 위해서는 열정도 책임감도 없습니다. 주님의 일에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무엘은 나이가 많은 엘리의 시중을 들기 위해 엘리의 침소 가까운 곳에서 잠을 자면서 한 밤 중이든 새벽이든 엘리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사람에게로 달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사람의 음성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람의 부름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르십니다. 직장 문제, 집 문제, 물질 문제, 자녀 문제, 건강 문제 등등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건강 문제로 부르시면 병원도 가야겠지만 하나님께도 나아가야 합니다. 물질 문제가 생기면 은행에도 가야하지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람의 부름으로 혼돈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달려가야 할 때 사람에게 달려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달려가십시오.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데 사람에게 달려가 매달리지 맙시다.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막 주면에는 여러 명의 제사장과 많은 레위인들이 자고 있습니다. 심지어 잠을 자지 않고 경계를 서는 레위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은 오직 사무엘에게만 들렸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상황을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2:9에는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9:7에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22:9에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길에서 동행하던 사람들이 소리를 듣기는 했는데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음성이 천둥치는 소리나 바람 부는 소리처럼 들린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은 오직 바울에게만 들렸습니다. 성막에 레위인들이 많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오직 사무엘에게만 들려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시대에 하늘의 문이 사무엘에게 열려졌습니다. 이 예배 중에 성령께서 항상 임재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그 임재하심을 깨닫고, 성령의 음성이 듣는데 어떤 분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강력한 성령의 임재하심이 느껴지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이름을 두 번씩 부르신 경우가 성경에 일곱 차례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경우가 모세, 사무엘, 사울입니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모세야! 모세야!”라고 부르셨고,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이심을 모세와 사울에게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경우는 자신이 누구이신지 밝히지를 않으시고 그냥 이름만을 부르셨습니다. 아마도 그 음성이 엘리의 음성과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확신을 가지고 엘리에게 달려가서 당신이 부르셨기에 내가 왔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가 사무엘을 부르듯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엘리가 사무엘을 부르는 목소리의 톤과 비슷하게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 세 차례나 이름만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모르고 사람에게 달려가고 있음에도 하나님은 같은 방식으로 계속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은 엘리 제사장을 깨우기 위한 것입니다. 2장에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 엘리 가문의 저주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엘리는 저주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를 하거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사무엘을 같은 방식으로 부르신 것은 엘리를 깨우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사무엘에게 세 번째 임했을 때 엘리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 깨달았습니다. 8절에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라고 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부르시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엘리가 이렇게 사무엘에게 가르쳐줄 수 있었던 것은 엘리가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엘리는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 사사이었고, 대제사장이었으며, 존귀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뒷전에 누워만 있습니다. 선지자를 보내도 듣지 않는 마음이 돌처럼 굳어버린 신앙인이 됐습니다. 영적 눈이 어두워진 제사장이 됐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엘리를 깨우시기 위해 사무엘을 계속 같은 방식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주변에 은혜 받고 변화되는 사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는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얼마 전에 전도 세미나를 갔습니다. 강사 목사님이 새신자가 교회를 계속 나오게 된 이유가 목사님이 설교를 잘 해서도 아니고, 교회 시설이 좋아서도 아니고, 옆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너무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를 해서라고 했습니다. 옆에 있는 분이 얼마나 뜨겁게 찬양을 하는지 아 뭔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교회를 계속 나오게 됐다고 합니다. 옆에서 누군가 뜨겁게 찬양하면 마음이 뜨겁지 않습니까? 엘리는 98세에 죽었습니다. 사무엘이 부름받았을 때 엘리는 70세 정도였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주어진 후 약 28년을 더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약 30년 후에 엘리 가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30여년 동안 엘리가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깨어나십시오.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시기가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않은 때라고 했습니다. 7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여기 알다는 말이 야다입니다. 야다는 부부가 같이 살면서 서로를 깊이 알아가는 앎입니다. 이건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적인 앎이며 전인격적인 앎입니다. 교실에서 배우는 딱딱한 지식이 아니라 삶에서 경험하는 친근한 앎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에 대해 배워서 지식적으로는 알았지만 하나님을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무엘이 첫 번째 음성을 들었을 때는 그 자리에서 즉시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큰 소리로) 대답하고 엘리에게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음성이 들렸을 때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대답을 있는 자리에서 하지 않았고, 달려가지도 않았습니다. 가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알 수 없어서 엘리에게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음성인지 사람의 음성인지 식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매일 사람에게만 매달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경험하면 삶이 바뀝니다. 나를 덮고 있는 어둠이 물러갑니다. 나를 억누르고, 나를 속박하는 세력이 다 물러갑니다. 자유를 얻습니다. 말씀을 경험하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말씀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말씀이 익숙해져야 합니다. 히브리어로 손이 야드입니다. 야다와 야드는 어원이 같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손과 안다는 말의 어원이 같습니다. 손으로 어떤 물건을 자주 만지게 되면 익숙해져서 그 물건에 대해 잘 알게 됩니다. 이건 들어서 아는 게 아니고, 경험해서 아는 것입니다. 야구 선수는 자기의 손 때가 묻은 자기의 글러브와 배트가 있습니다. 테니스 선수는 자기의 땀이 손잡이에 배어 있는 자기의 라켓이 있습니다. 어떻게 말씀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자꾸 손으로도 만지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생각해서 말씀이 익숙해져야 합니다. 성경에 줄도 치고, 메모도 하고, 색도 칠 하세요. 성경이 익숙해야 성경이 우리 마음 속으로 들어옵니다. 바울은 우리를 그 분이 만드신 바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10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만드신 바라는 말은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손 때가 묻은 작품이라는 의미입니다(NLT, we are God’s masterpiece).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24년이 됐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에 아버지 주민증과 원동기 면허증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쓰레기에 불과해요. 하지만 제게는 아버지의 손 때가 묻은 기념품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이 만들어 하나님의 손 때가 묻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만드신 작품이니 우리를 얼마나 잘 아시겠습니까? 

시편 139:1~4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야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야다)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야다)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야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호세아 6:6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야다)을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목사에게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들은 지식, 배운 지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교실 지식이 아니라 생활의 지식을 원하십니다. 경험적인 지식, 인격적인 지식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으로 아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조 권사님과 손녀딸이 함께 예배를 참석했습니다. 권사님이 손녀딸의 키를 알까요? 제 생각에는 모르실 것 같아요. 그러면 손녀딸의 혈액형을 알까요?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모른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키도 모르고 혈액형도 모르니까 할머니가 손녀를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너무 잘 아시죠. 권사님은 손녀딸이 두 살 때부터 키웠습니다. 씻기고 먹이고 입혔습니다. 손녀딸에게는 권사님의 손 때가 묻어 있습니다. 키도 모르고 혈액형도 모르지만 권사님은 손녀딸을 너무 잘 압니다. 어떻게 아실까요? 함께 살면서 손녀딸이 어떤 아이인지 알게 됐어요. 이건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서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면서 생활에서 배운 앎입니다. 삶의 지식입니다. 저는 제 아내를 압니다. 그런데 제 아내에 대해서 대학에 가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아내에 대한 연구 논문을 읽은 것이 아닙니다. 아내의 부모님에게 아내에 대해서 어떤 사람인지 배운 것이 아닙니다. 살면서 부딪치면서 알게 된 앎입니다. 경험적인 앎입니다. 인격적인 앎입니다. 저와 아내는 인격과 인격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7:21~23에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배, 기도, 헌신, 봉사, 찬양, 전도, 선교, 귀신쫓음, 병고침 등등의 일들이 주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가 없이 종교적으로만 행해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님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종교의 형태를 띠고 우리 중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단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나오는 주님이어야 합니다.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사건, , 사람, 어려움, 환란 등등과 부딪치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한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찬양하다는 말이 야다입니다. 안다는 말의 야다와 철자가 하나 다릅니다. ‘야다두 손을 높이 들고 감사함으로 경배하다 두 손을 치켜들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찬양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두 손을 들고 찬양할 수 있고 감사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부르는 찬양은 찬양이 아니라 노래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진정한 의미의 찬양을 할 수 없습니다. 삶 속에서 어떤 일을 만나면 내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부릅시다. 주의 이름을 부릅시다. 그러면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을 삶에서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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