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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에게 가장 치욕적인 날이 있다면 언제일까요?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것을 공포한 1910년 8월 29일일 것입니다. 이 날은 500년 조선왕조가 멸망한 날입니다. 이를 일본은 ‘한일합병’이라 부르고, 우리는 경술년에 치욕적으로 나라를 빼앗겼다고 해서 ‘경술국치’라고 부릅니다. 이 날은 우리 민족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날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잊을 수 없는 날이 있습니다. 그날은 BC 588년 1월 15일입니다. 1절에 “아홉째 해 열째 달 열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이 바벨론에 끌려온지 9년 10월 10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이때가 BC 588년 1월 15일입니다. 이때 망한 유다 민족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2534년 동안 나라 없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이 날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세 번째로 포위한 날입니다. 이날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18개월 후인 BC 586년 7월에 성벽이 완전히 무너지고 유다는 완전히 망했습니다. 지구상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없어진 날입니다. 2절, “인자야 너는 날짜 곧 오늘의 이름을 기록하라 바벨론 왕이 오늘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느니라” 오늘의 이름을 기록하라. 오늘의 이름. 이날의 이름을 뭐라고 지어야 할까요? ‘국치일’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스라엘 나라의 ‘기일’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록하다는 말이 끝이 날카로운 도구(철필)로 돌이나 토판 등에 새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날의 일을 철필로 기록하여 이 수치를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지 기록해 후대에 전하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교훈을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천연적인 요새에 건축된 성입니다. 예루살렘이 얼마나 견고한 성이었는지 여호수아가 정복하지 못한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지 400년 만에 다윗이 정복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요새 중의 요새입니다. 예루살렘이 왜 망했을까요? 힘이 없어서 일까요? 돈이 없어서 일까요? 아닙니다. 죄 때문입니다. 이것을 기록해 영원한 교훈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헤르츨 언덕에 홀로코스트(Holocaust)기념관이 있습니다. 홀로코스트(Holocaust, 1933-1945)는 나치 독일 정권이 동맹국들과 협력자들과 함께 600만 유럽계 유대인들을 제도적으로 탄압하고 조직적으로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입니다. 이 기념관 이름이 “야드 바셈”입니다. 히브리어 야드는 기억이라는 뜻이고, 바는 그리고, 셈은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기억과 이름>이라는 기념관입니다. 이사야 56:5에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야드 바쉠)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야드 바셈은 나치에 학살된 600만의 유대인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박물관 맨 마지막 방에는 220만 페이지에 달하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 원통형의 방 전체를 둘러 꽂혀 있으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들을 위한 자리도 남아있습니다. 이 기념관에 이렇게 써져 있습니다. <망각은 우리를 노예로 이끌고 기억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 건물 정면에는 높이 30미터의 원기둥이 서있고, 히브리어로 “잊지 마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유태인이 잊지 않으려는 것은 히틀러의 만행입니다. 그런데 정말 유태인들이 정말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히틀러의 학살과 아우슈비츠의 참혹함이 아니라 죄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흉악범인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했습니다. 왜 유태인 600만 명이 학살 됐을까요? 오직 하나 예수 이름을 부인한 죄입니다. 유대인이 왜 역사 속에서 그렇게 학대를 당했을까요? 죄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에 가시와 엉겅퀴가 들어오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 죄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 한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구한 시간이 흐르고, 이 세상이 시시각각 바뀌고, 사람 사는 모습이 다 달라도 이것 한 가지는 결코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불행과 고통은 죄 때입니다. 죄를 잊지 마십시오.
에스겔이 이날을 또 잊을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이 날에 에스겔의 아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16~18절에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라고 했습니다. 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막게파입니다. 막게파는 전쟁터에서 무기로 상대방을 쳐서 죽이거나 큰 역병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의미입니다. 심한 재앙이나 역병으로 죽는다는 말입니다. 아주 고통스럽게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셨으면 가족을 건강하게 해주시고, 사고 당하지 않게 해주시고, 병에 걸리지 않게 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멀쩡한 아내를 아주 심하게 쳐서 참혹하게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너무 황당한 일이 아닌가요? 더 황당한 일은 아내가 죽어도 울지 말라는 것입니다. 슬퍼하지도 말고, 머리를 풀지 말고, 수건으로 머리를 묶고, 장례 음식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죽은 것보다 더 슬픈 일이 있을까요? 그런데 울지도 말고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징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가족이고, 아내이며, 애인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장입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의 가족의 멸망이고, 하나님의 아내의 죽음이며,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 끝났는데 에스겔이 아내 때문에 울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교회의 멸망은 예수님의 신부가 죽은 것입니다. 교회는 부흥해야 합니다. 우리 등대교회와 민족의 교회와 세계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에베소서 2:19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해체는 하나님의 가족의 해체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몸입니다. 에베소서 5:30에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무너짐은 그리스도의 몸의 무너짐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고, 하나님의 신부이고, 하나님의 몸인 예루살렘이 멸망했는데 이 사건 앞에서 에스겔이 아내 때문에 울 수 있겠습니까?
지난 주간에 아내가 미용실에서 갔는데 미용실 원장님의 친척이 다니는 교회 성도 세 명이 새벽기도 오다가 사고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안타까워하는 아내를 보고 제가 “얼마나 영광이에요. 놀러가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교회에 기도하러 가다가 죽은 건데 그것보다 더 영광이 어디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기도하다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아는 권사님 한 분이 교회 큰 행사를 치루기 위해 교회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해서 손님들에게 식사 대접을 했습니다. 예배시간이 돼서 봉사자들이 다 예배실로 올라가고 혼자 뒷정리하다가 식당에서 미끄러져 뒤로 벌러덩 넘어졌어요. 얼마나 아픈지 넘어진 상태에서 한참동안 꼼짝을 못했습니다. 다 예배실에 올라가서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허리가 안 좋아요. 그래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놀다가 다친 것이 아니라 봉사하다가 다쳤으니 영광이 아닙니까? 놀다가 다치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봉사하다가 다치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주님을 위한 상처가 영광이 아닙니까? 십자가의 흔적이 아닙니까? 바울은 그것을 예수님의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 흔적을 자랑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디트리트 본회퍼는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그를 죽음으로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몇 년 전에 어떤 분이 전화를 하더니 당한 어려운 일을 이야기해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 소리를 듣고 싶으신가 보네요.” 어제 어떤 분이 전화해서 큰 병에 걸린 것 같다며 씩씩 거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이 부르시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고통은 하나님의 또 다른 부르심입니다. 질병은 하나님이 내게로 더 가까이 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사고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슬픔이 깊을수록 하나님의 부르심은 큰 것입니다.
예레미아 애가 3장 19~23절에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라고 했습니다. 고통을 마음에 기억했더니 낙심이 됐지만 그것이 오히려 소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은혜와 소망이 아침마다 새로웠다는 것입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청각장애인이 된 후에 영웅교향곡, 운명교향곡, 전원교향곡, 합창교향곡, 피아노 소나타 열정, 발트슈타인 등등의 불후의 명곡을 작곡했습니다. 후대 음악인들은 청신경 마비가 베토벤을 위대한 음악가로 만들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지독한 간질병 환자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간질병자가 많이 나옵니다. 비평가들은 그가 간질병 환자가 아니었다면 19세기를 대표하는 문학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역사상 위대했던 인물 중에 간질병 앓았던 사람이 많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베토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파스칼, 파이코프스키, 미켈란젤로 톨스토이 등등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어린왕자」의 저자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일생동안 대기 발령자로 살았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 절하의 고통이 그를 위대한 작가가 되게 했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고통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질병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원망하지 마세요. 24절에 “이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표징이라는 말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 에스겔의 삶에 그대로 녹아들었다는 뜻입니다.
이 날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족속에게 비유를 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가마를 걸고, 물을 붓고, 양 떼에서 가장 좋은 것 한 마리를 골라, 각을 뜨고, 가장 좋은 고기 덩어리와 좋은 뼈를 가득히 채운 후, 뼈가 무르도록 삶으라는 것입니다. “너는 이 반역하는 족속에게 비유를 베풀어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가마 하나를 걸라 건 후에 물을 붓고 양 떼에서 한 마리를 골라 각을 뜨고 그 넓적다리와 어깨 고기의 모든 좋은 덩이를 그 가운데에 모아 넣으며 고른 뼈를 가득히 담고 그 뼈를 위하여 가마 밑에 나무를 쌓아 넣고 잘 삶되 가마 속의 뼈가 무르도록 삶을지어다” 어떤 학자는 이 말씀이 일을 할 때 부르는 노동요라고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힘을 얻고 믿음의 위안을 얻었습니다. 에스겔은 가마솥에 가장 좋은 고기와 가장 좋은 뼈를 담고 노래를 하면서 삶고 있습니다. 좋은 양 … 좋은 고기 … 좋은 뼈 … 많이 … 가득히. 그런데 이 노래는 역설의 노래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너는 이 반역하는 족속에게 비유를 베풀어 이르기를”이라고 했습니다. 가마솥은 예루살렘이고, 양고기는 예루살렘의 주민들입니다. 그런데 가마솥이 녹이 슬었습니다. 6절에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피를 흘린 성읍, 녹슨 가마 곧 그 속의 녹을 없이하지 아니한 가마여 화 있을진저 제비 뽑을 것도 없이 그 덩이를 하나하나 꺼낼지어다” 녹은 예루살렘의 죄악을 가리킵니다. 가마솥은 구리(놋)로 만들어졌습니다. 구리는 부식이 되지 녹이 슬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녹은 부식을 가리킵니다. 가마가 녹이 슬고 부식이 되면 안에 있는 음식물까지 버리게 됩니다. 제비 뽑을 것도 없이 덩이를 하나하나 꺼내라는 말은 다 더러워졌으니 고를 것 없이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피곤할 때 좋은 음식을 먹으면 피곤이 풀립니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몸이 건강해집니다. 하지만 음식을 잘못 먹으면 병이 생깁니다. 저는 문어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한번은 상한 문어를 먹고 식중독에 걸렸습니다. 밤새도록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다가 너무 아파서 새벽에 병원응급실에 갔습니다. 그때부터 문어를 보면 몸에서 살짝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가마솥에서 나오는 국밥을 먹고 사람들이 병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가마솥은 다른 곳에 있는 가마솥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가마솥입니다. 이 가마솥에 있는 고기는 단순히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가마솥에서 나오는 국밥은 육신만을 만족케 하는 국밥이 아니라 영혼까지 만족시키는 국밥입니다. 가장 좋은 고기와 가장 좋은 뼈로 국물을 낸 최고의 국밥입니다. 재질이 구리입니다. 구리는 잘 녹이 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국밥이 녹물에 오염되어 이 국밥을 먹는 사람들이 병들게 되었습니다. 이 국밥은 단순히 식중독 정도가 아니라 영혼을 병들게 하고 나중에는 죽게 했습니다.
이사야 2:3에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말씀이 나오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예루살렘에서 있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됐습니다. 예루살렘은 사람들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가마솥입니다. 하나님은 남자들에게 1년에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치료하는 가마솥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라는 가마솥이 병이 들어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더 병들게 하고, 더 고통스럽게 하고, 더 죽게 했습니다.
구약의 예루살렘은 신약의 교회입니다. 교회가 예루살렘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가마솥입니다. 교회는 정화시키는 곳입니다. 우리는 가마솥 안에 있는 양고기입니다. 4절에 “양 떼에서 한 마리를 골라”라고 했습니다. 고르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미브하르로 선택하다는 뜻입니다. 가장 좋은 것, 가장 탁월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고른다는 의미입니다. 최고의 것으로 정선했다는 의미입니다. “넓적다리와 어깨 고기의 모든 좋은 덩이”라고 했고, 고른 뼈라고 했으며, 그것을 가득 담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고르고 고른 아주 좋은 양고기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존심을 가지세요. 이 세상 죄에 자신을 함부로 굴리지 마세요. 교회는 영혼을 소독하는 곳입니다. 예배는 영혼을 정화시키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가마솥인 교회가 병이 들면 고기가 더 더러워져 버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내 신앙이 세속주의, 자유주의, 인본주의, 혼합주의 등등에 더러워지지 않았는지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세상에서 더러워진 우리 영혼을 씻고 또 씻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씻고 또 씻고 계속 씻어야 합니다.
일본에 80년 전통의 3대째 운영 중인 유명 식당이 있다고 합니다. 이 식당에 맛이 비법이 60년간 한 번도 씻지 않은 소스 항아리라고 했습니다. 해당 식당은 60년간 씻지 않은 항아리에 새로 만든 소스를 붓고 또 붓는다는 사실을 자랑하듯 홍보했으며, 사장은 “3대째 식당을 운영하며 단 한 번도 항아리를 씻지 않았다. 항아리에 담긴 소스에 꼬치를 찍어 손님들에게 제공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사장은 “옹기 항아리에 담긴 소스는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라며 식당 고유의 비법이라는 식의 발언을 했고, 이를 본 시청자들은 비위생적인 모습에 “법에 걸릴 정도”라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논란이 계속 되자 식당은 결국 60년 만에 항아리를 씻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나가시 소멘 맛집에서는 8월 한 달간 손님 892명이 집단 식중독에 걸렸다고 합니다. 가장 맛있으면 뭐합니까? 아무리 맛있고,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더러워 먹는 사람을 병들게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목사는 가마솥인가를 양고기인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양고기이지만 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양고기입니다. 목사가 녹이 슬면 가마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성경과 기도에 충실해야 합니다.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영혼에 녹이 슬면 안 됩니다. 제가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마음에 녹이 슬지 않았는지 돌아보십시오. 영혼에 녹이 슬지 않았는지 돌아보십시오. 녹이 슬었다면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버리십시오. 수시로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의 녹은 불의입니다. 7절에 “그 피가 그 가운데에 있음이여 피를 땅에 쏟아 티끌이 덮이게 하지 않고 맨 바위 위에 두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맨 바위는 아주 큰 바위 중에 눈에 잘 띄는 꼭대기 부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피는 함부로 다루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동물의 피도 땅에 쏟아지면 흙으로 덮게 했습니다. 피를 노출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공의의 성인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피를 흘려 맨 바위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대놓고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고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했다는 의미입니다. 약한 사람에게 갑질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상처주지 마십시오. 나 때문에 조금이라도 상처 입은 사람이 생기지 않게 하십시오. 만약 나 때문에 상처입은 사람이 있다면 마음 아파하시고 괴로워하시고 사과하십시오. 예루살렘 주민들은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쉽게 흘렸고 그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그냥 그 피를 그대로 두게 해 그들이 그 핏 값을 받게 하셨습니다. 8절, “내가 그 피를 맨 바위 위에 두고 덮이지 아니하게 함은 분노를 나타내어 보응하려 함이로라”
하나님이 가마솥이 녹이 나서 더러워지고 고기까지 오염을 시키자 녹을 제거하기로 하셨습니다. 방법이 무엇일까요? 가마솥을 아주 뜨겁게 달구는 것입니다. 10-11절에 “나무를 많이 쌓고 불을 피워 그 고기를 삶아 녹이고 국물을 조리고 그 뼈를 태우고 가마가 빈 후에는 숯불 위에 놓아 뜨겁게 하며 그 가마의 놋을 달궈서 그 속에 더러운 것을 녹게 하며 녹이 소멸되게 하라” 하나님은 녹을 제거하기 위해 가마솥을 아주 뜨겁게 하셨습니다. 뼈가 타고, 더러운 것이 녹고, 녹이 소멸정도로 뜨겁게 하셨습니다. 뜨겁게 한다는 말은 환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환란의 바람으로 우리를 연단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뜨겁게 합시다. 예배는 우리를 소독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녹을 제거하는 시간입니다. 이왕 예배드리는 것 뜨겁게 예배드립시다. 뜨겁게 찬양하고, 뜨겁게 기도합시다. 디모데전서 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했습니다. 대충 기도하지 맙시다. 간절히 기도합시다.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기도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등대교회라는 가마솥이 아주 펄펄 끓는 가마솥이 되어 우리의 녹이 다 녹아 없어지도록 진실된 마음으로 가마솥의 노래를 부릅시다. 저는 말씀을 깨끗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성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교회라는 가마솥을 뜨겁게 해주세요. 대표기도 준비하시는 분들, 헌금위원하시는 분들, 찬양하시는 분들, 그냥 대충 오셔서 하시는 것은 예배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녹슬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오염시키지 마십시오. 교회를 녹슬게 하지 맙시다. 기도하시고, 말씀보시면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우리 예배가 뜨거워져 참석한 사람들의 영혼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리 씻으려고 해도 녹이 씻기지 않았습니다. 13절, “너의 더러운 것들 중에 음란이 그 하나이니라 내가 너를 깨끗하게 하나 네가 깨끗하여지지 아니하니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깨끗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왜 깨끗해지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예배를 형식적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12절에 “이 성읍이 수고하므로 스스로 피곤하나 많은 녹이 그 속에서 벗겨지지 아니하며 불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이 얼마나 수고했는지 피곤할 정도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녹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녹을 제거하고, 주민들의 오염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셨는데 주민들이 형식적으로 마음이 없는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녹이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징벌을 내리십니다. 징벌하시기 시작하시면 아주 철저히 징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징벌하시기 전에 회개하십시오. 영혼의 녹을 제거하십시오. 진심으로 가마솥의 노래를 부릅시다. 역설의 노래가 아니라 진심으로 노래합시다. 이 시간 우리 영혼의 녹이 다 녹아 버리도록 진심으로 가마솥의 노래를 부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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