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계정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
2 == 2 ok!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는 것은 우리 인식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다고 우리 눈이 모든 것을 다 보는 것은 아닙니다. 가시광선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광선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시광선을 보임광선(visible light)이라고도 합니다. 보통 무지개 색깔이라고 합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에 대한 인식이 나라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어쨌든 적외선은 빨강색 이상의 색을 말하고, 자외선은 보라색 이하의 색을 말합니다. 적외선과 자외선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광선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빨강색은 660nm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볼 수 없습니다. 보라색은 410nm까지만 볼 수 있고, 그 이하는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 볼 수 있는 색의 범위는 410~660nm이고, 그 이상과 그 이하는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자료에 보니까 자외선을 380nm 이하의 짧은 파장이라고 했고, 적외선은 780nm 이상의 긴 파장이라고 했습니다. 가시광선을 380~780nm로 본 것입니다. 제가 이 분야에 전문가가 아니라 조금씩 자료가 다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세상에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색이 훨씬 더 많습니다.
밤에 나가서 북쪽 하늘을 바라보면 북두칠성이 보입니다. 그런데 북두칠성이 지금은 없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북두칠성은 지구로부터 800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빛은 800년 전에 북두칠성에서 떠난 빛입니다. 우리는 800년 전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북두칠성은 이미 사라진지 모릅니다. 눈으로는 현재 북두칠성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늘의 별들이 어떤 것은 1000 광년, 어떤 것은 2000 광년 거리에 있습니다. 1000년 전, 2000년 전의 빛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하늘의 별 중에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직 빛이 지구에 도달하지 않은 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중에 실재로는 없는 것이 있을 수 있고, 우리가 보지는 못하지만 있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물질세계가 이 정도라면 영적인 세계는 어떨까요? 시이불견(視而不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면 본다고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청이불문(聽而不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들은 청(聽)자는 귀 이(耳) 자에 임금 왕(王) 자에 큰 덕(德)(은혜)의 조합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왕(하나님)께 듣는다는 의미입니다. 청이불문은 하나님께 듣는 것이 아니면 진정한 들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 55:9에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이 가시는 길
오늘 말씀에는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과 그치지 않는 열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절에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고 했습니다.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여기에 쓰인 ‘떠나사’와 ‘가시니’라는 두 단어는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이 어떤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4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떠나시다’는 말이 32번(마-15, 막-7, 눅-4, 요-6) 나옵니다. ‘가시다’라는 말도 32번(마-7, 막10, 눅6, 요10) 나옵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단어들도 자주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떠나다’는 말을 종종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한 곳에서 안주하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시곤 하셨습니다. 무리들은 이런 예수님을 자기들 곁에 붙잡아 두고 싶어 했습니다. 누가복음 4: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라고 했습니다. 만류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카테코입니다. 카테고는 ‘제지하다, 만류하다, 굳게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크게 실랑이를 벌이며 떠나시지 못하도록 아주 심하게 붙잡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이 한 일은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곁에 두고 싶어하는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곁에 있으려고 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입니다. 하지만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고향이라고 하지 않고 자라신 곳이라고 했습니다(눅4:26). 예수님께서 사역 중에 여러 번 고향 나사렛을 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향 방문은 그 중 마지막 방문입니다.
사역 초기에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누가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도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설교 주제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 과부에게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3년 6개월 동안의 기근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그 중에 아무도 깨끗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사에게 나병을 유일하게 고침받은 사람은 이방인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설교를 듣고 유대인들이 화가 나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4:28-29에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라고 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동네 밖에 있는 낭떠러지기(나사렛 남쪽)로 끌고 가서 거기서 예수님을 밀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시던 길을 계속 가셨습니다. 누가는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는 기사의 끝을 이렇게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4: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하시는 길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가셨다'는 의미입니다. 당당하게 당신의 길을 가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실망, 낙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열정도 식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던 길을 중단없이 계속 가셨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했던 고향 나사렛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큰 교회입니다. 장로 안수집사 권사를 뽑는 투표가 있었습니다. 투표해서 2/3표를 얻어야 됩니다. 그런데 투표가 큰 교회에서는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누가 누군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대상자를 먼저 선정했습니다. 그런 다음 가부를 묻는 투표를 했습니다. 투표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권사 명단 선정에서 빠진 사람의 자녀들이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자기들의 어머니가 권사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예배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와 목양실로 가시는데 목사님을 납치해 교회의 빈 방으로 목사님을 끌고 갔어요. 거기서 그 자녀들이 목사님을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왜 어머님이 빠졌냐고 따졌습니다. 별의별 말을 다했습니다. 협박을 당했습니다. 목사님이 너무 낙심이 돼서 목회를 못하시겠더랍니다. 그래서 목회를 그만두시려고 하셨답니다. 힘이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시겠더랍니다. 마음이 꺾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힘을 내서 목회를 계속하셨습니다. 그래서 큰 교회를 이루셨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일로 우리의 마음이 꺾입니다. 마음이 꺾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힘을 내십시오. 계속 가던 길을 가십시오. 중단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길은 마귀의 방해가 계속 있습니다. 가던 길을 계속 가십시오. 믿음의 길은 우리가 결코 꺾이거나 포기해서는 안 되는 길입니다. 믿음의 길, 끝까지 가십시오. 손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시던 길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그 고향으로 다시 가시고 계십니다. 다시 들어가셔도 배척할 것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다시 고향으로 들어가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5절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예수님은 고향에서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배척하고 모독했습니다. 심지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완악한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영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들을 향해 가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환영하는 곳으로 가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향해 가셨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와 성도는 세상에 있어야 하고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바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세상으로 갑니다. 매일 우리끼리만 예배하고 우리끼리만 찬송하고 기도한다면 이미 교회로서 기능이 상실된 것이 아닐까요? 영어에서 ‘열정’이라는 말이 passion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고통받다’는 뜻의 라틴어 patere에서 왔습니다. 열정(passion)이라는 말에는 ‘고통’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열정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인생은 열정대로 되지 않습니다. 열정을 막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열정이 꺼지기도 합니다. 끝까지 열정을 유지하려면 고통을 극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뜨거우셨는지 그 고난을 감수하시면서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뜨거운 사랑과 열정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마가복음 1:38에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2. 은혜를 놓친 이유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변함없이 회당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치시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고향 사람들이 아주 많이 놀랍니다. 2절,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지혜라는 말에 헬라어 ‘소피아’(σοφία)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소피아는 타고난 선천적인 지혜입니다. 거기에 풍부한 경험이 합쳐진 지혜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혜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권능은 ‘하나님의 힘, 기적적인 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간의 내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인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는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인정은 하지만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참 아이러니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출신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3절 a)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아주 폄하하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죽었어도 자식은 보통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꽤 됐습니다. 어머님이 시골에 혼자 계십니다. 어머니께 가면 마을 어른들을 길에서 만납니다. 어머님이 인사를 시켜요. 그러면 어머니가 옆에 계신데도 아버지 이름을 대며 “서 씨 아들이구먼”이라고 합니다. 아마 그분들은 어머니 이름은 모를 거예요.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24년이 됐는데 아무도 저를 어머니 이름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제가 부목사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떤 여자 청년이 결혼한다고 하며 청첩장을 가져왔어요. 그런데 아버지 이름이 있는 거예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청첩장을 보면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하고 한참을 봤습니다. 그랬더니 이 청년이 아버지는 계시지 않지만 결혼할 때 청첩장에 아버지 이름을 꼭 넣고 싶었다는 거예요. 그 청년의 생각이 너무 깊은 거예요. 이 여자 청년의 대답이 너무 가슴 뭉클했습니다.
지금은 이제 이런 전통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자식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돌아가셨어도 자식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엄마의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조롱하는 의도입니다.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버지 없이 태어난 사람 아니냐는 경멸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생아가 아니냐?’는 비꼼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이셨습니다. 목수라는 말은 헬라어로 텍톤(τέκτων)입니다. 텍톤은 딱딱한 재료(나무, 돌, 금속 등)를 다루는 기술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말로 굳이 표현한다면 ‘유능한 장인’ 정도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나무, 돌, 금속 같은 딱딱한 재료를 다루는 유능한 장인이었습니다. 유대 사회는 명예를 중시했습니다. 자기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최고의 명예이었습니다. 참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목수 일을 하셨으니 얼마나 그 일을 잘 하셨겠습니까? 얼마나 진실하게 일을 하셨을까요? 무슨 일을 맡으시든지 조금도 대충하는 법이 없이 아주 성심껏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일을 맡기면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수로서 최고의 영예로운 사람으로 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을 넘었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것은 율법사나 서기관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수가 율법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것도 율법사 보다 더 잘 가르쳤습니다. 목수가 아니냐는 말은 ‘목수가 왜 율법과 서기관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사생아에 목수가 왜 율법을 가르치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가르치고 능력이 있어도 출신 때문에 싫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의 그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인정하는데 당신의 출신 때문에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고향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편견입니다. 그들은 편견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편견과 아집 때문에 영원한 삶을 잃었습니다. 편견 때문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복음을 놓쳤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남녀관계에 의해서 잉태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고 예수님을 모독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으로 눈앞에 있는 구원의 길을 놓쳤습니다. 여러분!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세계는 아주 조금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아주 부분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세계는 어떻겠습니까.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내 지식. 이성 경험을 버리십시오. 편견과 오만을 버리십시오. 편견으로 하나님의 참 생명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편견으로 영원한 삶을 놓치지 마십시오.
둘째, 예수님이 아주 가까이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30년 가까운 시간을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을까요? 틀림없이 아주 평범한 한 인간으로 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남이셨습니다. 아버지 요셉을 이어 목수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마13:55). 법적 아버지였던 요셉이 일찍 죽었다면 어머니와 동생들을 책임지는 가장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수 일을 하시면서 이곳저곳을 많이 다니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집을 지어주고 수리해주었을 것입니다. 일을 하며 함께 밥을 먹고, 담소를 나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아주 가까이 계셨습니다. 형제들의 이름을 사람들이 모두 나열할 만큼 예수님은 사람들 가까이 계셨습니다.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3절 b)
저는 가구 수가 열 몇 채 밖에 안 되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이 정도 되면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거의 다 압니다. 누구 동생, 누구 형, 누구 언니... 그런데 건너 마을만 가도 잘 모릅니다. 자기와 관계 된 사람만 압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의 형제 이름, 가족 수를 거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사람들 가까이에 계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동시에 참 사람이셨습니다. 반은 사람이고 반은 신이 아닙니다. 기괴한 인간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배고프고 아프고 슬프고 피곤하고 괴롭고 춥고 배고프고 …. 사람이 겪는 모든 감정을 다 겪으시면 사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을까요? 우리의 연약함을 예수님의 몸으로 체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조롱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연약함을 아파하십니다. 우리의 슬픔을 통감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와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오만, 편견, 이기심, 정욕 등 인간의 악함이 전혀 없으신 참 사람이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이 세상을 사셨다면 얼마나 진실하게 사셨을까요? 얼마나 사람답게 사셨을까요? 그 삶이 얼마나 고귀했을까요? 아주 좋은 사람이 내 직장이나 내 근처에 있다면 정말 좋은 일이 아닐까요? 친구, 이웃, 직장 동료, 아내, 남편, 자녀 등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믿는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존 라일 감독은 나사렛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땅 위에서는 나사렛만큼 특권을 가진 곳이 없었다. 삼십 년 동안 하나님의 아들이 이 도시에서 거주하셨고 그 거리를 이리저리 다니셨다. 그는 흠 없이 온전하게 사시면서 그곳의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아무런 효과가 없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들은 가까이에 있는 놀라운 은혜를 놓쳐버렸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기들과 함께 먹고 함께 마시며 함께 생활을 하던 평범한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늘 가까이에서 자기들처럼 너무나 인간적으로 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권능을 행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편견이 가지고 있는 이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권능인줄은 알겠어요. 그런데 그냥 싫어요.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 편견의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전에 알던 집사님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미얀마에 단기 선교를 다녀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교회가 너무 흔해서 교회가 귀한지 모른다는 거예요. 미얀마는 생활수준이 우리나라 1970년대 정도라는 거예요. 복음을 전하니까 사람들이 그냥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기도해준다고 하면 손을 꼭 잡는다고 합니다. 기도가 끝나면 손을 잡고 너무 고마워한다는 거예요. 지금도 선교지에 가면 예수님 시대와 같은 기적이 막 일어납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다. 병자가 고침을 받습니다. 믿어지지 않으시죠? 동영상을 보면서 제가 갖는 의문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저런 기적을 체험할 수 없을까? 신학자들은 복음을 전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전파 된 이후에는 말씀으로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에 기적이 안 일어난다는 거예요. 맞는 말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똑같습니다. 선교지에서나 여기서나 믿는 하나님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들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충만하게 맛볼 수 없을까요? 교회가 너무 가깝고 너무 많고 그래서 귀한지 모르는 편견이 아닐까요? 교회가 많습니다.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귀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아닐까요?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따르다’는 말의 헬라어 문자적인 의미는 ‘함께 같은 길에 있다’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길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과 다른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3년 공생애 동안 예수님의 기적을 눈으로 보며 살았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는 그 기적을 일으키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길에 섭시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갑시다. 그리고 오늘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며 삽시다. 믿음으로 삽시다. 영원한 삶을 바라보며 삽시다.
이전글 |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등불 |
---|---|
다음글 | 가마솥의 노래 |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