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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4일 5시에 다윗 벤구리온(Ben Gurion)이 국회의원 37명과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언제 망했을까? BC 586년에 바벨론에 망했다. 2534년 만에 독립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36년 만에 독립한 것을 세계가 기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30년도 300년도 아닌 2534년 만에 독립했다. 유대인은 2534년 동안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나라 없는 민족으로 온갖 수모와 설움을 당했다. 바벨론의 칼의 세력에 멸망당했다.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스와 로마의 학정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신음을 하며 죽었다. 1차 세계 대전 때는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히틀러에 의해 갖은 수난과 고통 속에 죽어갔다. 여기에 치이고, 저기에 치이고, 유랑하며 배회했다. 그러면서도 아주 쓰러지지 않았다. 세계를 유랑하며 2534년 동안 온갖 멸시를 받으면서도 아주 멸절당하지 않은 힘은 어디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세계 지혜의 보고인 탈무드가 있다. 탈무드는 유대인들의 지혜다. 탈무드는 유대인의 힘이다. 그런데 이 탈무드는 성경, 특히 10계명을 기초로 하고 있다. 유대인의 헌법의 기초는 성경이다. 그것도 10계명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헌법을 10조 금법이라고 하고 한다. 교육, 정치, 문화, 사회의 모든 분야가 성경에 기초하고 있는 셈이다. 유대인들의 모든 삶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인정을 하든지 인정을 하지 않든지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 유대인의 힘은 탈무드가 아니라 성경에 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의 황금률이라 할 수 있는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이다. 그 결론의 말씀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비유이다. 예수님은 지혜로운 건축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지만 어리석은 건축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무엇인 반석이고 무엇인 모래일가? 그리고 누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고 누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일가? 그리고 그들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까?
1.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자세히 보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시련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본문에서 말하는 시련의 법칙은 세 가지이다. 먼저 동일성이다. 25절 상반절은 이렇게 말한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친다” 27절 상반절에도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친다”라는 말씀이 동일하게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다.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25절과 27절을 9개의 번역 성경을 비교하며 살펴봤다. 그런데 두 절이 글자 하나, 심지어는 점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왜 그럴까? 여기에 성령님의 의도가 있으시다. 그것은 시련의 동일성을 말씀하고 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모래 위에 지은 집이나 동일하게 비를 맞고 창수가 나고 바람을 맞는다. 어떤 사람이든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동일하게 환난과 고통과 시련을 겪는다는 말씀이다.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상처를 입지 않고, 고통을 당하지 않고, 쓴 눈물을 흘리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이래 살아도 저래 살아도 시련과 고통을 면할 길이 없다. 햇빛과 공기와 비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동일하게 내리듯이 시련 또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온다. 선한 사람도 시련을 당하고, 악한 사람도 시련을 당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불신앙의 사람도 시련을 당하지만 신앙의 사람도 시련을 당한다는 사실이다. 믿음이 작은 사람도 시련을 당하지만 믿음이 큰 사람도 시련을 당한다. 기도를 조금 하는 사람도 시련을 당하지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도 시련을 당한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도 시련을 당하고 거짓되게 하는 사람도 시련을 당한다. 목사도 시련을 당하고, 성도도 시련을 당한다. 목사도 아프고, 성도도 병에 걸린다. 목사도 사고가 나고, 성도도 사고가 난다. 모든 사람에게 시련은 동일하게 찾아온다. 예외는 없다.
두 번째 연속성이다. KJV으로 25절을 보니까 and라는 말이 5번이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다. 27절에는 and가 6번이 나온다. 이것은 원문 성경의 의미를 그대로 살린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시련이 오는데 오고 또 오고, 그리고 오고 또 오고 또 다시 오고..... 이 말은 정신을 못 차리게 시련이 연타로 계속 온다는 의미다. “이제 시련이 끝났구나! 됐다. 안심하자” 한숨 돌리고 있는데 시련이 또 온다. 비가 그쳐서 괜찮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창수(홍수)가 났다. 창수(홍수)가 그쳤다 했더니 이번에는 태풍이 불어온다. 그래서 ‘그리고’라는 말이 25절에서 5번이나 나온다. 여러분! 이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정신을 못 차리게 엎친대 덮친 격으로 우리 사람에게 어려움이 오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온다. 욥이 그랬다. 스바 사람들이 소와 나귀를 빼앗아 가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양들이 모두 죽고, 갈대아 사람들이 낙타를 빼앗아 갔으며, 자식들이 모두 죽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가 내린다. 그리고 창수가 난다. 그리고 바람이 분다. 그리고 그 집에 부딪친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시련에는 다섯 번의 “그리고”가 있다. “그리고” 다섯 번. 이럴 때는 어떠한 강심장이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고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니다. 다 그렇다. 다 똑같다.
세 번째 다양성이다. 시련이 계속 올뿐만 아니라 시련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비, 창수, 바람이라고 했다. '로이드 존스' 라는 유명한 영국의 강해 설교자는 이 세 가지를 이렇게 설명을 했다. '비'라고 하는 것은 위로부터 내린다. 즉 천재지변이다.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질병이 있다. 뜻하지 않은 사고가 있다. 경제 한파가 생긴다. 정치적 혼란이 가중된다. 비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말한다. 비라고 하는 것은 결코 세상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시련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창수'라고 하는 것을 어떤 번역 성경에 보면 홍수(헬, 폭우)라고 했는데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세상의 영향력이라고 했다. 이 세상의 영향력이 홍수같이 우리에게 밀려오면 피할 길이 없다. 세속적인 물결이 끓임없이 우리를 공격해온다. 밀려온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세속적인 영향력이다. 세속적인 영향력을 극복하기를 바란다.
'바람'을 로이드 존스는 사단의 공격이라고 했다. 사단은 태풍 같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사단은 우리 가운데 의심의 바람을 불게 한다. 불안의 바람을 불게 한다. 절망의 바람을 불게 한다. 감사했던 마음이 원망과 불평의 마음으로 굳어지게 하는 바람으로 우리를 넘어지게 한다.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부는데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때린다. “부딪히매”라는 말을 영어성경은 “때리매”(혹은 치다, beat)라고 번역했다. 왜? 넘어지라고, 쓰러지라고, 무너지라고.... 세상은 우리를 무너뜨리고 싶어 한다. 비가 오면 사람들은 집에 들어가 비를 피한다. “휴! 안심이다”하며 한숨 돌리는데 홍수가 나서 집이 잠긴다. 물이 닫지 않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바람이 불어 있는 곳을 넘어뜨렸다. 무엇을 말할까? 결코 피할 수 없는 시련을 말한다. 세상에는 결코 결코 피할 수 없는 시련이 있다.
시련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계속해서 일어난다. 게다가 그 시련의 종류가 다양하다. 그 많은 시련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결과를 얻고 싶은가? 그 시련이 왔을 때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게 되길 바라는가?
2. 결론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그리고’
성경이 참 재밌다. 25절에서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라고 했는데 27절에서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라고 했다. ‘되’, ‘매’ 끝이 다르다. 시작도 과정도 다 같은데 결론이 다르다. 하나는 “부딪히되”인데 다른 하나는 “부딪히매”이다. 하나는 “그러나” 인데 다른 하나는 “그래서”이다. 끝이 다르다. NIV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다. 25절에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친다. “그러나(yet), 그럼에도 불구하고”. 27절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친다’ 그래서(and) 25절은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인생이다. 그런데 27절은 ‘그래서’의 인생이다. 이 세상에는 ‘그러나’의 인생과 ‘그래서’의 인생이 있다. 시련에 무너지지 않는 인생이다.
25절은 이런 뜻이다. 비가 내렸다. 그리고 창수가 났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때렸다. “그러나” 나는 끄떡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반면에 27절은 이런 뜻이다. 비가 내렸다. 그리고 창수가 났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때렸다. “그래서” 나는 무너졌다. “그래서” 나는 떠내려갔다. “그래서” 내 인생이 끝났다. 시련이 오면 금방 무너지는 인생이 있다. 여러분의 삶(인생)의 결론이 어떻게 되길 바라는가? “그러나” 인가 아니면 “그래서”인가? 전자인가? 후자인가? ‘그러나’ 의 인생과 ‘그래서’의 인생, 이 둘 중에 어떻게 되길 바라는가? 여러분의 인생이 ‘그러나’의 인생이 되길 기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인생이 되길 소망한다.
3.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결론을 위하여
그러면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인생 결론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열쇠는 기초에 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연타로 시련과 재난과 환난이 올 때 모래 위에 인생의 기초를 두는 자는 다 넘어지지만 그러나 그 기초를 반석 위에 두는 자는 넘어지지 아니한다. 어떤 환난과 고통이 오더라도 반석 위에 우리 인생의 기초를 세웠다면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다.
일본 동경에 가면 임페리얼 호텔이 있다. 이 호텔을 '프랭크 라이트' 라는 미국의 설계자가 설계를 했다. 건축을 하는데 2년 내내 기초공사만 했다. 사람들이 그 건축을 지켜보면서 “무슨 건축이 저렇게 오래 걸리느냐!”라고 했다. 돈이 기초 공사에 아주 많이 투자됐다. 사람들이 비난하다가 나중에는 신문까지 ‘돈 낭비, 시간 낭비, 저렇게 집을 지어야 하느냐,’는 식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기초 공사 2년, 지상에 올리는데 또 2년 만 4년 만에 그 건물을 완공을 시켰다. 그런데 52년이 지난 후에 동경에 세계적으로 기록될 대 지진이 일어났다. 모든 집들이 다 무너졌는데 유일하게 그 집만 무너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건물 안에 있는 비품이 하나도 움직인 것이 없었다. 그 바람에 라이트는 세계적인 설계자로 하루아침에 영웅이 되었다. 신화로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반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다. 24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여기에 보면 중요한 동사가 두 개 나온다. “듣는다”, “행한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 이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두 가지가 다 중요하다. 계시록 1:3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다.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진 자가 복이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일은 말씀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은 우리 인생을 반석 위에 세운 것과 같다.
기독교는 행위의 종교이다. 행동의 종교이다. 절에 가면 부처는 앉아 있지만 브라질 리오 데 자네이로 코르코바도 언덕의 예수상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가나안 농군 학교에서 불교의 승려가 보름동안 훈련을 받게 되었다. 가나안농군학교는 기독교 제단이다. 교육을 받은 후 이 승려는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앉아만 있는 부처를 부수고 호미를 들고 서 있는 부처를 만들었다. 불교가 참선의 종교라면 기독교는 행위의 종교이다.
서양 격언에 “나태는 신자의 무덤이다”라고 하였다.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은 죄를 행하는 것이다. 곽종운 씨의 『내 인생의 블루 오션』이란 책에 이런 말이 있다. “1g의 행동이 1톤의 생각보다 났다.” 성경을 수백 권 쌓아 놓는 것보다 한 마디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 더 났다. 수 없이 많은 말씀을 아는 것 보다 한 절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 더 났다. 사람의 건강 상태는 얼마나 많이 먹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소화시키느냐에 달렸다. 부자가 되는 것도 벌어들이는 액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이 저축하느냐에 달렸다. 사람을 박식하게 하는 것은 얼마나 읽었느냐가 아니고 얼마나 많이 기억하느냐에 달려 있다. 참다운 성도가 되는 길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말씀을 얼마나 많이 행하느냐에 달렸다.
어느 잡화상을 하고 있는 사람이 그 동네에 새로 부임해 온 목사가 아주 설교를 잘 한다고 상점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칭찬했다. 하루는 어떤 손님이 주인에게 “지난주에 목사님이 어떤 설교를 하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저는 시간이 없어 교회에 나가 설교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설교를 잘 하는 줄 압니까?” 주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 목사님이 오신 후 외상값을 잘 갚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 인생의 반석이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여러분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여러분의 사업장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여러분의 가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인생의 반석이 될 때 그 인생은 결코 흔들림이 없다. 이 시간 그 말씀을 소유하시고 그것을 한주간도 행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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